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모든 게 다 네 거야. 나란 남자도 네 거고.
2017.06.22.
제아를 반기는 색색의 다양한 드라이플라워가 마치 사무실이 아닌 화원을 방불케 했다.
바닥에 흩뿌려지지만 않았을 뿐 로비 입구부터 복도까지 꽃들의 행렬이 촘촘히 이어졌다. 눈의 즐거움에 코끝을 간질이는 짙은 향기로움은 옵션일 뿐.
“이게 대체.”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화사한 꽃들이 반겨주는 건 좋지만 여긴 엄연히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는 회사이다. 게다가 드라이플라워는 일반 꽃보다 몇 배로 비싸다.
그런 드라이플라워로 넓은 15층을 가득 채웠다면 그 총 가격은……. 로맨틱함은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렸다.
“한도준! 누가 이렇게 돈을 낭비하래?”
무엄하게도 공과 사를 구분하는 회사이지만 제아는 지금 사장님이 아닌 제 남친에게 화를 내는 중이었다.
[꽃 싫어?]
태연하게 묻는 말에 제아는 잠시 움찔했다. 꽃 싫은 여자가 세상 어디 있겠는가.
며칠 후면 버려야 되더라도 받는 순간만큼은 기분 좋게 하는 게 바로 꽃인데.
“내 말은 싫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까지 돈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이 꽃을 살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리고 아껴야지! 이렇게 물 쓰듯이 펑펑 쓸 때가 아니잖아!’
그 말까진 차마 할 수 없는 제아였다. 도준이 얼마나 큰 걸 포기하고 자신과 함께 하려는지 잘 아니까.
이를 앙다물고 도준이 짜놓은 스파르타식 커리큘럼을 소화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도준이다.
[문제아, 나 돈 많아.]
“누가 돈 없대?”
또다시 속이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우리 연애가 공식화 되었어. 제일가의 손자가 연인에게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욕먹는 건 너일까 나일까.]
그거야 당연히…… 오빠지.
[알면 계속 걸어, 꽃을 따라서.]
제아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천천히 걸었다. 꽃을 따라, 향기를 따라.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게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꽃길은 집무실로 이어졌고, 문 앞에서 걸음은 멈추었다.
“설마, 오빠 지금 집무실이야?”
듣기 좋게 귀를 울리는 나직한 웃음소리가 넘어온다.
[글쎄, 열어보면 알겠지.]
집무실로 들어섰지만, 도준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달라진 내부가 제아를 반겼다.
널찍한 집무실의 뒤쪽에 공간을 구분하는 벽이 생기고 문이 생겼다. 새로 생긴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전면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공간이 넓지는 않지만 완벽한 개인 공간이었다.
마치 도준의 집무실을 데칼코마니처럼 찍어낸 듯했다.
다른 게 있다면 내부의 인테리어와 조화를 이루는 드라이플라워였다. 이 공간이 여자의 것임을 유일하게 드러내주는.
널찍한 책상 위 크리스털 문패에 시선이 박혔다.
-특별 전략 팀장 문제아-
“대체…… 오빠 집무실에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말에 반응을 하듯이 제아를 등지고 있던 등받이가 긴 책상의 가죽 의자가 서서히 돌아갔다.
고급스러운 가죽의자에 앉아 한 폭의 그림처럼 검은 슈트를 입고 있는 섬세한 실루엣의 남자.
몸을 일으킨 도준이 제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가왔다.
제아는 전화를 끊지도 못한 채 그 모습에 홀려 시선을 박았다.
“사랑하는 나의 문 팀장, 마음에 드나?”
긴 팔이 제아의 허리를 휘어감아 끌어당기는 순간 통화는 종료되었다.
“꽃과 사무실 말이야.”
제아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머금어진 희미한 웃음기. 집요하게 파고드는 눈빛이 대답을 요구했다.
“그 예쁜 입술로 대답해봐.”
