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81화 (81/104)

81. 너라는 진수성찬, 산해진미

2017.06.12.

튤립 봉오리가 꽃을 피우듯 제아의 입술이 아주 작고 동그랗게 벌어졌다. 온몸에 열꽃이 퍼지는 것 같았다.

“내가 살기 위해 꼭 먹어야 하는, 유일한 내 밥.”

또다시 감당 못할 아찔한 고백이 느닷없이 쏟아진다.

”그 밥을 먹어야 그 밥심으로 내가 버티지.”

가볍게 입술을 스친 도준의 입술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내 여자가 과감하게 유혹까지 해서 힘들게 차려준 저녁인데.”

곧이어 제아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도준의 뜨거운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식사 예절을 잘 지켜야 착한 애인 아닌가?”

제아는 깜짝 놀라 잡힌 손을 빼보려 하지만 할짝이는 촉촉한 느낌에 소스라치듯 놀라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렸다.

뜨겁고 차가운 걸 많이 접한 손가락의 피부 감각은 무뎌질 대로 무뎌져 있었다. 하지만 촉촉하고 뜨겁게 감싸이는 부드러운 살갗에 감싸인 손가락 피부는 민감하기 그지없었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차례대로 음미하듯이 도준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난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먹는 편이지.”

느릿하게 움직이는 입술과 달리 눈빛만은 제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움찔거리는 반응을 즐기는 듯.

제아의 눈을 깊숙이 파고드는 도준의 눈빛은 뜨겁고 짙었다. 마지막 손가락이 드디어 해방되는 순간, 이제 끝이구나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반찬을 먹었으니 이제 메인인 밥을 먹어야겠어.”

메인인 밥……이라면 설마? 제아가 그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입술이 먹혔다.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확 치고 드는 격렬함에 놀랐다. 도망가는 혀가 잡아챘다. 도준은 느릿하고 꼼꼼하게 맛있는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진수성찬, 산해진미라는 말로는 부족할 인생 최고의 식사를 말이다. 내일도 독하게 달려야 할 밥심을 키우기 위해.

***

강훈은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책상 위의 물건들을 모조리 손으로 쓸어버렸다. 떨어지고 부서지고 집무실 내부가 난장판이었다.

그런데도 지독한 패배감은 여전히 그의 전신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개자식!”

몇 주 전 통화를 한 지로가 꽤 괜찮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고가가 아니어도 워낙 해외 상위층이 선호하는 브랜드라서 선배가 일리니만 믿고 있는 것 같아. 온라인 몰과 다르게 오픈 날짜 홍보 이외엔 별다른 마케팅도 안 하는 것 같더라고. 좀 급해도 형도 일리니 오픈 날짜를 맞춰 보는 게 어때? 어차피 우리나라 VIP 고객들은 다 제일 백화점이 꽉 잡고 있잖아. 오픈했을 때 파리 날리는 꼴 좀 느껴보라고 말이야. 형이 그날 제일 아울렛으로 갈 일리니 고객을 백화점으로 다 끌어가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닌지라 급하게 날짜를 맞추었다. 그런데 오히려 뒤통수를 맞은 건 강훈이었다.

일리니란 브랜드는 같지만, 레벨이 다르다. 상위 계층이 환장하는 일리니 리미티드라는 한정판 브랜드를 재탄생시킨 것이다.

홍보 날짜 이외에는 어떤 마케팅도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상위 계층 사이에 제일 아울렛 홍보 팸플릿이 은밀하게 돌았다. 강훈도 모를 정도로.

일리니 계약 진행에 관한 건 전적으로 일리안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기에 클레임도 걸 수 없다.

이런 꼴을 보려고 일리안이 동시 계약을 한 것이었다. 철저하게 도준과 한통속이었다.

결론적으로 제일 아울렛 오픈은 대성공이었고 그날 제일 백화점은 파리만 끓었을 뿐이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박 실장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난장판이 된 집무실을 쓱 훑어본 후 슬그머니 강훈의 눈치를 보았다.

