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내 남자는 내가 지킨다.
2017.05.04.
완성한 요리를 가지고 나가는 라운지 레스토랑 매니저의 뒤통수를 레이나는 말없이 노려보았다.
좋아하는 남자의 선 자리에 나갈 음식을 제 손으로 만들어 받쳐야만 하는 굴욕감.
‘이런 기분을 느끼라고, 그 노인이 날 지목한 거야.’
레이나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채 매니저의 뒤를 따랐다. 인사를 핑계 삼아 그 여자와 정면으로 부딪힐 것이다.
재력과 권력으로는 밀렸지만, 여자 대 여자로는 절대 자신이 밀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해줄 셈이었다.
복도에서 턴만 하면 이제 라운지의 프라이빗 룸 입구가 보일 것이다. 그런데 복도에서 턴을 하기 전 직원이 멈추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꺼낸 무언가를 술 주전자에 섞었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술에 뭘 탄 거냐구.”
갑작스러운 레이나의 등장에 매니저가 깜짝 놀라 그녀를 응시했다.
“저, 저도 모릅니다.”
“탄 사람이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당장 술 새 걸로 다시 가져가.”
“사장님께서 오늘 예약하신 손님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지시를 하셨습니다.”
사장의 딸보다 사장의 말을 따르겠는 매니저의 의사표현이었다. 매니저의 뒤를 따라 들어가고 싶었지만 룸 앞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저지가 당했다.
‘술에 독약을 탔을 리는 없고, 대체 무슨 꿍꿍이지?’
불현 듯 최상층의 스위트룸까지 예약했다는 민석의 말이 떠올랐다. 약을 탄 술과 은밀함이 보장되는 최고급 스위트 룸.
결론은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유치한 상황극으로 발목을 잡기에는,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비웃던 레이나의 안면이 서서히 굳어갔다.
하룻밤의 원나잇이라도 상대는 대한민국 최고 실세를 할아버지로 둔 여자이다. 그런 엄청난 여자와 밤을 보냈다고 치자. 원나잇 후, 남자를 마음에 든다고 하면?
최고 실세는 둘 중 하나를 택하리라. 치워버리거나, 협박을 해서라도 손녀딸 옆에 묶어 두거나. 그리고 도준은 치워버리기에는 아까운 남자였다.
레이나가 돌아오자 그녀의 요리를 보조해주던 셰프가 보고를 했다.
“레이나 셰프님, 프런트에서 문제아 씨가 로비에 도착했다고 전해주랍니다.”
문제아란 이름만으로도 꽉 막혀 있던 레이나의 머릿속이 확 트였다. 웃음을 되찾은 레이나는 시간을 확인한 후 생긋 웃었다.
“정욱씨,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공실인지 확인 좀 해줄래?”
***
객실 다이닝 룸의 식탁 위에 레이나가 준비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저 정말 언니 광팬이에요! 사인에다가 언니 음식까지 직접 맛볼 수 있다니. 혹시 사진도 같이 찍어주시면 안될까요?”
“사진 찍는 게 뭐 어렵다구.”
흔쾌히 지연과 사진까지 찍어주는 레이나에게 제아는 진심으로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집들이를 할 때 레이나의 광팬인 지연을 위해 사인을 부탁 할 때 언제 한 번 같이 보자고 했었다.
빈말일 줄 알았는데, 갑작스럽게 연락을 했지만 레이나는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것도 최고급 스위트룸에서 식사 대접이라니.
“제아 씨, 혹시 알고 있어?”
“……?”
“제이드 지금 이 호텔에서 선을 보는 중인데.”
잠시 멈칫하던 제아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어서 나간 자리일 거예요. 선 보는 게 바람피우는 것도 아닌데요, 뭐. 전 이해해요.”
도준을 믿는다는 뜻이었다. 레이나의 얼굴이 미약하게 구겨졌다.
이 말을 듣고 도준의 핸드폰에 불이 나게 전화라도 할 줄 알았다. 그게 아니면 꽤 성격 있게 생겼으니 그 자리까지 쫓아가 난리라도 칠 줄 알았는데. 저 앙칼진 고양이가 발톱을 드러내게 하려면 좀 더 강렬한 자극을 줘야 한다.
“하긴, 제이드도 미처 몰랐던 것 같긴 해. 그러니까 그쪽에서 그런 파렴치한 짓까지 하려는 거 같아.”
드디어 제아의 포크질이 멈추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걸려, 들었다. 레이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연하게 제이드가 있는 룸에 들어가는 술 주전자에 뭘 타는 걸 봤거든.”
“…….”
