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73화 (73/104)

73. 얼굴을 보니 만지고 싶고, 품고 싶다.

2017.05.15.

도준이 제아의 손을 잡고 무작정 뛰어간 곳은 동네 공원이었다.

공원 입구에 있는 벤치에 숨이 턱까지 차오른 제아를 앉히자 추위에 노출되어 빨개진 맨발이 보였다. 추운지 제아는 자꾸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말없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준은 제아의 발을 들어 따스한 입김을 불어주었다.

그런 도준을 내려다보는 제아는 기분이 묘했다. 오만한 이 남자를 무릎 꿇게 했다는 게. 이 남자의 정수리를 볼 수 있는 여잔 나밖에 없을 거야. 이 순간에도 바보같이 기뻤다.

“나 괜찮은데.”

부끄러운지 자꾸만 다리를 빼려 했지만, 그래도 얌전히 있어주는 제아가 도준은 사랑스러웠다.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발밑에 깐 후 꼭 감싸주었다.

“고작 도망친 곳이 여기야?”

제아의 음성에선 웃음기가 묻어났다.

“내가 호텔이라도 데려가길 원했나?”

나직한 도준의 음성에도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건 아니지만 적어도 난 차를 타고 멀리 갈 줄 알았지. 공원은 우리 집이랑 고작 10분 거리잖아. 엄마가 마음만 먹었으면 쫓아왔을 거리와 장소. 오빠답지 않아서.”

물론 그렇게까지 윤영이 쫓아오지 않을 걸 제아도, 도준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럴 생각은 없던 도준이었다.

하지만 제아를 본 순간, 뜨거운 본능이 차가운 이성을 넘어섰다. 참고 참았던 그리움이 폭발해버린 것이다. 이럴까 봐 도시락만 주고 오려고 했던 건데.

“나름 소심한 반항이라고 해두지.”

웃자고 한 말 같지만, 제아는 도준의 그 말이 꽤 씁쓸하게 느껴졌다. 도준이 이번에는 등을 내보였다.

“업혀.”

어디 가냐고 물으려던 걸 포기한 제아는 말없이 등에 업혔다. 어딜 가든 도준과 함께라면, 상관없으니까.

도준이 향한 곳은 공원 구석 쪽에 위치한 좁은 비탈길이었다.

……아지트로 가려는 거구나.

꽤 경사진 비탈길을 도준은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구두를 신은 발로 차분하게 올라갔다.

제아는 도준의 등에 가만히 뺨을 기대었다. 슈트 재킷을 통해 스며드는 온기와 강인한 심장 소리가 제아의 심장까지 세차게 울리게 했다.

“오빠는 왜, 유독 엄마한테 약해?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렇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빤 나보다 엄마한테 더 지극정성이었던 것 같아. 엄마 말이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잖아.”

“어머니가 어떤 심정으로 날 키웠는지 아니까.”

초록색 대문을 넘어선 그날 밤 안방에서 흘러나온 그 음성, 도준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여보, 나 저 아이 엄마 노릇을 잘할지 모르겠어요.

―나 자신 없어. 우리 저 아이 포기하면 안 돼요?

절망 어린, 두려워하는 윤영의 음성을.

하지만 다음 날 윤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따스하게 웃어주었고 제 아들처럼 대해주었다. 그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계속해서 쭉.

그는 어린 나이에 두려웠다, 다시 버림받을까 봐. 그래서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조금도 그녀의 바람에서 어긋나지 않는 잘난 아들이 되기 위해서.

성장해서는 윤영의 심정이 이해가 되어 미안했다. 그래서 더더욱 피나는 노력을 했다. 죽을 때까지 그 은혜는 갚지 못할 거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10년 전도, 그래서 떠난 거였어? 가기 싫었는데, 우리 엄마가 돈 때문에 엄마한테 부탁해서?”

비탈길을 오르던 도준의 걸음이 멈추었다. 하지만 잠시뿐, 이내 다시 차분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덤덤히 답을 해주었다.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어. 그게 앞당겨지고, 계약서와 돈이 오가는 게 되었을 뿐이지.”

