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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미치게 하는 그대-86화 (86/104)

86. 서비스로 복숭아 사탕 물고 10분

2017.06.29.

두 남자를 완벽하게 제압한 도준의 눈빛에 나른한 만족감이 어렸다. 이마에 닿았던 입술이 드디어 떨어졌다.

“오빠가 웬일이야?”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러는 건 처음인지라 당혹스러운 제아였다. 그런데도 두근거리는 심장이 급하게 펌프질을 하며 야릇한 설렘을 자꾸만 온몸으로 퍼뜨렸다.

“내 여자 보고 싶어서 보러 온 건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꽃까지 들고 갑자기 나타나서 묻는 거잖아.”

“선생님들마다 따라오는 속도가 빠르다고 훌륭한 학생이라고 칭찬하더군. 그래서 상도 줄 겸.”

“설마 선생님 일도 오빠가 시킨 거야?”

대답 대신 도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휴, 내가 정말 못 살아. 근데 꽃이 상이야? 서프라이즈하게 나타난 오빠가 상이야? 아니면, 이마에 해준 키스가 상?”

“셋 다 아닌데.”

재킷 안에서 꺼낸 주얼리 케이스를 받는 제아의 손가락에 도준의 시선이 집요하게 꽂혔다.

케이스를 받아서 조심히 여는 제아의 네 번째 손가락엔 반지가 끼어져 있다. 분명히. 그런데 왜 못 본 거냐고. 이미 품은 흑심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은 것이리라.

다음 선물은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크기의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우와, 예쁘다.”

심플한 크리스털 비즈 팔찌였지만 케이스의 브랜드가 고가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

“엄청! 마음에 들어.”

비싼 거 샀다고 잔소리 할 줄 알았는데 제아는 눈을 곱게 휘며 예쁘게도 웃어주었다.

“근데 오늘 회사 들르지 못할 정도로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그냥. 어쩌다가 시간이 났어.”

오늘 밸런타인데이라 겸사겸사 혹시라도 초콜릿이라도 받을까 해서. 그 말까지는 차마 하지 못하는 도준이었다.

학창 시절 그날만 다가오면 유독 여자들에게 시달림을 당했기에 밸런타인데이가 싫었다. 그런데 올해의 밸런타인데이는 신경이 쓰여서 미칠 것 같았다. 인호도 받은 초콜릿을 정작 애인인 자신은 받지 못한 것이다.

―문 비서가 준 초콜릿 맛있더라. 넌 더 좋은 거 받았지?

초콜릿을 눈앞에서 흔들며 작정하고 놀리려고 달려드는 인호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회사 안에선 나를 돌 보듯이 무시하며 지나치니 밖에서라도 잠깐 보는 수밖에.”

조금은 불만인 듯 도준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공개 연애를 선언한 이후로 제아는 그와 우연히 닿는 것조차 소스라칠 정도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남들이 봤을 때 눈꼴 시릴 수도 있다나 뭐라나. 이럴 줄 알았으면 공개 선언을 괜히 했나 후회가 될 정도였다.

“우쭈쭈, 그게 서운했어요? 그래서 나한테 선생님까지 찬스까지 이용하면서 30분짜리 데이트 신청한 거구요?”

부드러운 손길로 이끌어 제 옆에 앉히는데 도준은 마냥 순한 강아지 같다. 천하의 한도준을 애완견 취급하는 여자, 아마도 제아밖에 없으리라.

“오늘은 별일 없었고?”

얌전히 앉은 도준이 무심하게 물었다. 항상 소소한 메시지를 아기자기하게 자주 보내던 제아가 오늘은 유독 조용했던 것이다.

“글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비밀.”

둘은 차가운 공기와 달리 창을 투시해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차를 즐겼다. 차를 마시던 제아가 생각난 게 있다는 듯 도준을 보았다.

“오빠 상반기 기획안 마무리 했는데 미리 봐주면 안 될까?”

“어차피 결재 올리면 내가 봐.”