“이번 주말 저녁, 제일 아울렛의 성공적인 오픈을 축하한다는 명목하에 한 회장님 주최로 조선 호텔에서 작은 규모의 파티가 열립니다.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고 은밀하게 진행이 되고 있어서 오늘에서야 겨우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규모 자체는 크지 않지만 파티 참가자 명단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혼기 꽉 찬 자식이 있는 내로라하는 정계재계 인사들이 참석한다고 합니다.”

“도준이를 그 자리에서 선보일 생각이군. 그렇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굳게 다물린 강훈의 입술이 씰룩였다. 지금까지 중립을 유지하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한 회장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삐 풀린 손자 놈을 휘어잡아볼 심산이었다. 제일 아울렛 오픈까지 성공한 마당에 뒷배경 든든한 처가까지 얻게 된다면 상황은 더욱더 불리해진다. 어떻게든 훼방을 놓아야 한다.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강훈의 머릿속에 한 여자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간다.

“문제아.”

만만치 않아 보이던 한도준의 이복동생, 그 여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

한 회장이 주최한 파티가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고 집사에게 은밀하게 보고를 받은지라 도준은 그 파티가 주최된 진짜 목적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각 집안의 잘난 아들딸들, 서로 내보이고 공개 맞선 한번 봅시다.-

은밀하게 열리는 것과 달리 파티의 질은 최고급 하이퀼리티. 게다가 파티의 모든 비용은 한 회장이 지불한다.

서로 자식들을 선보이고 이해득실이 맞는 집안끼리 붙어먹으면 끝, 정경유착을 확고히 다질 자리를 마다할 리 없다.

그리고 한 회장은 그 자리를 빌려 선을 보이고 빼도 박도 못하게 도준을 확 휘어잡으려는 계획이리라.

그런데도 도준이 모른 척 그 자리에 참석하는 건 나름 생각이 있어서였다.

그 자리에 모이는 이들은 한국을 움직이게 하는 정계와 재계의 인사들, 그가 별짓을 해도 모이게 할 수 없는 인맥들이다. 오늘 그 자리를 톡톡히 이용할 생각이다.

조선 호텔 주차장에 도착하자, 인호가 뒷좌석을 돌아보며 도준에게 조심히 말을 건넸다.

“오늘 파티에 대해서 문 비서에게 알려야 하지 않아?”

보타이를 만지던 손이 아주 잠시 멈추었지만 이내 다시 느릿하게 움직였다.

“모르는 게 나아.”

공개 연애를 선언한 이후로 어디든 제아를 달고 다니는 도준이었다.

그런데 이번 파티만큼은 동행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공개적으로 선언할 생각이다.

제일 어패럴의 분리 경영과 더불어 그 파티에 참석한 어떤 집안의 여식과도 약혼할 생각이 없음을.

한 회장과 연희가 다시는 어떤 집안의 여식도 갖다 붙이지 못하도록 못을 박을 것이다.

이 자리까지 제아를 데리고 와서 가족과 막강한 인사들을 적으로 돌리는 걸 보게 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도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서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제아에게 더 이상의 걱정거리는 주고 싶지 않다.

“하긴, 때론 모르는 게 약이 될 수도 있지.”

인호도 바로 수긍을 했다.

***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제아는 지로와 함께 회사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제일 아울렛 오픈이 대박 난 이후로 더 바빠진 도준이었기에 일주일째 지로와 퇴근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수업 들으러 가는 거냐? 하루는 좀 빠지는 게 어때? 제아 너 살 너무 많이 빠졌어.”

공부라면 질색하는 지로인지라 이제야 열공에 들어간 제아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을 했다.

“쌍코피 터지도록 노력해보겠다고 오빠한테 약속했어.”

도준에게 장난으로 한 말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수업을 듣고 들어오자마자 잠을 자는 게 아니라 복습을 했다. 머리가 안 되면 노력으로라도 이루어야 하니까.