도준의 말이 꽤 충격적이었지만, 제아는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수긍까지 했다.

아마 자신이라도 그랬을 것 같다. 떠나야만, 오빠와 내가 이 마음으로 서로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어느새 오두막집에 다다랐다. 도준이 먼저 들어가 촛불을 밝히자 변함없는 오두막 내부가 드러났다.

일렁이는 촛불에 도준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제아는 가볍게 까치발을 들어 목에 팔을 둘러 끌어당겼다. 살짝 벌어진 젖은 입술 사이로 과감하게 파고들었다.

처음이었다. 스스로 도준의 입 안을 파고든 건. 엉키는 혀만큼, 호흡이 거칠어졌다. 키스가 깊어지고 점점 더 등이 휘어졌다. 밀려드는 도준의 손길을 감당 못 할 정도였다.

더 가면 이 오두막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미 불이 붙은 도준은 멈추는 방법을 잊었다.

제아는 집요하게 쫓아오는 도준의 입술을 피하며 들었던 발꿈치를 내렸다. 지독하게 가라앉은 도준의 동공과 부딪혔다. 그 속에 도사린 욕망을 과감하게 마주하며 제아가 속삭였다.

“난 오빠한테 줄 게 이것밖에 없어. 내 몸. 그리고 내 영혼.”

향기로운 몸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어 유혹하는 제아의 영혼에 심장이 발작하듯이 반응을 했다. 혈관의 피들이 빠르게 감돌았다. 타액으로 반질거리는 젖은 입술을 도준의 엄지가 꾹 눌러 쓸었다.

“제아 넌 몰라.”

호텔에서 제아가 돌아간 그날 이후, 도준은 늦은 밤 혹은 새벽이라도 어김없이 이 동네를 들렀다는 걸.

맞은편의 집 2층 베란다에서 하염없이 쳐다보다 제아의 방 불이 꺼지는 걸 보고야 돌아갔다는 걸.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거든? 너무 알아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거든?”

“네 몸과 영혼, 다 받아줄 테니까.”

희미한 촛불에도 달아오른 제아의 얼굴이 보였다.

“나란 놈, 무슨 일이 있어도 감당해 봐.”

도준은 천천히 얼굴을 내려 다시 입술을 댔다.

“감당한 그 이상으로 숨도 못 쉬게 사랑해줄 테니까.”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온 고백은 지독했다.

“너 죽을지도 몰라.”

그런데도 제아는 두렵지 않았다. 죽을 지도 모른다면, 죽어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의 사랑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입술로 삼켜낸 도준의 고백이 심장에 다다라 통증처럼 박혀버렸다. 타들어간 심장에 각인처럼 새겨졌다.

도준을 올려다보며 제 여자가 생긋 웃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아니야? 그럴 거면 사랑이라도 죽도록 하고 죽을래.”

지금 도준의 눈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제아만 보일 뿐. 흐려진 시야 속, 제아만 또렷하게 보였다.

“이거 비밀인데 사실 나 오빠랑 결혼까지는 생각 안 했었거든. 근데 바뀌었어, 이젠 욕심 나.”

욕심 많이 내지 말자, 도준과 사랑만 하자고 다짐했던 제아였다. 하지만 사랑을 할수록, 욕심이 난다.

“나이 들어서 아길 낳고 아줌마가 되도, 백발 할머니 되도, 오빤 나 사랑해줄 거지?”

“제일가의 한도준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한도준이라도, 좋다면.”

“당연한 거 아니야? 난 평범한 한도준이 더 좋거든요?”

평범한 한도준. 귀엽게 코를 찡긋거린 제아의 그 한마디에 심장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200킬로 거구가 되어도, 할머니가 되어도. 어떤 모습이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내 여자.

“너, 예뻐 죽겠어.”

보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너무 예뻐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고.”

그런데 얼굴을 보니 만지고 싶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만지고 있으니 품고 싶다.

“그래서 만사 제쳐두고 달려와 버렸어.”

