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의사 이름은 ‘한도준’, 입술 시술명은 ‘사탕 필러’
2017.05.25.
서로의 입안에서 넘나들던 복숭아 사탕이 점점 형체를 잃어갔다. 새끼손톱만큼 작아지자 과격하게 몰아붙이던 도준의 키스가 감질맛 나게 섬세해졌다. 물어뜯고 짓이기며 비벼대는 지독한 감각이 옅어지자 안달이 났다.
조금만 더 진하게. 조금만 더 강하게.
제아의 조바심을 느꼈나 보다. 멀어진 도준의 젖은 입술이 목덜미를 공격했다. 시야가 흐릿해질 정도로 동공이 풀렸다.
목덜미에 이어 손가락이 차례대로 순서 있게 도준의 뜨거운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른손이 끝나자 왼손이 이어졌다.
혀끝에 남아 있는 작은 사탕이 손끝의 피부에서 느껴진다. 그 사탕이 형체 없이 사라지는 걸 손끝의 감각으로 지켜봤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키스가 끝이 났다.
키스하기 전 도준이 엄포를 놓았던 것처럼 천천히, 마음껏, 음미 당하고 먹혀버렸다.
책상에서 내려오려는 제아의 행동을 막으며 도준이 물었다.
“말해봐. 다음 스케줄이 어떻게 되는지.”
“GK몰 MD랑, 미팅하기로 했어.”
업무를 입에 담자 나른하게 풀어졌던 현실 감각이 또렷해졌다.
“시간 여유가 얼마나 있지?”
벽시계로 향한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체감한 시간은 몇 분밖에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30분이 흘러 있었다. 갑작스러운 사탕 심부름에 사탕 키스까지, 엉뚱하게 시간을 허비해버렸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제아는 얼른 책상에서 내려달라는 듯 바짝 붙어 있는 도준을 손으로 밀어냈다.
“맙소사, 나 3시까지 가야 하는데!”
“내가 데려다주면, 그래도 바로 나가야 되나?”
오빠가 데려다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약간의 여유가 더 생긴다.
“10분, 정도?”
“20분만 나한테 더 할애해봐.”
“……?”
“정확히 오후 2시 50분 안에 GK몰 본사 앞에 내려줄 테니.”
도준의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포장지에서 막 탈출한 새 복숭아 사탕이 다시 제아의 입술 안으로 은밀하게 밀려들어왔다.
***
도준이 인내심 강하고 끈기가 넘쳐흐르는 남자라는 걸 오늘 제아는 다시 한 번 절실하게 깨달았다. 한 개도 아닌 두 개를, 그것도 새끼손톱보다 작아진 사탕을 그렇게 집요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녹여 없애버릴 줄은 몰랐다.
책상 위에 앉아 나누었던 사탕 키스를 떠올리니 괜히 또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아는 헛기침을 몇 번 흘린 후, 열변을 토하는 GK몰 정 대리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GK몰과의 미팅은 생각보다 길어져서 벌써 2시간이 넘어서고 있었다.
“3개월. 제일 아울렛 자사 사이트 외 판매몰 독점권, 우리 쪽으로 주는 게 어때요?”
한 달을 예상했는데 GK몰은 3개월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아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오픈에 앞서 대대적인 마케팅에 들어가긴 했다.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GK몰에서 첫 판매를 동시 진행하려는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회원을 보유한 온라인 종합 패션몰이니 부족할 수 있는 매출도 채워주고, 한국에 첫 입점하는 브랜드에 대한 홍보 효과도 톡톡히 보고. 어떻게든, 목표치를 달성해서 사표를 내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GK몰 상단 가장 큰 메인 광고 자리에 3개월 내내 24시간 동안 띄어줄게요. 이 정도면 파격적이지 않아요?”
