87. 그 남자 버릴 테면 버리세요. 제가 잘 주워가겠습니다.
2017.07.03.
철컹 하고 육중한 철문 열리자 제아는 그 안으로 조심히 발을 들였다. 깎아지른 인공 절벽과 작은 폭포, 고풍스러운 나무들까지, 한 폭의 동양화 같은 드넓은 정원은 인상 깊었다. 그런데도 감탄은 나오지 않았다.
흔들리는 시야 속, 시꺼멓게 속이 타고 있을 텐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신을 믿고 보내준 도준이 계속 아른거렸다.
<뒷좌석에 있는 검은 쇼핑백은 모두 오빠 거야. 나 들어가고 나면 숫자 붙여진 순서대로 하나씩 열어봐.>
도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자 한참을 걸어야 도착하는 출입문이 열리고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으로 내딛는 걸음이 휘청거릴 정도로 떨린다.
한 회장과 대화를 나눈 후, 많은 생각을 한 제아였다. 다시는 흔들릴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흔들려 버렸다.
화려한 말솜씨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정곡을 찔러대는 한 회장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만큼 매서웠다. 헤어져야만 도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고 또 도준을 정말 사랑하는 거라고 착각이 될 정도로.
하마터면…… 이별을 선택할 뻔했다.
도준과 둘만 있는 집무실 안, 제아의 손은 서류를 정리하지만 온 신경은 민감하게 곤두서서 도준에게 쏠려 있었다.
지극히 미세한 반응만으로도 속을 꿰뚫어 보는 도준을 바라볼 자신이 차마 없었다. 눈을 마주한 순간, 복잡한 속내를 탈탈 털려버릴 것 같았다.
최대한 들키지 않으려고 평소처럼 수다를 떨었다. 물론 그 수다에 도준이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쓸데없는 말 한마디까지도 진지하게 귀담아 들어주는 그였다.
하루 일과를 도준에게 들려주는 게 기뻤고, 그걸 또 열심히 들어주는 도준이 좋았다. 그런데 바보같이 눈을 마주쳐버렸다. 그래서…… 들켜버렸다.
‘문제아, 말해봐.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건데.’
그러면서도 정작 캐묻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풍랑을 맞은 마음을 다잡아줄 뿐이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눈을 마주하고 마음을 헤아려주고 세심하게 신경을 써준다. 이렇게나 날 사랑해주는 남자를……. 이렇게나 사랑하는 남자를…….
‘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 눈앞에 있는 도준을 보니 결론은 빨리 내려졌다. 그 결과로 제아는 지금 한 회장의 정원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제아 양, 어서 오세요.”
무테안경 너머로 제아를 맞이하는 고 집사의 눈빛은 정중했다. 적장에 단신으로 뛰어든 관창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목이 베이지 않고 이 곳에서 나오게 해주세요.’
고 집사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하마터면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능구렁이 같은 호랑이만으로도 버거운데, 꼬리 아홉 달린 여우까지 있었다.
도준의 어머니인 연희의 차가운 눈빛이 제아의 얼굴에 꽂혔다. 이곳에서 만난 게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쾌한 표정으로.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다잡았다.
“전 잠시 나가 있을게요.”
다행이도 연희는 자리를 피했다.
“결정을 생각보다 빨리 했구먼. 거기 앉게나.”
제아는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고 한 회장과 마주앉았다.
은은한 난의 향이 거북하지 않게 심신을 위로 해주었다. 힘내라는 듯. 그래도 이 낯선 공간에서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회장님께서 가신 후에 생각……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왔어요.”
고르고 고른 첫마디였다. 제아를 가만히 응시하던 한 회장이 어딘가를 뒤적거리더니 하얀 봉투를 하나 꺼내어 내밀었다. 봉투에 뭐가 들어 있을지 뻔했다.
“이게 뭔가요?”
“나도 아가씨랑 이야기한 후에 생각을 많이 했지. 정작 나도 아가씨에게 희생만 강요했더군. 이건 결론에 상관없이 내가 아가씨에게 보여주는 성의네. 사심 없이 도움을 준 아가씨에게 그런 말을 한 게 미안하기도 하고. 받기 거북하면 아침에 도와준 것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하게.”
제아는 그 봉투를 받아서 가방에 넣는 대신 제 앞에 놓았다.
“제 이야기 먼저 들어주세요. 봉투는 그 후에 받든지 할게요.”
봉투까지 거절하지 않는 걸 보면. 한 회장은 제 계획대로 돌아가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 말해보시게.”
“첫째로 전 절대 제 부모님을 버릴 수 없습니다. 효녀는 아니지만 제 부모님을 버릴 정도로 불효녀도 아닙니다.”