제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스케줄은 어떻게 하고?”

“유 실장이, 내 욕 엄청 하고 있겠지.”

“유 실장님, 연봉 더 올려줘야 되는 거 아니야?”

“그렇지 않아도 내 카드 던져주고 왔는데, 메시지가 막 울리네.”

“그래도 오빠 나빴어. 유 실장님 너무 불쌍해.”

도준의 손이 제아의 허리를 부드럽게 휘어감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나란 놈은 독하고 못됐어. 지독할 정도로, 나밖에 모르지.”

“…….”

“그런 내가 널 사랑해.”

“…….”

“너랑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한날한시에 같이 죽을 거야.”

“…….”

“그래서 난 앞만 보고 달려야 해. 누가 다치고 상처받는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

“난, 너만 지키면 되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 도준의 눈빛이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를 알아들었다.

제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앞날이 순탄치 않을 거란 게 느껴지는데도 행복했다. 바보같이.

“짧으면 삼 주, 길면 한 달 정도. 내일 새벽 비행기로 미국 출장 가.”

“무지 길게 가네.”

일주일 만에 봤는데 이제 한 달을 헤어져 있어야 하다니. 얼굴에서 묻어나는 미련을 보았는지 도준이 제아를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

“네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게.”

제아는 도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출장 잘 갔다 와.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연락 한 통 없던 강훈이 오랜만에 지로에게 연락을 해왔다. 마음 같아선 꼴도 보기 싫지만, 아직 드러내면 안 되니까.

일식 집 룸 안, 강훈이 젓가락을 움직이면서 태연하게 물었다.

“짝사랑하는 네 여자 친구는, 여전히 꼼짝도 안 하나?”

마음먹고 나왔는데도 제 성질을 숨기지 못한 지로가 툭, 쏘아붙였다.

“참 내. 남 연애에 관심 갖지 마시고 형이나 잘 하시지.”

“형이니까. 내 동생이 오랫동안 짝사랑하는 게 마음이 아파서 말이야.”

하아! 아주 가지가지 가식 떠네! 지로는 걱정스러운 듯 가식을 떠는 저 얼굴에 술을 확 끼얹어버리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한지로 릴렉스, 릴렉스 하자.

“지로 네가 짝사랑하는 그 여자, 한 사장이랑 좋지 않은 스캔들이 돌고 있던데, 너 괜찮나 해서.”

걱정하는 척, 떠보는 것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둘을 지켜볼 자신을 통해 도준과 제아 사이를 가늠하기 위한. 도준의 약점을 틀어잡기 위한.

현재 강훈의 눈과 귀는 제일 어패럴에서 거의 내쳐진 상황이었다. 그나마 몇 남지 않은 김 부장마저 지로를 추천해주는 걸 마지막으로 김포에 있는 물류 부서로 내쳐질 예정이다. 그만두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좌천이었다.

“하도 감싸고도니 그런 소문이 나도는 거야. 옛날에도 그 남매, 아주 짜증나게 유별났거든. 그 둘 사이 모르면 그런 소문 돌 만도 해.”

대충 넘기려든 지로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던 강훈이 무심히 말을 흘렸다.

“아, 둘이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이라는 건 알고 있나?”

순간 움찔한 지로였지만, 모르고 있는 척 버럭버럭 성질을 냈다.

“누가 그딴 소리를 해? 형이라고 해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면 가만 안 둬!”

“워워, 진정해. 난 허튼 소리는 안 하니까.”

“한도준 이 미친 새끼,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어, 내가! 그 새끼가 제아한테 더러운 마음만 품었어 봐! 가만 안 둘 거야, 재수 없는 새끼! Fuck you다!”

지로는 보란 듯이 강훈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말은 도준에게 욕하고 있었지만, 명백하게 강훈을 향한 손가락이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욕을 하고 나니 속이 풀리는 지로였다.

그 욕의 대상이 자신이란 것도 모른 채, 강훈이 만족스럽게 웃는다.