해외 직구족이 늘어난 만큼, GK몰은 제자리에서 머무르고 있는 매출을 확 끌어올릴 만한 새로운 브랜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해외 직구가 힘든 고가 또는 희소성 있는 브랜드. 마침 제일 어패럴에서 GK몰 구미에 맞는 브랜드를 우르르 새롭게 론칭한다. 어떻게든 이 거래를 성사해야 했다.
“수수료는 5% 더 다운! 어때요? 이래도 고민할 거예요?”
득실을 따지느라 제아가 침묵하자, 정 대리가 몸이 달아 수수료까지 파격적으로 제안을 했다. GK몰 미팅에 몇 번 따라갔을 때마다 항상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던 정 대리가 이렇게 굽실거리다니. 참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미팅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럽게 끝이 났다.
평소답지 않게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해주며 정 대리가 조심히 물었다.
“제일 어패럴 사장님이 그렇게 멋지다면서요?”
소문이, 여기까지 났나?
“사진 보니까 완전 끝내주던데. 실물은 더 끝내준다면서요?”
“네? 사진이라니요?”
“이쪽 일 오래하다 보면 거래처 사람들끼리 웬만하면 서로 잘 알아요. 제일 어패럴에 있는 지인들 만났다가 우연히 사진 봤거든요. 어후, 노처녀 가슴에 불나는 줄 알았어요, 호호! 회사 다닐 맛 제대로 나겠어요, 문 팀장님은. 우리 회사는 다 아저씨들밖에 없는데.”
‘회사 다닐 맛 나게 하는 그 남자가 제 남자랍니다.’
제아는 속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근데 나 하나 더 물어볼 거 있는데. 문 팀장, 그거 어디서 맞았어요?”
“네?”
“필러 말이에요.”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죽을 정도로 아파도 주사 무서워서 병원 안 가는 내가 웬 필러?
“저 필러 같은 거 안 맞는데요.”
“에이, 그러지 말고 공유 좀 해줘요.”
“……?”
“입술 필러 맞았잖아요. GK몰 몇 번 왔을 때랑 입술이 확연히 다른데. 너무 자연스럽게 탱탱하다. 병원이랑 의사 이름 좀 나한테 알려주면 안 돼요? 같은 여자끼리 좋은 정보는 공유를 해야 더 친해지고 돈독해지죠.”
이걸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도 그럴 것이 사탕을 두 개나 해치웠다. 그러니 입술이 손만 대도 터질 것처럼 탱탱하게 부어오를 만도 했다.
그런데 그걸 또 필러로 완벽하게 착각하고 넌지시 물어보는 정 대리에게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 할지, 상당히 곤란한 질문이었다.
병원명은 제일 어패럴 집무실, 의사 이름은 한도준, 시술명은 사탕 필러라고 말해줄 순 없으니.
제아는 그저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매출이 좋으면, 그때 병원명과 의사명, 시술명까지 알려주겠노라고 말하며.
***
GK몰 앞 도로가에 차를 세운 지로는 제아를 기다렸다.
30분 정도 기다렸을까. 건물에서 제아가 나왔다. 탐스러운 긴 머리를 휘날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동안 꽤 많은 남자들이 제아를 뒤돌아보았다.
사실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눈에 띄는 미모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본능적으로 생각이 나서 돌아보게 되고 향긋한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강렬한 첫인상보다 더 무서운 이끌림. 그게 바로 제아라는 여자였다.
여자를 돌같이 여기던 베프인 은하늘마저 제아에게 흔들려버렸다. 하마터면 돌덩이보다 단단한 우정이 아작 날 뻔했다. 여자 한 명 때문에.
하지만 과거사를 따지면 뭐하겠는가. 결론은 이제 제아는 다른 남자의 여자이며, 넘사벽 남친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지로는 차의 유리창을 내리고 제아를 불렀다.
“문 팀장!”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제아는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근데 저 토끼를 깨물면, 흑표범이 내 목덜미를 물어뜯겠지. 조수석에 오르는 제아의 눈 가득 반가움이 어렸다.
