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현대판 신데렐라가 될, 나의 피앙세입니다.
2017.06.01.
동네까지 쳐들어와서 잠복했고, 실명이 거론되었다. 제아의 신상이 완벽하게 털리고 제일가에서 철저하게 숨기려 했던 과거사까지 파헤쳐졌다. 누군가가 뒤에서 단단히 버티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녁 밤하늘의 어둑함보다 더 낮고 짙게 가라앉은 도준의 눈빛이 배려 없이 질문을 쏟아낸 기자들에게 빠짐없이 머물렀다.
“많은 분들이 수고스럽게 잠복까지 할 정도로, 내가 유명인은 아니라고 보는데.”
플래시가 멈추었다. 좁은 골목길을 빠듯하게 채우는 광채 나는 존재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런데도 와주셨네요.”
어떤 수단의 매체에서도 모습을 공개하지 않아 얼굴에 다이아를 두른 제일가의 황태자라 불리던 도준이었다.
그런데 그런 얼굴이 싸구려처럼 느닷없이 들이닥친 카메라의 메모리 안에 담겨버렸다. 허락 없이, 무분별하고, 예의 없게.
“그것도 아주 갑자기.”
갑작스러운 질문과 카메라 세례를 받아 화가 날 법한데도 도준은 미소 지으며 흠 잡을 데 없는 젠틀함을 보였다.
“작은 성의는 보여드리는 게 예의겠죠?”
느릿한 음색의 선율에 맞추어 도준이 움직였다. 제 몸으로 완벽하게 제아를 가린 채 코트를 벗어 제아의 머리 위까지 씌어주었다.
코트에 완벽하게 감싸인 제아의 존재는 불쑥 솟아오른 검은 허수아비 같아 우스꽝스러웠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웃는 이는 없었다.
도준이 긴 팔로 다정하게 코트에 감싸인 존재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현대판 신데렐라가 될…….”
그리고 도준은 제아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나의 피앙세입니다.”
순간적인 정적이 골목길을 잠식했다. 피앙세라 일컬어진 제아도, 그걸 들은 기자들도 아무도 움직일 생각도, 어떤 말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예상했던 그 기회를 도준은 놓치지 않고 잡았다.
“나의 피앙세가 아직 세간의 관심에 익숙하지 않으니.”
도준의 차분한 손길에 제아의 몸이 천천히 뒤로 돌려졌다.
“우선 집에 먼저 들여보내야겠습니다.”
도준의 손이 아주 약하게 제아의 등을 밀었다. ‘넘어지지 말고 평소처럼 걸어가.’라는 메시지가 손끝에서 전달되었다.
안전지대인 초록색 대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 제아는 스르륵 주저앉아버렸다. 어깨에 걸치고 있던 도준의 코트가 청량한 향기를 흘리며 매끄럽게 바닥에 떨어졌다.
“제아 왔니?”
익숙한 윤영의 음성이 들리고, 곧이어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주저앉은 제아를 바라본 윤영이 황급히 대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가 다시 얼른 들어왔다.
“세상에, 저 사람들 뭐니? 카메라 들고 있는 거 보니 기자 맞지? 이준이 때문에 온 거야!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흥분하며 다시 나가려는 윤영을 제아가 잡아 세웠다.
“엄마, 나가지 마.”
엄마가 나가면, 일만 커져.
“아무 일 없을 거야.”
도준이라면 가능하다.
“저 사람들 다 돌려보내고, 오빠 저녁 먹으러 곧 올 거야.”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와서 초록색 대문을 넘을 거라는 걸.
“누가 또 저녁 준대? 아주 오기만 해봐! 당장 쫓아낼 거야!”
“엄마.”
물 먹은 제아의 눈빛이 윤영에게 닿았다.
“나 오빠 따뜻한 밥 먹는 거 보고 싶어.”
“……!”
“구박하고 눈치 줘도, 엄마가 해주는 밥은 오빠가 잘 먹어. 엄마도 오빠 밥 맛있게 먹는 거 보면 기분 좋잖아. 아니야?”
