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79화 (79/104)

79. 오늘 밤, 나 집에 들여보내지 마.

2017.06.05.

“사장님한테 그런 게 절대 아니에요! 문 팀장님이 잘못 들은 거예요!”

통하지 않을 궁색한 변명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도준에게는 더더욱.

“그럼 내 귀가 이상한 겁니까? 내 귀엔 분명, 쓰레기란 단어가 들렸는데.”

막 해맑아지려던 두 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뿔사, 제대로 걸렸다. 그나마 머리 회전이 빠른 김 대리가 궁색한 변명을 이었다.

“사, 사실은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요. 문제아 씨가…….”

“문 팀장. 호칭 똑바로 쓰세요.”

“아, 네. 문…… 팀장님이 사장님을 유혹해서 특별 승진한 거라고. 그래서 그런 단어가 나온 거예요. 능력이 아닌 다른 걸로 상사한테 점수를 따는 건, 쓰레기들이나 하는 짓이잖아요. 무, 물론 사장님께서 그런 것에 넘어갈 리도 없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잖아요. 그렇죠?”

그녀 딴에는 나름 머리를 쓴 거였다. 사장이 제아와의 관계를 당당히 공개할 리가 없다는 절대적인 전제하에. 금수저가, 흙수저와 진짜 연애를 할 리는 없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제대로 한 번 외면당해봐라. 간사한 심보였다.

김 대리의 득의양양한 시선이 제아에게 꽂혔다.

“능력이 아닌 다른 걸로 유혹했다는 게 육체를 말하는 겁니까?”

직설적인 도준의 말에 김 대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예? 아, 그게…… 뭐, 비슷한.”

비스듬히 어깨를 튼 도준이 제 뒤에 있던 제아를 바라보았다. 철저하게 상품을 평가하는 듯한 냉혹한 시선으로.

“문 팀장이 몸매가 좋긴 하군요. 춤 실력도 뭐, 좋을지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는 듯, 도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나직한 중얼거림.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 내리는 도준의 눈빛에 제아는 솜털까지 바짝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어찌 보면 도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가 바로 제아 자신일 것이다.

그런데도 도준은 항상 예측 불허였다. 이번엔 저 비상한 머리에서 어떤 말을 생각해낼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소문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도준의 어깨 너머, 김 대리가 그것 보라는 듯 제아를 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 유혹이란 거, 내가 먼저 했습니다.”

시선은 한 명에게 머물러 있지만, 차분한 바리톤의 음성은 식당 내 모든 이들에게 들으라는 듯 또렷하고 확고했다. 웅성웅성, 식당 안이 급격히 술렁였다.

“내가, 문 팀장 좋다고 쫓아다녔습니다.”

마, 맙소사. 이건 어떻게 수습하려고! 제아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꽉 쥔 주먹 안 손바닥이 땀으로 촉촉이 젖어들었다. 오빠 제발 그만, 여기까지!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나와 문 팀장, 정식으로 교제 중입니다.”

정작 일을 크게 벌인 도준은 요지부동, 폭탄의 크기를 부풀려갔다. 김 대리에게서 떨어진 시선이 식당 안을 두루두루 훑었다.

“기사에 대해서 묵인한 건, 내 식구들에게 가장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제일 어패럴 직원들, 여러분에게 말입니다.”

여기저기서 숨길 수 없는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말단 직원들은 개 무시하는 일개 사장들과는 달랐다. 제 직원들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간부란 간부는 다 때려잡는 ‘한 독종’이라는 별명의 사장이 말이다.

“내 식구들에게 정확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문 팀장의 고속 승진은 철저하게 능력만으로 이 자리까지 온 겁니다. 그리고 문 팀장이 최연소 승진의 첫 번째 케이스일 뿐입니다.”

물 흐르듯이, 관심이 옮겨갔다. 사장의 연애 찌라시에서 회사가 지향하는 인재 방향으로 말이다.

