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널 집에 들여보내야 할까, 말아야 할까.
2017.05.18.
제일 아울렛 사이트 오픈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제 겨우 남은 시간은 2주일. 처음으로 맡은 대형 프로젝트이니만큼, 제아에게는 각별했다. 폐인이 될 정도로 밤을 지새우며 심혈을 기울였다.
도준에게 보란 듯이 목표치를 달성한 성과 보고서를 올리고 말리라. 능력이 없었던 게 아니라 기회가 없어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이른 아침 제일 어패럴 인사과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권고사직이라니요? 제가 왜요?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이런 느낌일까. 제아는 당혹스러웠다.
[전 인사과 김 부장이 뒷돈 받고 회사에 넣어준 직원 명단에 문 팀장 이름이 있어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증명할 방법은 또 있고?]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제아도 바보는 아니었다. 연이은 권고사직을 회사 내부에서 실시하는 게 도준이 강훈 쪽 사람을 쳐내려 함이라는 걸. 그런데 정작 자신이 본의 아니게 강훈의 추천으로 이 회사에 입사를 한 것이다.
[문 팀장 하나 살리자고 1차 권고사직 대상부터 다시 뒤엎어서 없는 일로 할 순 없어요. 억울한 거 알지만, 사장님 승인도 떨어졌으니 받아들이세요.]
아주 잠깐, 눈앞이 새하얘졌다. 이런 일이 사장의 승인 없이 이루어질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도준에 대한 원망은 조금도 없다. 그저 미안하기만 할 뿐이다.
그가 열심히 노력한 10년 동안, 바보같이 세월을 흘려버려 결국은 남의 도움을 받아 회사에 입사했으니.
제아는 흐트러진 호흡을 골랐다.
“……알겠습니다. 인수인계는 누구한테 하면 될까요?”
[온라인기획팀 박 세호 대리가 팀장으로 승진했으니 박 팀장에게 메일로 하세요.]
지금까지 그녀가 밤새우며 노력했던 모든 게 허무함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
제일 어패럴의 IT보안을 담당하고 있는 데이콤의 보안망이 일시적으로 뚫렸다. 중국 해커로부터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지만 돈을 요구하는 협박 따위는 없었다.
특별 전략팀을 비롯한 마케팅 팀과 신규 사업 팀 이외 다른 부서 몇 곳의 PC가 초기화가 되었다. 무작위로 부서를 선정했다고 하기엔 제일 아울렛 몰 관련 부서들만 공격을 당했기에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분위기다.
쉬쉬하면서도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이들은 강훈 쪽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제일 어패럴 특별 전략팀과 신규 사업 팀, 그리고 도준의 화상 회의가 시작되었다. 한국이 오후 2시 정도 되었으니 미국은 아마도 새벽이리라. 하지만 PC 화면 안의 슈트를 입은 도준은 새벽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온라인 몰 오픈이 미루어지면 아울렛 오픈도 같이 미루어집니다. 대대적으로 마케팅이 이루어진 이상 오픈 일정은 고객과의 첫 번째 약속이자 신용입니다. 일정 변경 불가합니다.]
도준의 싸늘한 한마디에 회의실 안 직원들의 표정이 긴장감에 바싹 얼어붙었다.
“하필 급하게 전략팀 팀장이 바뀐 시기에 공격을 받아서 박 팀장이 관련 자료를 별도로 보관하지 못했습니다. 확인 결과 문제아 씨도 이미 자료를 삭제했다고 합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에는 자료의 양도 방대하고, 사이트 시스템도 모두 꼬여버려서 상당한 시간이…….”
붉어진 얼굴로 보고를 하는 신 사업팀 홍 부장의 말이 도준에 의해 잘렸다.
[보안이 뚫린 부분은 업체 쪽에 책임을 물 겁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실수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전략팀 박 팀장은 책임지고 사표 제출하세요.]
당사자인 박 팀장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오픈 일정 및 목표치 200% 달성까지 모두 완벽하게 되어야 할 겁니다. 하나라도 차질이 생길시 전략팀은 해체, 신규 사업과 마케팅 팀 책임자는 사표 각오하세요.]
“예에? 사장님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
홍 부장은 제일 어패럴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강훈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 위기를 기회로 여기던 그마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 부서가 해야 할 일까지 사장이 직접 꾸린 전략팀이 채가서 불만이 가득이었다. 이번 기회에 특별 전략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해체시킨 후, 신 사업 팀에서 차분하게 다시 시작하려고 했는데. 다 모가지라니?
홍 부장이 곤란하든 말든, 도준은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온라인 몰의 성공적인 선 오픈이 곧, 제일 아울렛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오픈 날짜 및 목표치 꼭 성사시키세요.]
