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85화 (85/104)

85. 그러니까 저 넘보지 마세요.

2017.06.26.

기분 나쁠 정도로 음습한 그의 시선이 닿는 순간 제아는 발작하듯이 손등으로 입술을 거칠게 훔쳐냈다.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몸에서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은 눈앞의 강훈은 잘생기고 능력 좋은 젠틀맨이었다. 사석에서 만났다면 속았을지도 모르는 허울뿐인 껍데기.

하지만 그녀는 안다. 저 안에 있는 자격지심에 사로잡힌 비열한 본모습을. 딱 두 번의 만남이었지만 매번 폭력이 동반되었다.

“죄송하지만 한 이사님이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럼 이만.”

얼른 지나치려 하는데 또다시 앞이 가로막혔다. 실크 타이에 꽂힌 넥타이핀이 보였다.

“문제아씨, 나랑 커피 한잔할까.”

이 남자, 기가 막힐 정도로 뻔뻔하다. 마지막 만남이 어땠는지 알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

“이사님과 저, 얼굴 보고 커피 마실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전 이사님과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거북합니다.”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자 강훈의 짙은 눈썹이 씰룩였다. 기분 나빠할 줄 알았는데, 흥미롭다는 듯이.

아씨, 이건 또 무슨 반응이야. 더 세게 나가야겠다.

“그래도 이해 못 하시겠다면 아주 쉽게 말씀 드릴게요. 전 변태에 손버릇 고약한 치한과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속으로 콧방귀를 흩날리며 지나치려는데 또다시 앞이 막혔다. 속도 지금 울렁거리는데 강훈까지 짜증나게 하니 급기야 그녀의 입에서 걸쭉한 욕이 터져 나왔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변태 새끼야!’ 그런데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날 일은 내가 사과하도록 하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강훈의 말에 제아는 벙찐 표정을 지어버렸다.

“그런데 사과할 시간을 줘야 할 거 아니야. 이제 커피 한잔 나랑 같이할 텐가?”

아주 잠깐 방심해버린 몇 초, 강훈은 놓치지 않고 제아를 낚아챘다. 피할 수 없도록.

“미래의 제수씨가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

제아는 백화점 상층에 있는 집무실로 가자는 강훈의 말에 끝까지 버텼다. 막힌 공간에 둘만 있다 또 무슨 일을 당하려고. 그나마 서로가 한 발짝씩 양보를 한 게 VIP 고객 라운지였다.

둘만 있는 공간이지만 지켜보는 눈이 있는, 투명한 유리공간. 라운지 직원이 그들에게 따스한 커피를 대령했다.

“그때 일은 내가 사과하지. 술을 마셔서 그런지 좀 과격해졌다는 걸 인정해.”

제아는 가늘어진 눈으로 눈 앞의 남자를 탐색했다. 대체 이 남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사과를 하려 했다면 진즉 했어야 했다. 그런데 우연히 마주치니 한다고 하는 게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말이야, 그날 이후 잊히지가 않더라고.”

삐용삐용. 불길한 사이렌이 제아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문제아란 여자가 말이야.”

“풉, 푸웁푸웁!”

급기야 입 안에 머금었던 커피가 뿜어져 나왔다. 입술의 힘이 과격했는지 뿜어져 나온 갈색 액체가 맞은편에 앉은 강훈의 와이셔츠에까지 묻어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얼른 일어나는 제아에게 강훈이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재킷 안에서 꺼낸 손수건을 자신이 아닌 제아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닦지 그래.”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매너.

“그렇지 않아도 한번 만나서 얼굴도 보고 사과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나야 말이지. 보시다시피 내가 꽤 바쁜 몸이라.”

얼떨결에 받아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는 제아를 보는 강훈의 눈빛이 부드럽다. 누가 보면 정말 좋아한다고 착각할 정도로.

“문제아 당신, 남자에게 꽤 뒤끝을 주는 여자더라고.”

“…….”

“제일 아울렛 몰 기획, 듣자하니 제아 씨가 다 했다고 하던데. 재벌가 영애들이 갖추기 힘든 능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더 매력적이군.”