빨개진 윤영의 눈 끝이 잔뜩 날이 섰다.
“기분 좋긴 누가 기분 좋아! 어휴, 내가 정말 못 살아!”
휙 돌아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윤영의 뒷모습을 보며 제아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도준이 옳았음을. 윤영은, 절대 독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걸 말이다.
***
유일무이한 약점이 사라지자, 도준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제게 관심을 가져 준 여러분들의 소속과 이름이, 궁금하군요.”
도준의 시선이 가장 왼쪽에 있는 여기자에게 닿았다. 시선이 옮겨갈수록 차례대로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또렷하게 귀로 듣고 뇌 속에서 다시 한 번 필터링을 해보지만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언론사들뿐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차례.
“UBC 연예부 소속, 박기태 기자입니다.”
실명도 모자라 ‘이복’과 ‘불륜’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유일무이한 기자.
날을 세운 도준의 눈빛이 박기태 기자에게 머물렀다. 나부랭이들을 앞세워서 혼란을 주고 숨어 있던 진짜 기자.
……잡았다.
제아의 신상을 최초로 흘린 출처, 이들을 여기까지 이끈 세력의 중심. 그리고 한강훈 또는 한태영과 연관이 되어 있을, 몸집이 가장 거대한 UBC 방송국.
도준은 다시 한 번 아찔한 미소를 남발했다. 입 꼬리는 비틀렸지만, 눈빛만은 얼어붙은.
“젠틀한 기사, 부탁드립니다.”
표면상으론 여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한 말이었다. 하지만 도준의 시선은 한 남자에게만 꽂혀 있었다.
“제가 여러분을 배려한 만큼, 말이죠.”
온전하게 제게로 쏟아지는 도준의 직설적인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박기태 기자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충분히 기사거리를 제공했으니, 이제 사적인 볼일을 봐도 되겠습니까?”
신비주의에 둘러 싸여 있던 제일가의 황태자가 사진을 제공했다. 그리고 엄청난 기사거리도 터뜨려 주었다. 그것도 아주 젠틀하게.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조용히 물러나는 게 전부일 뿐이었다.
급하게 들이닥친 걸음과 달리 소리 없이 한 명 두 명 발걸음이 멀어졌다. 그 무리에 끼려는 박기태 기자에게 도준이 소리 없이 다가섰다.
“박기태 씨.”
나직한 그 부름에 어린 불가항력의 힘에 박기태 기자는 돌아섰다.
“이복, 불륜,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단어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죠?”
기사는 허락하되, 그딴 단어는 감히 쓰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지금은 완벽하게 무방비하게 혼자인 상태.
박기태 기자는 덜컥 두려움이 일었다. 여전히 젠틀한 눈앞의 남자 때문에.
“앞을 내다보는 눈이 밝아야, 현명한 사람인 법이죠.”
도준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호리호리한 몸과 달리 큰 키 때문일까. 감당할 수 없는 위압감이 해일처럼 도준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기자란 자고로 눈치도 빠르지만 본능적인 촉도 남달랐다. 지금 UBC 뒤에 있는 세력보다 이 남자가 더 거대해지리라.
“그러니 적당히 하세요, 적당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준은 유유히 골목길 안으로 몸을 틀었다.
조금이라도 여자의 신상을 까발리거나 해가 되는 기사를 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 그만큼 내가 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진심.
그것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박기태 기자의 숨통을 졸랐다.
***
식탁 위, 따스한 한 끼 식사가 차려졌다. 대충 차린 듯하지만 도준이 좋아하는 음식은 최소 3가지 이상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어머니.”
식사를 마친 도준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자 윤영의 괜한 불똥이 제아에게 튀었다.
“문제아 넌 밥을 먹는 거야, 마는 거야? 이게 음식 아까운 줄 모르고 밥을 남겨!”
“안 먹다가 한 번에 어떻게 많이 먹어? 양을 천천히 늘려야 위가 안 놀라거든?”