도톰한 아랫입술이 강요당하듯이 도준의 엄지손가락에 묵직하게 쓸렸다.
지극히 단순한 손동작임에도 불구하고 불러일으키는 감각이 야릇했다. 내리깐 속눈썹이 흔들리고 흘러나오는 음성마저 가늘게 떨렸다.
“마음에 들어. 그것도 엄청.”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제아는 이번만큼은 의사표현을 명확히 하기로 했다.
“근데 이건 아닌 것 같아. 내가 개인 사무실을 차지할 만한 위치도 아니고 너무 표 내는 것도 싫어. 이건 누가 봐도 욕……?”
“감히 누가 욕을 해. 내 공간을 나의 피앙세와 나누겠다는데.”
순간 제아는 숨을 꼴딱 삼켰다. 욕하는 이들은 죄다 잡아다 요절내버릴 듯 서릿발 같은 차가운 눈동자가 번뜩한 것이다.
“난 널 아무 생각 없이 전략 팀장에 앉힌 게 아니야.”
“…….”
“특별 전략팀은 제일 어패럴에서 추진될 모든 프로젝트를 함께할 나의 심장부야. 보안을 위해서라도 난 철저하게 전략팀 팀장을 관리해야 하지. 문만 열면 바로 확인하고 처리할 수 있도록.”
도준답지 않은 장황한 설명에 제아는 가늘게 눈을 뜨고 응시했다. 진실을 밝히라는 재촉이 어린.
“내 여자가 보고 싶을 때 내 맘대로 봐야 할 거 아니야.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건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제아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자 도준이 흐릿하게 웃는다. 한 번 봐주라는 듯.
“문제아, 이제 시작일 뿐이야. 유리 구두 신을 각오 단단히 해야지.”
유리 구두? 그 말뜻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도준이 제아의 목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이젠 당당히 끼고 다녀.”
허전하게 뚫려 있던 반지의 빈틈에 가늘고 긴 손가락이 빈틈없이 끼워졌다. 반지가 빠져나가고 허전해진 제아의 목에 새 목걸이가 걸렸다.
오색빛깔로 영롱하게 빛나는 이어링이 귓불에서 빛을 발했다.
세트인 듯 동일한 디자인의 목걸이 펜던트와 이어링. 다이아몬드로 보이는 자잘하게 박힌 큐빅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목걸이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는 제아의 표정은 정작 밝지 않았다.
행복하다고 함빡 웃어줄 줄 알았는데. 그 미소 한 번 보려고 이렇게 고생했는데.
제아가 웃지 않으면, 도준은 행복해질 수 없다.
“뭐가 문제지?”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제아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이것도 다이아몬드지?”
“그럼, 제일가의 손자가 싸구려 큐빅을 해줄 줄 알았나?”
말을 멈춘 제아가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고 도준의 얼굴을 응시한다.
“나한테 감동 줄 수 있는 팁 하나 줄까?”
“…….”
“난 오빠 마음이 담긴 이 꽃 한 다발이면 충분히 감동해. 그러니까 무리하게 그러지 마.”
꽃은 좋아하지만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꽃 향을 제대로 맡아보지 못하는 제아였다.
그런 자신을 위해 드라이플라워에 향을 심어준 도준이었다.
희미해져버린 꽃 냄새 대신 평소 좋아하던 향기를 일일이 골랐을 도준의 정성이 느껴진다.
“지금 오빠가 가지고 있는 것들, 어차피 다 돌려줘야 할 것들이잖아. 이런 거 나 욕심 안 나.”
“…….”
“한도준이란 이름의 남자만 있으면 난 만족한다구.”
조곤조곤 달래듯이 토해내는 제아의 음성은 눈빛만큼이나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혹시라도 드높은 남자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을까 조심하는 게 역력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아의 다음 말은 도준의 심장을 제대로 후려쳤다.
“오빠가 백수가 돼도 내가 먹여 살려.”
아주 잠깐 도준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누가 누구를, 먹여 살린다고.