“그 정도로 아가씨가 되바라진 이가 아닌 걸 나도 아네.”
“두 번째로 제가 사장님께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경영자인 사장님께 도움이 될 만한 재력과 배경을 전 가지고 있지 않거든요.”
얼씨구나. 한 회장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래서 사장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헤어져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앙칼지게 생겼건만 의외로 무른 여자였다.
이런 여자 어디가 좋다고, 그 녀석은…….
‘쯧’ 한 회장이 속으로 혀를 차는 순간, 속삭이는 듯 청아한 음성이 단정하게 말을 마무리했다.
“……하마터면요.”
하, 마, 터, 면? 한 회장의 새하얀 눈썹이 뒤틀렸다.
지금까지 다소곳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던 제아가 고개를 들었다. 맑은 동공 깊숙한 곳에 심어진 곧은 심지, 고집을 천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정리 정돈을 못 합니다. 하지만 더러운 걸 싫어해요. 뭔가 시작한 게 있으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옆에서 말려주지 않으면 몸을 혹사시키면서까지 정주행해요. 몸이 좋지 않아도 내색을 안 해서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어요. 사장님 진짜 미소는 입술이 아닌 눈으로 웃어요. 그리고 고집이 참 세요. 저희 부모님도 꺾지 못했고 회장님도…… 꺾지 못했으니 저를 만나신 거 압니다. 겉은 고고한 공작새 같지만, 포악한 짐승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일말의 정도 없고 융통성도 없습니다. 지독하게 잔인할 때가 많아요. 어떨 때 보면 사람이 아니라 죽어 있는 얼음 동상 같아요.”
얼어붙어 있다가도 숨결을 불어넣으면 심장이 뛰고 온기가 돈다. 오직 제아 자신만이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는, 그게 바로 도준이었다.
“아가씨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겐가.”
노기를 다스리는 듯, 한 회장의 음성이 잘게 떨렸다. 그럼에도 제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악몽을 잘 꾸기 때문에 옆에 사람이 있어야 푹 자요. 체력은 좋지만 한 번 아프면 심하게 아파서 평소 건강관리를 잘해주어야 해요. 차가운 건 차갑고 뜨거운 건 뜨거워야 음식을 먹어요. 양식을 싫어하고 한식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젓가락질을 못해서 반찬을 집어주어야 두 그릇을 먹습니다. 워낙 완벽주의자라 믿는 사람이 아니면 젓가락질 하는 걸 보여주기 싫어합니다. 굶었으면 굶었지, 타인이라 생각하는 이들 앞에선 식사 자체를 하지 않아요.”
하다못해 유일하게 믿는 인호에게까지 젓가락질하는 걸 보이기 꺼려하는 도준이었다. 독하다면 독하지만 그만큼 섬세하고 민감한. 그런 그가 제일가의 식구들과 식사를 했을 리가 없다. 그녀가 아는 도준이라면 말이다.
“이쯤에서 외람되지만 회장님께 묻겠습니다. 회장님은…… 사장님이 식사하시는 걸 본 적이 있나요?”
제아는 묻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도준을 옭아매려 하는 한 회장에게.
‘회장님은…… 도준 오빠가 믿는 진짜 가족이 맞나요?’
갑자기 치고 들어온 질문에 한 회장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제아가 제대로 짚어낸 것이다.
한 회장은 단 한 번도 도준과 식사를 한 적도 본 적도 없다. 식사 자리를 가질 때마다 매번 입맛이 없다고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으니까.
고집스러운 한 회장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답은 내려졌다. 도준은 한 회장을 제 사람이라고, 제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내려졌던 결론이 더욱더 확고하게 다져졌다.
“사장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것 이상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한도준이란 남자를 사랑해요.
“아무도 못 꺾는 사장님의 그 고집도 전 무디게 할 수 있어요. 생명이 없는 얼음 동상에 온기를 돌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할 수 있습니다. 정이란 게 뭔지, 따스하다는 게 뭔지, 행복하다는 게 뭔지 느끼고 알게 해주고 싶어요.”
그는 저 아니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비상하려는 독수리의 날개를 꺾는 건 제가 아니라 회장님이세요.”
한 회장은 모른다. 도준을 비상하게 하는 커다란 날개가 바로 제아 자신임을.
“망해 가는 제일 어패럴도 남의 도움 없이 단시간에 혼자 일으켜 세우신 분이 사장님이세요. 힘들지만 제일 그룹도 남의 도움 없이 충분히 잘 이끌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재력이야 많을수록 좋지만 지금도 차고 넘치시잖아요. 과유불급이라 했어요. 과한 건 부족한 것만 못합니다.”
