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69화 (69/104)

69. 입술 잔으로 마시는 소주 한 병 더?

2017.05.01.

바짝 곤두선 온몸의 신경과 오감이 귀에 닿아 있는 핸드폰으로 쏠렸다. 그때 업무용 핸드폰이 드르륵 울렸다.

-왜 계속 통화중이야. 한 여사님이 문 비서 만났다.-

인호의 메시지를 확인한 도준의 눈매가 날카롭게 곤두섰다. 다행히도 발신인은 끊지 않고 그를 기다려주는 인내심을 보이고 있었다.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마.”

[…….]

“내가 갈게.”

[…….]

“어떻게든 찾아낼 테니까.”

[…….]

“문제아,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으라고.”

전화를 끊으려는 듯,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뚜뚜뚜―.

곧이어 전화는 맥없이 끊겼다.

***

조선 호텔 집무실 안, 레이나는 제 아버지인 민석과 대치 중이었다.

“내가 왜 개인 요리사가 되어야 해요? 싫어요! 해외에서도 그렇게 불려 다닌 적 없다구요!”

“세경아, 여긴 미국이 아니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 법을 따라야지 어쩌겠냐.”

“당장 거절해요! 아빠는 자존심도 없어요?”

“호텔이 별다른 이슈 없이 이만큼 성장한 게 다 그 분 덕이다. 그분이 돌아서면, 아빠가 꽤 곤란해져.”

“그러니까 호텔 경영 좀 투명하게 하지 그랬어요! 흠 잡힐 짓을 왜 해요?”

“세경아!”

“아, 몰라! 하고 많은 셰프 중에 왜 하필 나야? 나이도 있으시니 한식 좋아할 거 아니에요! 한식 전문 셰프 부르라고 해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던 레이나에게 민석이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그 자리에 한 사장도 있을 거다.”

그 한마디는 효과가 있었다. 레이나가 다시 돌아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제이드가, 왜요?”

“제 손녀딸과 한 사장의 만남을 주선하는 자리야. 게다가 호텔 스위트룸까지 예약을 했어. 그게 무슨 뜻이겠냐.”

“…….”

“명목은 미국에서 오랜 생활을 한 한 사장에 대한 배려라고 널 지목했지만. 그분이 굳이 널 지목한 진짜 이유, 네가 잘 생각해 봐라.”

제이드의 뒷조사를 했다면 레이나 자신의 존재가 빠질 수는 없는 일. 그건 명백한 경고였다. 제 손녀딸의 남자로 그를 찍었으니, 포기하라는.

“호텔 합작 프로젝트 건은, 잊어라.”

“아빠!”

“제의는 받아들인 걸로 전달할 테니 그리 알아.”

집무실을 나온 레이나는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10대가 지나간 이후로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불안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직접 손을 쓰지 않고 그 자리를 파토 낼 수 있지?”

그때 번뜩 떠오른 건 바로 제아의 얼굴이었다.

***

공중전화 박스 안, 제아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손으로 막았다.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한 것뿐이다. 제 핸드폰으로는 차마 전화할 자신이 없어서.

그런데, 나인 걸 어떻게 알았지?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곳은 허름한 판자촌의 가파른 언덕이었다. 도준과 처음 만났던 그곳.

제아는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앞에 쭈그리고 앉아 밑을 내려다보았다.

“……무지 무섭네.”

어렸던 도준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밑으로 몸을 던지려 한 걸까? 겁도 없이.

“난 여기, 왜 온 거지?”

자조적으로 묻지만,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커피숍을 나와서 갈 곳이 없어 방황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다. 부모님을 이해한다고 했지만 그건 머리뿐, 가슴은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준을 찾아갈 수도 없다.

어느 누구에게 털어낼 수 없는 답답함.

뻥 뚫린 시야에 몰아치는 바람에 제아의 코끝이 시큰하게 빨개졌다. 구멍가게에서 사온 소주를 따서 작은 종이컵에 따라 홀짝거렸다.

“에이씨, 눈물은 왜 자꾸 흘러.”

제아는 거칠게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마시는 소주보다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의 양이 더 많을 것 같다.

“염치없다, 문제아.”

제아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감은 눈 사이로 차오르는 눈물보다 더 빠르게 시야를 점령하는 건 도준의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보고 싶어.”

이런 상황에서도 뻔뻔하게 보고 싶다. 미치도록.

“나보고 어떻게 헤어지라는 거야.”

이렇게 좋아 죽겠는데. 제아는 소주를 다시 들이켰다. 얼굴을 보면 차마 나오지 않을 그 말을 계속해서 되풀이하기 위해.