그런데도 감히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제아의 표정은 진지했다. 뻐근한 심장의 감각에 도준은 잠시 침묵했다.
“내가 잘못 알았어? 오빠가 제일가에서 나오면 나한테 먹여 살리라고 지독하게 공부시키고 스펙 쌓아주려는 건 줄 알았는데.”
무거워진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장난스럽게 눈을 마주한 제아가 살포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 엄청 열심히 노력 중이야. 내 남자 먹여 살릴 커리어를 쌓으려고 말이야. 그러니까 오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나한테 오기만 하면 돼.”
이쯤 되니 제아의 무한 상상력이 어디까지 갈지, 조금은 궁금하기까지 한 도준이었다.
“이 반지랑 목걸이는 우선 잘 받을게. 비상시에 엄청 소중한 우리의 비상금이 되어줄 수 있는 거잖아?”
받은 지 오 분도 안 된 선물을 비상시에 팔겠노라고 말을 하는 제아를 보며 도준은 모호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걸 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기쁘면서도 그렇게나 내가 못 미더운 걸까, 서운하기도 했다.
정말 다양하게 그를 곤란하게 하는 제아였다.
너란 여자를 정말 어찌해야 할지.
처음엔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미치게 했다. 그다음엔 마음을 주지 않아서 미치게 했다. 그런데 이젠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다.
예쁘게 종알거리는 저 입술을 확 막아버리고 싶지만, 우선은 쓸데없는 제아의 걱정을 사라지게 하는 게 우선이리라.
“문제아, 나는 돌려줄 게 없어.”
“……?”
“제일가에서 받은 게 하나도 없으니까.”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재력과 권력, 오로지 도준 혼자 힘으로 얻어낸 것이었다. 제일가에서 해준 건 제일가의 손자라는 타이틀만 제공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누리는 호화로운 생활은 아주 철저하게 재테크를 통해서 불어난 재산을 조금 썼을 뿐이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닌 것, 받을 필요가 없어서 받지 않았거든.”
홀로 던져진 미국이란 곳에서 제일가에서 인정받기 전까지 잠도 자지 않고 개처럼 벌어서 버텼다.
하버드대에 합격하자 그제야 어마어마한 돈이 입금되었다. 인호의 통장을 통해서. 하지만 도준은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닌 것들, 조금도 누릴 생각이 없었으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난 치밀하고 계획적인 놈이지.”
지금 누리고 있는 부는 철저하게 그만의 것이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10억을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그동안 쌓아온 상위층 인맥과 비상한 머리를 총동원해서 주식과 부동산을 사들이고 파는 짓을 수없이 반복했다. 수십 배, 수백 배로 늘어났다.
돈이 돈을 벌어온다는 말을, 아주 정확하게 경험했다.
한 회장도, 연희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었다.
물론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제아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철저하게 제아를 위해 독하게 쌓아올린 것이니까.
도준의 손끝이 제아의 코끝을 잡고 부드럽게 흔들었다.
“문제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 돈 많은 놈이야.”
나란 남자가 어떤 놈인지 제발 좀 알아주라고.
“제일가에서 나와도 너에게 현대판 신데렐라라는 소리 듣게 할 만큼.”
이해를 하지 못한 듯 제아의 동그란 눈동자가 도준을 올려다보았다.
“좀 현실적으로 말해주어야겠군.”
상체가 기울어지고 도준의 입술이 제아의 귓가에 바짝 붙었다. 붉은 입술이 나직하게 달싹일 때마다 제아의 눈은 점점 더 커다래졌다.
미국에 보유하고 있는 주택과 건물, 주식의 값어치, 어마어마한 통장의 잔액,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불어나고 있다는 것을, 도준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애초에 지금의 재력을 만들 수 있게 10억이라는 목숨 값을 물려준 아버지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그 모든 게 다 네 거야. 나란 남자도…… 문제아란 여자 거고.”
도준의 마지막 종착점은 항상 제아였다.
