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82화 (82/104)

82. 네 입술에 결제 도장 찍을 거야.

2017.06.15.

도준이 놀라든 말든,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 입은 여자들이 수군거리든 말든 제아는 차분한 걸음으로 도준 앞까지 걸어가서 멈추어 섰다.

남자와 여자의 구두코가 서로를 아슬하게 마주 보았다.

비싸 보이는 남자의 잘빠진 구두코는 흠집 없이 반질반질했다.

그 구두코에 닿을 듯 다가선 여자의 구두코는 평범한 무광색 검정으로 흠집이 꽤 나 있었다.

하지만 조바심에 거리를 좁혀온 건 바로 남자의 구두코였다.

서로의 구두코가 드디어 부딪히는 순간, 도준의 입술에 물려 있던 담배가 사라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꽤 건방진 행동이었다. 감히 비서가 묻지도 않고 사장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앗았으니.

발코니에 있던 여자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마치‘넌 이제 해고야.’하고 도준 대신 사형 선고를 내리고 있는 듯했다. 아니, 사형 선고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입술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앗긴 도준도, 그 담배를 빼앗아 가는 몸통을 잔인하게 꺾어버린 제아도 태연하기만 했다. 보는 이들만 그저 두근두근 긴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금연하신다고 저한테 약속하셨으니 담배는 압수할게요.”

그런데 건방진 비서를 응시하는 도준의 눈빛도 표정도 다정하기 그지없다. 방금 전까지 무료하고 따분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남자가 맞는지.

여자들이 열심히 그들을 살펴보든 말든, 도준은 제아에게 단 한마디만 물었다.

“이유가 뭐지?”

제아가 어떻게 알고, 또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하지만 왜 왔는지는 궁금하다. 미치도록.

“워낙 긴급을 요하는 결재안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아, 유 실장님한테는 미리 연락해두었구요.”

제아가 보란 듯이 서류 가방을 흔들어 보인다.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하마터면 도준마저 속을 뻔했다. 정말 중요한 문건이 있어서 쫓아온 걸로 말이다.

하지만 그가 아는 한 급한 결재안은 없다. 그런 결재안은 모두 인호가 직접 처리를 하니까.

어찌되었든 제아와 같은 편을 먹고 그를 놀라게 한 패가 인호라는 것.

자택 가사 헬퍼 건도 둘이서 몰래 짜고 친 것도 눈감아주었건만.

곰곰이 생각에 잠긴 도준의 표정을 착각한 한 여자가 얼른 나섰다.

“대체 경호를 어떻게 하길래 아무나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오늘 파티 경호를 맡은 업체와 호텔 측에 한마디 단단히 해줘야겠어.”

서로 경계할 때는 언제고 제아의 등장에 여자들은 어느새 단합을 하고 있었다. 여자의 본능적인 촉이 곤두선 것이리라.

비서로 보이는 이 여자, 마음에 들지 않아. 쫓아내야겠어.

그런데 그 여자들이 착각한 게 있었다.

파티장을 벗어나 지극히 좁은 공간이라도 개인 공간을 원했고, 그 공간을 침범당한 건 도준이었다. 그것도 아무나에게 함부로 말이다.

이젠 아무나 함부로 그들을 쫓아낼 차례였다.

“아무나 함부로가 아닙니다.”

도준이 뻗은 손길이 자연스럽게 제아의 허리 안쪽을 파고들었다.

“잔뜩 궁금해하는 눈치이니 간단히 소개 먼저 하죠.”

허리를 끌어당기는 적당한 악력에 제아는 얌전하게 끌려갔다.

“가장 아끼는 특별 비서이자.”

마침내 도준의 품에 온전하게 제아가 안겨들었다.

제자리를 찾은 듯 딱 맞게 떨어지는 서로의 몸체.

청량하고 산뜻한 향과 달달 상큼한 복숭아향이 기다렸다는 듯 서로에게 파고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느닷없는 돌발 선언에 여자들은 저마다 각자의 생각 또는 계산에 빠져들었다.

