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이 단추 먼저 풀어 봐.
2017.05.08.
넓은 침대 위, 도준의 아래에 여자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제아는 침착하게 문 바로 옆에 있는 버튼을 눌러 침실 내부를 환하게 밝혔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화연이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왔다.
“너, 뭐야!?”
청순한 얼굴과 다르게 하대하는 여자는 딱 봐도 싸가지가 없었다. 여자에게서 떨어진 시선이 뒤에 서 있는 도준에게로 날아가 꽂혔다. 도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제아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노크해도 대답이 없으셔서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들어왔어요. 오늘 특별한 이벤트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뒤늦게 받아서요.”
“……이벤트?”
“오늘 각별히 더 신경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화연의 시선이 제아가 탕비실에서 급하게 챙겨온 용품들에 닿았다. 향긋한 장미 꽃잎부터 최고급 입욕제, 커플 베스 가운과 옆 스위트룸에서 급하게 가지고 나온 샴페인까지.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가늘게 떨리는 몸은 아직도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됐으니까 이딴 거 들고 당장?”
“하은아! 너 하은이 맞지?”
제아의 뒤에서 지연이 들이닥쳤다.
“지연…… 언니?”
화연의 눈은 꽤 반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하필 이런 상황에.
“그래, 나 이지연이야. 나도 지인한테 초대받아서 오늘 옆 객실에서 투숙하거든. 근데 네가 이 객실에 남자랑 들어가는 걸 본 것 같아서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마침 문이 열려 있네?”
“아, 네…….”
“조선호텔 지하에 있는 BAR가 물 죽인대. 같이 가서 놀자.”
시치미를 뚝 떼는 지연의 연기는 감탄스러울 만큼 연기대상감이었다. 화연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오늘은 곤란해요.”
“아, 혹시 남자분이랑 같이 있어서, 좀 그런가? 내가 말실수 한 거야? 곤란해 보이긴, 한다. 근데 하은이 너답지 않게 웬 하얀 원피스?”
“언니, 우리 나가서 이야기해요.”
지연의 입에서 무슨 말이 더 나올까봐 무서웠는지 화연이 황급하게 지연과 함께 침실에서 나갔다. 열린 침실 문 사이로 객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잠깐 동안, 제아와 도준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건 제아였다. 코앞까지 다가와 침대에 앉아 있는 도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더니 생긋, 웃는다.
“다행히 내 애인이 나쁜 짓은 안 한 것 같은데. 맞지?”
“제아 너 어떻게.”
도준은 이 순간 바보가 되었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은 것이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으니 사실부터 털어놔서 오해를 풀어야 할지. 네가 어떻게 여기에 온 거냐고 물어야 할지. 제아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노라고 고백해야 할지.
“어떻게 내가 왔냐구? 내 남자 지키려고 왔지.”
별걸 다 묻는다는 듯 제아가 생긋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눈을 뜬 순간 낯선 곳에 화연과 있다는 사실보다 제아가 지금 이곳에 나타났다는 게 도준에게는 더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저 도둑년이 오기 전에 여길 나가야 돼!”
도준은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도둑, 뭐?”
“내 남자 훔쳐 가려 했으니까, 도둑년 맞잖아. 아니야?”
청소용품을 바닥에 내려놓고 난 후 빈 청소 수레를 보며 제아가 도준에게 눈짓을 했다.
“얼른 타!”
“나보고, 여기 타라고?”
“오빠 수면제 같은 거 먹었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객실 들어가는 거 보니 남자들한테 실려 가던데. 자존심은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얼른 여기부터 벗어나자, 응?”
“내 발로 걸어 나갈 수 있어.”
도준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제아가 얼른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내가 부축해줄게.”
“문제아.”
“걱정돼서 그런단 말이야.”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어버리니, 도준은 더 이상 제아를 거부할 수 없었다. 아주 조금만 제아에게 체중을 실은 채 객실에서 벗어났다.
***
옆 객실로 들어오자마자 제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 일이 잘 풀리긴 했지만, 그래도 심장이 얼마나 오그라들었는지 모른다. 침대에 앉은 도준이 조심히 손을 뻗어 제아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오해 안 해?”
도준의 손에 가만히 뺨을 대며 제아가 심술궂게 되묻는다.
“오해할 건 있어?”
“……아니.”
“그런데 왜 물어봐. 나 오빠 믿는 거 알면서.”
문제아 너란 여자 정말, 예고도 없이 그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러니 너한테서 내가 헤어날 수가 있나.
“이제 말해 봐. 네가 왜 여기 있는지, 그것도 이 옷차림으로 말이야.”