더 이상은 못 듣겠다. 이젠 도준을 닮아서 돌려 말하는 건 딱 질색인 제아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들으리라.

“저기 이사님, 사과하러 부른 자리에서 너무 과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사님 동생분이랑 연애한 걸 알면서도 이런 말씀을 하는 의도가 뭐죠?”

“의도라……. 돌이킬 수 없기 전에 한 번 해보고 싶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군.”

순간 불길함이 치밀어 올랐다.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며 제아가 그의 말을 어떻게든 가로채려는 순간…….

“나 지금 제아 씨한테 고백하는 중이야.”

강훈이 선수를 쳤다.

“제수씨가 되기 전에 대시라도 해봐야 후회 안 할 것 같아서.”

사랑 고백이란 원래 감동과 설렘을 주는 법이다. 그런데 제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한마디.

이런…… 미친 멍멍이를 봤나.

“당장 날 받아들이라는 게 아니야. 고려 한번 해주라는 거야.”

저 주둥이를 어떻게 닥치게 해야 하나. 제아는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강훈은 그 표정을 자신의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묻지도 않는 말을 술술 풀어낸다.

“제아 씨를 선택하게 되면 도준이 녀석은 모든 걸 버려야 해. 외모는 여전하지만 재력은 무의 상태로 돌아가는 거지. 아, 혹시 도준이 재산도 사랑에 한몫하는 거라면 참고하라고 해주는 말이야.”

“계속해 봐요.”

“그런데 난 아니야. 내가 제아 씨와 결혼한다고 하면 평범한 며느리를 들여서 제일가의 이미지를 급부상시켰다고 한 회장이 반색할지 모르지. 난, 한 회장의 친손자가 아니니까.”

“연애도 아니고 벌써 결혼 이야기하시네요. 부담스럽게.”

“단순한 연애만 할 거라면 제수씨가 될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이런 말 따위는 안 해. 그 정도로 제아 씨에게 진심으로 다가선단 뜻이야.”

“좋아요. 제가 그럼 계산 좀 해볼게요. MD를 하다 보니 손해보는 딜은 절대 안 하거든요.”

“얼마든지.”

“제가 한 사장님을 버리고 이사님을 선택하면…….”

꽤 먹혔다고 생각하는지 느긋하게 웃는 강훈의 얼굴에 자신감이 어렸다.

“제일 백화점, 나한테 줄 수 있어요?”

“……뭐?”

“저와 한 사장님 연애를 세상이 다 알아요. 그 정도는 해줘야 제가 감당하지 않겠어요? 형제 사이를 저울질한 여자가 얼마나 욕먹을지 이사님도 잘 아시리라 보는데.”

강훈의 낯빛이 확 바뀌었다.

“표정을 보니 그건 무리인가 보네요. 그냥 물어본 말이니 신경은 쓰지 마세요. 주실 수 있다고 해도 제가 사양할 것 같거든요.”

매너가 사라진 강훈의 눈을 주시하며 제아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제일 백화점을 얹어준다고 해도 전 그냥 한 사장님이랑 사랑할래요.”

“……!”

“제게 능력 좋다고 하셨죠? 그렇게 되려고 피나게 노력한 이유가 있어요. 한 사장님이 절 선택해서 무일푼이 되면 백수 된 우리 오빠, 제가 먹여 살려야 하거든요.”

그 정도로 도준을 사랑한다. 제일가에서 나와도 도준이 엄청난 재력가임을 알아버렸지만 그럼에도 그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방금 한 고백이 이사님 진심인지 아닌지는 몰라요. 아니면 아닌 거고, 정말 진심이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욕구라는 표현이 맞을 듯합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남자를 향한 자격지심에서 우러나오는…… 욕구, 그리고 전 대리만족으로 그 욕구를 받아주는 대상이 아닙니다.”

만날 때마다 깔아뭉개려는 이 남자에게 단단히 경고를 해줘야 한다.