“앞으로 제일 어패럴은 오로지 능력으로만 평가될 겁니다. 인재 채용도 철저하게 학벌 스펙 불문하고 열정과 능력 위주로 뽑을 것입니다. 능력을 입증하면 고속 승진을 할 것이고, 능력이 없으면 회사를 나가야 할 겁니다.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건, 나와 임원진이 아니라 직접 발로 뛰고 실질적인 업무를 하는 바로 여러분들이니까요. 능력만 있다면,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질 겁니다.”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준이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이루어진 공채의 자격 요건이 바뀐 건 사실이었다.

항상 4년제 대졸을 요구하던 학벌이 학력 무관으로 바뀐 것이다. 제일 어패럴은 변화의 물결을 급격하게 타는 중이었다.

“좋은 소식 하나 더 전해드리죠. 제일 아울렛 몰 사이트가 며칠 만에 매출 목표치 300%를 달리고 있습니다. 500% 넘길 시, 전 직원에게 성과금이 100% 지급될 겁니다. 그러니 문 팀장이 이끄는 특별 전략팀, 전 직원이 응원해주세요.”

식사를 하던 공간이, 도준의 능수능란한 언변에 의해 강당으로 변해버린 듯했다.

성과금이라는 말 한마디에 제아를 향해 날아오던 날카로운 화살촉이 무뎌져 버렸다.

의구심, 질투, 시기심 등등은 사라지고 없었다. 오로지 현실적인 결과물이 될 성과금 앞에 제아를 향한 시선이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현대판 신데렐라가 탄생할 수 있도록.”

도준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나와 문 팀장의 연애, 지지하고 응원해주길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가 막힌 언변, 어느 누구도 손가락질을 못 하고 욕 할 수도 없었다.

험담을 늘어놓았던 김 대리와 오 대리마저도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제아마저도 제3의 관객이 되어 도준의 언변에 홀려버렸다.

옆에 있던 지로마저도 입을 쩍, 벌려 버렸다. ‘이 남자, 사고치는 스케일도 남다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

강훈은 제 집무실 안에서 실시간으로 박 실장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한도준이 사내 식당에서 파격 선언을 했다, 이건가?”

단 두 번의 자극 끝에 드디어 잡아냈다. 도준이 이복동생이었던 문제아와의 사내 연애를 인정한 것이다. 그 말인즉슨, 제 약점이라는 걸 스스로 인정한 꼴.

언론 매체에서 아침에 쏟아진 기사들이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강훈이었다.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강렬한 걸 원했는데. 미적지근한 내용들이었다. 딱히 이슈가 될 만한 표현도 없었다.

물론 강훈은 절대 몰랐다. 박기태 기자가 도준을 만난 그날 바로 늦은 밤에도 불구하고 UBC 국장과 은밀하게 통화를 했다는 걸.

―국장님, 제일가의 후계자가 될 진짜 황태자는 한 부회장님이나 한 이사님이 아닌 제일 어패럴 한 사장님일지도 모릅니다. 기사는 쓰되, 훗날을 위해서 적당한 선에서 내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UBC 국장의 선택은 박기태 기자의 말대로 양쪽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었다. 강훈의 요구대로 기사는 내보내되, 자극적인 내용은 모두 빼버린 것이다. 도준이 말한 ‘적당히 해요, 적당히.’를 수용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선은 원하는 결과를 끌어냈기에 강훈은 만족스러웠다. 온몸으로 퍼지는 즐거움에 양쪽 입 꼬리가 아주 바짝 치켜 올라갔다.

“한 회장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이겠군.”

강훈은 벌써부터 몸이 달았다. 핏줄도 나 몰라라 할 정도로 냉혹한 한 회장이, 엄청난 사고를 쳐버린 도준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리고 얼음 인형 같은 연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

폭탄선언을 하고 외부 일정을 소화하러 나간 도준에게서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연락이 왔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데려다줄게.]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도준이 차에서 내렸다. 오늘 하루를 정신없이 보낸 자신과 달리 지극히 태연한 도준의 모습은 흔들림이 없었다.