좀 더 떨어진 도준의 시선이 제아의 메이드 복에 닿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제아가 멋쩍게 웃었다.
“아, 007 작전을 수행하려면 변장이 필요했거든. 이 옷 협찬은 레이나 언니야.”
“007 작전이라.”
“나 오늘 이 객실에 지연이랑 같이 세경 언니한테 초대받았거든. 근데 세경 언니가 그러는 거야. 오빠가 여기서 선 본다고. 그러면서 오빠가 있는 룸에 들어가는 음식에 누가 약 타는 걸 봤다는 거야! 그걸 듣고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어? 오빠를 구출할 007 작전을 세웠지. 내가 쳐들어가면 지연이가 그 여자 밖으로 유인해낸다고 했거든. 그러면 내가 오빨 청소 수레에 싣고 나와서 옆 객실로 데리고…… 오빠?”
도준은 그저 자신에게 열심히 007작전을 설명하는 제아가 사랑스러울 뿐이다. 뚫어지게 응시하는 도준의 시선에 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쳐다만 봐?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냐? 그 약 수면제가 아니고 이상한 약 아니야?”
서늘한 손끝이 다가와 도준의 얼굴을 조심히 감쌌다. 기분 좋게 스며드는 온기에 취해 도준은 제아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팔 안에 꼭 가두고 심장이 뛰는 부드러운 품에 얼굴을 묻었다.
사그라들지 않은 잠기운이 몸 안에서 다시 활개를 치려하고 있었다.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제 여자의 품, 달달한 복숭아 향기가 악착같이 그의 정신력을 붙들어주었다.
“오빠, 괜찮아?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걱정스러운 음성과 함께 뺨에서 타고 오른손 끝이 도준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시원하고 섬세하게 꾹꾹, 눌러주었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다행이구. 그나저나 오빠 시간 내서 지연이랑 세경 언니한테 단단히 한턱내야 해, 알지?”
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제아의 느닷없는 등장이 사실 기뻤다. 사랑받는 느낌, 아껴지는 느낌, 소중해지는 느낌. 제아만이 그에게 오롯이 느끼게 해주는 감정들이었다.
“우리 오빠 노리는 여자들이 많아서 나 어떻게 하지? 지키고 구해줘도 끝이 없네.”
부드러운 제아의 음성엔 살포시 웃음기가 묻어났다. 도준은 참새처럼 쫑알거리는 제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제아야, 죽을 것 같아.”
본능적인 몸뚱이가 제 여자를 알아보고 폭발하다시피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른한 잠기운과 뒤섞인 욕망이 끈적이게 그의 몸을 잠식해 나갔다.
“어디? 어디가 안 좋은데? 막 졸려?”
도준이 얼굴을 들어 제아를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생일 선물이었던 바니 걸에 이어 오늘은, 메이드복이었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단정한 메이드복이 제아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잘 어울렸다. 이벤트에 이벤트였다. 저 단정한 매무새를 찢어발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옷, 잘 어울리네.”
“청소복이 잘 어울려? 하긴, 뭐 내가 청소에는 일가견이 있긴 한데. 근데 어디가 안 좋은데?”
“나도 약은 이기기 힘들어.”
손목을 좀 더 끌어당기자 제아의 상체가 가까이 당겨지고 숙여졌다. 목덜미 사이로 도준의 얼굴이 파고드는 순간, 제아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얏!”
비벼지는 입술 사이로 도준이 이를 드러냈다. 연약한 피부를 깨물리자 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 겨우 몸에 남아 있던 흔적들이 사라졌다 싶었는데, 도준이 또 흔적을 남긴 것이다.
왜 이렇게 물어뜯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침대만 올라가면 짐승이 되는 건 알지만, 그것도 상황 나름이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물어뜯긴 왜 물어뜯어?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도준을 응시하자 그가 나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 웃음에 제아는 순간 착각이 들었다.
내가 엉큼한 건가? 오빠가 웃는 게 나를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지?
“네가 치료해줘야지.”
“내가? 어떻게?”
살그머니 허리를 좀 더 끌어당긴 도준이 제아의 손을 잡고 제 셔츠 쪽으로 이끌었다.
“나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알려줄 테니까.”
“……?”
“이 단추 먼저 풀어 봐.”
도준은 지금, 그를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를 유혹하는 중이었다.
***
늦은 밤 윤영의 집에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후다닥 달려 나간 윤영은 제 눈을 의심했다. 말끔한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뒤에 서 있는 체구가 자그마한 여자.
“한연희…… 씨?”