“한지로가 웬일?”
“내 업무가 너잖냐. 데리러 오는 건 당연한 거지.”
지로가 힐끗, 제아를 보았다.
“그나저나 문제아 너, 좋아 보인다?”
“내가? 한 달 가까이 잠도 잘 못자고 잘 먹지도 못했는데?”
“살이야 안쓰러울 정도로 빠졌지.”
“……그런데?”
“표정이 좋아 보인다고. 그전에는 회사 이야기만 나오면 겨우 버티는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는데 지금은 뭐랄까. 얼굴에 열정이 넘쳐난다고 해야 하나. 여튼 좋아 보인다는 뜻이야. 멋있어 보이고.”
지로의 말에 제아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보여? 그럼 다행이구. 사실 전에는 일하는 즐거움을 몰랐었어. 근데 이젠 그걸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내가 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고 그 결과를 인정받고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
도준이 나타나기 전까지, 제아에게 회사는 곧 지옥이었다. 빠져나오고 싶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나올 수 있는데도 기어이 버텨야만 하는, 이상한 지옥. 직원이 아닌 알바생 같았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녀처럼 부림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도준이 나타남으로써 천천히 바뀌었다. 그러곤 결국 이 자리까지 왔다. 기회는 도준이 모두 주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지켜내고 지켜야 하는 건 철저하게 제아 자신의 몫이었다.
“부모님은, 선배랑 네 관계 알고? 좋아하셔?”
지로가 느닷없이 묻자, 제아는 순간 당황했지만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지연처럼 지로도 소중한 친구이니까.
“아시는데 엄청 반대하셔, 특히 우리 엄마가.”
시무룩한 목소리와 어두운 표정에 지로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미안하다. 내가 괜한 걸 물었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대잖아, 그치? 그동안 넌 우리집 출입 금지다.”
“나는 또 왜?”
“울 엄마 안 그래도 너 이뻐하는데, 너 집에 오면 더 난리 날걸? 어떻게든 너랑 붙이고 오빠 떼어내려고.”
“……알았다.”
“고마워.”
“고마운 줄 알면 하나만 약속해라.”
“……?”
“선배가 힘들게 하면, 나한테 꼭 말해준다고.”
“이 말 믿으려나? 오빠 때문에 힘든 것도, 행복하다고 하면.”
씩씩하게 웃은 제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웬만해선 짖지 않는 벼룩이가 마구 짖어대는 소리에 윤영은 밖으로 나왔다.
“이놈의 자식, 왜 또 짖는 거니?”
그런데 초록색 철창 사이로 어른거리는 길쭉한 음영.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반듯한 자세로 서 있는 도준이 보였다.
“이준이 네가, 왜.”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저녁 얻어먹으려고 왔습니다.”
윤영은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너 방금 뭐라고. 저녁? 내가 차려주는? 그것도 우리 집에서?”
10년 동안 아들로 키웠던 아이가 이렇게 안하무인이었었나, 윤영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단 한 번도 기대에서 어긋난 적도 없는, 제 말이라면 껌뻑 죽는 그런 아들이었다.
친딸보다 더 아껴주었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정말 변하긴 변했나 보다. 제 눈을 똑바로 보며 할 말 다 하는 도준을 보니 말이다.
“이게 밀어붙인다는 네 방식인가 보구나. 그런데 이를 어쩌니. 그 방식, 나한테는 하나도 안 먹히겠구나.”
매몰차게 대문을 닫으려는 순간…….
“제아 오늘도 굶기실 겁니까?”
틈을 좁히던 대문이 다시 열리고 살짝 붉어진 얼굴의 윤영이 나왔다.
“굶기긴 누가 굶겨? 그것이 고집 피우면서 밥 차려줘도 안 먹는 거야!”
“제아 한 달째 잠도 잘 못자고 식사도 잘 못 했습니다. 그래서 살도 많이 빠졌고 몸 상태도 좋지 않습니다. 아시죠?”
