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77화 (77/104)

77. 이복동생과의 불륜 같은 사랑, 맞습니까?

2017.05.29.

도준을 보고 넋이 나간 딸의 표정은 꽤 볼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윤영도 지금 도준의 모습이 적응이 안 되는데 제아라고 오죽할까.

―아무리 남이라도 이 정도는 지키는 게 남자의 기본 매너입니다.

때마침 딱 떨어져 버린 마늘, 하지만 마늘을 까고 빻기 담당인 윤식은 친구를 만나러 나가고 없었다.

손목이 좋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도준이 빼앗다시피 그것들을 가져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맡긴 상황이었다.

“먹기 싫으면 말든지. 이준이 혼자 먹으라고 해야겠구나.”

윤영의 말에 제아는 정신이 확 들었다.

“머, 먹어! 나 저녁 먹어! 씻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핸드백이 천장 위로 던져지면서, 제아는 휘리릭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허겁지겁 들어가는 딸의 실루엣을 윤영은 혀를 쯧쯧, 차며 내둘렀다.

저렇게 좋나.

윤영의 시선이 마늘을 열심히 빻고 있는 도준에게 향했다. 저렇게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른 채 앉아 있는 걸 보려니, 말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세 식구가 아닌, 네 식구였던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 윤영에게 이준은 어딜 가도 굶어죽지 않을 잘난 아들이었다. 그래서 연희가 아들에 대한 정이 없는 걸 알면서도 가달라고 부탁했다.

돈이 절실했고, 그래도 핏줄이니 부대끼다 보면 정이 들겠지 생각했다. 친부모가 살아 있는데 굳이 내가 끼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불현듯 10년이 지난 후에야, 궁금해졌다.

그때 차라리 보내지 않았다면, 지금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까. 여전히 우리 네식구 행복했을까.

‘내가 무슨 망측한 생각을!’

윤영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회상을 털어버렸다. 옛날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돌아와버렸으니까.

잘 익은 총각김치를 김치 냉장고에서 새로 꺼내고 냉동실에 고이 모셔두었던 갈치까지 꺼내서 무를 썰어 넣고 자글자글 조렸다. 김치를 볶았고, 마른 황태를 붉은 양념으로 맛깔스럽게 무쳤다.

다행히도 사놓은 메추리알이 있어서 장조림을 만들었다. 있는 걸로 차린 것치곤 꽤 그럴싸한 한상이 차려졌다.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제아가 주방에 들어섰다. 얼마나 급하게 나왔는지, 젖은 향이 훅 주방으로 끼쳐들었다.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게 물기도 제대로 안 닦고 나온 게 분명했다.

“제아 너 머리 물기 제대로 안 닦아?”

윤영의 나무람에 귀엽게 코를 찡긋한 제아는 물기를 닦는 대신 수건으로 머리를 돌돌 말았다.

“이제 됐지?”

한 성격하는 윤영이 또 도준을 어떻게 할지 몰라 불안한 제아는 좋아하는 샤워조차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달려 나왔다.

음식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제아는 수저를 들었다. 식사를 안 하면 윤영이 주방에서 쫓아낼 기색으로 뚫어지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제아의 걱정과 달리 도준은 지극히 편해 보였다. 잘하지도 못하는 젓가락질로 메추리알을 집으려 하자 제아의 젓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젓가락질 한 번에 작은 알을 집어 도준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그러자 도준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눈을 마주했다.

“제아 너도 먹어야지.”

“어? 어, 응.”

제아는 아무 반찬이나 집으려고 생각없이 젓가락을 뻗었다. 그런데 그게 하필 갈치조림이었나 보다. 젓가락이 닿기도 전에 그 접시가 도준 쪽으로 옮겨졌다.

“넌 갈치조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뒤적이려고 하니? 그리고 이준이 넌 얼른 먹고 너희 집 가렴! 무턱대고 쳐들어와서 저녁은 대접했다만, 다신 그러지 말아라. 하나도 안 반가우니까! 옛정을 베푸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았니?

이왕 차려준 거 맘 편하게 먹게 해주면 덧나나? 갖은 구박과 눈치에도 도준은 수저로 밥을 담뿍담뿍 떠먹어서 밥을 두 그릇이나 뚝딱 해치웠다.

설거지 거리까지 싱크대로 모두 옮긴 후에야 도준이 윤영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어머니.”

물론 윤영은 끝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오빠 마중해주고 올게.”

도준을 쫓아 대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제아는 당연하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러면서 참았던 질문들을 마구 퍼부어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오빠가 엄마랑 주방에 있는 거 보고 심장 터져버리는 줄 알았거든? 나 놀라서 기절하는 꼴 보고 싶어서 연락도 없이 쳐들어온 거야?”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제아를 도준이 비스듬히 시선을 틀어 내려다보았다.