“그러니까 저 넘보지 마세요. 커피 잘 마셨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로 향하던 제아는 잊은 게 있다는 듯 다시 돌아섰다.

“아, 제가 마케팅팀에도 말해놓긴 했지만 일리니 매출 관리 좀 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게 아니면 저희 쪽에서 제일 백화점에 매장 철수를 요청할지도 모르거든요.”

“너 따위가!”

매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포악한 눈빛을 한 채 강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럴 걸 대비해서 트인 공간을 고집한 제아였다.

“이제야 가면 벗으셨네요.”

“……!”

“그런데 어쩌죠? 여긴 보는 눈이 있어서 그 가면 다시 쓰셔야 할 것 같은데.”

투명한 유리벽 너머 라운지 직원과 다른 공간에 있는 고객들의 시선마저 그들에게 쏠려 있었다. 남아 있는 몇 걸음의 간격을 제아가 먼저 좁히고 다가섰다.

제아는 살짝 까치발을 들어 강훈의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이 되어서 충고해드리는 건데요. 한도준 사장님을 향한 자격지심 버리세요. 그래야 행복해지실 거예요.”

인심 쓰듯 미소 한 방을 마지막으로 날린 제아는 사라졌다. 순간 화가 나긴 했지만, 그건 잠깐 뿐이었다.

혼자 남은 강훈은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제아의 체취에 배인 향기일까. 아련한 복숭아향이 내려앉은 공기가 강훈의 후각을 민감하게 자극했다.

“향수 냄새는 아닌데.”

그를 향해 야릇하게 반짝이던 고양이 눈과 귓불을 데우던 촉촉한 숨결이 자꾸 기억난다.

***

연세를 생각해서 차를 타고 가라는 고 집사의 제안마저 무시한 채 한 회장은 지하철을 고집했다.

어찌어찌해서 강남역에 도착은 했다. 그런데 복잡한 지하 상가와 출구 안내를 보는 순간 곧바로 후회가 들었다.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려고 해도 어찌나 바쁘게 휙휙 지나다니는지 도통 물어볼 틈을 주지 않았다.

‘세상 말세야, 말세.’

옛날 같았으면 노인들이 이렇게 엉거주춤 서 있으면 저마다 다가와서 도움을 주었건만. 요즘 젊은이들은 지하철에서부터 지금까지 봐도 도통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고 집사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는 찰나…….

“할아버지, 도움 필요하시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청아하고 야무진 음성에 고개를 트니 꽤 새침하게 생긴 젊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세상 말세라는 말, 취소다.

“내가 어디 좀 가려고 하는데 어느 출구로 나가야할지 모르겠구먼.”

“어디 가시는데요?”

“제일 어패럴이란 회사 좀 갔으면 하는데. 안내해줄 수 있나?”

“제일 어패럴……이요?”

여자의 눈동자가 조금 휘둥그레졌다.

“내가 거기서 만나야 할 아가씨가 있네.”

“아.”

만나야 할 아가씨가 손녀인가 보구나,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노약자 전용 엘리베이터에 다다르자 한 회장이 거절을 했다.

“내 두 다리 아직 쓸 만하니 계단으로 안내해주게.”

계단까지 가려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여자는 짜증은커녕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계단을 오르는 한 회장을 옆에서 차분하게 도와주기까지 했다.

드디어 복잡한 지하상가에서 탈출을 했다. 살짝은 숨이 가빠왔지만 한 회장은 내색하지 않은 채 여자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왜 시간 낭비하면서까지 날 도와주는 겐가? 요즘 젊은이들은 도와주라고 해도 모른 척하더구만. 아주 노인들 옆에는 오기도 싫어해.”

“그건 오해세요.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안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요. 아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살 만한 곳이거든요.”

얼씨구. 생긴 것과 달리 의외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손녀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처음으로 들었다.

“아가씨 조부모는 참 좋겠구먼. 이렇게 친절한 손녀딸이 있으니.”