‘회사 내 평사원과 열애를 인정했다는 건 기사로 봤는데. 근데 팀장이 아니라 겨우 비서였어? 그것도 저렇게 보잘 것 없는?’

‘이미지를 깎아내리려는 일개 찌라시가 아니었어? 그 기사가 진짜였다구?’

‘당당하게 공개까지 하는 걸 보면 딱 봐도 보통 사이가 아니잖아! 우리 엄마 꼴 나긴 싫은데. 약혼한다 해도 저 꼴을 어떻게 봐주지? 악, 난 못 해!’

제일 그룹 황태자의 열애설로 언론이 떠들썩한데도 상대 여자의 신상은 아주 완벽하게 보호가 되었다.

언론의 기사는 제일가에서 막았을 것이다. SNS는 의외로 현대판 예비 신데렐라를 보호해주려는 듯 모자이크된 얼굴이나 멀리서 찍은 사진만 나돌았다.

“아무나 함부로가 아닌 걸 알았으니 자리 좀 비워줬음 하는데.”

나직한 도준의 음성은 매너를 유지했지만 내포된 의미는 퇴장을 요구하고 있었다. 다양한 감정을 드러낸 표정으로 여자들은 우선 후퇴했다.

마침내 둘만 남았다. 그제야 제아가 조심히 도준을 올려다보며 작게 투덜거렸다.

“결제 받으러 왔다니까 안기는 왜 안아?”

“안아주라고 신호 보냈잖아.”

“내가? 언제?”

“내 눈에 보인 것 자체가 널 안아주라는 거 아닌가?”

보이면 안으라고, 안으면 품으라고. 도준에게 끊임없이 몸의 신호를 보내는 여자. 그게 너잖아.

“그 신호 무시하면 그 때처럼 나를 유혹할 거잖아, 정신 못 차리게. 그러니 내가 그 신호를 무시할 수가 있나.”

기가 막힌 듯 눈을 치켜뜬 제아는 의외로 뻔뻔하게 웃는 도준을 보았다. ‘이 남자, 정말 한도준 맞나?’ 하는 표정으로.

“진짜 결재 받을 거 있어서 온 거거든요?”

작게 콧방귀를 흘린 제아가 성급한 손길로 서류가방을 뒤져 서류를 꺼내려고 했지만 이내 도준에게 저지당했다. 숙여진 고개가 뺨을 스쳐 귓가에 다다랐다.

“날 믿으면서도 여기까지 달려온 건. 그래도 질투가 나긴 했나 보지?”

기분 좋다는 듯 나른하게 풀려 있는 도준의 음성이 정곡을…… 찔렀다.

머리를 야무지게 틀어 올려서 드러난 제아의 작고 새하얀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지, 질투는 무슨! 이거 봐봐! 진짜 결재할 거 안 보여?”

서류를 팔랑팔랑 흔들어도 도준의 엄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아의 입술을 둔탁하게 쓸었다.

“그렇게 급한 거면 네가 나 대신 다 사인하든지.”

“……뭐?”

“난 내가 정확히 해야 할 그곳에만 결재를 할 생각이니.”

비스듬히 틀어서 다가오는 얼굴과 눈빛의 아찔한 각도,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이 은밀하게 경고한다. ‘네 입술에 결재 도장 찍을 거야.’라고.

“문 비서, 결제 받을 준비 됐나?”

꿀꺽. 침을 자꾸만 삼키는데도 묘한 긴장감으로 인해 제아의 입안은 계속 촉촉해졌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익숙한 자극에 무조건적인 반응이 새어 나오는 것이다.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틀었다.

“그런 결재 받으려고 잠입한 거 아니거든?”

도준이 걱정이 되어 달려오긴 했지만 조금의 질투도 없었다는 말은 못 한다.

질투도 약간 났지만 그녀는 또다시 이곳에서 혼자 버텨낼 도준을 위해 달려왔다. 빠져 나오기 힘든 자리라면 구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도준을 불러내는 건 안 된다고 가차없이 파티장 입구에서 경호원들에게 거절당했다.

