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저란 놈, 독하고 못된 놈입니다.
2017.05.11.
난생처음 와보는 으리으리한 호텔의 외관마저도 윤영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노크를 하면서 끊임없이 빌었다.
‘이 안에 내 딸이 없게 해주세요. 그 여자의 말이 틀리게 해주세요.’
하지만 열린 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제아였다. 넓은 객실 안에 가득 찬 얼큰한 콩나물 국 냄새, 새댁이라도 되는 듯 매고 있는 앞치마까지.
호텔에서 살림이라도 차린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요즘 부쩍 외박도 잦았는데.
윤영이 설마 하는 순간, 객실 안 룸에서 목 부분 셔츠 단추를 막 잠그며 나오는 도준이 보였다. 그걸 보자 딸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믿음이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
짜악―.
날카로운 마찰음이 번졌다. 뺨을 맞은 건 제아가 아닌 도준이었다. 빠르게 다가온 도준이 제아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제아는 잘못한 거 없습니다. 제가 같이 있어달라고 잡았습니다.”
도준의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제아의 눈이 쏟아질 듯 커다랬다.
“엄마 대체 왜 이래? 오빠한테 밥 한 끼 해주는 게 손찌검할 만큼 큰 잘못이야? 나 이제 더 이상 어린애 아니야. 엄마 허락 없이 외박해도 되는 어엿한 어른이라구.”
“어른 좋아하시네. 어른이라면서 왜 사리분별을 못 해? 집에도 안 들어오고 호텔에서 둘이 뭘 했는데! 돈 받았다고 몸이라도 준 거야? 그런 거냐구!”
“엄마아!”
제아의 얼굴이 터질 듯이 새빨개졌다.
“너 당장 나와서 집으로 가.”
윤영이 막무가내로 딸의 손을 잡아끌었지만, 제아는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잘한 것도 없지만, 잘못한 것도 없다.
“제아야, 어머니 말 들어.”
“하지만.”
“얼른.”
단호한 도준의 표정에 결국 제아는 앞치마를 풀고 씩씩대며 코트와 가방을 집어들었다.
“유 실장, 제아 집까지 데려다주도록 해.”
***
이른 아침, 레이나는 연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연희가 어떻게 제 번호를 알았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그저 좋아하는 남자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묘하게 긴장감이 들었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레이나 양에게 어머니라고 불릴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아, 마땅한 호칭이 생각나지 않아요.”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나 보죠?]
제대로 정곡을 찔리자, 레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레이나 양이 예약한 객실에 도준이와 제아 양이 있는 거 알아요.]
“……그걸 어떻게.”
[내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앞으로 레이나 양과 내가 잘 지낼 수 있을지 없을지가 중요하지. 안 그래요?]
“네.”
[내가 부탁 하나 할게요. 오전 중에 제아 양 어머니가 호텔에 갈 건데 차질 없이 그 객실까지 가도록 조치해줘요.]
레이나는 연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에 잠겼다.
[그 둘, 갈라놓아야 레이나 양이 내게 어머니라고 부를 확률이 더 높겠죠?]
하지만 연희는 정확히 레이나의 빈틈을 파고들어 찔러들었다. 절대 거절할 수 없도록, 예비 며느리라는 뉘앙스를 풀풀 풍기면서 말이다.
[조치, 해줄 거죠?]
“알겠습니다. 조만간, 제가 찾아봬도 될까요?”
[스케줄 보고 내가 한 번 또 연락하죠.]
연희와의 첫 통화였지만, 레이나는 미래 시어머니가 될 그녀가 만만치 않음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도 그 정도쯤이야.
민화연은 문제아가 털어주고, 문제아는 연희가 깨끗하게 털어주길 바란다.
10년 동안에도 만들지 못했던 친밀함. 이제 제아를 내세워 도준과 그 친밀함을 형성해 나갈 생각이다.
오늘 도움을 준 것까지, 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
윤영은 제 앞에 앉아 있는 도준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 식구,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었는데.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틀어졌다.
윤영의 직감이 맞다면, 아마도 도준이 돌아오고 난 후부터 시작이 된 것 같다.
오래전 재경이 그 여자와 연관이 되고 나서부터 불운이 닥친 것처럼.
호흡을 고른 윤영은 마음을 독하게 다잡았다.
“난 이준이 널 사위로 받아들일 생각 없다.”
침착하고 덤덤하게, 도준이 물었다.
“왜 저는 안 되는 겁니까?”
“잘난 네 엄마가, 내 딸을 며느리로 받아줄 것 같니?”