“그러니까 잘 지켜봐. 내가 뭘 묻게 되면 제대로 대답해 줄 수 있음 만큼.”

“……뭔 소리야.”

“재계에서는 이미지 관리가 참 중요해. 추악한 스캔들 한 번 터지면 한동안 회복이 불가능하지. 그 기회를 난 이용할 생각이고.”

“내가 미쳤어? 스캔들 터지면 우리 제아는 그럼 어쩌라고.”

“걱정 마. 네 여자 친구는 절대 신원 보장해줄 테니.”

“뭐 건수가 있어야 확인을 하지. 그냥 봤을 땐 사장이랑 비서야.”

“건수야, 만들면 되지.”

“뭐?”

“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으면 돼. 그 여자 꼭, 내가 너한테 가게 해줄 테니까.”

대신 그 여자 상태는 나도 보장 못해. 뒷말은 속으로만 생각하며 강훈은 웃었다.

“지로 네가 재수 없어하는 그 새끼, 내가 깨끗하게 끝내줄 거야.”

지로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애증의 중점에 서 있는 가련한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두 남자가 모두 자신에게 서로를 끝내주겠다고 하다니.

하지만 이 싸움의 승자는 도준이라는 걸 지로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눈앞의 강훈은 도준을 절대 이길 수 없을 테니까.

항상 한 발짝 느리게 움직인다. 시야가 좁고 듣는 귀가 작다. 그러니 당할 수밖에.

“그럼 형만 믿는다. 어렸을 때부터 한도준 그 새끼 겁나 재수 없었거든.”

“나만 믿어. 내가 후계자 되면 너한테도 톡톡히 베풀 거다. 핏줄이란 게 뭐냐.”

예전 같았으면 그 말을 믿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강훈이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느긋하게 웃는 강훈을 보며 지로는 왜 도준이 자신에게 그런 제의를 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핏줄임에도 뒤통수를 때리려고 남모르게 그 짓을 벌이면서도 또 핏줄이라고 그를 믿고 있는 것이다. 바보같이.

“기대할게, 형.”

철없이 웃어 보이며 지로는 속으로 속삭였다.

‘개새끼, 너도 뒤통수 한번 맞아봐라.’

지로와 저녁 식사를 마친 강훈은 지금까지 계속 피하던 제일 어패럴 김 부장과 통화를 했다. 단 물 빠진 껌, 버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써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사님 사람 중에 제가 들키지 않고 이 회사에서 가장 잘 버티고 있는 건 아시죠? 이 회사에 충성하고 한 이사님한테 충성했는데 제가 여기서 나가면 어딜 가겠습니까?]

겨우 통화가 되자 죽는 소리부터 늘어놓는 김 부장의 말을 강훈은 가만히 들어주었다.

1차 권고사직에서 그의 사람들 대부분이 잘려 나갔다. 김 부장이 메일로 보낸 2차 권고사직 명단을 보니 살아남은 제 사람은 겨우 두세 명.

제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실질적으로 제대로 된 충신은 찾기 힘들었다. 모두 제 배를 불리느라 바쁠 뿐.

그에 반해 도준은 유 실장만을 곁에 둘 뿐이다. 그런데도 점점 더 제 힘을 뻗어가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젠 마지막 승부수를 띄워야 할 때. 그 전에 확인을 해야 한다.

“김 부장, 다른 회사 부장직을 알아봐주지. 대기업은 아니더라도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말이야.”

[역시 한 이사님밖에 없습니다!]

“그 대신 말이야. 제일 어패럴을 나오기 전에 자네가 마지막으로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지시를 내리는 강훈의 입술에 비열한 미소가 어렸다.

***

연희는 이제 막 박중용과 저녁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날의 계획이 틀어졌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약점을 잡히는 순간, 중용과 연희가 동시에 도준을 몰아서 약혼을 시키려고 했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도준은 교묘하게 빠져 나갔다. 화연을 겁 준 것도 모자라 그 여자 딸까지 불러들여 다른 객실에 투숙했다.

‘걱정 마요. 도준이, 연애는 제 맘대로 할지 몰라도 결혼은 화연 양이랑 하게 될 테니.’