“그러니까 적응 좀 해봐. 나란 남자한테.”
너무 놀라 작게 벌어진 입술을 입술로 막아버렸다.
***
―절 끌어내리고 싶으시면, 회장님이 직접 끌어내리십시오.
한 회장은 도준이 했던 그 말을 뒤늦게야 절실히 깨달았다.
‘회장님, 전 한도준 사장이 제일 어패럴을 경영하기를 바랍니다.’
‘헐값이 되어도 팔지 않고 내가 왜 그 주식을 가지고 있었겠나. 그만큼 제일 어패럴에 애정이 있어서야. 그런데 자넨 매각 위기에 놓일 때까지 제일 어패럴을 방치했어. 그런 제일 어패럴을 다시 살린 게 한 사장이네. 난 이제 자네 편이 아닌 손자 편이야.’
‘어르신은 바닥 친 제일 어패럴 주식을 단기간에 10배 이상 껑충 뛰게 한 능력자를 왜 끌어 내리려 하세요? 못 들은 이야기로 하겠습니다.’
‘그거 아나 모르겠구먼. 지금 자네 손자, 옛날의 자네 같네. 열정 넘치고 능력 있는.’
한때는 회사의 옛 동료이자 제일 어패럴을 함께 세운 이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렸건만 몇 명 빼고는 거의 완곡한 거절이었다.
한 회장은 이제 갓 30살이 넘은 손자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개개인으로 볼 때 제일 어패럴의 주식을 가장 많이 보유한 건 한 회장이다. 하지만 대주주들이 한 편이 되어 반대를 한다면 제 아무리 그라도 이길 수가 없다.
‘이 녀석, 대체 언제 다 만나고 다닌 게야?’
아니, 대체 언제부터 이런 일들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인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뒷목 잡고 쓰러질 정도로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또 묘하게 기분이 좋다.
‘크험, 나를 닮았다니.’
이래서 피는 물보다 더 진하다고 하는 건가. 물론 한 회장도 영특한 손자를 영영 끌어내릴 생각은 없었다. 버릇을 아주 톡톡히 고치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고집 센 그 녀석과 충돌하지 않고 원하는 걸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을까.
‘가만,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를 닮아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손자 놈에게 약점이라는 게 있다는 게 말이다.
***
“휴…….”
핸드폰으로 SNS를 확인하는 제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준이 제아에게 오전에 해주었던 이벤트가 SNS에서 일파만파로 퍼지는 건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미디어보다 SNS가 가지고 있는 파급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제일 그룹 황태자의 신데렐라가 꽃집을 통째로 선물 받았음!
-여긴 회사인가, 화원인가? 개 부럽.
-현대판 신데렐라를 응원합니다.
-이 정도 꽃 선물이면 이벤트가 아니라 청혼이다.
시작은 김 비서였다. 적은 가까이 있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그래도 제아는 아직까지 신상이 털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성은 예비요, 이름은 신데렐라, 직업은 황태자의 연인, 특기는 재벌남 사로잡기.’라는 신상으로 SNS에서 통할 뿐이었다. 떠도는 사진들 모두 모자이크 처리 또는 멀리서 찍은 사진뿐이었다.
“자유롭고 싶다. 자유가…… 그리워라.”
외근 때문에 회사를 나오니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회사 내부에선 끊임없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기분이었다.
지하철역에서 올라와 걷다 보니 어느새 제일 백화점 앞이었다.
“설마 부딪히진 않겠지? 서울이 얼마나 넓은데.”
제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과감하게 백화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브랜드 관리 차원으로 들르긴 했지만 눈으로 확인한 일리니 매장은 너무 한산했다.
매장을 둘러본 제아는 제일 백화점 마케팅팀과 백화점 상층 회의실에서 한바탕 설전을 벌였다.
“핫한 브랜드를 기껏 내주었더니 너무 관리를 안 하는 거 아닌가요? 매출이 계속 이렇게 유지가 되면 조만간 저희 사장님께 매장 입점 취소 요청 넣을 겁니다.”