부릅뜬 눈으로 딸을 노려본 윤영의 시선이 도준에게 옮겨갔다.
“식사 끝났으면, 그만 가줄래? 불편하구나.”
식탁에서 일어난 도준은 이번에도 설거지거리들을 싱크대로 모두 옮겨놓았다. 그사이 제아는 회사 팀원에게 전화가 왔는지 잠깐 자리를 비웠다.
“넌 너대로 밖에서 제아 만날 테면 만나렴. 난 나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딸을 말릴 테니.”
다신 저녁 먹으로 오지 말라는 경고. 명백한 밀어냄, 완벽한 반대였다.
“식사 전에 밖에서 있었던 일은 문제없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여기 있는 것 자체가 문제야, 모르겠니?”
“어머니가 저를 반대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권력과 재력을 다 포기하지 않은 절 못 믿어서라고 하셨죠?”
그 이야기를 갑자기 또 왜. 윤영이 희미하게 눈살을 구겼다.
“포기 안한 그 권력과 재력으로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곧 알게 되실 겁니다.”
“…….”
“어느 누구도, 제아 건드리지 못하고 무시하지 못합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
“지켜봐주세요, 제가 어떻게 하는지.”
도준은 주방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한다면 하는 성격의 도준의 공언에 윤영은 덜컥 겁이 났다. 대체, 뭘 어떻게 하려고.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고작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몇 분 남짓.
집을 나와 도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제아는 괜히 서운하고 아쉬웠다. 닿을 듯 말 듯 스치는 서로의 손끝이 자꾸만 의식된다.
하지만 도준은 끝끝내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윤영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한 지독한 자제력이었다.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제 남자의 손을 제아가 먼저 덥석 잡았다.
“오빤 나한테 손 끝 하나 대지 마. 나는 마음껏 오빠 만질 테니까.”
그것도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깍지까지 껴서 꼭.
살짝 놀란 듯 내려다보는 도준을 향해 제아가 능청스럽게 웃어 보였다.
“난 엄마랑 그런 약속 한 적 없거든.”
일리 있는 말이었다.
“오빠한테는 없는, 나한테만 있는 이걸 뭐라고 하는 줄 알아?”
“글쎄.”
사실 도준은 제아의 대답 따위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존재가 사랑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바로 융통성이라고 하는 거야. 그런 건 좀 나한테 배우라구요, 한도준 씨. 공부 머리만 똑똑하지, 어휴.”
도준은 귀여운 잔소리를 늘어놓는 제아에게 손이 잡혀 얌전하게 걸었다. 융통성 있는 애인이 있는 걸 행운으로 생각하며.
골목길 끝에서 나뒹구는 꽃바구니가 보였다. 무참히 짓밟혀 가루처럼 바스러진 꽃을 바라보는 제아의 눈빛에 얼핏 슬픔이 어렸다. 예뻤는데, 오빠한테 받은 축하 선물인데.
그저 꽃일 뿐인데, 그 꽃의 운명이 꼭 자신처럼 느껴지는 불길함은 뭔지.
“문제아, 그런 눈빛 하지 말랬지.”
그걸 또 도준이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그의 모든 신경과 본능과 촉이 제아에게 그만큼 온전하게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냥. 오빠가 준 선물인데 제대로 빛도 못 보고 밟혀버렸잖아…… 주인 잘못 만나서.”
눈빛과 달리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는 제아에게 도준이 코트 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진짜 선물은 이거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제아가 봉투를 열어보려는 순간, 미묘한 표정의 도준이 그 손을 저지했다.
“집에 가서 확인해야지.”
드디어 도로 갓길에 세워놓은 도준의 차에 다다랐다. 아쉽긴 하지만 이제 헤어져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미련 한가득 남은 제아의 손끝이 마침내 도준의 긴 손가락을 타고 미끄러졌다. 두 개의 손이 완벽하게 떨어졌다.
“내일 너와 나에 대한 기사가 날지도 몰라. 놀라지 말라고.”