“사준다고 해도 싫고, 말은 집에서 잘 먹는다고 하는데 얼굴은 부쩍 야위고. 내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순간 화끈 얼굴이 달아오른 제아였다. 이래서 도준에겐 거짓말을 하면 안 되나 보다. 집까지 용감무쌍하게 쳐들어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다고 우리 집까지 쳐들어와? 우리 엄마 성격 알면서? 정말 간도 부었어.”

식사 내내 구박 받는 도준을 보는 제아의 마음은 절대 편하지 않았다.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날 뻔했다.

“어머니 음식이 그립기도 해서 쳐들어온 거야. 그러니까 강아지처럼 슬프게 쳐다보지 않았으면 하는데.”

“……밥 잘 먹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밥 잘 먹을 테니까. 그러니까 다신 이러지 마.”

“이런, 큰일인데?”

부드럽게 휘어진 도준의 눈매에 미약한 웃음기가 번졌다.

“스케줄 빌 때마다 저녁 얻어먹으러 갈 생각이거든.”

“뭐어? 오빠 미쳤어?”

“미친놈 중에서도 상 미친놈이 나지.”

그런 소름 돋는 말을 하는 중에도 도준은 참 멋있어 보였다. 심장 떨리게 왜 이렇게 멋진 거야? 이젠 정말 제아 자신도 미쳐가는 느낌이었다.

“오빠 나 장난할 기분 아니거든? 심각해 죽겠다구.”

“나도 장난으로 한 말 아니야.”

“오빠 혹시 우리 엄마한테 뺨 맞고 명석한 두뇌에 스크래치라도 났어? 그런 구박을 받고도 우리 집 와서 밥을 또 먹겠다구? 오늘은 우연히 얻어걸린 거야. 다음엔 어림도 없다구. 우리 엄마 성격, 나보다 오빠가 더 잘 알잖아.”

“알아서 이러는 거야.”

“알면 하지 마, 제발. 나 오빠가 구박 받고 눈칫밥 먹고 자존심까지 버리면서 그러는 거, 보기 싫어.”

갑자기 도준이 걸음을 멈추고 제아의 앞에 마주 섰다.

“문제아,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 나랑 할 수 있어?”

“……아니.”

“나도 마찬가지야.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는 결혼, 제아 네가 행복할 리가 없잖아.”

그럼 우리 정말, 죽을 때까지 연애만 해야 하는 거야? 도준에게 묻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제아였다. 그저 고개만 자꾸 바닥으로 숙여졌다.

“고개 들어봐, 문제아.”

그래도 고개를 들지 않자, 한숨 섞인 도준의 짙은 숨결이 가까이 밀려들었다.

“결혼 허락, 내가 꼭 받아내.”

느릿하게 달싹이는 붉은 입술이 고집스러운 약속을 쏟아냈다.

“허락만 받을 수 있다면, 뺨도 기꺼이 더 내어줄 수 있어. 그까짓 자존심, 개나 줘버리라지. 수십 번 수백 번 욕먹고 구박 받아도.”

꺾어진 고개가 키스할 것처럼 비스듬히 파고들었다. 그 각도에 놀란 제아의 심장이 어느새 쿵쾅거리며 기대치를 높이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두드리려고. 어머니 아버지께서 날 사위로 받아들이실 때까지.”

도준을 향한 걱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제아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이 파들파들 떨렸다. 기가 막히게 키스를 잘하는 입술이 닿을 듯 가까이 있는데 심장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살그머니 입술을 오므린 채 다가서 보지만, 지독한 쾌감을 느끼게 해주는 입술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 미치겠네.”

나직하게 뱉어내는 도준의 신경질에 제아의 눈이 반짝 뜨였다.

“그 약속은 하지 말걸 그랬나.”

“……?”

“저녁 얻어먹는 동안, 너한테 손끝 하나 대지 않겠다고 어머니한테 약속했거든.”

“오빠 진짜 미쳤구나?”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약속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제아는 그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도준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입으로 내뱉은 말은 꼭 지켜야 하는 도준이란 걸 아니까 서운하기까지 했다. 키스 중독자로 만들어놓고 어떻게 그런 엄청난 약속을 할 수 있는 건지.

“나 속 뒤집어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내일부터 저녁 먹으러 오지 마.”

도준이 가늘게 눈을 뜨고 제아를 응시했다. 하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제아의 다음 말을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엄마한테는 그런 거 안 통해.”

“자꾸 부딪혀야 정 드는 법이야.”

“엄마가 오빠 벌레 보듯이 오빠 쳐다봤어. 구박에다 눈치에다. 그걸 본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우리 식구한테 간 쓸개 다 바쳐놓고 그런 취급당하는 오빠 보기 싫어. 허락은 내가 받아 낼 테니까?”

갑자기 도준이 나른하게 한쪽 입 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웃는다.