“그건 사장님이고.”

“…….”

“난 지금 머리 좋은 내 남친에게 미리 봐달라고 부탁하는 거거든? 능력 좋은 남친 이용하라고 한 게 누구더라?”

“위험한 청탁이야. 내가 그거 해주면. 넌 뭐 해줄 건데.”

“이게 왜 청탁이야? 그냥 간단한 조언을 바라는 거지! 바라는 것 있으면 말해봐.”

도준 쪽으로 슬그머니 태블릿 PC를 돌리며 제아가 애교스럽게 웃었다.

“……먼저 제시해봐.”

‘초, 콜, 릿. 미치도록 받고 싶다.’

말 못 하는 도준은 속이 타들어가고, 고민하는 제아는 심각했다.

“사무실 올라가기 전 오빠 차에서 같이 10분.”

지금도 같이 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도준이 모호한 눈빛으로 응시하자 제아가 볼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살며시 웃었다.

“키스……해준다구.”

살짝 놀란 듯 도준의 동공이 확장되는 게 보인다. 그런데도 대답이 없자 애가 타는 건 제아였다.

“좋아! 서비스로 복숭아 사탕 물고 10분. 콜?”

복숭아 사탕 먹은 지가 언제더라. 도준은 야릇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딜, 받아들이지.”

머릿속으로는 기억을 더듬는 도준의 손은 어느새 태블릿 PC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복숭아 사탕은 저렴하니까, 김영란 법에 걸리진 않겠다고 생각하며.

***

얼마나 빨리고 깨물리고 유린당했는지. 점잖던 남자가 복숭아 사탕 하나에 돌변하는 무시무시한 경험을 했다.

그런데도 정작 넋을 놓은 건 제아 자신이었고, 알람이 울리자 도준은 칼 같이 입술을 뗐다.

야하게 움직이던 도준의 손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하게 제아의 머리를 넘겨주고 옷을 매만져주었다.

“먼저 올라가.”

제아는 얼얼한 입술을 어루만지며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중얼거렸다.

“10분 더 넘어도 되는데. 사장이 권력 남용도 좀 하고 그러지.”

한도준은 아직 융통성이란 걸 배우려면 멀었다!

그럼에도 제 손에 들린 꽃다발을 내려다보는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15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 순간, 그 행복함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문 팀장님!”

김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 난장판이 되어버린 로비, 제멋대로 지팡이를 휘두르고 있는 노인이 몸을 돌렸다.

도준이 선물해 주었던 수많은 드라이플라워 다발 중 하나가 얼굴에 정확히 맞고 바닥에 툭, 떨어지는 순간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하철…… 할아버지?”

잠시 놀란 듯했지만 한 회장의 시선은 차분해지고 제아의 손에 들린 멀쩡한 꽃다발에 멈추었다.

“내 회사를 잔뜩 메우고 있는 이 꽃들처럼. 그 꽃도…… 내 손주 녀석이 준 건가?”

“그렇습니다.”

제아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대답이 흘러나오는 순간, 한 회장이 지팡이를 또다시 휘둘렀다. 주변의 것들이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

보란 듯이 날 무시하고 이딴 사랑 놀음을 해? 그것도 감히 내가 일궈낸 일터에서?

고 집사가 보고했던 말도 한 회장의 뇌리를 울렸다.

―손자분이 단단히 홀린 것 같습니다. 꽃과 선물은 기본이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연락을 하고 여유 시간이 날 때마다 항상 같이 시간을 보냅니다. 모든 걸 그 여자분에게 맞추어서 움직입니다.

한 회장이라고 손자와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한국으로 들어온 이후 시간이 나면 손자를 본가로 불러들였다.

화초방에서 아끼는 난들을 보이며 대화를 시도했건만, 손자 녀석은 그에게 철벽을 쳤다. 게다가 선물해준 고가의 난까지 물 한 번 주지 앉아 말라죽게 했다.

한 회장이 바락바락 성질을 내자 한다는 말이…….