아는 척도 모라자 훈계질까지. 한 회장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전 제일 어패럴이 이중장부 편법으로 내지 않았던 세금까지 사장님이 자진 신고해서 감면받고 모두 완납했습니다. 그 후 투명경영을 하고 계시고 파티에서도 그걸 공식화하신 거예요. 사장님이 경영하시는 제일 어패럴, 검찰에서 지금 당장 들이닥쳐도 털어낼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깨끗하면 협박당할 일도 업고 정치인들에게 휘둘릴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리숙한 줄 알았건만, 아주 야물딱지게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 제일 그룹을 훌륭하게 이끌 사장님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줄 생각입니다. 물론 사장님께 제가 많이 부족한 여자란 거 압니다. 하지만 노력할게요. 재력과 배경은 없지만 남편 내조 제대로 하고 웃어른 깍듯하게 공경하는 착한 손자며느리가 될 자신 있어요.”
노기 어린 눈빛이 긁어버릴 듯 얼굴에 박혔지만 제아는 두렵지 않았다.
“회장님께서 부족한 절 받아주신다면 더욱더 높이 비상하며 행복해하는 손자분을 보실 수 있어요. 가화만사성, 제가 꼭 보여드릴 테니까?”
제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참지 못한 한 회장이 손을 휘둘렀다. 백자 찻잔에 담겨 있던 미지근한 차가 순식간에 허공에 흩뿌려져 제아의 얼굴과 옷을 흠뻑 적셨다.
“이런 고얀! 결국은 허락해달라는 그딴 말이나 하려고 지금까지 말장난을 친 게야!”
“회장님, 저는.”
“입 닥치게! 내 두고 보지! 여자 하나에 미쳐서 가족을 버리고 간 그놈이 얼마나 잘 사는지 말이야! 내 장담허이! 그 녀석 얼마 버티지 못하고 찾아와서 다시 받아달라고 내 발 아래 무릎 꿇으면 내가 이 발로 꽝 차버릴 걸세! 여자 보는 눈도 제대로 박히지 않는 손자 따위, 이제 난 필요 없네! 기껏 거지 새끼 하나 불쌍해서 거두어줬건만, 은혜를 원수로 갚아, 감히?”
노기가 치민 한 회장은 이미 반이성 사실 상태로 언어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말을 묵묵히 들으며, 제아는 촘촘한 속눈썹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물을 멍하니 응시했다. 진심을 보이면 통할 줄 알았다. 적어도 도준의 진짜 가족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철저한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뼈가 시리도록 처연한 진실이 심장에 아로새겨졌다. 도준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한 부회장과 한 이사야 그렇다 쳐도 친어머니인 연희와 한 회장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이런 가족도 가족이라고 10년을 함께 했을 도준을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다.
‘내가…… 가족들 몫까지 오빠 사랑해줄 거야.’
외롭지 않게, 아프지 않게, 슬프지 않게. 문득 창밖으로 시선이 향했다. 비가 내린다. 투명한 창문에 몸을 부딪히는 빗방울들이 도준이 속으로 흘렸을 눈물처럼 느껴졌다.
“……사장님은 비 오는 걸 싫어합니다. 악몽에 자주 시달리거든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내 앞에서 훈계질이야? 어디 어른 앞에서 배워먹지 못한 짓이야?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꼴도 보기 싫네!”
한 회장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제아는 정말 일어났다. 허리를 90도로 숙여 정중하게 인사까지 올린 후 나가려 했지만 할 말이 생각나서 다시 돌아섰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한 회장의 말이 맞다. 희생은 오로지 도준의 몫일뿐이다.
“죄책감을 느꼈어요. 저와 사장님이 나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미안함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잠시 흔들리기까지 했지만.
“그런데 회장님 덕분에 깨달았어요.”
지금 이 순간, 제아는 깨끗하게 털어버렸다.
“가족을 버리게 한 저와 버리려고 한 사장님도 나쁘지만.”
미안함과 죄책감 따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결정을 내리게 할 정도로 사장님께 가족이란 의미를 알지 못하게 한 건 제가 아닌 회장님 가족입니다. 그리고 사장님은 저를 사랑한 것뿐이지 가족을 버린다는 언급은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버린다고 언급한 건, 회장님이세요.”
제아는 도준과 소주를 입술로 나누어 마셨던 날의 결심이 떠올랐다.
“사장님을 버릴 테면 버리세요.”
……악녀가 되어야 한다.