‘휴.’

제아는 한숨부터 먼저 나왔다. 따지고 보면 오늘은 꽤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런데도 기쁘다기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단연코 도준의 마음을 의심한 적도 없고, 믿지 않은 적도 없다. 그런데 왜 굳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폭탄 발언을 해버린 걸까.

도준이 조수석의 차 문을 열어주자 제아는 우선 얌전하게 올라탔다. 적막감이 감도는 차 내부, 오가는 대화는 사막처럼 메말랐다.

하지만 익숙한 적막감이었고, 조금의 어색함도 없었다. 도준이 버릇처럼 손을 뻗어 제아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네.”

따스한 도준의 온기가 손끝부터 서서히 스며들어 차가운 제아의 손을 데웠다.

몇 시간도 안 되었는데 그리웠던 이 온기, 제아는 온전하게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스며드는 온기를 느끼고 간간히 귀를 자극하는 나직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빠르게 달린 도준의 차가 동네 어귀에 다다랐다. 제아가 차에서 내리자 도준도 따라 내렸다.

차에서 내려 차체에 기대서자, 보닛을 돌아온 도준이 그 앞에 마주 섰다. 그런 도준을 제아는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난 가끔씩 오빠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너와 내 사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게, 그렇게 걱정이 되나?”

“걱정이 안 되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한꺼번에 감당하기엔, 너무 일이 커졌잖아.”

“저지르고 감당하는 거지.”

시선을 내리깐 도준이 나른하게 웃는다. 말하는 뉘앙스까지 지극히 여유롭다.

휴……. 속 타는 건 항상 나지. 시무룩한 제아의 얼굴을 도준이 다정하게 응시했다.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오빠를 믿어. 그런데 난 관심 받는 데 익숙하지 않아. 오히려 부담스러워. 기사로도 모자라서 SNS에 내 얼굴 뜨게 생겼다구. 그럼 이제 맘대로 얼굴 들고 다니지도 못해.”

그게 무서워서 제아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그나마 잘 하지도 않던 SNS를 모두 닫아버렸다.

“그걸 노린 거야.”

“……?”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경유착에 환멸감을 느끼고 있지. 그런데 국내 기업 2위인 제일가의 황태자인 내가 정치인이나 재벌가가 아닌 평범한 널 선택했어. 네가 국민이라면, 어떨 것 같아?”

“잠깐뿐이겠지. 설마 결혼까지는 안 하겠지 하고 의심……하겠지.”

“내가 너에게 열열이 구애를 하는 게 계속 기사화되고 SNS에 증거 사진들이 떠돌면?”

“의심하면서도…… 응원하겠지.”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도준의 눈매가 만족스럽다는 듯 가늘어졌다.

―이제 숨기기 싫어, 너와 대놓고 연애를 할 거야.

오늘의 폭탄 발언은 바로 도준이 제 의지를 공식화한 것이었다. 그것도 응원을 받으면서 연애를 하겠다는, 아주 뻔뻔한.

그런데도 감히 뭐라 할 수 없다. 사실 그녀 자신도 끼리끼리 결혼하고 부를 축적하는 재벌가와 정치인들을 욕했으니까. 그럼 그렇지, 하면서.

그러다가 가뭄에 콩 나듯, 재벌가와 평범한 집안이 만나면 은근하게 응원했다. 대리만족의 심리가 적용이 되어서 말이다.

“문제아, 넌 내 유일한 약점이야.”

도준이 뻗은 손끝이 아지랑이처럼 제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날 견제하는 적들이, 최악의 상황에 몰리면 널 건드릴 수도 있다는 뜻이지.”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눈길에는 애틋함이 느껴졌다. 너무 소중하고 간절해서 바라보는 것도 아깝다는 듯.

“그런 널, 내가 24시간 지킬 수는 없어.”