침울해 하는 화연에게 연희는 그녀답지 않게 살가운 위로를 해주었다.

그런데 거실에서 한 태영이 그녈 기다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한 부회장의 눈빛이 야비하게 연희에게 꽂혀들었다.

“당신이 대체 왜 어르신을 만나고 다니는 거지?”

설마 내게 사람이라도 붙인 걸까. 고운 눈매를 살짝 찌푸린 연희었지만, 그렇다고 주눅 들지는 않았다.

“먼저 만나자고 한 건, 내가 아니라 그분이에요. 도준이를 손녀사위로 마음에 들어 해요. 그런 집안이랑 사돈을 맺는 건 제일가에 득이 되는 건데, 나라도 나서서 밀어붙여야지 않겠어요?”

“도준이가 아니라 제일가 손자를 원하는 건 아니고? 당신, 강훈이가 우리 집 장남이란 걸 잊지 마.”

“잊을 리가요. 호적에 버젓이 올라와 있는 걸요. 다른 여자가 낳은, 더러운 남의 자식.”

조소하듯, 연희가 말을 끝맺자 태영도 지지 않았다.

“도준이도 다른 남자 씨를 받아 당신이 낳은 더러운 자식이지. 그러니 나 혼자 그랬다고 피해자인 척하는 건 그만하지 그래.”

“당신이 먼저 외도했어요! 잊었어요?”

“……당신도 잊었나 보군.”

태영이 싸늘하게 연희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결혼한 순간부터 계속, 당신 몸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한 걸 말이야.”

“……!”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가 어떻게 버티길 바라는 거지? 다른 여자라도 찾아야 하지 않겠어? 내가 손만 벌려도 안길 여자가 지금도 수두룩한데.”

“더러운 말 그만해요!”

연희는 각방을 쓰고 있는 침실로 들어와 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

뉴욕 맨해튼 트라이베카 지역 최고의 호텔 할튼, 최상층의 펜트하우스는 호화롭기보다는 소박하고 차분한 미학이 돋보이는 곳이었다. 넓은 응접실 테이블에 앉은 도준과 인호는 각자 제 PC를 열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

“지독해도 너무 지독해. 그 몇 시간도 놔주지를 않으면 난 숨을 어떻게 쉬라고.”

업무에 열중하는 도준과 달리 키보드를 두드리는 인호의 입은 연신 불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쭉쭉빵빵 금발 미녀들이 넘쳐나는 트라이베카 최고의 클럽에 갔다 오겠다는 걸 도준이 막은 후부터 말이다.

업무를 끝내고 가라고 했지만, 업무란 게 끝이 없으니 가지 말라는 소리와도 마찬가지였다. 툴툴거리며 회사에서 보낸 메일을 확인하던 인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사장, 이번 2차 권고사직 명단에 문 비서가 올라와 있어.”

“……누구 짓이지?”

“인사과 김 부장이 문 비서를 물고 늘어졌어. 본인이 뒷돈 받고 넣어준 직원들 명단에 문 비서까지 올려버렸네. 빼도 박도 못 하게 공식적으로 명단까지 공개했어. 아, 이런 빌어먹을 자식.”

도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리는 손끝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는 의미.

“우리의 문 비서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도준도 알고 있다. 제아가 얼마나 이번 오픈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지. 하지만 제아의 입사에 어찌 되었든 강훈이 연관되어 있는 건 사실이다.

스펙도 없기에 능력 있는 인재라고 편을 들 수도 없다. 자칫했다간 회사 직원들이 아니라 제 사람들까지 반감을 가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번 온라인 몰 오픈을 어떻게든 제아가 잘 마쳐야 능력을 입증하고 인정받을 수 있다. 제일 어패럴이든, 다른 회사든.

“권고사직 2차 명단 보고서 승인, 당연히 미뤄야겠지?”

테이블 위를 두드리던 도준의 손가락이 멈췄다. 생각을 끝냈다.

“그럴 필요 없어. 승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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