“제 어머니 의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난 중요하다. 너 때문에 내 딸이랑 내가 싸우는 게 싫은 것처럼 내 딸 때문에 너와 네 엄마가 싸우는 것도 난 싫다. 남의 부모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 내 눈에서도 피눈물 나. 그리고 내 딸 눈에서도 피눈물이 나고.”
“제아 눈에서 눈물 날 일 따위,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어머니는 피눈물 따위 흘리실 분이 아닙니다.”
“부모는 부모다! 지금까지 널 이렇게 키워주셨잖니!”
키워줬다라. 도준은 속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거두어 준 건 사실이고, 한 태영 부회장의 한씨 성을 준 것은 맞다.
하지만 도움 하나 없이 피나는 노력 끝에 제 스스로 여기까지 왔다. 연희는 그저 방관했을 뿐이었다.
“네 엄마가 우리 제아를 곱게 받아줄 것 같니?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왜냐구? 제아는 내 딸이니까.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넌, 그 여자 아들이니까.”
신랄하게 퍼붓던 윤영이 그의 이해를 바라는 듯 갑자기 간절하게 애원했다.
“이준아,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도준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한때 부모였던 눈앞의 여인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미치도록 방황했던 그 시절.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죄송합니다.”
이젠 윤영의 말을 들어줄 수 없다. 거절에 윤영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그래, 지금은 사랑이라고 치자. 그런데 좀 더 지나면 너도 변해. 네가 가진 재력과 권력이, 널 변하게 할 거다.”
눈을 내리깐 도준의 얼굴 위로 누군가가 겹쳐졌다. 윤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박재경이 좋아. 오빠랑 결혼할 거야.
―늙을 때까지 둘 다 인연 만나지 못하면, 그땐 너와 결혼해도 될 것 같아. 남매처럼 오순도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거든.
장난기 어린 말투로 부드럽게 웃던 남자의 얼굴이 시야 가득 차올랐다. 어린 시절 그녀의 유일한 태양이었던 남자 박재경. 하지만 희망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나, 연희를 사랑해.
해바라기처럼 변함없이 바라보았건만, 외면당했다. 재경만은 다른 남자와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은 부와 명예를 가진 그 여자를 선택했다. 그럴 거면, 희망을 주지 말았어야지.
회상을 끝낸 윤영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고 많은 여자 중에, 왜 하필 제아니.”
드디어 도준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윤영을 직시했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여자로 보이는 게 제아일 뿐입니다.”
“……!”
“어머니.”
“그만! 그만해라.”
“저도,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애절하고 먹먹한 눈빛이었다. 단연코 처음이었다. 한결같이 냉랭했던 그 눈에 감정이란 게 어린 걸 본 건.
가끔씩 이 아이는 감정이라는 걸 느끼기는 할까 생각까지 했었는데.
‘내가 당한 일을, 내 딸에게도 당하게 할 순 없어!’
낯선 그 눈빛에 순간 독한 마음이 무너져 내릴 뻔했지만, 윤영은 다시 독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내 딸의 행복을 위해서 널 받아들일 수 없어.”
“……어머니.”
“내가 널 어떻게 믿니? 후에 헤어지면 그 뒷감당 누가 하는지 알아? 제아야, 제아라고! 망가지는 건 여자지 남자가 아니거든. 쓰러지는 건 있는 네가 아니라 없는 부모 만난 내 딸 제아라구! 그러니 꿈도 꾸지 마라. 난 내 딸 눈에서 피눈물 나는 꼴, 못 본다.”
“오래전, 제게 독하고 못된 놈이라고 하신 적 있습니다. 기억하세요?”
어렴풋이 떠오른 기억에 윤영은 말문이 막혔다. 퍼붓고 나서 후회했던 그 말을 갑자기 왜.
“어머니가 제대로 보셨습니다. 저란 놈은 원하는 건 어떻게든 가져야 하는 독한 놈입니다. 갖지 못할 바엔 차라리 부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못된 놈이구요.”
“저기, 이준아.”
“독하고 못된 그 마음으로 제아와 절 키워주신 어머니 아버지, 꼭 지켜드릴 겁니다. 지금은 속상하게 해드릴지 모르지만, 그만큼 배로 보답하겠습니다.”
윤영은 처음으로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제 할 말을 하는 도준에게 말문이 막혀버렸다. 언제 이렇게, 거대한 산처럼 성장해버린 걸까.
연희의 말이 옳다는 걸 깨달았다. 둘을 헤어지게 하려면, 자신이 좀 더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는 걸. 가족을 위해서 말이다.
“차별 없이 널 내 아들처럼 키웠던 건 진심이야. 그래서 10년 전 네 엄마에게 받은 돈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은 거라고 생각한다. 원망하려면 원망하렴.”