“오빠, 헤어지자. 아니, 한도준 씨, 우리 헤어져. 아니야. 사장님, 죄송합니다. 우리 그만…….”

“누구 맘대로 헤어져.”

그때 불쑥 튀어나온 남자의 확고한 음성이 제아의 말을 싹뚝 잘라버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눈치챈 심장이 널뛰기를 시작했다.

코를 훌쩍이며 서서히 일어나는 순간 제아의 몸이 휘청했다. 어둠을 머금은 아찔한 낭떠러지가 얼핏 시야로 파고드는 순간…….

“으아아악!”

강한 힘이 제아의 손목을 잡아채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청량한 체취가 코끝을 스침과 동시에 제아는 도준의 품에 확 안겨들었다.

“내가 꼼짝 말고 기다리랬지.”

도준의 음성은 나직했는데도 으르렁거리듯이 귓가를 거칠게 긁어내렸다.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뺨을 통해 스며드는 심장 박동은 거칠게 날뛰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이곳을 들쑤시고 다녔을지 감히 상상이 되자 바보같이도 기쁘다. 이렇게 자신을 찾아준 도준에게.

“……용케 찾았네.”

“이 동네 전화박스, 하나만 남겨놓고 싹 다 없애버릴 거야.”

진심이 섞인 도준의 신경질 적인 말에 제아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에게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제아는 잠시 말을 미루기로 했다. 봇물 터지듯이 솟아오른 그리움 먼저 다스리고. 그런데 도준이 먼저 대화의 주도권을 손에 쥐어버렸다.

“문제아, 나한테 왜 떠났냐고 물었었지?”

“……?”

“이러려고.”

갑자기 도준이 얼굴을 내려 제아에게 깊은 키스를 퍼부었다. 입술이 얼얼하고 영혼이 털릴 정도로. 한참 후에야 도준이 입술을 뗐다.

“제아 너한테 오빠가 아닌 남자가 되고 싶어서.”

최고 속도로 오토바이를 몰아 사고 날 위험까지 몇 번이나 감수하면서 제아의 동네에 도착했다. 동네를 샅샅이 뒤졌지만 제아를 찾지 못했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 싸해지는 기분, 절망감이 그의 몸을 잠식했다.

“그래서 내 의지로 떠난 거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온 곳이 판자촌이었다. 오토바이가 올라올 길이 아니라서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전화박스를 찾아 헤맸다. 마지막으로 흘러든 곳이 바로 이 낭떠러지였다. 제아와 처음 만났던, 그곳.

“그러니까, 넌 부모님 원망하지 마.”

“어떻게 그래. 난 아무것도 모르고 오빠만 미워했는데. 대체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 거야?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고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를 올려다보는 제아의 눈빛은 혼란스러움 자체였다. 시린 공기에도 젖어드는 뺨이 안쓰러워 도준은 부드럽게 뺨을 쓸어내리며 덤덤히 토해냈다.

“13억. 10년 전 내 몸값이자 네 집안을 살린 액수.”

“……!”

“그리고 지금 2억이 더 들어갔지. 네가 원하면, 오천이 더 들어갈 수도 있고.”

“……!”

“그러니까 갚을 거라는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라고.”

속을 꿰뚫린 제아는 그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에 숨이 탁, 막혀왔다.

도준이 가볍게 제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둘이 나란히 낭떠러지에 앉아 밑을 내려다보았다.

“꽤 괜찮군.”

“……뭐가?”

“죽으려 했던 곳을 내려다보며 술을 마시는 기분.”

내리꽂힌 도준의 시선이 닿은 곳은 돌바닥에 놓인 쓸쓸한 소주병이었다.

“술, 마시게?”

“마셔 봐.”

“……?”

“술, 말이야.”

종이컵이 하나이니 술을 마시고 그 종이컵을 달라는 소리 같았다. 그래서 제아는 소주를 종이컵에 따라서 입 안에 머금었다. 그 때 도준의 손끝이 제아의 턱을 야무지게 잡았다.

“삼키지 말고.”

막 목구멍으로 넘어가려던 술이 다시 입 안에 머금어졌다. 싸하면서도 쓰디쓰게 퍼지는 알코올이 입 안을 마비시키는 순간, 도준이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다가왔다. 그만큼 제아의 턱을 잡은 손끝도 힘이 들어갔다.

머금어지는 입술 사이로 소주가 흘러들었다. 비벼지는 혀 사이에서 느껴지는 소주의 맛은, 싸하면서도 달콤했다. 입 안에 있던 소주가 사라지고 도준이 입술을 뗐다.

“내가 다 알아서 해. 그러니까 넌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하지 마.”

“…….”