“너와 다르게 난, 희망이 보였는데.”

“희망은 무슨! 난 절망감만 느꼈거든?”

“어머니가 해주신 저녁.”

“……?”

“대충 있는 걸로 차린다고 하셔놓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만 다 하셨지. 가망 없었으면 대문 안으로 발도 들이지 못했을 거야.”

도준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음식들은 다 도준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갈치조림만 해도 그렇다. 헤집지 말라고 낚아채서 도준의 앞까지 끌어다주었다.

“설마, 그걸 보려고 무작정 쳐들어와서 밥 차려달라고 한 거야?”

공부 머리만 똑똑한 줄 알았더니, 굴리는 잔머리도 보통이 아니었다. 상상을 초월했다. You win. 도준에게 ‘엄지 척’을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제아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 남자의 뇌가, 어떻게 생겼는지. 마음먹으면 못하는 일이 있기는 한 건지.

“오빠 사전에 불가능이란 게 있긴 있어?”

본인이 그에게 가장 불가능이었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

사실 도준은 제아와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꿈을 꾸는 거 같았다. 문제아란 여자는 꿈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불가능이었으니까. 그래서 실물을 보고 느끼고 같이 할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

그까짓 자존심쯤이야, 그까짓 눈칫밥쯤이야, 그까짓 욕쯤이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어. 제아 널 위해서라면.

“제아야, 내가 아는 어머니는 의외로 정이 많으셔.”

아주 또렷하게 기억한다. 말로는 감당 못하겠다고 두렵다고 밤마다 윤식에게 탄식하던 윤영이 얼마나 그에게 살뜰하게 잘해주었는지 말이다.

엄마의 사랑이 뭔지 제대로 알게 해주신 분이었다. 그런 분이 독할 리가 없다. 그렇게 도준은 굳게 믿었고, 그 믿음은 배신당하지 않았다.

“물론 돈도 좋아하시지만.”

돈이나 선물을 드릴 때마다 행복해하던 윤영도.

“가장 중요한 건, 남자 보는 눈썰미가 좋으시다는 거지.”

빠르게 떨리는 제아의 풍성한 속눈썹이 도준의 눈을 자극했다. 작게 새근거리며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제아에게서 흘러나오는 젖은 체향이 코를 자극했다. 바짝 곤두서서 반응하는 오감, 신경, 본능.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곧 알아보실 거야.”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에 가까운 갈증을 느끼며.

“하나뿐인 딸의 남자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걸.”

그와 동시에 처음으로 약속이란 걸 어겨버리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지독한 본능의 갈증을 그보다 더 지독하게 억누르며 제아에게로 가려는 손을 거두었다.

“나랑 키스하고 싶어도, 말이야.”

그러니까 한도준, 참아보자.

***

제일 아울렛 몰 오픈일이 드디어 다가왔다. 제아를 포함한 그녀의 팀원들은 모두 새벽부터 출근해서 사이트를 재정비하고 확인했다. 정각 9시, 드디어 사이트가 오픈되었다.

단연 가장 긴장되고 떨리는 이는 바로 제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일 몰의 모든 것이 제아 자신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게다가 매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제 스스로 사표를 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발, 제발!”

정확히 1시간이 흘렀다.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관리자 사이트를 들어가서 매출을 확인하는 순간,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0을 잘 못 센 건 아니겠지?’

그동안의 노력이 무색하지 않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믿어지지 않는 매출의 자릿수가 그걸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오픈일도 맞추었고, 매출도 이대로라면 기존 목표치의 300% 이상 달성이었다.

팀원들끼리 서로 얼싸안고 뛰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 GK몰 정 대리에게도 연락이 왔다.

[문 팀장님, GK몰 판매율도 대박입니다. 론칭한 브랜드가 고객들에게 제대로 먹혔어요. 우리 앞으로도 잘 해보아요.]

제아는 이 기쁜 소식을 얼른 도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도준은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한 이후 더욱 바빠진 스케줄로 인해 회사마저 들리지 못할 때가 빈번했다.

오늘마저도 도준은 회사에 코빼기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그래도 오픈일은 잊지 않았는지, 메시지를 보냈다.

-고생했어, 문제아.-

단답형의 짧은 메시지였지만 서운함은 조금도 없었다. 항상 응원해주고 버티게 해주는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유일하게 제 편이 되어줄 사람이 도준이다. 비록 곁에 있지는 못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가장 기뻐하고 있을 거라는 걸 믿는다.

퇴근 시간까지 매출은 고공행진이 계속되었다.

며칠째 바쁜 도준을 대신해 지로가 계속 집까지 데려다주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지로의 차에 올라탄 제아는 말없이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지로가 묻는다.

“선배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냐?”

“무슨! 나 아무 말도 안 했거든?”