어딜 가나 집중되는 이목만 익숙해진다면……. 그들도, 그리고 그들의 손에 들어가 있는 언론도, 제아를 함부로 건드리진 못할 것이다. 그만큼 국민의 여론이란 무서운 법이니까.

“국민들의 눈과 귀가 널 보호할 거야.”

상위 5%가 95%의 힘을 가지고 좌지우지하는 게 대한민국이었다.

하지만 그 상위 5%를 흔들 수 있는 건 그 안에 속한 이들이 아니다. 고작 5%의 힘으로 끊임없이 흔들고 공격해서 무너뜨리는, 95%의 국민들이다.

“그렇게 되도록, 내가 국민들의 대리만족을 채워줄 거고.”

환상이 채워질수록, 의심은 사라지고 현대판 신데렐라에게 열광할 것이다. 영국의 사랑받는 평민 출신 왕세손비 케이트 미들턴처럼.

“그러니까 불편하겠지만 좀 참아.”

그러기 위해선 먼저 정치 자금을 대주고 정치인들에게 기업적 이득을 취하는 기업에서 환골탈태하여 국민 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 제일 어패럴이 그 첫 번째 스타트이다.

“난 얼마든지 감당할 자신 있는데.”

상체를 기울인 도준이 바로 코앞까지 얼굴을 가져와 깊숙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아 넌 어때?’

까치발을 살짝 든 제아가 도준에게 기습 입맞춤을 했다.

쪼옥―.

달콤하면서도 산뜻한 그 소리에 주위 공기가 잘게 파동했다.

“나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어.”

독하게 견뎌내 보리라, 제아는 또 다짐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근데 이건 도저히 받아들이지도, 감당하지도 못하겠어.”

어젯밤 도준이 주었던 선물을 그의 눈앞에 활짝 펼쳤다.

“내가 무슨 고3 수험생도 아니고!”

러브레터라 착각했었다. 도준에게 손 편지는 처음 받아보는지라, 얼마나 설레고 떨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종이를 펼치는 순간, 절망했다. 들었다 놨다 가볍게 흔들어도 그저 가벼운 종이 한 장일 뿐이건만, 그 안의 내용은 수십 톤에 달하는 육중한 무게감을 담고 있었다.

영어에 중국어, 마케팅 전략 및 기획에 관한 수업이 스케줄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나열되어 있었다. 이게 정말 한 장의 종이가 맞단 말인가. 충격의 도가니였다.

“이게 대체 뭐야?”

바르르 떨리는 제아의 손끝에서 도준이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제아의 눈앞에 들이댔다.

사랑받는 현대판 신데렐라가 되려면, 도준 혼자만의 노력으로 부족하다. 안주하고 제자리걸음하는 현모양처보다는 능력 있는 여자가 더 사랑받는 시대.

“널 위한 맞춤형 커리큘럼.”

“커, 뭐?”

부끄럽긴 하지만, 제아로선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지극히 태연하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덤덤하게 도준이 대답했다.

“어머니께 약속했어. 널 최고의 커리어우먼으로 만들겠노라고.”

“절대 못 해! 누구 맘대로!”

지금도 24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쁜 제아였다. 그런데 그 시간을 또 쪼개서 나보고 배우라니!?

사람에게 자고로 필요한 건 바로 휴식이었다. 휴식을 취해야 또 열심히 일하는 법인데. 그런데 이 커리큘럼은,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주말에다 공휴일, 퇴근 시간 이후까지 반납하라는 건!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제아였다. 강경한 반대 의지를 드러내 보였다. 내가 이번만큼은 절대…….?

그때 도준의 엄지 끝이 묵직하게 제아의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널 사랑하는, 내 마음대로.”

그윽한 눈빛만큼 그윽한 음성이 요망하도록 흘러나오면서 의지를 쏟아낸다.

이, 이 마성의 손가락을 입술에서 당장 떼지 못할까!

