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좀 더 안아 줘. 토닥여줘.
2017.06.19.
제아의 팔을 움켜쥐고 있던 경호원들의 손길이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그만큼 도준의 눈빛은 살벌했다.
경호원들의 손은 떨어져 나갔지만 수많은 시선이 집요하게 제아에게 꽂혀들었다. 가느다란 몸뚱이가 벌집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도준이 터뜨린 엄청난 폭탄의 피해자들이 여기저기서 속출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속살거림에 뒤섞인 한숨 소리는 아마도 도준을 노린 이들의 것이리라.
하지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그 주인공인 제아와 이 자리를 어렵게 마련한 한 회장이었다.
거리감이 꽤 있는데도 웅성거림 속 아주 정확히 들려오는 다급한 음성이 제아의 귀에 들렸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사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던 도준이었다. 그런데 제아를 함부로 끌어내려는 경호원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어느 누구도 제아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가장 소개해야 할 이들에게 제아를 공식적으로 소개하지 않은 것이다.
그걸 뒤늦게 깨닫는 순간 바로 질러 버렸다. 최종적으로 마침표를 찍어버린 것이다.
이 자리의 어떤 여자와도 약혼을 하지 않겠습니다.
저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어차피 그 말이 그 말이니.
“바쁜 시간을 내서 파티에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연설의 마지막을 아주 젠틀하게 끝맺은 도준은 단상에서 여유롭게 내려왔다.
사선으로 뻗는 발걸음이 거침이 없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홍해 갈라지듯 갈라섰다.
아름답게 치장한 여자들은 파티장에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도준의 눈엔 오직 제아만 보인다.
새하얀 도화지 위에 한 방울 툭 떨어진 검은 잉크 자국처럼. 유일하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내 여자.
도준은 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아야, 가자.”
‘내 손을 잡아. 우리 이곳에서 벗어나자. 같이.’
흔들리는 제아의 커다란 동공이 잠시 도준의 얼굴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내 차가운 손가락이 매끄럽게 도준의 손가락 사이로 스며든다. 손을 꼭 잡고 보폭을 맞추어 입구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뒤에 꽂혀드는 시선들이 가시처럼 따가웠지만 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구에 다다르자 경호원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여자분은 나가도 되지만 도련님은 나가실 수 없습니다. 회장님이 모시라고 했습니다.”
짧은 시간에도 연락을 받았는지 경호원들은 단단히 버티고 섰다.
바짝 긴장한 제아의 눈이 도준을 올려다보았다. 경호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도준이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고 집사님, 회장님 좀 바꿔주세요. 쓰러지실 분 아닌 거 알고 있습니다. 네. 회장님께 내일 오후 중으로 찾아뵙겠다고 전해주세요.”
도준이 전화를 끊고 정확히 1분 후에 경호원들이 길을 터주었다.
마침내 주차장에 다다랐다. 태연한 듯 독하게 버티고 걸은 제아의 다리는 이내 후들거리면서 무너져 내렸다.
그런 제아를 부축해서 도준이 차체에 기대게 했다.
“많이 놀랐어?”
놀라지 않는 게 더 비정상 아닌가? 제아로선 놀란 정도가 아니라 심장 마비 오는 줄 알았다.
꿈인가 싶었지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과 거칠게 붙들렸던 팔이 놓이는 느낌이 현실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윤영과 호텔에서 부딪혔을 때도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다.
도준이 손가락 끝이 제게 향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심장은 아직까지도 팔딱거린다.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해. 물릴 생각도 없어.”
입가에 걸린 나른한 미소와는 대비되게 진솔하게 쏟아지는 도준의 눈빛엔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제아 네가 공식적인 연인이 된 게 난 기쁘니까. 그러니까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제아도 안다. 당장 내일부터 순탄치 않은 하루가 시작되리라는 걸. 하지만 자신보다 더 힘든 건 도준일 것이다.
태산처럼 항상 혼자 버티고 이겨내는 그였지만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치밀하게 노력하고 공을 들였을까.
그런 도준에게 오히려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잠깐 나 좀 안아볼래?”
‘안아줘요’도 아닌, ‘안아볼래’. 꽤 건방진 어감이었다.
하지만 도준은 제아의 마음이 변할 세라 얼른 손을 뻗었다. 나긋나긋한 여체가 품에 쏙 들어오자 급격히 가라앉았던 기분에 날개가 달려 치솟기 시작했다.
이제야, 살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잠시 동안 이렇게 있고 싶다. 티끌같이 소박한 욕심이 들었다.