“저는 조부모님이 안 계세요. 그래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그냥 할머니 할아버지분들 보시면 도와드리고 싶어요. 또 도와드리면 그분들이 얼마나 저를 살갑게 대해주시는데요. 이런 게 손녀딸의 느낌인가, 그런 대리만족도 느끼고 좋은 일도 하고. 그리고 어차피 저도 늙을 건데요 뭐.”

새초롬하게 눈알을 굴리던 여자가 한 회장에게 생긋 웃는다. 얼굴도 예쁘장한데 인성도 괜찮은 아가씨였다.

“할아버지, 여기서 직진으로 5분 정도만 걸으시면 제일 어패럴 건물 나올 거예요. 건물 디자인이 독특해서 금방 눈에 들어올 거예요.”

힘차게 손을 휘저은 여자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꽤 서두르는 걸음새가 한 회장의 눈에 박혔다.

“꽤 괜찮은 아가씨구먼.”

***

은은한 로스팅 향이 감도는 커피숍 내부는 훈훈했고 전면 유리창을 투시되어 들어오는 햇살이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이제 정말 봄이 오는 건가.

커피숍 입구에서 봄의 기운을 더듬던 도준의 시선이 어느 곳에서 멈추었다. 창 쪽을 바라보며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눈에 띌 게 없는데도 지그시 눈을 감고 달달한 차의 향을 만끽하는 여자는 스치는 시선마저도 사로잡았다.

야무지게 솟아오른 단아한 이마부터 흘러내리는 얼굴 옆선이 도도해 보였지만, 속눈썹이 길어서 잠을 자는 듯 나른해 보이는 분위기가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여자의 앞에 있는 태블릿 PC, 그 옆에 놓인 두툼한 서류 가방이 커리어를 더해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문제아.”

도준의 가슴을 뿌듯하게 차오르게 하는 존재.

꽃다발을 들이밀며 나타나면 놀랄 것이다. 큰 눈을 앙큼하게 치켜떴다가 이내 녹일 듯이 달콤한 미소를 지어줄까.

생각만으로도 벌써부터 가슴에 훈풍이 부는 도준이었다. 물론 그의 앞에서 소소하게 대화를 하는 두 남자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반지도 안 낀 것 같은데 말 한번 걸어볼까.”

“내가 저 여자 얼굴 보려고 커피숍 나가서 얼굴 보고 왔다.”

남의 여자 얼굴은 왜 궁금한데?

“어때?”

“저 정도 몸매면 얼굴은 웬만하면 용서되지. 어후, 쭉 빠진 각선미에 바스트 사이즈가 D는 되려나. 아주 죽여줘. 근데 얼굴도 청순해서 볼만하더라고.”

하다못해 바스트…… 사이즈까지 거론이 되니 드라이플라워 다발을 들고 있던 도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잘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뭐라 지껄이는 거야.

“오히려 저런 여자들이 접근하기 힘들어서 애인 없는 게 허다해. 내가 장담한다.”

“그럼 전번은 내가 딸게. 너보단 그래도 내가 허우대가 멀쩡하니. 대신 만날 때 같이…… 어헛?”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강하게 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한 남자는 성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아니, 이봐요! 그렇게 뒤에서 어깨를…… 치면.”

살벌하게 뒤에 서 있는 도준의 포스에 눌려 남자는 말을 제대로 맺지 못했다. 장신의 키로 바짝 다가와 눌러버릴 듯 내리찍는 남자의 눈빛이 10톤급 망치 같았다.

딱 봐도 명품으로 두른 차림새도 차림새였지만 외모가 더 끝내줬다.

구두 굽까지 해서 이제 겨우 180센티가 되는 키가 저 눈빛 망치에 눌려 쫄아들어버린 것 같다. 키와 얼굴도 예술이지만, 브라운 같기도 하고 와인 빛 같기도 하고. 혼혈인 듯 아닌 듯 기묘한 눈동자 색이 기가 막혔다.

‘무슨 남자 새끼가 저렇게 곱상해.’

다행히도 도준의 첫마디는 존댓말이었다.

“입구를 막고 있는 건 그쪽들 같은데. 좀 비켜주시죠.”