누가 들으면 도준이 제 딸을 데리고 살고 있다고 착각을 할 정도 잘 알고 있었다. 만나지 않아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연락은 꼬박꼬박하면서 죽는 시늉은 다 했나 보다.
“그렇게 잘 알면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네가 제아를 좀 놔주지 그러니? 너만 아니면 제아가 그렇게 단식 투쟁하고 마음고생 할 일 없다!”
“저 때문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헤어지지는 못해요. 그래서 죄송합니다. 그 대신, 제가 더 책임지고 잘하겠습니다.”
집 앞까지 쳐들어와서 사람 염장 지르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권력과 재력 다 갖췄다고 이제 내가 만만해 보이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윤영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곤두섰다.
“소금이라도 끼얹기 전에 당장 네 집 앞에서 사라져라.”
“어머니, 제아가 회사에서도 식사를 제대로 못 합니다. 그 정도로 예민해져 있는 상태예요. 제가 아무리 좋은 걸 먹이고 싶어도 속에서 받지 않고, 또 저녁은 기어코 집에서 먹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이대로라면 제아 또 쓰러집니다. 그래서 걱정이 돼요.”
윤영에게 이해하고 존경한다고 말을 한 제아는 아직까지도 식사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해 못한 마음과 이해한다는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니, 속에서 화가 쌓인 것이다.
제 맘대로 되지 않으면 바로 몸에서 탈이 나는, 아주 지랄 맞은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딸이니까.
이놈의 계집애, 저녁 먹는다고 집에 들어와서 밥은 왜 안 먹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그런 딸 때문에 속상해 죽을 거 같은 윤영이었다.
“반대하시는 어머니 마음 돌려달라는 게 아닙니다.”
“…….”
“제가 스케줄이 없는 날은 이 집에서 저녁을 먹게 허락해주세요. 제가 식사를 하면 제아도 저와 같이 식사를 할 겁니다. 처음은 억지겠지만 그게 반복이 되면 어머니가 절 조금은 이해하고 받아들여준 거라 생각해서 마음도 곧 편안해질 거예요.”
“…….”
“내키지 않으시면 제아에겐 제가 무턱대고 쳐들어와서 옛 정 때문에 못 쳐내는 거라고 하세요.”
“난 이제 너에게 옛 정 따위 조금도 없다!”
“그럼 연기라도 해주세요. 제아를 위해서라도.”
“내가 바본 줄 아니? 그러면서 허락 받아내려고 하는 거 모를 줄 알아?”
갑자기 도준이 윤영을 빤히 응시했다.
“그럼 허락, 해주실 겁니까?”
그게, 그 말인가? 제대로 트집이 잡힌 기분이었다. 똑똑하기는 무지 똑똑한 아들이었다. 윤영의 얼굴이 제대로 일그러졌다.
“그럴 일 절대 없어, 그러니 꿈도 꾸지 말고 돌아가!”
“저녁 식사 허락해주시는 동안만큼은, 제아와 사적으로 단 둘이 만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안 되겠습니까?”
언성이 다시 높아지자, 이웃집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라 들어가려는 윤영의 뒤로 도준이 솔깃할 만한 제안을 했다.
“……널 누가 보면 안 되니 우선 들어와라. 대문 안까지만이야.”
윤영이 홱 돌아서서 들어갔다. 제게 활짝 열린 초록색 대문을 보며 도준은 생각했다.
초록색 대문의 경계가, 무너졌다.
1단계 계획 성공.
이제 좀 더 높아진 2단계 관문은 바로 현관문이었다.
***
주방에서 윤영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충 있는 음식 재료로 요리를 하면서도 내가 뭐 하는 짓인가, 생각이 들었다.