“혹시나 해서 알아봤더니 프레지덴셜 스위트룸까지 예약했더라구. 이건 만약인데 말이야.”
의도적으로 짙은 한숨을 내쉬며 리얼함을 더했다.
“술에 탄 게 수면제가 아닐까 걱정이 좀 되어서.”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이지만 사실처럼 말을 했다.
“말도 안 돼요! 같은 침대에서 잤다고 남자가 책임지는 게 요즘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런 세상이면 나는 수십 번 결혼했게요?”
발끈한 건 제아가 아닌 지연이었다.
“그런 세상이라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틀려지는 거 아니겠어?”
무슨 말이냐는 듯 자신을 응시하는 두 개의 눈빛을 담담히 받으며 레이나가 말을 이었다.
“오늘 제이드가 만나고 있는 사람, 대한민국 최고의 실세야. 우리 아빠도 꼼짝 못 하게 할 만큼. 그런 사람의 하나뿐인 외손녀라면 말이 달라지지.”
그래서 오늘 제아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자신이 나서기에는 아버지의 호텔이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잃을 게 많다는 건 그만큼 몸을 사려야 한다는 뜻. 하지만 잃을 게 없는 제아는 입장이 다르리라.
“맙소사! 제아야, 우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당장 가서 오빠를 구출해 내야지!”
“이지연, 흥분 좀 하지 마. 정확한 건 아니잖아.”
“제아 너 이렇게 태평할 때가 아니라니까? 눈 뜨고 네 남자 뺏길 상황이라고! 나 같으면 내 남자 꼭 지킨다! 실세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잔뜩 흥분해서 부추기는 지연과 달리 제아는 의외로 침착했다. 그만큼 도준을 믿으니까. 레이나와 지연의 상상력도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터무니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자니 찝찝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상황을 바로 어제 연희를 만나서 겪었으니까.
“우리 오빠 그렇게 바보 아니야. 그리고 정확하지 않은 걸로 나섰다가 오빠를 더 곤란하게 하면 안 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제아를 보자 레이나는 속이 타들어갔다. 어떻게든 자극을 해서 나서게 해야 하는데.
“제아씨, 그래도 확인은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내 예상이 맞다면 상황이 굉장히 복잡해져.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제이드가 단호하게 거절하면, 그 사람이 제일 그룹 가만히 놔둘 것 같아?”
“…….”
“제아 씨, 아무리 제이드라도 약기운은 못 이겨.”
레이나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거였다. 부득이한 상황에 의해 그녀 자신보다 더 탄탄한 배경을 가진 그 여자를 받아들일까봐.
제아는 승산이 있지만 그 여자는 승산이 없다.
다행히도 마지막 말에 제아가 반응을 했다.
“언니 말이 맞아요. 확인은 해봐야할 것 같은데, 방법이…….”
제아는 말끝을 흐렸다. 확인을 무슨 수로 한단 말인가. 그런데 레이나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조심히 몸을 숙여왔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
제아와 지연은 호텔 룸메이드 복장을 하고 10분째 엘리베이터 앞 복도를 어설프게 닦고 있었다. 레이나가 얻어다준 잠복용 의상이라고 해야 할까.
‘예약한 스위트룸으로 가려면 무조건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이 복도를 지나쳐야 해. 프레지덴셜 룸은 이 층에 딱 두 개뿐이거든.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식사가 끝나기를 바라야지.’
묵묵히 진짜 청소를 하는 제아와 달리 곱게 자란 지연은 못 참겠는지 들고 있던 걸레를 반질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내던졌다.
“내가 지금 걸레 들고 뭐 하는 짓이지?”
“찍히면 어쩌려고 걸레를 던지고 그래. 세경 언니 곤란하게 하지 말자, 우리.”
“레이나가 그랬잖아. 여기는 최상층 손님들이 투숙하는 VVIP룸이라서 CCTV 같은 거 없다고.”
“……맞다.”
“제아 너 그냥 이준 오빠 그 여자한테 양보해! 니가 감당할 남자가 아닌 것 같아!”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지연이 너는?”
홧김에 한 말인데 제아가 진지하게 묻자 지연은 한숨과 함께 다시 걸레를 집어 들었다.
“문제아 너, 진짜 친구 잘 둔 줄 알아라.”
“지금 엄청 고마워하고 있다. 그런데 지연이 너 의외로 그 복장 잘 어울린다?”
“너도 만만치 않게 잘 어울릴……, 제, 제아야, 엘리베이터 움직인다!”
농담까지 주고받는 그때, 멈추어 있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층을 내려오는 거라 그녀들은 허둥지둥할 수밖에 없었다.