윤영이 핸드백 안에서 꺼낸 봉투를 도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에 네 도움을 받은 건 갚아야 할 것 같구나. 제아가 받은 사내 대출도, 네가 뒤에서 손쓴 거지? 이 돈 받고, 우리 제아를 돈으로 옭아맬 생각하지 마렴.”
도준은 테이블 위에 놓인 봉투를 받지 않고 가만히 볼 뿐이다. 거액의 돈이 어디서 났는지, 감이 잡혔다.
“어머니만큼은 반대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 제아가, 덜 힘들 테니까요.”
“내 눈에 흙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내 마음은 변함없을 거다. 너희 둘은, 절대 안 돼.”
소파에서 일어난 도준이 윤영에게 느닷없이 큰절을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하는 윤영을 바라보는 도준의 눈빛은 차갑고 단호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
“절 받아주실 때까지, 제 방식대로 밀어붙이겠습니다.”
***
―이준이한테는 돈 다 갚았다. 그러니까 제아 너, 회사 출근할 생각도 하지 마라!
호텔에서 돌아온 윤영은 제아에게 일방적으로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사춘기 청소년도 아닌 성인인 그녀에게 말이다.
물론 어길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도준이 윤영의 말대로 하라고 한 것이다.
―너까지 그러지 마. 어머니 많이 속상해하실 테니까.
―그래도 일은 해야 돼. 사이트 오픈이 막바지인데 내가 어떻게 쉬어?
―재택 근무해. 충분히 가능하니까.
역시나 도준은 그녀보다 생각하는 게 한수 위였다. 머리 좋은 사람은 달라도 다르다니까.
그녀는 매일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부서원들과 화상 채팅을 했고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었다. 메일로 자료도 주고받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부서원들과 메신저로 미팅을 하는 중이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살그머니 문이 열리더니 윤식이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 딸, 밥 먹어야지.”
“엄마가 나랑 대화할 때까지, 나 밥 안 먹어.”
대화를 거부하는 윤영에게 보여주기 위한 나름의 반항으로 제아는 단식 투쟁에 들어간 것이다.
사실 윤영이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더 배신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윤영이 왜 그렇게까지 도준을 반대하는지.
꼬르륵―.
뱃속에서 음식을 주라는 신호를 강렬하게 보냈다.
“에잇, 의지 없는 몸뚱이 같으니라고!”
의지는 강한데 몸뚱이가 그 의지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제아는 도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나 배고파. 히잉.]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왔다.
[어린애도 아니고, 단식 투쟁은 왜 하는 건데.]
[그럼 이대로 무너져?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 그리고 이건 날 아직도 애 취급하는 거야! 내가 엄마랑 어른 대 어른으로 꼭 대화를 나누고 말겠어!]
[불효 저지르는 건 나 하나로 족해. 그러니까 넌 어머니 말 거역하지 마.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내가 꼭 해결할 거야.]
“으휴, 이놈의 효자 노릇!”
제 속도 몰라주는 도준이 야속한 제아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침대로 던져버렸다.
누가 보면 자신이 의붓딸이고 도준이 친아들인 줄 착각할 정도로 그는 윤영에게 끔찍했다.
“벌써 일주일이 넘었는데…….”
도준을 본 지 말이다. 그동안 외출은커녕 제 방과 욕실만 들락거린 제아였다. 눈만 감아도 도준의 얼굴이 아른아른, 상사병이 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과 달리 도준은 너무도 침착했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 듣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설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나를 잊고 있는 거 아니야?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으니, 온갖 상상력이 어둡게 활개를 쳤다. 밖에다 내놓기엔 너무 잘난 그를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탐내고 접근하는가! 지금도 그럴지도 몰라!
그 생각이 들자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던져버리고 도준에게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보고 싶어.-
드르륵,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기대감이 어린 반짝이는 눈으로 액정을 확인하는 순간,
-보고 싶어도 참아.-
아, 이 남자 너무 냉정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참아. 나 그냥 확, 가출해버릴까. 우리 앞집, 오빠 집으로. 히히히.-
-쓸데없는 생각 좀 하지 마.-
-……오빤 나 안 보고 싶나 봐?ㅡ_ㅡ^-
화가 났다는 표시로 이모티콘까지 귀엽게 보냈건만.
-참을 만해.-
끝까지 냉정한 도준의 메시지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나에 대한 사랑이 참을 수 있는 정도라 이거지? 흥이다!”
폭발하고 나니 만나지 못한 그간의 서운함들이 밀려들었다.