“말만 안하면 다냐? 눈이랑 얼굴에선 아주 나 오빠 보고 싶어 죽겠어요, 하고 뚝뚝 메시지를 흘리는구만. 아까도 사무실 나올 때 보니까 집무실 문 뚫어버릴 듯 쳐다봤잖아.”

“내가, 그랬어?”

“시치미까지 떼시게?”

“일주일 넘게 못 봤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아이고,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나.”

“이제 곧 봄이잖아. 옆구리 시릴 일은 그래도 없으니 서러워하지 마.”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거지?”

“어. 위로라고 하는 거야.”

진지한 표정의 제아와 기가 막힌 표정의 지로. 결국 둘 다 실없이 웃어버렸다.

지로의 차가 동네에 다다랐다. 말려도 짚 앞까지 데려다주던 지로가 오늘은 운전석에서 작별을 고했다.

“뭐야, 오늘은 안 데려다줘? 나 애인 있다고 이제 매너 상실하는 거야?”

“나 약속 있다. 하루 안 데려다준다고 무슨 일 나는 것도 아니잖아, 치한 거시기도 걷어찰 계집애가. 내리기나 해.”

그 순간까지도 지로는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썸 타는 여자라도 생긴 건가? 그러면 좋을 텐데.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라며 제아는 차에서 내렸다.

오늘따라 한적한 동네 입구에 차가 많이 세워져 있다고 무심코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부터 가로등의 전등이 나가버려 골목길은 어둑했다.

‘가로등 좀 정비 해주면 안 되나?’

투덜거리며 골목길로 접어드는 순간, 길쭉한 인영이 덮치듯이 튀어나왔다. 본능적으로 무릎이 올라갔지만 막혔다. 핸드백을 휘두르다가 뒤로 벌러덩 넘어져버렸다. 벗겨진 힐 한 짝이 나뒹굴었다.

그 힐을 얼른 손으로 집어 들고 일어나는 순간…….

“야, 이 변태 새……?”

어둑하던 골목길이 환해졌다. 가로등의 불이 들어온 것이다. 곧이어 향긋한 내음과 함께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제아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시야를 적응했다. 큼지막한 드라이플라워 꽃바구니였다.

마른 꽃인데도 향수를 뿌려놓았는지 뿜어내는 향기가 농밀했다. 아직은 시린 공기를 머금은 2월의 저녁인데도 말이다.

“그 힐 좀 내려놓으면 좋겠는데.”

서서히 내려가는 꽃바구니 너머, 얕은 칼바람에 휘날리는 부드러운 머리칼이 드러났다.

우수에 잠긴 듯 가라앉은 나른한 눈동자, 높고 곧게 흘러내리는 콧날과 색기 어린 섬세한 입술선. 도준이었다.

“프로젝트 성공 축하해, 문제아.”

제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꽃바구니를 받아들었다.

“타이밍 죽인다. 난 줄 어떻게 알고?”

그 순간 제아는 무언가가 머리에서 번뜩 했다. 차를 운전하는 내내, 그리고 마지막까지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던 지로가 떠오른 것이다.

“한지로구나? 오빠 스파이. 오빠 진짜 대단해. 어떻게 적이었던 한지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감탄해 마지않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제아에게 도준이 손을 내밀었다.

“저녁 먹으러 가자.”

꽤 무거운 꽃바구니는 다시 도준의 손에 들렸다. 사이좋게 손깍지를 낀 채 몇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골목길 뒤에서 무언가가 번쩍번쩍 터졌다. 카메라 플래시였다.

돌아서는 순간,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와 빠르게 달려드는 굽 소리가 좁은 골목길을 어지럽혔다.

기자인지 파파라치인지 모를 사람들이 좁은 틈을 채우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도준은 본능적으로 코트 깃을 들어 제아의 머리까지 감쌌다. 그 바람에 손에 들려 있던 꽃바구니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름답던 꽃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스라진 채 보기 흉하게 나뒹굴었다. 그럼에도 야속한 이들은 그 꽃 위로 구두를 움직이며 무자비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제일 어패럴 한도준 사장님 맞죠? 옆에 여자분은 단순히 교제하는 연인입니까? 약혼녀입니까?”

“연인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입니까? 꽃바구니는 프러포즈용이구요?”

몇 초 사이에 질문의 강도가 더해졌다.

“같은 회사 여직원과 내연관계를 맺고 있는 게 사실입니까?”

“한 도준 사장님, 권력을 남용하여 회사 내 연인을 부당하게 밀어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 말씀해주세요!”

하지만 그다음 질문. 그 질문이 여기 있는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무심하던 도준의 눈빛이 섬뜩하게 돌변했다.

“문제아 씨가 이복동생이 맞습니까? 이복동생과의 불륜 같은 사랑, 맞습니까?”

좁은 골목길을 메운 공기가 얼어붙었는데도, 플래시는 배려 없이 계속해서 터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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