잠을 줄이고 미친 듯이 매달렸고 결국 4일 만에 쌍코피가 터져버렸다. 물론 도준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지금도 충분히 고공행진 하고 있는데 뭐하러 개고생 하냐? 너랑 난 공부 머리 아니라니까?”

“우씨, 너랑 나랑 틀리거든? 넌 공부를 못한 거고 난 공부를 안한 거거든?”

제아가 정색하자 지로는 키득키득 웃었다.

“이거나 저거나 둘 다 공부 못한 건 똑같거든요? 그리고 남친이 제일 그룹 후계자가 될 건데 무슨 개고생이야. 당장 그딴 공부 때려치워라.”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 오빠 먹여 살려야 된단 말이야. 그 대답을 속으로만 삼키면서 제아는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신을 선택한 대가로 모든 걸 버려야 하는 도준에게 더 이상의 짐은 되지 않아야 한다.

요즘 시대에 맞벌이는 기본이니까, 돈 많이 벌어서 도준이 자신을 선택한 걸 후회하게 안 할 것이다.

큰 도로로 차가 접어들자마자 지로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지로가 단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씨, 이 형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전화질이야?”

강훈이 6시 이후로 30분에 한 번 꼴로 전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가운 목소리도 아닌데 오늘 도대체 왜 이러는지. 짜증이 나서 무시하려 했지만 제아도 발신인을 이미 본 후였다.

“혹시 모르잖아. 받아봐.”

지로는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이 블루투스로 연결이 되어 강훈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차 안을 울렸다.

[한지로, 퇴근했나?]

“퇴근했다, 했어! 형 오늘 도대체 왜 그러는데!”

[차 타고 가는 중이지?]

“그래! 그럼 내 성격에 대중교통 이용할 것 같아?”

[성북동으로 가는 중인가?]

“그건 왜 물어?”

[술 한잔할까 해서 말이야.]

“나 지금 오류동 가거든? 그러니까 술은 혼자 마셔.”

[오류동이라, 그렇군.]

지극히 여유로운, 하지만 굉장히 가식적인 말투였다.

[오늘 저녁 굉장히 중요한 파티에 참여하는 한 사장과 달리, 나는 그 파티에 초대를 받지 못했어. 그래서 속상해서 동생과 술 한잔할까 했지. 한 사장이 지금 뭐 하러 갔는지, 지로 너도 모르나?]

“내가 선배 비서야? 선배 스케줄을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내놓으라 하는 집안 자식들이 오늘 조선 호텔에 다 모여. 그것도 미혼인 자식들 말이야. 공식적인 집단 맞선 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런데 난 핏줄이 아니라고 한 회장님이 날 제외시켰더라고. 친손자를 위해 거액까지 들여가며 파티를 주최한 걸 보니 엄청난 집안 여식과 연결해주려는 모양이야.]

예상하지 못한 주제에 지로가 당황한 듯 제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무리 고집 센 도준이라도 회장님까지 거스를 순 없지. 마음은 네 친구한테 있어도 회장님이 정해준 약혼녀를 무시할 순 없을 거야. 특히 그 자리에선 말이야. 절대 못 빠져 나올 거다. 우리 회장님 성격이 보통이 아니거든.]

“그, 그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건데?”

[네 친구가 그걸 알고 있다면 나는 위로 못해줘도 친구는 위로 해주라고 전화한 거지. 연애 공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세컨드로 밀려봐, 오죽 속상하겠어.]

“아씨, 주둥아리 좀 닥쳐봐!”

당황한 나머지 제아의 눈치를 보며 얼른 전화를 끊으려는 지로에게 제아가 핸드폰 액정을 내밀었다.

[계속 통화해서 물어봐. 그 파티 어디서 몇 시에 하는지.]

보아하니 제아는 전혀 몰랐던 눈치다. 눈꼬리가 앙큼하게 올라간 걸 보니 저 계집애, 또 성질 돋았네. 그런데도 지로는 제아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그 파티, 어디서 몇 시에 하는데?”