그날 이후, 항상 먼저 연락을 한 건 자신이었다. 혼자만 보고 싶어 하고 애가 타 했다. 그걸 생각하니 미친 듯이 화가 나는데, 그런데도 이대로 오빠가 날 포기하면 어쩌지? 바보 같은 두려움까지 생겼다.
“이래서 집에만 있으면 우울증이 온다는 거구나.”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마저 음침하고 어둡게 변해가고 있었다. 사랑이 점점 식어가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자신감이 폭삭 사그라들었다.
“내가 먼저 연락하나 봐! 잘 먹고 잘 살아라, 한도준!”
괜한 오기를 부리며 애꿎은 핸드폰을 침대 위에 휙 던져버렸다. 오기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시 한 번 메시지를 보낼 법한데도 핸드폰은 얄미우리만치 침묵하고 있었다.
드르륵―.
“누가 볼 줄 알고?”
제아는 턱을 치켜들며 고개를 틀어버렸다.
“안 봐, 절대 안 봐!”
“……나도 한 번 하면 한다 이거야!”
하지만 그녀의 발칙한 손은 어느새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지연이었다.
“우씨!”
그렇게 30분을 혼자 발광하던 제아는 결국 벌떡 일어나 방문 손잡이까지 잡았다.
“안 돼! 으아악! 내가 질 수 없어! 남자는 매달리는 여자 매력 없어 하잖아!”
하지만 그녀는 다시 침대에 몸을 던지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약해진 마음을 다잡았다.
나쁜 한도준! 넌 내가 보고 싶지도 않아? 이 나쁜 놈아!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살짝 열렸다.
“아빠, 나 진짜 배 안 고파.”
문이 닫히기 전 작은 봉지가 내밀어졌다. 그 안엔 우유와 빵이 있으리라.
사실 며칠 내내 단식을 할 수 있었던 건 윤식이 제공해주는 음식 때문이었다. 확 줄어든 용돈으로 저걸 사왔을 윤식을 생각하니 제아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다시 진동을 울리는 핸드폰 액정으로 무심코 시선이 갔다.
-대문 앞에 쇼핑백 놔뒀어. 어머니 몰래 가지고 들어가서 먹어.-
제아는 방금 온 메시지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문 앞, 쇼핑백. 그 의미는 곧…….
그걸 깨닫자마자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돌진했다.
이렇게 달려올 거면서 괜찮은 척하기는!
없던 운동 신경이 솟아났다. 창문을 훌쩍 뛰어넘자 시린 바닥이 발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제아가 나타나자 반가운 듯 벼룩이가 제 집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벼룩이가 물어뜯고 있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구, 효녀 벼룩이!”
현관문이 잠깐 열렸을 때 벼룩이가 물어다 놓은 삼선 슬리퍼. 기특하게도 오늘은 두 짝을 물어다 놓은 것이다. 살살살 머리를 어루만져주며 슬리퍼를 뺏어 신었다.
대문을 열자 하얀 쇼핑백 두 개가 계단 위에 놓여 있다.
하지만 제아의 목표는 쇼핑백이 아니었다. 내 남자, 한도준.
제아의 눈이 원하는 목표물을 찾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막 골목길을 벗어나려는 길쭉한 실루엣을 본 순간 이상하게 눈물부터 차올랐다. 맨발에 삼선 슬리퍼를 신은 채 내달렸다.
“한도준!”
돌아서는 도준의 품으로 비글처럼 점프해서 매달렸다.
“인간적으로 여기까지 왔으면 보고 가야 되는 거 아니야?”
품에 안긴 제아가 고개를 들고 밉지 않게 눈을 흘기자, 도준이 웃었다.
“얼굴 보면 발이 안 떨어질 것 같으니까.”
“연락은 왜 안 했는데?”
“목소리 들으면, 달려갈 것 같아서.”
“어휴, 내가 못 살아!”
그렇게나 밉고 원망스러웠는데, 얼굴을 보는 순간 그 모든 원망과 미움이 사르륵 녹아버렸다.
“그래도 그렇지, 연락은?”
그래도 짐짓 화난 표정으로 잔소리를 퍼부으려는 그때, 윤영의 날카로운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문제아!”
도준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는지 윤영이 대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휴, 미치겠네.”
마음 같아서는 도준과 줄행랑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끔찍할 정도로 효자인 도준이 그럴 리가 없었다. 결론은 도준을 본 지 1분도 되지 않았는데 헤어져야 한다는 것.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서려는 제아는 갑자기 손목이 잡혔다. 도준은 다가오는 윤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문제아, 준비해.”
“……뭐를?”
고개를 내려 제아를 응시하는 도준이 입술을 달싹이며 짧게 내뱉었다.
“뛰어.”
손목이 앞으로 확 당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