―전 식물들과 친하지 않습니다.

그런 녀석이, 감히 제 여자를 위해 이딴 꽃 선물을 해? 그것도 꽃집으로 착각할 정도로? 내겐 안부 전환 한 통 안 하고. 불러들여도 심드렁한 녀석이?

또다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리자 드디어 한 회장의 난폭한 지팡이질이 멈추었다.

내리자마자 난장판인 로비를 쓱 훑어보던 도준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제아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그런 도준에게 한 회장의 성난 눈빛이 꽂혔다.

‘지지리도 못난 녀석.’

도준에게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가씨, 나랑 차 한잔할 텐가.”

보이지도 않는 제아를 향해 한 회장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회장님, 들어가서 저랑 이야기해요.”

도준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눈빛만은 사나웠다. 제 여자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한 회장은 도준의 방어적인 태도에 기가 막혔다. 보자마자 인사는 하지 못할망정, 뭐시 어쩌고 저째?

핏줄이고 뭐고 확 쫓아내버리고 싶지만, 그럼에도 후계자는 필요하다. 제 피를 이어받은 영특한 손자가 말이다. 젊을 땐 이리도 핏줄에 연연하지 않았건만 죽을 때가 되어가니 나약해진 것이다.

한 회장은 자신을 이렇게 나약하게 만든 세월이 야속할 뿐이었다.

“난 네 녀석이랑 할 이야기 없다.”

“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생겼어요. 그러니 들어가시죠.”

지금까지 제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적어도 이런 거만한 말투를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손자였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여자 하나에 미쳐서, 네놈이…….

한 회장이 도준에게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순간 새하얀 낯빛의 제아가 뒤에서 불쑥 튀어나와 도준에게로 돌아섰다.

“사장님, 한 회장님께 제가 차 한 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세요.”

그리고 한 회장은 처음으로 보았다. 단 한 번도 흔들린 걸 본 적이 없는 손주놈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리는 것을.

“후, 나보고 어쩌라고.”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린 도준의 입에서 결국…….

“오래 걸리진 말고.”

허락이 떨어졌다. 고맙다는 듯 살그머니 눈웃음을 흘리는 제아가 한 회장을 향해 돌아섰다.

“회장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곧이어 15층 사무실에 진풍경이 벌어졌다.

한 회장과 제아가 들어간 회의실 문 앞, 귀를 쫑긋 세우고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는 귀족 견 한 마리가 있었다. 석상이라도 되는 듯 미세한 움직임도 없이 문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그랬다.

분명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를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은 의외로 즐거워 보였다. 지독히도 적응 안 되는 사장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재밌어 보였다.

신기하고 희귀했다. 한독종이 저렇게 변할 수가 있나. 사랑이란 참 위대하구나.

***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한 회장의 말에 제아도 적극 공감하는 중이었다. 지하철에서 웃으면서 헤어졌던 할아버지와 이렇게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일대일로 앉아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말이야. 후회라는 걸 웬만해선 잘 안하는 사람이네. 그런데 지금 아가씨 때문에 후회를 하고 있어. 고집을 부리며 지하철을 타서 아가씨 도움을 받은 걸 말이야.”

“…….”

“어찌 보면 그것도 운이지. 그래 지독히도 운이 좋은 거야. 그게 아니었으면 내가 아가씨를 이렇게 정중하게 대하지는 못하지.”

한 회장이 말하려는 의중은 아주 정확히 제아에게 전달이 되었다. 지하철에서의 인연이 아니었으면 인정사정없이 독하게 긁어버렸을 거라는.

“그런데 말이야, 그 운은 딱 거기까지라고 생각하게.”

“회장님 바쁘신 분이란 거 압니다. 그런데도 저를 만나려고 귀한 걸음 해주셨으니 시간 낭비 하실 필요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주세요.”

생각보다는 꽤 당찬 아가씨구먼. 한 회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그도 돌려 말하는 건 딱 질색이니.