제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체에 몸을 기댄 도준이 손을 하늘 위로 살짝 들어올렸다.
“내 신체는 한동안 무용지물이야.”
희미한 웃음을 입 꼬리에 매단 도준이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니까 제아 네가 한번 해봐.”
“……?”
“키스, 말이야.”
은밀하게 귓가에 닿는 도준의 숨결과 함께 흘러든 속삭임은 아찔했다.
“나 지금 너한테 배운 대로.”
귓가에서 멀어진 유혹적인 입술이 다시 얼굴 가까이 다가와 깊숙이 치고 들어왔다.
“융통성 발휘하는 중이야.”
닿을 듯 말 듯, 유혹하듯이, 덮쳐달라는 듯. 도준은 아주 똑똑한 학생이었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우치는.
***
필터링도 없이 기사는 바로 다음 날 터졌다.
-긴급 속보. J그룹 차기 황태자의 파격 선언, 그녀는 나의 피앙세입니다.-
-J의류 브랜드 회사 사장, 뜨거운 사내 열애 중.-
-현대판 신데렐라의 탄생 VS 내연녀의 운명.-
-J그룹 황태자, 연인을 위한 과감한 낙하산 인사 조정!-
-모 그룹 차기 후계자, 같은 회사 여직원과의 추문.-
도준의 경고 때문인지 기사의 내용은 제목과 달리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엄연히 사전 경고도 없이 터진 기사였다.
권력 있는 삼자의 입김이 적용했다는 증거였다.
실명을 밝히지 않는 이니셜 기사였지만,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기에 여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당당하게 뉴스의 일면을 장식하고, 베스트 기사가 되었다.
그 덕에 제일 어패럴 홍보부가 발칵 뒤집어졌다. 사전 경고도 없이 터져버린 기사, 확인을 요하는 문의 전화가 쇄도했다.
아울렛 몰 오픈 때문에 정신이 쏙 빠져 있던 제아는 미쳐 기사를 확인하지 못한 채 출근을 했다. 제아를 보자마자 김 비서가 핸드폰을 들이밀며 달려들었다.
“언니, 지금 난리가 났어요! 기사 봤어요?”
김 비서가 내민 핸드폰 액정에 뜬 기사를 보고 나서야 어젯밤 도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일 너와 나에 대한 기사가 날지도 몰라.’
핸드폰을 받아드는 제아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모든 기사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확인한 눈빛은 의외로 덤덤했다.
“언니, 괜찮아요?”
“사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닌 게 더 많아. 그런 것까지 신경 써서 상처받고 울면, 나 사장님이랑 연애 못 해.”
사실은 사실이니 신경 쓰지 않으면 되고, 사실이 아니면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거다. 제아를 보는 김 비서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역시. 이 정도 강심장이니까 우리 사장님이랑 연애하는구나. 저 같았으면 무서워서 기절했을지도 몰라요.”
물론 제아라고 겁이 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미 터진 기사였고, 도준이 그 기사가 터질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막지 않았다는 건, 나름의 생각이 있다는 뜻. 그만큼 도준에 대한 제아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견딜 거야. 이겨낼 거야.’
아침에 눈을 뜨고 잠에 들 때마다 하는 다짐. 그 정도 각오마저 없다면, 한도준이라는 남자는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온전하게 사랑해버렸다.
물론 어젯밤 도준이 건네주었던 진짜 선물은 아주 지극히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자리에 앉아 도준에게 덤덤한 마음으로 메시지를 보낸 게 전부였다.
-오빠 인기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겁나서 인터넷이나 뉴스도 못 보겠어.-
드르륵, 바로 답장이 왔다.
-그래서, 겁이 나?-
-왜 이래? 나 문제아야. 그 정도로 겁먹을 여자 아니거든요?-
-그래서 널 사랑해.-
도준의 느닷없는 사랑 고백에 제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정말 예측 불가인 남자라니까. 전혀 생각지 못한 순간에 사랑한다고 마음을 고백하고 이벤트를 한다. 이러니까, 심장이 남아날 수가 없다. 매번 떨리고 설레고 뛰어.