인호까지 나와서 안에 들어가서 얼른 결재를 받고 나오라는 지시가 있은 후 통과되었다.

“결재는 그냥 핑계였고, 오빠 파이팅 해주려고 온 거야.”

통화를 할 때 인호가 제아에게 넌지시 귀띔을 해주었다. 도준이 이 자리에서 회사에 관한 중대 발언을 할 거라는 걸.

그 발언에 의해 한 회장과 척을 질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구출은 실패했지만 그냥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오빠 오늘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 거 아니야.”

오늘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눈앞에 있는 밥이라도 보면서 밥심 좀 잘 내라고 응원 온 것이다.

그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도준이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문제아 너란 여자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그때 도준을 찾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키스할 듯 기울여지던 도준의 몸이 다시 반듯하게 세워졌다.

때가 되었음을 제아도 느꼈다.

떨리는 손끝이 도준의 보타이를, 그리고 셔츠의 목깃을 다시 한 번 단정하게 매만져주었다.

보내주어야 할 때이다. 말리고 싶지만, 말릴 순 없다. 서로가 함께 하려면. 그리고 말린다고 멈출 도준도 아니다.

애달픈 손끝이 떨어져 나가자 도준이 날렵하게 턱을 기울여 스치듯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힘 있는 숨결이 가냘픈 숨결을 타고 흘러들었다.

“몇 마디만 하면 돼. 금방 끝날 거야.”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만큼, 빨리 돌아오고 싶다.

“그러니까 문제아, 여기서 기다려.”

어디 가지 말고.

“다시 돌아올 거야.”

내가 있어야 할 네 곁으로 말이야.

발코니 입구에 제아를 세워둔 채 도준은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 숨겨두었다는 표현이 옳았다.

어딜 가나 달콤한 향을 탐하는 벌들은 들끓기 마련이니. 제아무리 꽁꽁 숨겨놔도 풍기는 향만은 어찌하지 못하니까.

파티장 내부로 들어오자 살짝 경직된 표정의 레이나가 도준을 응시한다. 그러곤 다시 발코니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누가 그곳에 있는지 안다는 듯 아주 정확히 안다는 눈빛으로. 한 번은 눈 감아줘도 두 번은 아니었다.

도준은 스치듯이 지나며 레이나에게 경고를 흘렸다.

“봐주는 건 한 번뿐이야. 접근할 생각하지 마.”

아름다운 색조에 물든 레이나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제이드, 무슨 오해가 있는 것?”

지나가는 도준의 옷깃을 잡았지만 매정하게 뿌리쳤다. 반쯤 몸을 튼 도준의 얼굴에 어린 건 짜증이었다.

“오해 같은 거 안 해. 너랑 나, 그럴 사이 아니지 않나.”

내려다보는 눈빛이 싸늘했다. 그 눈빛을 접한 순간 레이나는 느꼈다. 겨우 좁혀졌다 생각했던 거리가 다시 원상복구되었다는 걸.

철저한 거리감, 그리고 냉대.

그날 이후 도준에게 받는 건 그것뿐이었다. 연락조차 받지 않았다. 존재 자체를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었다. 기껏 도와주었건만.

“제이드 넌 차갑긴 하지만 적어도 예의는 있는 남자였어. 그런데 대체 왜 이래? 너와 제아씨를 도와준 내 연락을 받지도 않고, 무시하고, 피하고.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

“자신하나?”

“……뭐?”

“나와 제아를. 순수하게 도와줬고 끝까지 도와줬다고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제아 어머니를 객실까지 통과시켜준 건 너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는데도 말이지. 내가 틀렸나?”

직시하는 도준의 눈빛에 레이나는 동공이 흔들려 버렸고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찰나를 놓쳐버린 것이다.

“김세경.”

고개 숙이는 레이나의 귓가가 바짝 곤두섰다. 그리고 심장도 곤두섰다. 세차게 뛰면서.