“둘이 계속 사랑하고 싶다면 하시게. 하지만 그 사랑의 대가는 아가씨가 아닌 내가 감당해야 하는 걸 아나? 아가씨가 도준일 놔주지 않으면 난 내 손자를 버려야 하니 말이네.”

“사장님을 쳐내야 할 정도로, 제가 그렇게 마음에 드시지 않나요? 그리고 그 이유가…… 제 배경 때문인 거구요?”

한 회장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이었다. 제아가 묻는 의도를 눈치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역으로 물었다.

“내놓으라 하는 정재계 집안들이 왜 저들끼리 배경 따지고 능력 따지고 결혼한다고 생각하나? 돈 많은 사람끼리 결혼해서 부를 더 축적하려고?”

“…….”

“우리에겐 가장 큰 적을 없애는 최고의 방법이 바로 결혼이네. 이 세계는 먹히거나 먹는 것만이 존재하지. 내가 먹지 않으면 남에게 먹혀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단 말이야.”

“…….”

“내가 아가씰 받아들인다고 치지. 그럼 그들은 더 분노해서 달려들 거네. 상위층 중에서도 1%에 해당하는 집안에서 도준이 녀석을 원하고 있었어. 그래서 갑자기 마련한 파티에도 그들이 기꺼이 참석을 한 거지. 그런 자리에서 그 녀석이 그런 발표를 했다는 건, 명백하게 그들을 무시한 행동이야.”

“…….”

“그 상태에서 아가씨와 결혼을 허락하면? 그땐 그들이 먹으려 하는 건 제일 그룹이겠지. 내가 맨 손으로 일으켜 세운 제일 그룹이 아가씨 한 명 때문에 무너져 내리는 꼴은 못 보네. 이해가 되나?”

흔들리지 않았던 견고한 마음에 살짝 찬바람이 닿은 듯한 오한이 느껴졌다. 무릎 위에 놓인 손끝이 차가워졌다.

“아, 내가 아가씨를 받아들여줄 방법이 딱 한 가지 있긴 하지.”

희망이…… 있다? 제아의 눈에 기대감이 어리는 찰나.

“아가씨 부모를 버리고 와. 그럼 내가 인정해주지. 그 정도로 내 손주를 사랑한다면 모험 한 번 해보겠다는 뜻이네.”

그나마 남아 있던 온기가 떨리는 몸짓으로 인해 증발해버렸다. 제아의 침묵에 한 회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듣자하니 효녀라고 하던데. 도준이에게 물질적으로 도움도 꽤 많이 받았고. 그러면서 내 손자에게만 가족을 버리게 하는 건, 심보가 고약하다는 생각이 안 드나?”

한 회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잘 벼른 칼날이 되어 제아의 심장을 쿡쿡 들쑤셨다. 넌 하나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왜 도준이만 희생을 시키려 하느냐.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도준에게 가족을 버리게 하고 제일가를 버리게 하려는 것이다.

아팠다. 심장이, 그리고 마음이.

내가 정말…… 이기주의적이었던 걸까.

오빠를 놔주어야만 하는 걸까.

극적인 흔들림은 한 회장이 움켜쥐고 제대로 흔들어 버렸다.

“아가씨는 도준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타고난 경영자에 야망도 있고 욕심도 있는 녀석에게 아가씨가 해줄 수 있는 게 뭐지? 사랑 타령은 내 앞에서 집어치우게. 사랑 타령하다 무너져 내린 건 내 딸년 하나로 족하니. 비상하려는 독수리의 날개를 꺾어버리는 게, 아가씨의 사랑법인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노련한 노장 앞에 제아는 결국…… 흔들려 버렸다.

***

오후 6시 30분, 지금 15층엔 도준과 제아 둘만 남아 있었다. 집무실 안, 도준은 눈앞에서 단정한 자세로 서류를 정리하는 제아를 가만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지?’