가만히 눈을 감으려던 도준의 어깨가 순간 바짝 긴장했다.
등 뒤에 닿는 깃털 같은 섬세한 손길.
토닥토닥. 토닥토닥.
허리를 휘감을 줄 알았던 제아의 손은 도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두드려주고 있었다.
“우리 오빠 아주 잘했어요.”
칭찬이었고 위로였다. 지극히 단순한 그 위로에도 도준은 가슴이 뻐근해졌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제아를 통해 하나씩 새로운 걸 터득해 나가고 있었다.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을 가지고 있지만 숭숭 뚫려 있던 빈틈 사이가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쉬지 않고 달리던 그에게 휴식을 주고 숨 가쁜 호흡을 고르게 해준다. 항상 긴장되어 있는 마음에 안정을 준다.
그래서일까. 도준은 여리여리한 제아에게 자꾸만 기대고 싶어진다. 마음의 안정을 얻고 쉬고 싶어진다.
너 때문에. 그리고 너이니까.
바보같이 어리광까지 부리고 싶어진다. 뭘 해도 넌 날 받아줄 테니까. 나란 놈을 사랑해줄 테니까. 그런 너니까.
도준은 등을 좀 더 구부정하게 기울였다.
“……해줘.”
작게 달싹이는 도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바람.
제아는 처음에 알아들을 수 없어서 귀를 쫑긋, 세웠다. 이제야 들린다.
“좀 더 안아줘. 토닥여줘.”
멈칫했던 제아의 손이 다시 부드럽게 리듬을 탔다. 도준은 지금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그걸 깨닫자 기분이 묘해졌다.
덩치가 산만 하진 않지만 도준은 엄연히 다 큰 성인 남자였다. 그것도 키가 185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그런데도 이렇게 제 품에 다소곳하게 안겨 관심 받길 바라고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뜨거워졌다. 내 품에서만 온전하게 쉴 수 있는 이 남자 때문에.
등을 타고 오른 제아의 손길이 도준의 머리까지 가만히 어루만진다.
“밤이 새도록 해줄게. 오빠가 원할 때까지.”
그러니까 힘 내. 난 항상 오빠 옆에 있을 거야. 어루만지는 손길과 나누어주는 온기로 제아는 최대한 그 마음을 전달하려 노력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봤을 때 안긴 건 당연히 여자이고 안아준 건 남자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둘은 알고 있다. 안긴 건 도준이고, 안아준 건 제아라는 걸.
제아에게 안겨 있는, 제아가 토닥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도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무게감이 중량을 덜어내고 있었다.
그런 둘을 은밀하게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딱 5대만 주차할 수 있는 VIP 주차장 가장 마지막 칸. 검은색의 비싼 외제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짙게 선팅된 유리창 너머로 둘을 지켜보고 있는 건 바로 강훈이었다.
지극히 이질적인 그 광경을 그는 지극히 생소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녀석이 여자에게 저렇게 안겨 있다니.’
말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강훈 또한 태어난 이래 따스한 품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지켜주고 사랑을 줄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외가 쪽에선 그의 존재를 숨기기 급급했다.
그래서 하나뿐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지 않고 인정받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위로라 받는 건 찌질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넌 왜,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거지?’
불변하던 고정관념이 지금 흔들리고 있다. 제아의 품에 안겨 있는 도준은 찌질해 보이기는커녕 부러울 만큼 행복해 보이니?
순간, 강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부럽다고?
“빌어먹을!”
강훈의 입술 사이로 짜증이 새어 나왔다. 그의 계획대로 문제아와 도준은 움직여주었다.
그런데도 만족감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하게 더욱더 짙은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가늘게 뜬 시야로 클로즈업된 제아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대체 어떤 여자인 거지?
한도준이란 놈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하는, 너란 여자 말이야.
널 빼앗으면, 혹은 망가뜨리면 한도준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새로운 궁금증이 치솟는 강훈이었다.
***
오후에 들린다고 했는데도 이른 아침부터 한 회장의 호출이 떨어졌다.
아침도 마다한 채 화초방에 앉아 있던 한 회장은 도준이 들어오자마자 벌떡 일어나 뺨을 후려쳤다.
짜악―.
“감히 네놈이 나를 무시해?”
노인답지 않게 손이 매서웠다. 똑똑한 손자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만큼 한 회장의 분노와 좌절감은 엄청났던 것이다.
씩씩거리던 한 회장이 도준을 노려보더니 딱 한마디 했다.
“박 의원 손녀딸이랑 약혼해라. 그러면 다 눈감아 주마.”