저 여자가 왜? 작은 중얼거림이 들리기라도 한 걸까. 돌아선 연희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윤영 자신과는 너무 달랐다. 탱탱한 피부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젊음을 유지하는 연희는 여전히 고왔다.
“그쪽이 나올래요? 내가 들어갈까요? 선택해요.”
거추장스러운 인사 따윈 서로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얼이 빠졌지만, 윤영은 정신을 차렸다.
“누추하긴 하지만 들어와요.”
우아하게 걸어서 연희가 거실 내부로 들어섰다. 안방에서 윤식이 휠체어를 밀고 나오던 참이었다.
“우리 제아 왔……? 여, 연희……? 네가 왜 여기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 윤식과 달리 연희는 태연자약했다.
“오랜만이에요, 윤식 오라버니.”
사뿐하게 바닥에 앉자마자 연희가 본론을 꺼냈다.
“피차 얼굴 보고 있으면 불편할 테니 할 말만 하고 갈게요. 내 아들과 그쪽 딸이 연애하고 있는 건 아나요?”
급격히 어두워진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는 윤영을 보건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알면서도 뻔뻔스럽게 방관하고 있다니. 더럽게. 차가운 연희의 눈빛이 더욱더 냉소적으로 변했다.
“그 둘, 서로 연애하면 안 되는 사이인 거 본인들이 더 잘 알지 않나요?”
“…….”
“일 더 커지기 전에 말려요. 막장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받아든 연희가 그걸 다시 윤영에게 내밀었다.
“돈 필요하면 내 도움 한 번 더 받아요. 어차피 한 번 받은 거, 두 번이 어렵겠어요?”
“이보세요, 한연희 씨. 우린 이제 당신 돈 필요!”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염치가 있으면, 고개를 조아려도 부족하지.”
연희가 싸늘하게 일갈하자 윤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돈 받고 그쪽 딸한테 헤어지라고 해요. 보니까 누구와는 다르게 자존심이 상당히 세 보이던데.”
“…….”
“당신 딸만은, 멀쩡한 가정 파탄 내는 더러운 취미는 물려받지 않았길 바라요. 내 아들, 보잘 것 없는 당신 딸만 아니면 튼튼한 배경이 되어줄 아주 좋은 집안의 여식과 약혼식 올릴 예정이니까.”
“한연희 씨, 말은 바로 해야죠! 그때 당신도 더러운 불륜이었어! 남편이 있는 여자가 재경 오빨 유혹했잖아! 더러운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윤영아, 그만해! 연희야, 얼른 가라. 제아한테는 내가 잘 말해서 헤어지게 할 거야.”
윤식이 말려보지만 두 여자의 살벌한 눈빛은 어김없이 불꽃이 튀었다. 정적으로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하던 연희가 갑자기 돌아섰다. 윤영을 빤히 바라보더니 굳게 다물고 있던 작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 사람이 돌아오면, 이혼할 생각이었어.”
“……!”
“그래서 그 더러운 동네에서 거지같이 살면서 버틴 거야. 그런데 당신이, 내 남자를 채가서 아이까지 낳았어. 그래놓곤 뻔뻔하게 그 사람 친구와 부부로 살고 있지.”
“……!”
“나보다 먼저 외도해서 아이까지 낳은 남편과 이혼하려 했던 나와, 피붙이 아기가 있는 남자임을 알면서도 채가서 살림을 차린 당신. 누가 더 더러운 거지?”
“여, 연희야! 그건.”
“당신은 아무 말 말아요.”
윤식이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윤영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둘을 비웃듯 바라보던 연희는 우아하게 그곳을 벗어났다.
***
룸 안으로 들어선 인호가 제아에게 쇼핑백과 비닐 봉투를 내밀었다. 제아가 부탁했던 몇 가지 음식 재료들과 도준의 옷가지들이었다.
“룸서비스 시켜도 되는데. 여기 음식 맛 꽤 괜찮아요.”
“오빠 아무 음식이나 안 먹어요. 어제 술과 약에 취했으니, 시원한 바지락 콩나물국에 청양고추 팍팍 썰어 넣어서 끓여줘야 해요.”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듣기는 했다. 도준이 그럴 동안 자신은 지하 바에서 여자와 술을 즐기고 있었다는 게 조금 미안해진 인호였다.
“제 잔심부름까지 해주셔서 감사해요.”
배시시 웃는 제아를 보던 인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옷에 가려져 있지만 얼핏얼핏 드러나는 목덜미와 손목 곳곳에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흔적. 멍울이기도 하고, 과격한 사랑의 영역 표시이도 한.