탕비실이 있는 좁은 복도 쪽으로 아슬하게 몸을 숨긴 채 벽 너머로 살그머니 눈만 빼꼼히 내밀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내렸다. 곧이어 여자의 뒤를 따라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내렸다.
그 남자들은 축 늘어진 장신의 남자를 양 옆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틀림없는 도준이었다.
“저 여자 낯이……, 웁.”
무슨 말을 하려는 지연의 입을 제아가 잽싸게 손으로 틀어막았다. 아니기를 바랐건만, 레이나의 말이 현실이라는 걸 깨닫는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복도 사이로 실루엣이 사라지자마자 지연이 먼저 말을 했다.
“제아야, 우리 이제 어떻게 해?”
“……나도 몰라.”
“모르면 어떻게 해?”
“나도 이런 상황이 진짜 일어날 줄 몰랐단 말이야!”
“그럼 이대로 저 여자가 이준 오빠 잡아먹게 지켜보자고?”
“……지켜야지.”
“뭐라는 거야, 크게 좀 말해 봐.”
제아는 일어나서 한 바퀴를 뱅그르르 돈 후에 손에 들고 있던 먼지떨이를 하늘로 뻗쳤다.
“내 남자는, 내가 지킨다!”
“참내, 세일러문 납셨네.”
지연이 기가 막힌 듯 눈웃음을 흘리자 제아도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사실 엄청 긴장이 됐기 때문에 이런 유치한 행동으로라도 그 긴장감을 풀고 싶었다.
그때 복도를 울리는 구두굽 소리에 제아와 지연은 다시 얼른 벽에 등을 붙이고 주저앉았다. 빼꼼히 내민 시야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는 경호원들이 보였다. 하늘이, 도운 것이다.
“휴, 여자만 밖으로 유인하면 되는데.”
어떻게 한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제아를 응시하던 지연이 갑자기 눈을 번뜩했다.
“잠깐, 나 좋은 생각났어. 저 여자 핸드폰 번호, 내가 알고 있는 것 같거든.”
지연이 제아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정숙한 옷차림에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지만, 분명 김하은이었다. 파티란 파티는 모조리 쓸고 다니는 파티 여왕.
똑같이 파티를 좋아해서 노는 부분에선 꽤 죽이 잘 맞았는데. 경호원들을 줄줄 달고 다니면서 신원은 철저하게 숨기기에 어느 집 여식인가 했더니, 정말 대단한 집 여식이었던 것이다. 김하은은 개뿔, 가명까지 쓰면서 말이다.
***
침대에 도준을 눕힌 경호원들은 화연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후 객실에서 사라졌다. 방음이 철저하기 때문에 객실 밖으로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갈 일은 없다.
그런데도 부끄러운 화연은 경호원들에게 아예 이 층에서 사라지라고 지시를 했다.
너무 갖고 싶은 남자지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걸까. 순간 약간의 회의감과 함께 자존심이 상하는 화연이지만 그 정도로 이 남자를 갈구하는 마음은 절박했다.
하지만 인사불성이 되어 침대 위에 길게 늘어진 남자에게 시선이 닿는 순간,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남자가 갖고 싶어. 격렬한 소유욕이 솟아올랐다.
암막 커튼을 치는 순간, 멀리 떨어져 있는 맞은편 건물에서 고용한 파파라치가 사진을 찍을 것이다. 이 남자를 옭아맬.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완벽하게 이 남자와 둘만의 비밀스러운 시간을 갖고 싶었다.
“당신, 내 남자로 만들고 싶어.”
은은한 불빛 아래, 이마부터 흘러내리는 선이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남자의 얼굴 윤곽은 환상적이었다. 홀린 듯 뻗은 화연의 손끝이 도준의 얼굴을 더듬어 내렸다.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 제 손길을 거부하던 남자였다. 좀 더 과감해진 손길이 금욕적으로 매어진 완벽한 넥타이에 닿는 순간, 손목이 거칠게 움켜잡혔다.
“나한테…… 뭘 먹인 거야.”
잡은 손을 거칠게 쳐내자 화연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하지만 도준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객실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먹인 거 없어요. 도준 씨가 갑자기 쓰러져서 급한 대로 객실로 데려왔을 뿐이에요!”
“그럼, 병원을 데려가거나 의사를 불렀어야지.”
“위중해…… 보이지 않아서.”
화연의 변명은 도준에게 통하지 않았다.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도준이 잡아먹을 듯 노려보자 화연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하, 할아버지가 시켰어요. 저한테…… 도준 씨 옆을 지키라고. 할아버지가, 도준 씨를 많이 아껴요.”