[뭐 궁금하다면야 말해주지.]

여유로운 웃음소리가 차 안을 울리지만 웃는 건 강훈뿐. 지로도, 제아도 웃지 않았다.

[조선 호텔 7시야. 지금쯤 한참 선 자리가 진행되고 있겠군. 그럼 이 형은 속상해서 술 한잔하러 가야겠다.]

전화는 곧 끊겼다. 하지만 분명 제아가 옆에 있는 걸 알고 강훈이 의도적으로 한 전화라는 걸 둘 다 안다. 지로는 속으로 강훈에게 온갖 욕을 다 퍼부었다.

이 새끼, 나를 이용했어?

한 방 먹였다 했더니 되돌려 받은 기분이었다.

“문 꼴통, 통화 내용 들으니까 속이 아주 시원하냐?”

“나 들으라고 전화한 건데 들어줘야지.”

기분 나빠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제아는 담담했다.

“뭐야, 선배 그 파티 간 거 알고 있었나 보네.”

“몰랐어.”

“근데 왜 이렇게 여유롭냐, 신경 안 쓰여?”

“신경 쓰여. 그것도 엄청.”

지로의 예상을 깬 제아는 도준이 아닌 인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저 문 팀장이에요. 오빠 지금 조선 호텔에 있나요? 그렇구나. 근데 그 파티, 빠져나오기 힘든 자리인가요? 저 지금 거기 가려고 하는데.”

제아는 잠자코 인호의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괜찮아요. 흙수저에 금박 씌운다고 금수저 되겠어요? 그냥 싸구려 도금일 뿐이지. 그냥 이대로 갈래요. 네네, 걱정 마세요.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요.”

인호와 통화를 끝낸 제아가 지로를 빤히 바라본다. 바라는 게 있다는 듯.

“한지로, 나 조선 호텔까지만 데려다 주라.”

“가서 뭐할라고?”

“빠져나오기 힘든 자리라잖아, 내 왕자님 구하러 가야지.”

“너 미쳤냐?”

“왕자만 공주 구하란 법 있어? 공주도 왕자 구할 줄 알거든?”

“얼씨구.”

걱정 말라는 듯 생긋 웃는 제아를 보며 지로는 다시 한 번 제 옆에 있는 이 여자가 탐이 났다.

한도준이란 완벽한 남자마저도 기대게 하고 지켜준다는 이 여자. 휴, 이런 여자 어디 또 없나?

지로가 차의 진로를 변경하자 그제야 제아는 가방에서 급하게 이것저것 찾아서 꺼냈다.

깔끔하게 머리를 틀어 올릴 머리끈과 컴퓨터를 할 때만 쓰는 뿔테 안경. 제아는 지금, 완벽한 비서로 거듭나는 중이었다.

***

말끔하다 못해 눈이 부신 자태로 파티에 참석한 도준을 본 한 회장은 흐뭇했다.

다른 집안의 자제들은 모두 오징어로 보이게 할 정도로 손자 녀석은 외모도, 뿜어내는 카리스마도 특출 났다. 자랑스러우면서도 내심 흐뭇했다.

“오늘 여기서 네 약혼 자리 알아볼 테니 그리 알아라. 지금까지 제멋대로 하도록 뒀지만 이젠 안 봐줘! 이 할아비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넌 가만히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제일 어패럴 사장직에서도 확 쫓아내버릴 테니까.”

의외로 담담한 도준의 표정에 한 회장은 옳거니, 했다. 그럼 그렇지. 네 녀석이 나를 거역할 수 있을라고. 그리고 그 말을 바로 실천에 옮겼다.

도준을 끌고 다니며 인사는 못 시켰지만 내심 찜해놓았던 여식이 있는 집안들과 꼼꼼히 인사를 나누었다.

“하하, 우리 손주 녀석이 좀 잘나긴 했습니다. 제일 어패럴 주가가 아주 비정상적으로 치솟고 있더라고. 후계자로 손색이 없지. 내가 마음 놓고 물러날 수 있겠어.”