“죄송합니다.”
예상은 했지만 어떤 변명도 없는 깔끔한 거절에 한 회장은 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대체 뭐를 믿고 저렇게 당당한 건지, 그런 손자가 한 회장은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다 저를 위해서 그러는 걸 왜 이렇게 몰라주느냐 이 말이다.
“네 녀석이 어젯밤 뭔 짓을 했는지 아는 게냐? 내 얼굴에 먹칠한 것도 모자라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집안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렸어!”
“당연히 해야 할걸 했을 뿐입니다.”
“뉘 맘대로 분리 경영이야? 투명 경영한다고 하면 거기 있는 사람들이 네놈한테 박수라도 보낼 줄 알았더냐? 그리고 뭐? 그것도 이복동생이랑 연애하는 게 뭐 자랑이라고 더러운 짓을 공개해? 이런 고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습니다. 서류상으로도 완벽한 남남입니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거죠?”
“네가 평범한 집안의 손자가 아니라는 게 문제다! 기업가의 일원이 된 순간 네 녀석의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새로운 사업의 연장이란 말이다!”
도준의 침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지 한 회장의 음성이 살짝 누그러졌다.
“연애까지는 암말 안 하마. 단, 그 이복동생은 단단히 숨겨라. 내가 양보해줄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야.”
제아를 내연녀, 세컨드로 만들라는 뜻이었다. 빛도 보지 못하고 시들게 말이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공개도 하지 않았을 도준이었다.
서늘한 눈빛이 고집스러운 한 회장의 눈빛을 마주했다.
“그 여자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제일 그룹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겠습니다.”
충격적인 발언은 이제 끝일 줄 알았건만. 한 회장이 숨을 헐떡였다.
“네놈이 뭘 잘못 아나 본데 그런다고 내가 꼼짝할 줄 알아? 네 녀석이 아니라도 한 부회장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길 수 있어!”
“마음대로 하세요. 그 전에 회장님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한 부회장님께 후계자 자리는 넘기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지금까지 조사해서 손에 틀어쥐고 있는 한 부회장님의 비리 자료, 제가 조만간 터뜨릴 생각이니까요. 후계자가 무너지면 제일 그룹도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찰나에 흔들리는 한 회장의 눈빛을 도준은 놓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한 부회장님은 정계 인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분이시죠. 정권 교체가 되면 제일 그룹은 비자금 수사 1순위의 역풍을 맞을 겁니다. 찌르면 터질 게 가장 많은, 정치인들의 특혜 기업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게 바로 제일 그룹이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게 바로 한 부회장님입니다.”
“한 부회장은 안 될 테니 네가 뭔 짓을 하든 눈감아주라 이거냐?”
“회장님이 맨 손으로 세운 제일 그룹의 지지도가 점점 더 추락하는 게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상치 못한 도준의 말에 한 회장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드리고 눈감아야 했던 부분이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대기업으로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치솟던 분노는 어느새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오랫동안 고심하던 문제를 도준이 건드린 것이다.
“너무 깊게 관여가 되었어. 그러니 어쩌겠냐. 터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보수를 해야지.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넌 이론적으로 경영을 하려는 거고 한 부회장은 현실적으로 경영을 하려는 게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선 한 부회장의 경영법이 옳다. 그러니 잔말 말고 그 자료들, 모두 파기해라.”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정치인들에게 대줄 자금으로 당당하게 세금을 내고 투명 경영을 하면 국민이 제일 그룹 편에 서줄 거예요. 털릴 게 없으니 검찰 수사가 들어와도 당당할 것이고, 정치인들 눈치 볼 필요도 없어요. 당장은 휘청하면서 바닥을 치겠지만 빠르게 원상복귀 할 수 있습니다. 그룹에게 이득을 주는 건 정치권이지만, 그룹을 존재하게 하고 먹여 살리는 건 바로 국민이니까요.”
도준을 협박하고 달래서 설득하려 불렀건만 정작 설득을 당하는 건 바로 한 회장이었다. 하마터면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제일 그룹 경영권, 어머니에게 넘겨주세요. 전 관심 없습니다. 이 말씀 드리려고 오늘 찾아뵈려 한 거예요.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단단히 틀어잡으려 했건만 오히려 흔들린 건 한 회장이었다.
덤덤히 돌아서는 도준에게 한 회장이 선포를 했다.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박 의원 손녀랑 약혼할 게 아니라면 당장 제일 어패럴 사장직에서 물러나라. 제일 그룹 어떤 것도 네 녀석한테 맡기는 일은 없을 게다!”