나름 반항하기 위해 고개를 비틀어보지만, 집요하게 입술이 문질러졌다. 키스할 때 입술에 비벼지듯, 탱탱한 아랫입술이 짓눌려질 만큼.

“내 여자가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혹독하게 몰아붙일 생각이야.”

사형선고를 내리는 눈앞의 남자는 너무 달콤하기만 했다.

“문제아 다시 한 번 말해봐. 아직도 못 하겠어?”

반칙, 이건 명백한 반칙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당하게 미남계를 쓰는 건 말이다.

차라리 보지 말아야지. 제아는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굳건한 의지와 달리 그녀의 이성은 이미 마비되고 입술은 제멋대로 움직여졌다.

“해. 하면 될 거 아니야!”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하지만 눈물은 나지 않고, 질끈 감은 시야만 새까맣다. 가로막힌 시야를 침투한 나직한 음성이 귓가로 냉혹하게 새어들었다.

“스타트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야근 핑계대고 지각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자, 잠깐! 제아는 눈을 번쩍 떴다. 우선, 진정하고 협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적당하게 조정을…….

“오빠, 이걸 다 소화하는 건 무리야. 사람이 어떻게…… 숨은 쉬어야지. 이렇게 쉬지 않고 일하면 과로사로 나 죽을지도 몰라. 나 죽으면……?”

도준의 엄지 대신 이번엔 검지가 제아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쉬잇. 사람은 하루 최소 6시간만 자면 건강에 지장이 없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논리지. 하루 최소 6시간 수면 시간 보장, 주말 및 공휴일은 늦잠도 잘 수 있게 시간표를 짰어. 이 정도면, 배려가 되었을 거라고 보는데.”

빼도 박도 못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해준다. 절대 죽지 않는다고. 연인이 아닌 학생에게 타이르듯이.

“제아 네 미래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난 널 최고의 위치까지 끌어올릴 생각이고. 네가 그 위치에 도달했을 때, 어느 누구도 널 무시하지 못하게 할 거야.”

제아도 인정한다. 한국은 아직 능력보단 스펙을 높이 사는 마인드가 강한 나라는 걸. 점심시간에도 직급이 더 낮은 대리에게 스펙 운운하면서 무시당했으니까.

백 번 천 번 이해한다. 하지만 이건…….

“오빠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런데 나, 지금도 충분히 만족해. 너무 과한 욕심 부리고 싶지 않아.”

“만족하지 마.”

단호한 눈빛이 날카롭게 뻗어 나와 제아를 덮쳤다.

“욕심도 꿈도 크게 가져. 내가 다 이루어줄 테니까.”

오롯이 파고드는 도준의 진심에 제아는 숨이 막혀왔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장이 팔딱였다.

“10년 동안 내가 노력해서 손에 틀어진 재력과 권력. 그것들을 쥐고 있는 동안, 난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널 위해서.”

도준이 쏟아내는 사랑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다채로웠다. ‘로맨틱’의 ‘로’도 모른다는 듯 냉정하면서도 은근한 ‘이벤트 남’이 되어 다정함을 보인다.

아이처럼 다루다가도, 군인처럼 스파르타식으로 몰아붙인다. 지독하면서도, 섬세해.

어찌되었든 이 모든 게 자신을 위한 거라는 걸 알기에 제아는 거절할 수 없다.

노력도 해보지 않고 안 된다고 하면, 그건 겁쟁이니까.

지금까지 기회를 주지 않아서 제 능력을 발휘 못 했다고 탓한 건 바로 나니까.

“그까짓 거, 쌍코피 터지도록 노력해보지 뭐.”

반지르르 윤이 나는 앙큼한 제아의 눈동자가 도준을 살그머니 올려다보았다.

“그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사르륵, 가늘고 새하얀 손가락에 도준의 넥타이가 부드럽게 휘감겨들어 끌어당겨졌다.

“오늘 밤, 나 집에 들여보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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