문득 시선을 느꼈는지 제아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또 예쁘게 눈매를 휘며 웃는다. 별 의미 없는 미소였는데도 도준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옆에 앉으라는 듯 옆자리를 두드리는 제아의 손짓 한 번에 보이지 않는 꼬리가 엉덩이 쪽 어딘가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몇 초도 되지 않아 얌전한 강아지가 된 도준이 제아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 참 운이 좋은 것 같아. 특히 오늘. 지하철역에서 도와줬던 할아버지가 회장님일 줄 누가 알았겠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오늘이다. 그런데 운이 좋다니. 수긍할 수 없다는 듯 도준이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아, 맞다! 제일 백화점에서 한 이사님 만난 것도 얘기 안 했지?”

“한 이사를, 만났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내가 한 이사님을 제대로 한 방 먹였어. 지하 식품 코너로 갔는데…….”

하이톤의 명랑한 목소리가 도준의 귀를 즐겁게 간질인다.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손짓과 표정을 지으면서.

제아는 단답형의 메시지에도 항상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데이트를 할 때도 말 수가 없는 그가 대답을 하지 않아도 항상 종알거렸다.

사실 중요한 내용은 대부분 없었다. 그저 하루의 일과 또는 그와는 상관이 없는 세상사를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게 좋았다. 소소한 일상을 시시콜콜 말해주는 게. 듣고 있으면 제아의 하루를 공유하는 느낌이니까.

도준이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등받이에 비스듬히 팔을 괸 채 제아를 응시했다. 작은 것 하나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 초집중하는, 사랑하는 여자의 일상을 듣기 위한 남자의 정중한 자세였다.

“어디서 젠틀맨인 척 연기해?”

그 상황에 잔뜩 화가 났었던 듯 핑크빛 입술의 움직임이 정교해지자 도준은 습관처럼 손을 뻗었다. 서로가 의식하지 못하는 손놀림, 보드라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드는 감촉이 야릇했다.

그런데 웃고 있는 제아의 눈가에 그늘이 느껴졌다.

새침한 동공 속에 언뜻 비치는 근심 걱정. 무언가…… 숨기고 있다.

도준의 손이 제아의 고집스러운 작은 턱을 움켜쥐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가까워진 동공 속이 잘게 경련을 일으키는 게 느껴졌다.

“문제아, 말해봐.”

“……?”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건데.”

“무슨 생각이라니. 난 오늘 있었던 일을…….”

“한 회장님이 뭐라고 한 거지?”

뭐라고 하지? 핑계를 생각하는 제아의 눈빛.

“날 속일 생각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눈빛과 호흡만으로도 제아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도준이다. 제 여자에게 모든 오감과 신경을 곤두세우는 촉, 거의 짐승에 가까운 본능이었다.

졌다는 듯 제아는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떨어트렸다.

제아의 도톰한 아랫입술이 새하얀 이에 잘근잘근 씹힌다.

깊은 생각에 빠졌을 때 나오는 습관적인 행동.

요동치는 침묵이 아주 잠깐, 둘을 에워쌌다. 그 침묵을 도준은 굳이 깨지 않았다. 차분하게 기다려주었다. 제아가 생각을 마치기를. 그리고 생각을 마친 듯, 제아가 눈을 마주쳐왔다.

“부탁이 있어. 나 회장님 댁에 좀 데려다줘.”

도준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아니, 잘못 들었기를 바랐지만.

“지금 당장.”

제아는 고집스럽게 제 결심을 드러냈다.

***

차가 본가에 도착할 때까지 제아는 침묵하며 창밖에 고정한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려는 제아의 손을 잡았다. 이대론, 도저히 보낼 수 없다.

“만날 거면 같이 만나.”

나 지금 미치도록 불안해. 문제아 너 때문에.

애달아하는 도준을 바라본 제아는 잡힌 손을 천천히 뺀 후 차에서 내렸다.

검은 창문 사이로 아른거리는 유려한 실루엣에 시선을 자꾸 갔지만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제아는 떨리는 손끝으로 어둠 속 찬 공기를 가르고 초인종을 눌렀다.

“한 회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문제아라고…… 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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