―제아 지금 중요한 시기입니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이번 시기만 잘 넘기면 제일 어패럴이 아니라도 큰 회사에서 스카우트가 될 정도로 능력을 갖춘 커리어우먼이 될 거예요. 제가 꼭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일리 있는 그 말에 현관문의 경계가 무너졌다.
―제아한테 손 끝 하나 대지 마라. 그것까지 약속해.
―어머니가 절 인정해주실 때까지, 제아에게 손 끝 하나 대지 않겠습니다.
일말의 고민도 없는 도준의 대답에 홀린 듯이 윤영은 넘어가버렸다. 단 몇 분 만에 거실과 주방, 화장실 등등, 집안의 모든 경계를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도준은 지금 원래 제 집인 듯, 편하고 태연하게 융화되어 있었다.
윤영은 뒤늦게 후회해보지만 다시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 제아가 쓰러질까 봐 대책 강구를 해야 할 판이었으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어느 회사에서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제아의 어두운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영은 믿었다. 철저하게 약속을 지키는 도준이 버텨주는 한, 제 딸이 아무리 작정하고 달려들어도 최악의 상황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이란 걸.
그놈의 자식이 뭔지. 후생에선 자식 따위 절대 낳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윤영이었다.
주방 너머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도준이 들어왔나 보다.
그런데 도준의 손에 선물 꾸러미가 한 가득이었다. 쇼핑백에 새겨진 백화점 로고로 보아 미리 사온 선물이었다.
“이게 다, 뭐니?”
“돈으로 드리기는 뭐해서 간소한 선물 몇 개 준비했어요.”
“선물 같은 거 다 필요 없으니 그건 도로 가지고 가거라.”
“어머니가 그러셨죠? 전 이제 아들도 아니고 사위도 못 된다고. 철저한 남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저녁을 차려주시는 거라면, 제가 착각할지도 모릅니다. 어머니가 조금은 제게 마음을 열었다고 말입니다.”
“…….”
“절대 손해 보는 짓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게 어머니세요. 어머니 말씀대로 전 제 손에 권력과 재력을 다 틀어쥐고 있는 놈입니다. 그런 놈한테 이 정도 실속은 챙기셔도 됩니다.”
“…….”
“어머니 손맛이 그리워서 무턱대고 찾아와서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있습니다. 오랜만에 먹는 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고생했는데, 어머니가 싸주신 반찬으로 잘 먹었어요. 그 보답이라고 생각해주셔 되구요.”
말을 해도 어찌나 그렇게 잘하는지. 예의바르게 서서 저를 향해 잔잔하게 웃는 도준의 미소는 마약 수준이었다. 재경 오빠를 쏙 빼다 박은, 여자들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정갈한 미소. 이러니 제아가 정신을 못 차리지.
윤영은 결국 받아든 선물 꾸러미를 주방 한쪽에 놓아두며 힐끔 시선을 거실 쪽으로 던졌다. 뭘 하려는지 화장실로 들어가는 도준의 손에 들린 전구가 보였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화장실 등이 깜빡거린다는 걸.
요동치는 심장을 다시 독하게 다잡은 윤영은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다녀왔습니다.”
30여 분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녀왔다고 인사는 하지만, 얼굴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제 방으로 직행하는 딸을 윤영이 잡았다.
“저녁 먹어야지.”
“배 안 고파. 안 먹을래.”
“먹어야지, 회사에서도 밥 잘 못 먹는다면서?”
제아의 걸음이 멈추었다. 눈이 마주치자 윤영이 주방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을 따라 주방으로 옮겨간 제아의 눈이 쏟아질 듯 휘둥그레졌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도준 오빠?”
틀림없는 도준이었다. 그것도 앞치마를 두르고 식탁에 앉아 작은 절구통에 마늘을 찧고 있는.
“이제 퇴근한 거야?”
입 꼬리는 웃고 있는데 생마늘의 매운 기운이 올라왔는지 섬세한 눈매 끝에 아른아른 눈물이 매달려 있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