“혈기왕성한 젊은이가 연애 몇 번 할 수도 있지. 그런 스캔들까지 없으면 어디 남자라고 할 수 있나. 암 그렇고말고. 약혼하기 전에 그런 평범한 연애라도 실컷 해야 결혼 후엔 지 아내한테 집중하는 게지.”

그런 한 회장을 도준은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잠자코 지켜보았다. 30분 후에 있을 한 회장의 축사에 이어 그도 짧은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다.

그때에 준비한 돌발 선언을 할 생각이다. 그전까지는 제대로 작정한 한 회장의 좋은 기분을 망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회장님 단단히 마음 먹으셨나 보다. 여기 경호원들이 죄다 한 사장 너만 보는 거 느껴지지? 도망쳤다가 뼈도 못 추리겠네.”

인호의 말대로 오늘 한 회장의 굳건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도망칠 마음도 없는 도준이었다.

축사가 시작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려 했지만, 파티에 참석한 여자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코를 찌르는 독한 향수 냄새와 화장품 냄새. 그것도 모자라 노골적인 시선과 은밀한 시선이 뒤죽박죽 얽혀 끊임없이 꽂혀들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제아를 떠올려 보지만 무리였다. 결국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지 못하고 발코니로 향했다. 제아가 없으니 지독할 정도로 담배만 당긴다.

그런데 다행히도 재킷 안에는 제아의 공백을 대신해줄 담배가 있다. 망설임 없이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일까 하다가 관뒀다. 담배를 피운 걸 알면, 제아가 화를 낼 테니까.

그런데 발코니까지 쫓아온 스토커들이 있었다. 오픈된 공간에선 서로 눈치만 보며 도준의 주위를 맴돌던 여자들이 과감하게 다가섰다.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막힌 공간인 발코니가 용기를 주었나 보다. 뒤에서 뭐라고 해대는 게 너무 귀찮아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 차원으로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그런데도 경고의 눈빛이 먹히기는커녕 여자들은 오히려 뜨겁게 도준을 바라보았다.

“한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 백영국 의원님 막내 딸 백미란이에요. 저희 아빠가 다음 있을 대선에 나가려는 거 아시죠? 온누리당 안에서 지지율도 가장 높아요.”

그 여자와 다투듯 다른 여자가 앞으로 치고 나왔다.

“같은 회사 여직원이랑 스캔들 난 거 전 이해할 수 있어요. 연애 따로 결혼 따로. 우리 같은 상위계층에선 기본이잖아요. 물론 그렇다고 저까지 바람피운다는 건 아니구요. 도준 씨를 이해해주면서 사업까지 적극적으로 밀어줄 수 있는 아내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예요.”

몇몇 여자들이 이어서 자신을 어필하는 말들을 쏟아냈지만 도준의 귀엔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만큼 무성의하고 무관심했다. 그런데도 여자들은 지칠 정도로 입을 멈추지 않았다.

도준은 일일이 거절하는 것도 귀찮았다. 조금만 있으면 저런 수다도 떨지 못하게 공식적으로 선언할 예정이니까.

독을 품은 혀가 간지럽긴 했지만 그래서 참았다. 입술에 물고 있는 담배 끝을 질겅질겅 씹으며.

그때였다. 지루함이 가득 차 있던 도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파티에 참석한 여자들은 하나같이 화려했다.

하지만 지금 도준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발코니로 들어서는 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고지식했다.

그런데도 눈을 뗄 수 없다. 온통 그 여자만 눈에 가득 찼다.

검은 투피스 정장에 야무지게 틀어 올린 헤어스타일, 검은 뿔테 안경, 검은 구두. 한 손에 들고 있는 서류 가방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으로 ‘나 비서예요.’라고 외치는 여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도준과 눈을 부딪힌 여자는 생글생글 웃었다.

“한 사장님, 담배는 몸에 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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