화상 미팅은 일방적으로 끝이 났다. 화면이 모두 꺼진 후, 회의실은 적막이 감돌았다.
“아니, 우리 사장님은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는 거야? 오픈하라고 한다고 그게 마음대로 되냐 그 말이지!”
홍 부장의 성난 눈빛이 박 팀장에게 향했다. 저 녀석이 파일만 다른 저장매체에 보관이라도 해놨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는데.
여기서 쫓겨나면 강훈이 더는 뒤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 하니 더 막막한 홍 부장이었다. 아, 이를 어쩐다!
“이게 다 박 팀장 자네 탓이네!”
꽤 젊은 박 팀장의 차분한 눈빛이 홍 부장에게 향했다.
“제가 보관하지 못한 파일이 더 중요한 자료일 뿐이지 마케팅과 신사업도 파일을 별도 보관 안한 건 저와 같습니다. 제가 입 다물고 혼자 뒤집어쓴 걸 감사하게 생각하셔야죠.”
“그래도 자네 책임이 제일 크네! 나가더라도 강구책을 내놓고 나가야 할 거 아닌가!”
“문 팀장을 다시 불러들이세요. 이 상황에서 기존 파일이 없는 이상, 일주일 안에 오픈은 절대 불가합니다. 처음부터 기획하고 관리한 문 팀장이 있으면 모를까.”
틀린 말은 아닌지라 홍 부장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걸 캐치한 박 팀장이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사장님 말씀 잊었습니까?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잘되면 문 팀장 복직도 문제 삼지 않을 테고, 잘 못되면 문 팀장이 저처럼 책임지고 다시 회살 나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 정도면, 해결책 드린 것 같으니 전 이제 제 짐이나 싸러 가야겠습니다.”
전략팀과 마케팅 팀이 빠져 나간 후 신 사업 팀만 남았다. 눈치를 보던 윤 대리가 슬그머니 홍 부장에게 물었다.
“부장님, 어찌할까요?”
사장이 직접 불러들인 만큼, 머리가 꽤 좋단 말이야. 박 팀장의 말을 곰곰이 곱씹던 홍 부장이 씩, 웃는다.
“어찌하긴, 문제아 씨 불러들여야지.”
***
매몰찬 권고사직을 당한지 며칠 만에 제아는 제일 어패럴로부터 복직을 하라는 연락을 다시 받았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우선 회사에 들려보기로 했다. 차비를 하고 나서자 윤영이 급하게 따라 나왔다.
“문제아, 너 엄마가 그 회사 출근하지 말랬지? 권고사직까지 당했다며, 그냥 다른 데 알아 봐. 네가 뭐가 아쉽다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회사를 또 나가니?”
제아가 윤영을 향해 차분하게 돌아섰다.
“엄마, 나 꼭 복직해야 해. 아쉬운 건 회사가 아니라 바로 나야.”
“알아보지도 않고 그런 소리 해?”
“제일 어패럴 들어가기 전에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잊었어?”
윤영이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만한 연봉 찾기도 힘들고, 또 그만두더라도 원래 맡았던 프로젝트 꼭 성공시켜야 해. 그래야 다른 회사 이직도 쉬워. 스펙은 없지만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구.”
이 말은 진심이었다. 스펙은 되지 않아도 온라인 몰 오픈만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획기적인 경력 사항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엄마, 내가 돈 많이 벌어야 우리 빚 갚지.”
“제아야, 우리 이제 빚 없어. 몇 번을.”
“나 오빠한테 빌렸던 돈도 다 갚으려고 했었어. 오빠 엄마한테 빌린 돈은, 더 꼭 갚아야 해.”
말은 지인에게 빌렸다고 하지만 그 많은 돈을 빌릴 지인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10년 전도 그랬고 10년 후도 그렇고. 이젠 그런 어설픈 변명 따위 믿지 않는다.
“엄마가 왜 그랬는지 이해해. 자존심 버리고 항상 우리 식구 지킨 건 엄마잖아. 대단하다고 생각해. 근데 엄마, 왜 오빠 돈은 안 되면서 오빠 엄마 돈은 되는 거야?”
윤영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제아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회사 가는 건 오빠랑은 상관없어. 철저하게 내 공적인 일이야. 그러니까 회사까지 오빠랑 묶어서 생각하지 말아 줘.”
눈앞의 제아는 항상 불같이 화를 내던 철부지 같은 딸이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 대문을 나서는 제아를 윤영은 잡지 못했다.
저 성격에 연희의 돈을 받은 걸 알면 모녀 사이를 끊는다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해한다고 했다.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언제 저렇게 커버린 걸까.
차오른 눈물로 인해 시야가 흐려지는 윤영이었다.
***
인사과 부장과 면담을 마쳤다.