“제가 잘 주워가겠습니다. 그리고 가족들 몫까지 사랑해주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악녀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닫은 문 너머로 뭔가가 세차게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제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
<뒷좌석에 있는 검은 쇼핑백은 모두 오빠 거야, 나 들어가고 나면 숫자 붙여진 순서대로 하나씩 열어봐.>
도준의 시선이 쇼핑백이 가득한 뒷좌석으로 향했다. 데려다 달라고 하던 제아는 도준에게 주차장에 먼저 내려가 있으라고 한 후 한참 후에야 양 손에 쇼핑백을 들고 내려왔다.
처음엔 한 회장에게 줄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제아에게 그런 것들 모두 소용없다고 말리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입을 꾹 다물었던 건, 그만큼 제아를 존중해주고 싶어서였다.
원수만도 못한 그의 가족도 가족이라고 최선을 다해 할 만큼은 해보겠다는 제아의 의지가 고마웠다. 한 회장이 어떻게 나올지 알면서도 그걸 감수하려는 제아의 마음이 예뻤다.
도준은 제아가 보낸 메시지대로 ‘1’이라고 네임 펜으로 적힌 쇼핑백부터 열어보았다. 그토록 받고 싶어 했던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왜, 기쁘지가 않지? 고급스러운 금박 초콜릿 위에 놓인 새하얀 카드 한 장.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야. 여자가 초콜릿을 주는 날. 생각해보니 난 오빠에게 해준 것도, 해줄 것도 없는 존재더라구. 내가 오빨 정말 사랑한다면 난 오빠를 놔줘야 할 것 같아.>
심장이 차갑게 경직되었다. 저혈압처럼 떨어지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귀를 울린다. 또박또박 꾹꾹 눌러쓴 글씨에서 제아가 얼마나 고민하고 썼을지 느껴졌다.
침묵을 고집하며 꾹 잡은 손을 끝끝내 빼내던 제아의 매정한 손길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제 겨우 널 믿게 되었는데, 넌 또 흔들렸던 거야?’
제아 때문에 오랜 시간 비에 대한 트라우마가 사라졌다. 밸런타인데이의 저주도 제아로 인해 풀릴 거라 생각했다. 끔찍하게 생각하던 초콜릿을 받길 기대하게 되었으니.
그런데…… 밸런타인데이의 저주는 그를 또 옭아맸다.
아직 풀어볼 쇼핑백은 몇 개가 더 있지만 손도 대지 않았다. 해준 게 없어서, 헤어지기 전의 이별 선물 따위, 그는 필요하지 않다.
“문제아, 왜 자꾸 나를 미치게 하는 거지?”
도준은 암담함에 눈을 감았다. 그를 화나게 하는 건 흔들려 버린 제아가 아니었다. 흔들리도록 교묘하게 약점을 잡아서 헤집어버린 한 회장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로 제아의 마음을 긁어버렸을까.
후드득후드득, 때마침 차의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민감하게 곤두선 신경을 더욱더 건드렸다. 오늘, 비가 온다고 했던가.
심장이 거칠게 틀어 잡혔다. 감당하기 힘든 통증이 느껴졌다. 제아가 알려준 비 오는 날의 공식은 무참히 깨진 것이다. 급기야 핸들에 이마를 박았다. 잘게 부수어져 흘러나오는 호흡과 함께 간절한 바람을 토해냈다.
‘문제아, 날 버리지 마.’
간절함이 통한 걸까. 거짓말처럼 운전석의 차문이 벌컥 열렸다.
“내가 너무 늦은 거 아니지?”
언제 나온 건지,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제아가 보였다.
“어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창백하게 질린 도준의 얼굴에 닿은 제아의 시선이 조수석 구석에 쳐 박힌 초콜릿에 멈추었다가 다시 도준의 손에 꼭 들린 카드에 멈추었다.
“왜 이러고 있어. 설마 오랜만에 오는 비라서 잊어버린 거야?”
제아가 고개를 숙이고 젖은 눈빛과 달리 웃고 있는 매끄러운 입술이 다가왔다.
“비 오는 날은 딥 키스.”
달콤한 속삭임을 시작으로 비 오는 날의 공식이 재성립되는 중이었다.
비벼지는 복숭아 맛이 농밀해질수록 통증은 무뎌져 갔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도준의 손이 제아의 뒷목을 움켜잡아 바짝 제게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제아도, 그리고 도준도 몰랐다. 한 회장의 자택 2층 통유리 너머로 연희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짙게 선팅이 된 차 안은 어둠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운전석으로 상체만 숙여서 들어간 제아가 도준과 뭘 하고 있을지 가히 짐작이 되었다.
“……더러워.”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중얼거림이었다.
연희는 표정 변화 없이 느릿하게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리자 감정 없는 톤이 덤덤히 흘러나왔다.
“나 한연희예요. 마지막 경고이니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삼 일 안에 더러운 진실을 알리지 않으면 내가 직접 말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