-이젠 내가 더 사랑해.-
오늘도 외부 일정을 소화하느라 바쁜 도준에게 아주 깜찍한 답장을 보낸 후에야 제아는 평소보다 더 빠듯한 일과를 시작했다.
아울렛 사이트가 대박이 나고 나니,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시간은 금방 흘러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팀원들 모두 오랜만에 사내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식판을 들고 자리를 잡고 앉는 순간, 바로 뒤에서 속살거리는 음성들이 제아의 귀를 찔러들었다.
“문제아 쟤가 그 내연녀 아니야? 스펙도 없는 주제에 특별 비서에 전략팀 팀장까지 승승장구했잖아.”
“현대판 신데렐라는 무슨. 문제아 쟤도 사장한테 몸 팔고 자리 따냈으니 쟤도 그렇고 그런 여자나 마찬가지지.”
당사자인 제아보다 팀원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중에서도 지극히 단세포에 한 성질 하는 지로가 벌떡 일어나려는 걸, 제아가 겨우 말렸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인물이 바로 한지로이니까.
“식사 계속해요. 나는 괜찮으니까.”
제아는 괜찮다는 듯, 팀원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반응하면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꼴이니, 저딴 유언비어 개무시 하자.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우리 사장 완전 쓰레기다. 비서들은 죄다 건들었을 거야. 그전에 비서들 밥 먹듯이 갈아치웠잖아. 다 한 번씩 건드리고 돈 좀 주고 잘라버린 거야, 그치?”
“그래도 문제아는 좀 오래 가는데? 진짜 연애하나?”
“워크숍에서 춤추는 거 안 봤어? 몸매 좀 된다고 사장님 앞에서 춤 춰서 유혹했나 보지. 춤은 끝내주게 잘 추잖아. 침대에서도 매번 그렇게 춤 춰주나 보지. 호호!”
타악―.
식판을 식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은 제아가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마케팅의 김한나 대리, 디자인 오세화 대리,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죠? 나는 그렇고 그런 여자고, 우리 사장님은 쓰레기라고 한 거.”
돌려 말할 가치도 없기에 직설적으로 물었다.
“켕기는 게 있나 봐, 날카롭게 반응하는 거 봐.”
“사장님 믿고 저러는 거 아니야?”
여기저기서 맞장구치는 여직원들의 속살거림이 들렸다. 이미 그녀들의 얼굴에 쓰여 있었다.
사실 유무 따윈 궁금하지 않다고. 그저 희박한 확률 속에서 탄생할지도 모르는 현대판 신데렐라를 질투하고 투기하는 거라고. 지루한 일상에 싸잡아서 욕할 상대가 필요한 것뿐이라고.
제 편들이 늘어나자 두 여자들은 기세등등해졌다.
“어머, 기가 막혀서. 간당간당 인턴 유지하면서 죽은 듯이 회사 다닐 땐 언제고, 이제 팀장 달았다고 눈에 봬는 게 없나 봐요?”
그렇다고 반응할 제아가 아니었다. 오히려 보란 듯이, 씩 아주 환하게 웃어주었다.
“저보다 두 분이 더 눈에 봬는 게 없는 것 같은데요? 저야 그렇다 쳐도, 하늘 같은 사장님께 쓰레기라고 하다니.”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엄청난 말실수인지라, 두 여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가 언제 사장님한테 쓰레기라고 했어요? 쓰레기는 상사한테 몸 파는 문 누구……?”
그때였다. 뒤쪽에서 무심한 음성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대체 누가 쓰레기라는 겁니까?”
순식간에 식당 안 직원들의 이목이 어디론가 쏠렸다. 사내 식당 입구에서 막 들어서는 사장에게 말이다.
도준은 아주 정확한 걸음걸이로 제아와 험담을 한 여직원들 사이에 멈추어 섰다.
“나도 한번, 듣고 싶군요.”
찌르듯이 내려다보는 도준의 눈빛이 매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