‘그냥 복직하라는 건 아닙니다. 오픈 일정 및 목표율을 달서하지 못하면 그 땐 문 팀장 손으로 직접 사표를 제출해야 할 겁니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 문 팀장 복직에 대해서 회사 내에서 말이 없어요.’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다. 다시 한 번 독하게 마음을 추스른 후에야 제아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5층에 도착하자 감회가 새로웠다. 다시는 이 로비 바닥을 걸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전략팀에 도착하자 그녀가 썼던 자리에서 박 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복직에 대한 감정은 꽤 복잡했지만 그래도 결론은 기쁘다는 거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중국 해킹에 날아가 버린 파일 때문에 모든 책임을 지고 그만두는 박 팀장에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 팀이었을 때 편은 들어준 적 없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면 항상 조용히 업무를 알려준 게 박 세호 대리였다. 보이지 않게 도와주던 사수라고 해야 할까.
아무도 없는 사무실, 박 팀장이 제아에게 USB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인수인계 파일입니다.”
의아했다. 인수인계할 파일이 없어서 그만두는 거 아닌가? 그래서 제아는 조심히 물었다.
“인수인계 할 파일이, 있으세요?”
“문 팀장도 파일 삭제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네. 죄송……?”
“문 팀장이 내게 보내준 파일 모두, 이 USB 안에 다 있습니다.”
“삭제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이 중요한 걸 제가 삭제할 리가 있습니까? 문 팀장님이 권고사직 당하기 전날, 한 사장님이 직접 전화하셔서 제게 지시한 사항입니다. 프로젝트, 꼭 성공하셔서 이 자리 지켜내길 바랍니다.”
“설마, 저 때문에…….”
말문을 잊지 못하는 제아를 보며 박 팀장은 조용히 웃었다. 인호와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바로 내일 중국 해커가 보안망을 뚫고 몇 개 부서 PC를 아예 밀어버릴 겁니다. 그 전에 인수인계 파일을 따로 보관하고 있다 문 팀장이 복직하면 건네주세요. 사장님께서 박 세호씨가 책임지고 나간 대가는 서운하지 않게 지불할 겁니다.’
통화를 끝내는 순간, 예상을 넘어선 금액이 통장에 바로 입금이 되었다. 개인 사업을 해도 충분히 남을 만한 금액이. 그래서 그는 제아를 보며 생각했다. 참 복 많은 여자구나, 그런 남자의 사랑을 받다니.
“문 팀장, MD는 절대 손해 보는 딜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제 말 기억해요?”
“……네.”
“문 팀장 입사한 날부터 지금까지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았으니, 빚졌다는 생각은 마세요.”
입사한 날부터? 그럼 박 팀장도? 제아는 멍해졌지만 박 팀장은 홀가분한 걸음걸이로 짐을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보상을 받았다지만, 책임을 지고 잘렸다는 건 MD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텐데. 미안함이 밀려왔지만 이미 악녀가 되기로 결심한 제아였다.
도준이 악역을 자처해서 다시 기회를 만들어주었으니 그 기회를 현실화 하는 건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심호흡을 크게 내쉰 제아는 박 팀장이 준 USB를 컴퓨터에 연결해서 확인했다.
자신이 기획했던 파일 이외에도 도준이 분석해놓은 타사 마케팅 전략, 고객층 분석 자료와 빅 데이터까지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새삼 느껴졌다. 그녀의 남자가 얼마나 지독하고 완벽한 남자인지.
제아의 입술 사이로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한도준 정말, 지독하다.”
텅 빈 사무실, 제아는 혼자 남아 자정이 다 되도록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컴퓨터만 들여다봤다. 이번에 일어난 일은 모두 중국의 해킹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불순한 일로 권고사직을 당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거라는 책임감도 컸다. 정식 업무는 내일부터이지만 부서원들을 위해 오늘 어느 정도 정리를 해놓을 심산이었다.
벽시계가 자정을 알리자, PC를 끄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속이 또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식사도 제대로 챙겨 먹질 못했다. 그런데 빈속에 평소 마시지도 않던 커피를 들이켰더니 위에서 또 탈이 난 것 같았다. 제아는 몸을 틀어 화장실로 내달렸다.
“웁, 우욱!”
변기를 잡고 비어 있는 속을 더 비워버렸다.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고 손을 씻었다. 거울 속 파리한 안색을 한 여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말이 아니네.”
그러다 문득…….
“오빠 보고 싶다.”
그녀 자신도 모르게 흘러 나왔다. 도준을 향한 그리움.
그녀가 목에 걸고 있던 반지를 꺼내 만지작거리며 힘없이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갑자기 손목이 끌어당겨졌다. 온기를 머금은 커다란 손에 의해 뺨이 감싸이고 얼굴이 들렸다.