죽는 시늉을 하는 마케팅 팀에게 통쾌한 한 방을 날린 후에야 홀가분하게 내려왔다.
그런데 백화점을 나서던 제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무심코 지나다니는 젊은이들의 손에 들린 무언가가 눈에 걸렸다.
초콜릿이었다.
물론 15층 여직원들과 돈을 합쳐서 남직원들에게 간단히 초콜릿을 돌리긴 했다. 하지만 도준의 것은 별도로 준비하진 않았었다.
공개 연애를 선언한 이후로 회사에서 연인으로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의식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고민이 되었다. 지금껏 도준에게 받기만 했지 무언가를 해준 적이 없었다.
결국 제아는 제일 백화점에서 간단히 쇼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인터넷이 싸지만 선물은 당장 오늘 필요하니 말이다.
“초콜릿이랑 뭘 사주지?”
마음을 먹고 나니 처음 맞는 밸런타인데이인 만큼 잊지 못하게 해주고 싶다. 구두쇠 지갑이 드디어 열리는 순간이었다.
재량껏 준비해서 잊지 못할 밸런타인데이를 쏘리라!
선물에 초콜릿까지 사고 에스컬레이터로 향하던 제아의 시선에 한우 판매 코너가 들어왔다.
“윤영 씨가 이 한우 브랜드…… 엄청 좋아하는데. 이왕 쓴 거 울 엄마한테도 화끈하게 쏴?”
아직까지 윤영과는 냉전 상태였다. 헤어지라는 윤영과 그러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제아였으니까.
“그래 오고 가는 소고기 속 모녀의 정을 되살려 보자!”
소고기를 사러 가는 코너 길목은 모두 식당 코너라 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다.
평소라면 배꼽시계가 자극을 받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찌르듯이 파고드는 냄새가 비위를 상하게 했다.
위가 요동을 치자 초조한 시선이 화장실을 찾았다. 오른쪽 끝, 식품 코너 복도에 화장실 안내 표시가 보였다. 입을 막고 쏜살같이 목적지를 향해 내달렸다.
얼마 먹지도 않은 점심을 다 게워낸 후에야 제아는 세면대 앞에 섰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쇼핑을 하던 문제아 대신 핼쑥한 얼굴로 서 있는 여자가 보였다.
“넌 너무 민감해.”
조금이라도 신경이 예민하면 몸이 바로 반응을 하는 저주받은 체질이다.
뭐든지 잘해내려는 욕심에 긴장의 연속, 하루하루 소화해야 하는 스케줄 강도는 헬(Hell) 수준이다.
게다가 도준이 핵폭탄 급 발언을 쉬지 않고 빵빵 터뜨려주니 예민한 신경이 제대로 안정을 취할 틈이 없었다.
물기 어린 손등으로 입술을 쓱 닦아낸 후 화장실을 나서던 제아는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화장실 복도 끝, 어떤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건장한 체구를 감싸고 있는 비싼 슈트, 한강훈 이사였다.
부딪혀서 좋을 것 없는 남자였다.
설마, 날 본 건 아니겠지? 그래, 아닐 거야.
“등을 지고 있으니 확 지나가는 거야!”
터질 것처럼 뛰어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막 그의 뒤를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강훈이 돌아섰다.
“인사도 안 하고 도망치려 하다니 서운하군, 문 비서.”
아니길 바랐건만 제아를 기다리고 있었단 뜻이었다.
“아, 이젠 한국의 현대판 신데렐라라고 불러줘야 하는 건가.”
동그랗게 치켜뜬 제아의 동공이 서서히 닫히면서 고집스러움을 머금는 순간, 능글거리는 시선이 더듬듯이 젖어 있는 입술에 와 닿았다.
“그런데 우리의 예비 신데렐라가 컨디션이 좋지 않나 보군.”
시원하게 웃는 입꼬리에 은밀한 비열함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