‘자식, 살살 좀 하지는.’
저 여린 몸으로 짐승 같은 놈을 어떻게 상대했을꼬. 제아가 갑자기 가여워 보이는 인호였다.
“한 사장은 어디 있습니까?”
“오빠 수영장에 있을 거예요. 유 실장님도 아침 안 드셨죠? 가지 말고 같이 아침 식사하고 가세요.”
최상층의 한쪽에 위치한 유리로 된 천장을 품고 있는 푸른 수영장, 오전은 VIP 룸 투숙객들을 위해 헬스장과 함께 제한적인 개방을 하는 곳이었다.
회색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서는 순간, 넓은 물줄기가 파동을 치면서 푸른 물을 뚫고 헐벗은 남자의 상체가 솟아올랐다.
탄탄한 몸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나오는 도준을 향해 인호가 타월을 던졌다.
“물 공포심 이겨낸 게 언젠데 웬 수영?”
“이겨냈을 뿐이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머리의 물기를 털며 도준이 무심히 대답했다.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일정한 패턴으로 꾹꾹, 공포심을 스스로 체험하고 이겨내는 걸.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조각 같은 도준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린 인호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도준의 몸은 어느새 가운을 걸치고 있었지만, 인호는 분명히 보았다. 매끈하게 뻗어 휘어진 그의 등골 라인에 새겨진 선명한 손톱자국을. 생채기가 맺혔던 듯한 흔적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후, 아주 난리를 쳤네.”
작게 중얼거리면서 인호는 생각했다. 어젯밤 문 비서도 만만치 않았군.
“한 여사님이 잔뜩 달았나 봐. 문 비서 집까지 쳐들어갔더라고.”
제아를 만났는데도 실패했으니, 어찌 보면 연희로서는 당연한 걸음이었다. 반대는 예상했지만, 이로써 제아의 부모님들이 좀 더 강하게 그를 거부할 것이다. 단단함의 정도가 달라질 뿐, 어차피 뚫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언론사 쪽은 어떻게 되었어?”
“지상파 쪽은 힘들고 케이블 쪽 한두 곳은 가능할 것 같아. 켕기는 게 있으니 지상파 쪽은 모두 몸을 사리더라고. 케이블 쪽 두 곳은 세무 조사 들어와도 잡힐 것 없다고 정확한 증거까지 확보된 건수만 던져주라는데?”
“그 정도면 됐어. 수고했어.”
수영장을 나서는 도준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그런데 돌아가야 할 인호가 도준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왔다. 결국 객실 앞까지 다다르자 도준이 돌아섰다.
“……보고만 올리고 쉬어도 된다고 했을 텐데.”
“쉴 테니 걱정 마.”
“그런데.”
“아침 먹고 가려고.”
“……뭐?”
“나도 콩나물 국 좋아하거든?”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기 도전에 인호가 도준을 지나서 객실 문을 열어젖혔다.
“문 비서, 아침 먹으러 왔습니다!”
인호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매콤한 콩나물국 향이 다이닝 룸 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북한 게 아니라, 입맛을 돋우는 먹음직스러운 냄새.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기자 머리를 비스듬히 틀어 올린 채 앞치마를 두른 제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제 여자가, 그를 위해 아침을 해주고 있었다.
앞치마 끈을 질끈 동여맨 가는 허리를 도준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머리칼에 코를 묻자, 향긋한 복숭아향이 묻어난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는 인호가 눈꼴 시려 툴툴거리든 말든,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침 먹고, 데이트할까?”
“데이트?”
무슨 데이트? 어디서? 여기서? 뭐 하면서? 당황한 제아의 눈이 세모꼴로 눈을 치켜뜨고 뒤에 있는 인호에게 향했다.
“오빠 일해야 되지 않아?”
“오늘은 쉴 거야. 문 비서와, 특별 일정을 소화해야 하니까.”
나른하게 웃는 그 웃음에 제아의 얼굴이 확 달아오른 순간, 뺨 위로 가볍게 도준의 입술이 스쳤다.
“옷 갈아입고 나올게.”
도준이 침실로 들어가고 인호도 손을 씻겠다며 사라졌다. 그 때 방문객을 알리는 벨 소리가 들려왔다. 2층의 로비까지 통과했다는 건, 확인된 신원이라는 뜻이니.
‘지연인가? 아니면 레이나 언니?’
아무 사심 없이 방문객을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연 제아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 엄마.”
“너, 제아 너! 어떻게 네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손을 치켜들었다.
짝―.
감았던 눈을 뜨자, 제 앞을 가리고 있는 도준의 넓은 등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