“문제아, 너.”
나른하게 가라앉은 짙은 동공과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널을 뛰었다. 제 남자를 알아본 설렘, 두근거림이 심장에 차올랐다. 나직하게 속삭이는 음성은 화가 난 듯하면서도 걱정이 가득했다.
“얼굴이 이게 뭐야.”
청량한 체취가 콧속으로 스며들자 느껴지는 현실감. 무심하면서도 다정한 이 음색이, 이 체취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왈칵 터져 나온 제아는 무작정 도준의 목에 매달렸다. 그런 제아를 숨 막히게 꽉 끌어안은 후 도준은 놓아주었다.
“돌아오기 전에 연락 좀 먼저 해주면 덧나? 정말 매번 놀라게 해.”
애교 섞인 핀잔이었지만, 도준의 신경은 딴 데 쏠려 있었다. 화장실 입구 쪽 벽에 기대어 제아를 기다리는 동안 들려온 소리가 자꾸만 신경에 거슬린 것이다.
푹 꺼진 눈 밑과 애처롭게 늘어진 긴 속눈썹, 통통했던 볼 살까지 빠져서 턱 선이 갸름했다. 그런데도 제아는 애처로운 눈동자에 애정을 듬뿍 담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물어야겠어.”
진지한 눈빛으로 찌르듯이 시선을 파고들며 도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다 들었어. 대체 어디가 안 좋은 거야?”
성격상 걱정 끼치는 건 딱 질색이다. 하지만 이미 밖에서 들었으니, 어영부영 둘러댄다고 속을 도준도 아니었다. 어차피 거짓말에 익숙하지도 않고, 제아는 솔직하게 이실직고하기로 했다.
“몇 주 동안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못 잤어. 근데 권고사직 당했어. 그리고 또 며칠 만에 복직 연락 받고. 그래서 내 심신 상태가 버티지 못하고 좀 망가졌어. 근데 오늘 빈속에 안 마시던 커피까지 좀 독하게 마셨더니 속이 뒤집어졌……? 아얏!”
갑자기 도준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튕기는 바람에 제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나 없다고, 누가 몸 관리 소홀히 하래.”
이런 모습이 얼마나 날 속상하게 하는지 모르는 건가. 어렸을 적 유난히 몸이 약했던 제아였기에 조금만 몸이 안 좋아 보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도준이었다.
“내 성격이 이런 걸 어떻게 해. 속이 편하지 않으니 밥도 안 넘어가고 잠도 안 오는데. 나라고 뭐 그러고 싶어서 그랬나? 게다가 보고 싶은 오빠는 한 달 가까이 보지도 못 하지, 힐링 할 게 없잖아.”
“문제아 너 정말. 그 성격 좀 고쳐.”
제아는 순간 기가 막혔다.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뭐라고 한다더니. 지금 누가 누구한테 성격 고치라는 건지.
그런데도 얄밉기는커녕 좋아 죽겠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으니까.
제아는 다시 도준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저 좋아 배시시 웃었다.
“맘 편하게 일을 못해, 제아 너 때문에, 내가.”
“아, 몰라. 오빠 얼굴 봤으니까 이제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잘 거야. 됐지? 그러니까 인상 좀 펴. 우리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거거든요?”
“그래서 바로 달려왔잖아.”
“……어디에서?”
“공항에서.”
“바보 아냐? 시차 적응해야 하니 집에 가서 좀 쉬어야지, 여길 왜 달려와? 내가 회사에 없으면 어쩌려고? 어차피 내일 볼 건데.”
“내일 보는 건 내일 보는 거고, 오늘 보는 건 오늘 보는 거고.”
기가 막힌 듯 자신을 응시하는 제아의 가냘픈 얼굴선을 도준의 손끝이 가볍게 어루만지며 흘러내렸다.
“보고 싶으면 난 언제든지 널 볼 거야.”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도준의 팔이 제아의 어깨를 감쌌다.
“가자.”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제아가 묻는다.
“설마 집까지 데려다 주려고?”
“아니.”
“그럼?”
“너 밥부터 먹이려고.”
“이 시간에? 나 배 안 고파.”
“먹어야 해.”
“오빠, 나 진짜.”
“너 밥 먹는 동안, 나는 네 컨디션 파악하면서 천천히 생각해야지.”
“뭐를?”
“한 달 동안 참았잖아.”
순간 얼어붙어버린 발걸음. 그런 제아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스윽, 끌어당기는 도준이었다.
“오늘 네가 날 감당할 수 있을까, 없을까.”
제아를 향해 내리깐 눈매 끝 묻어나는 웃음기에 어린 묘한 색기, 눈빛보다 끈적이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널 집에 들여보내야 할까, 말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