도준이 다시 몸을 틀었다.
“제 스스로 물러날 생각은 없습니다.”
“뭐, 뭐라고?”
“절 끌어내리고 싶으시면, 회장님이 직접 끌어내리십시오.”
화초방을 나서던 도준은 그 안으로 막 들어오려던 연희와 맞닥뜨렸다. 연희의 차가운 눈이 부어오른 도준의 왼쪽 뺨으로 쏠렸다.
하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자는 인사 한마디 없이 서로를 지나쳤다.
화초방으로 들어선 연희는 앙상한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거리는 한 회장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도준이 얼굴, 아빠가 그런 거예요?”
“귀싸대기 한 대로도 부족하다! 진즉에 이 지팡이로 실컷 두들겨 팼어야 했어! 연희 네가 감싸고도니 저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제멋대로 구는 게 아니냐?”
하지만 지금 연희의 귀에 한 회장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달싹이는 선홍빛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한 회장을 향한 경고였다.
“다신, 도준이한테 손대지 마세요.”
한 회장이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연희를 응시했다. 제 아들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제 딸이 맞는지 확인 중이었다.
“나도 하나뿐인 내 손주 놈이라 때린 게다! 아니었으면 때릴 필요도 없이 내쳤을 게다!”
“내가 데리고 오지 않았으면 아빤 그 아이 존재 자체를 지웠겠죠. 아빠의 유일한 수치심이 바로 나고 그 아이니까.”
“연희야!”
“핏줄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셨죠? 정말 혼자 남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다신 도준이 때리지 말아요.”
쏘아보는 연희의 눈빛 속에 바짝 날이 선 칼날들이 번뜩이고 있었다.
한 회장을 향한 원망, 미움, 분노.
씹어뱉듯이 연희는 말을 끝맺었다.
“내 아들이에요. 때려도 내가 때리고 쳐내도 내가 쳐내요.”
‘그 아일 상처 주고 무너뜨릴 자격, 오로지 나한테만 있어.’
연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
파란만장했던 토요일과 무난했던 일요일이 물 흐르듯이 흐르고 월요일이 다가왔다.
“다녀올게요.”
제아는 아직까지 윤영과 냉전 중이었다.
하지만 윤영은 그 전처럼 강압적으로 제아를 휘어잡으려고는 안 했다.
제 딸이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윤영도 인식을 한 것이다.
대문을 나서자 봄이 왔는지 몸에 와 닿는 아침의 공기는 꽤 부드러웠다.
토요일의 여파 때문인지 도준은 일요일 내내 연락이 없다. 그래도 조금의 서운함은 없었다.
토요일 밤 12시가 될 때까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꼭 붙어 있었으니까.
일요일을 편히 보낸 자신과 달리 정신없이 동분서주하게 뛰고 있을 도준이 걱정되었다.
정각 8시가 되기 3분 전, 정확히 회사에 도착했다. 평소처럼 엘리베이터에 오른 제아의 머릿속은 도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빤 오늘도 회사에 나오지 못하는 걸까.’
‘회장님 성격이 보통이 아니신 것 같은데. 설마 자택에 감금이라도 된 거 아니야?’
‘맙소사. 나 그럼 또 오빠 구하러 회장님 자택까지 쳐들어가야 하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때마침 도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오빠!”
[3분 전이니, 지금 엘리베이터 기다리고 있겠지?]
“내 남자친구가 아니라 스토커 아니야?”
대답하는 제아의 음성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강박적으로 시간관념을 지키는 게 누구더라.]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1분의 오차도 없이 정해진 패턴대로 움직이려는 제아의 습관은 거의 강박에 가까웠다. 특히나 아침 출근은 말이다.
“다 오빠한테 배운 거거든요? 그런데 아침부터 웬 전화?”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제아는 도준과 통화를 하며 올라탔다.
대답 대신 도준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매혹적으로 넘어왔다. 뭐야, 이 웃음의 의미는.
“오빠 오늘 좋은 일 있어?”
[있지.]
“뭔데?”
[지금 몇 층이지?]
“9층 올라가고 있어.”
왜 자꾸 엘리베이터에 집착하는 거지? 의문을 갖으면서도 제아는 대답해주었다.
[10, 11, 12, 13, 14, 15.]
도준의 카운트다운과 함께 아주 정확하게 엘리베이터가 15층에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무의식적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귓가에 대고 있는 핸드폰 너머로 도준의 나른한 음성이 들려왔다.
[축하해, 문제아. 나의 공식적인 연인이 된 걸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