처음으로 도준이 제 이름을 불러준 것이다. 이유 불문하고 도준의 입술이 발음하는 제 이름이 이렇게나 듣기 좋을 줄이야.

수줍게 상기된 얼굴을 레이나가 드는 순간…….

“널 믿는 누군가 때문에 지금까지 참았지만 이젠 아니야. 똑똑하니 내 말뜻 이해했을 거라 믿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준은 파티장 제일 안쪽에 마련된 단상으로 걸어가 버렸다.

처음으로 이름이 불리는 황홀한 순간, 비참함을 동시에 경험했다.

학처럼 고고한 목과 연결되는 나긋나긋한 어깨선이 부들부들 미세하게 떨려왔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시선이 발코니에 꽂혔다.

발코니 입구와 파티장 내부의 중간쯤에 딱 멈추어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여자.

화려한 이 파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수수한 차림의 제아를 말이다.

네가 미워…….

***

단상 쪽으로 향하는 도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다 레이나를 발견했다.

고혹적인 머메이드 라인의 탑 롱 드레스에 풀 메이크업을 받은 레이나는 오늘 더 아름다웠다.

눈이 마주지차 제아는 그녀를 향해 싱그럽게 웃어 보였다. 친언니처럼 잘 따르는 레이나가 반가웠던 것이다.

그런데 레이나는 웃지 않는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매끈하게 올라갔던 제아의 입꼬리는 어색하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주 잠시 동안 제아를 빤히 보던 레이나가 뒤늦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제아 씨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저도 제가 여기 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근데 모습이 왜 이래? 파티 왔으면 좀 격식을 차려야 하지 않아?”

지금 파티장 안의 여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어깨와 가슴 또는 몸매를 과감히 드러냈다.

고가의 명품 드레스와 액세서리로 치장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스타일링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여자들과는 극과 극으로 제아는 고리타분한 옷차림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검정 투피스에 굽 낮은 검은 구두. 지금 제아의 얼굴은 화장기 하나 없었다.

돋보이는 거라곤 안경뿐이었다.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흉내내봤자 흙수저가 금수저 되겠어요? 이게 원래 내 모습이잖아요. 그리고 저 여기 비서로 온 거예요.”

그렇게 주제 파악 잘하면서, 왜 차지하는 건데! 분에 넘치는 한도준이란 남자를! 레이나의 동공이 번들거렸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함부로 통과가 안 됐을 건데.”

“한 도준 사장님 비서인데 긴급하게 받아야 할 결재안이 있다고 둘러댔어요. 그래도 경호원들이 통과 안 시켜주는 거 있죠. 유 실장님까지 나오셔서 비서 맞다고 확인해주니까 그제야 통과시켜줬어요. 그것도 얼른 들어갔다 나오라고 했지만.”

“그랬구나. 그래도 머리 참…… 좋네. 비서 핑계로 들어올 생각을 하고.”

“바늘 가는 데 실 가야죠.”

몸을 기울여 살며시 속삭이는 제아는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과 눈빛이었다. 레이나 자신은 지금 인생 최고로 비참한데 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가로 치장한 자신이었다. 외모도, 갖추고 있는 재력과 배경도, 능력까지도 월등히 저 여자보다 우세하다.

그런데 왜 내가 아닌 너지?

“그럼 더 있다가 가.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술도 한잔하고. 난 볼일이 있어서 갈게.”

우아한 미소를 끝으로 레이나는 파티장을 벗어나 보안실로 향했다. 오늘 경호를 맡은 업체의 팀장을 호출했다.

파티장 내부 곳곳을 담고 있는 화면의 어느 한곳을 손가락질했다.

“경호를 이따위로 하라고 조선 호텔에서 고액을 지불한 게 아니에요. 저 여자, 당장 끌어내요.”

“아, 저 여자분은 제일 어패럴 사장님 비서라고.”

“비서든 뭐든. 파티명단에 없으면 모두 잡상인이에요.”