“말을 하면 될걸 그렇다고 그렇게……?”

‘어깨 깡패처럼 그렇게 뒤에서 팍 칩니까?’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도준의 손가락이 남자를 지나 어딘가를 뚜렷하게 콕 짚었다.

“저기, 제 약혼녀가 기다리고 있어서.”

애인이 아닌 약혼녀라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건, 순전히 도준의 심술이었다.

두 남자의 입이 벌어졌다.

지나갈 자리가 충분함에도 도준이 어깨를 친 이유가…….

두 남자가 얼른 양쪽 옆으로 붙어 섰다. 느릿하게 그 앞을 지나던 도준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정신 못 차린 두 남자들이 제아에게 시선을 박고 아쉽다는 듯 쩝,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아주 신경에 거슬렸다.

다시 슬핏 몸을 틀며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도준에게 두 남자의 시선이 옮겨갔다. 그리곤 눈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손목에서 말이다.

길고 곧은 새하얀 손가락의 움직임도 유려했지만 그들의 연봉으로도 사지 못하는 브랜드의 클래식한 시계가 보인 것이다.

“내가, 누구 같습니까?”

“아, 저기 저 여자분…… 약혼녀라고.”

저 여자 임자 있는 여자인 거 알면, 그만 좀 껄떡거리라고.

“알면 관심 끄고 노력을 더 하세요.”

젊어 보이지만 어느 회사의 고위 간부가 분명하리라. 태연한 말투에 배인 건 타고난 지배자의 오만함이었다. 같은 회사도 아닌데 저절로 고개가 수그려지고 승복하게 된다.

“남의 여자 얼굴 궁금해하고 바스트 사이즈 가늠할 시간에 자기 계발이나 더 하란 뜻입니다. 그럼 그쪽들이 탐내는 이 시계, 어쩌면 몇 년 만에 살지도 모르니.”

제대로 한 방 먹은 두 남자는 그저 넋을 놓고 응시했다. 차가운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등 뒤에 드라이플라워 다발을 숨기고 제 약혼녀에게로 직진하는 도준을 말이다.

뒤에서 도준이 자신 때문에 유치한 기 싸움을 벌인 줄도 모른 채 제아는 핸드폰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귀는 노래를 듣지만 머릿속은 토익 영단어를 반복해서 외우는 중이었다.

토익 선생님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회사 근처를 지나가던 길이라 중간 체크를 10분 정도하고 오늘 수업은 다음으로 미루겠다고 말이다. 급한 일이 있다는데 어쩌겠는가.

회사에 짐을 던져 놓고 다시 나와 커피숍에 앉아 있던 제아였다.

톡톡톡―.

가볍게 테이블 위를 두드리는 소리에 반짝 눈을 뜨니, 흐드러지게 만발한 꽃들이 시야를 가들 채웠다.

갑작스러운 꽃보다 더 그녀를 자극하는 건, 은은하게 스며드는 누군가의 익숙한 체향이었다. 청량하고 산뜻한, 맡고 있는데도 마냥 그리운.

치명타를 입은 건 꽃들에 홀려버린 시각이 아니라 아찔한 향기를 뒤에서 뿜어내는 남자의 존재가 침범한 심장이었다.

제아는 떨리는 손끝으로 꽃다발을 가만히 받아 들었다. 꽃을 받아들고 일어나는 순간 어깨가 잡히고 몸이 돌려지면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빈틈없이 매어진 금욕적인 넥타이 위로 길고 강하게 뻗은 남자의 섹시한 목울대가 보였다.

곧이어 이마에 닿는 촉촉하면서도 말캉한 기분 좋은 감촉.

쪼옥―.

달달한 숨결로 흡입하듯 제아의 이마에 낙인을 새기고 있는 건 도준의 입술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지라 제아는 로맨틱하지 못하게 눈을 뜬 채로 그대로 당해버렸다.

최상위 수컷이 제 암컷에게 보란 듯이 영역표시를 하는 중이었다.

‘내 여자야. 그러니까 꺼져.’

두 남자를 쏘아보는 눈빛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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