“그래서, 내가 마신 술에 수면제라도 탔나 보지?”
정곡을 찔리자 화연은 움찔했지만, 최대한 태연함을 유지했다.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도준 씨 옆에 있어줄게요.”
도준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독한 약기운이 아직도 몸 안에 남아 있었다. 끈적이는 손길들이 밑에서 뻗어 나와 다시 아래로 잡아끄는 기분이었다. 감기려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린 도준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민화연 당신, 나를 원해?”
“……네?”
노골적인 질문에 순간 화연은 멍해졌다.
“내가 묻잖아.”
“……?”
“나와 자고 싶은 건지, 나와 결혼하고 싶은 건지.”
처음보다 더 농도 깊은 질문에 화연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수줍게 눈을 내리깔았다. 잠도 자보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은 이 속내를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시니컬한 도준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아, 질문이 틀렸나?”
“……?”
“나를 원하는 게 당신이야, 아니면 당신 할아버지야.”
커다래진 눈으로 화연이 도준을 보았다.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잠기운을 이겨내는 남자에게서 쏟아지는 나른함은 상상 이상으로 섹시해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만만해 보이는 건 아니었다.
“나한테 약 먹이는 유치한 수작,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냐고 묻잖아.”
이 남자를 오늘 제대로 처음 마주했지만 화연은 절실하게 깨달았다. 어설픈 수작으로 잡을 수 있는 남자가 아님을 말이다. 그래서 화연은 정공법을 택했다.
“그래요. 도준 씨가 마신 술에 수면제를 탔어요. 물론 당신이 너무 빨리 깨어나서 맞은편 건물에서 대기하고 있는 파파라치는 왜 커튼이 안 열리나 궁금해하고 있겠죠?”
“…….”
“그 정도로 도준 씨를 원해요. 나와 할아버지 둘 다 말이에요.”
“그래서, 나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내어주겠다?”
화연이 유혹하듯이 침대에서 일어나 거리를 좁혀왔다. 하늘거리는 원피스 단추에 손을 댄 채.
“나 민화연을 안아요. 그리고 나와 결혼해요.”
바로 앞까지 다가온 화연이 흐느적거리는 손길을 뻗었다.
“당신에게 최고의 부와 명예를 줄게요. 대한민국 최고 실세인 내 할아버지가, 그렇게 해줄 거라?”
순식간이었다. 덮치듯이 화연의 몸 위에 올라탄 도준이 얼굴을 내렸다. 입술은 닿지도 않았다. 그런데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단단한 몸과 목덜미에 훅 닿는 뜨거운 숨결에 화연은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도 도준 씨, 잠깐만…… 숨이.”
격렬하게 더 원하는데도 감당 못 할 감각들이 심장을 강렬하게 짓눌리자, 화연은 숨을 제대로 쉬는 게 버거웠다. 행위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이 남자가 주는 감각은 지독했다.
닿지도 않았는데, 피어오르는 기대감만으로 숨통이 조여 오는 극한 황홀감이었다.
“내가 계속하면, 넌 죽을지도 몰라.”
비웃는 듯 그르렁거리는 허스키한 음성이 화연의 귓가를 쓸었다. 묵직하게 몸을 누르던 아찔한 무게감이 멀어졌다.
“……뭐가 보이지.”
깊은 숨을 토해내며 눈을 뜨자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도준이 보였다.
“내 눈에서, 뭐가 보이냐고.”
섬뜩한 무언가가, 나른하게 내리뜬 눈빛에서 번뜩였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감지한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팔목을 잡고 있던 도준의 손이 타고 올라와 그녀의 가는 목을 갈고리처럼 움켜쥐었다.
숨을 헐떡일수록 숨통이 막혀오는 건, 기분 탓일까. 화연의 동공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흔들거렸다.
“싸구려 유혹 따위, 나한테 먹힐 거라고 생각했나?”
”도, 도준 씨 무섭게 왜 이래요.”
“너 같은 여잔, 날 감당하지 못해.”
나른한 눈빛과 달리 짙은 동공은 얼음장처럼 냉랭했다.
“죽을 각오로 감당할 자신 없으면, 지금 당장 꺼져.”
잔인한 손길과는 다르게 귓가에 속삭이는 음성은 소름 끼치도록 다정했다. 그때 침실 문이 노크 소리도 없이 벌컥 열렸다. 설마, 파파라치가 침실까지 들이닥친 건가? 도준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침실 입구, 메이드 복장을 한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