***

형식적인 한 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거리감도 꽤 있었지만 체구가 작은 한 회장은 단상에 가려져 제아에겐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분이 오빠의 할아버지 목소리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도준의 차례가 돌아왔다. 단상 위로 올라서는 훤칠한 제 남자를 보는 제아의 마음은 미묘하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뛰는 게 아니라 가득 차올라 달아오르는 기분, 감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수려한 외모만큼이나 수려한 언변이 이어졌다.

그때였다. 턱시도를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발코니 쪽으로 다가섰다.

“비서인가 보지?”

“아, 네…….”

지극히 귀찮아하는 눈치를 보였건만, 남자는 사라지기는커녕 더 바짝 다가왔다. 마지못해 고개를 틀자 호기심이 어린 눈빛과 부딪혔다.

잘나가는 의원의 아들인 남자는 처음엔 그저 지루함에 시선을 여기저기 던졌다. 그리고 우연히, 이 파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리타분한 검정 투피스를 입은 여자를 발견했다.

그런데 몸태가 고왔다. 좀 더 다가서니 가는 뒷모습과 달리 옆모습은 육감적이었다.

남자는 급기야 여자의 얼굴이 궁금해져서 그녀에게 다가섰다.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앙큼한 고양이 눈매가 금욕적인 옷차림과 상반되었다.

결론은 신선하다는 것. 건드려보고 싶다는 것.

“비서직 할 만하나? 월급은 만족스럽고?”

치근덕거림이 분명했다. 제아의 짜증 게이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남자가 자꾸 말을 거는 사이, 도준의 연설은 이어지고 있었다.

“제일 그룹의 계열사인 제일 어패럴은 2017년부터 제일 그룹의 경영권에서 벗어나 단독 경영을 선언합니다. 정치인들과의 결탁을 멀리하여 기업 비리에서 벗어날 것이며, 누드 경영을 통해 국민에게 더 친화적으로 다가가는 국민 기업이 될 것입니다.”

파티장 내부가 급격히 술렁였다. 한 회장은 잘난 손자를 공식적으로 선보이고 주목을 받게 하고 싶어 형식적인 발표 시간을 내주었던 거다.

그런데 도준이 그 자리를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듣고 있는 제아마저도 심장이 터질 듯이 널뛰기를 했다. 누군가가 도준을 잡아채서 끌고 가버릴까 봐 눈조차 뗄 수 없었다.

듣는 자신도 이렇게 덜덜 떨리는데 당사자는 얼마나 떨릴까. 도준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적대시한다고 해도, 나만은 끝까지 흔들림 없이 지켜봐줘야 한다. 우선 옆에서 앵앵거리는 벌을 빨리 떼어버린 후에 말이다.

“전 비서직이 아주 만족스럽고 아주 할……?”

그런데 앵앵거리는 벌에 이어 또 다른 방해꾼이 나타났다. 시커먼 정장을 차려 입은 경호원 둘이 발코니 쪽으로 다가온 것이다.

“외부인은 출입 금지입니다. 그만 나가주시죠.”

굳이 찾아내서 한다는 게 잡상인 취급이었다. 오빠가 기다리라고 했는데.

“10분만, 아니 5분만 기다려주세요.”

사정해 보지만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강제로 끌고라도 나가겠다는 듯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도준이 기다리라고 했지만,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괜히 버텼다가 소란을 일으키기는 싫었다.

그녀가 경호원들에게 양쪽 팔이 붙잡혀 끌려 나가려는 찰나…….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기쁜 소식을 한 가지 전해드릴까 합니다.”

숨어 있으라고 할 땐 언제고. 단상 위에 오른 도준의 손끝이 아주 정확하게 제아를 집어냈다.

순식간에 제아에게 몰려드는 엄청난 시선들.

“제 특별 비서이자 현대판 신데렐라가 될 저의 예비 피앙세를 소개합니다.”

찌르듯이 넘어온 싸늘한 눈빛이 경호원들에게 정확히 꽂혀들었다.

‘내 여자에게서 당장 손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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