“제 자리에만 있어주면 된다고.”

지독한 그의 사랑이 느껴졌다. 웅얼거리는 입술 사이로 작은 중얼거림이 본능적으로 흘러 나왔다.

“오빤 진짜…… 미쳤어.”

시선을 부딪혀오는 도준이 느릿하게 한쪽 입 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미친놈은 무섭지. 안 그래?”

“…….”

“그러니까 이제 멈출 생각 하지 마.”

“…….”

“이미 늦었어.”

그런 도준을 가만히 바라본 제아는 한숨과 함께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다.

“미친놈보다 무서운 게 미친년이랍니다.”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는 도준에게 제아가 소주잔을 내밀었다.

“오빠도 마셔.”

제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도준이 소주를 입안에 머금었다. 다가오는 제아의 얼굴을 보는 도준의 눈빛에 나른한 웃음이 어렸다.

착실한 학생답게 그에게 방금 배운 대로 소주를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소주가 사라질 때쯤, 제아가 진실을 고했다.

“오빠보다, 내가 더 미쳤어.”

시린 바람에 몸은 얼어갔지만, 둘의 입술만은 얼리지 못했다. 오고가는 술잔 속, 입술의 온기는 자꾸만 나누어지고 얼어붙을 틈이 없었다. 소주 한 병이 서서히 비워져 갔다.

또다시 돌아온 차례.

입술이 닿기 전, 제아가 작게 속삭였다.

“염치없는 거 아는데, 나 오빠 포기 안 할래.”

“…….”

“내가 오빨 사랑하는 게 이용하는 거라고 욕해도.”

“…….”

“나 마음껏 사랑할 거야.”

도준의 옆자리를 지키지 위해서는,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닫는 악녀가 되어야 한다는 걸. 제아는 방금 절실히 깨달았다.

“그러니까 오빠도, 못된 악녀 포기하지 마.”

굳이 대답은 필요 없었다. 못 참겠다는 듯, 도준의 큰 손이 제아의 뺨을 감싸 끌어당겼다. 빨아들이지 않았는데도 도준의 혀와 함께 쌉싸름한 소주가 입 안으로 강렬하게 흘러들었다. 서로의 입 안에서 남김없이 소주가 사라졌다.

“몇 번이나 말해. 나란 놈, 마음껏 이용하라고.”

맞닿은 입술 사이로 미소가 피어나고 주고받는 눈빛 속, 서로가 묻는다.

‘입술 잔으로 마시는 소주, 한 병 더?’

***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제아는 초록색 대문을 넘을 수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가자 주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주방으로 가자 식탁에 앉아 있던 윤영이 고개를 틀었다.

“제아 너, 술 마셨니?”

“……조금. 아니, 많이.”

“너 이리 좀 앉아 봐.”

“엄마, 나 피곤해. 내일 출근도 일찍 해야 하고.”

“피곤하다는 애가 이 시간까지! 하아, 술 마시고 들어오니?”

언성을 높이던 윤영이 다시 목소리를 죽였다. 제아는 그런 윤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리 엄마 많이 늙었네, 엄청 고왔는데.”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세다고 들었던 그 자존심, 바로 윤영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그런 윤영이 연희에게 돈을 받을 때 그 심정이 오죽 찢어졌을까.  그리고 자존심을 버리고 받은 돈을 아버지인 윤식이 주식으로 모두 날렸을 때는.

다시 벌면 된다고 제아가 수백 번 위로했는데도 목 놓아 통곡했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내가 어떻게…… 그 돈을. 흑흑.’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가족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받았던 그 돈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으니. 제아는 손을 뻗어 윤영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 자존심, 이제 내가 지켜줄게. 욕을 먹어도 내가 듣고, 자존심을 버려도 내가 버려.”

윤영을 내려다보는 제아의 눈은 의외로 담담했다. 온갖 풍파를 겪은 돌이 더 매끄럽고 단단해지듯, 지금의 제아가 그러했다.

“이미 받은 돈이 13억이랑 1억, 그리고 받을 돈이 1억에 오천 더. 총 15억 5천. 혹시 내가 모르는 게 더 있어?”

윤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제, 제아야. 너 어떻게…….”

“그 돈, 나 평생 벌어도 오빠한테 못 갚아. 그래서 뻔뻔하긴 해도 오빠한테 안 갚을 거라고 했어.”

뻔뻔한 악녀가 되기로 했으니까. 제아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나 지금 엄마 엄청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가족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자존심 센 우리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

“그러니까 엄마도 나랑 오빠 이해하려고 노력해 줘.”

“…….”

“오빠 잘못 없잖아. 우리한테 할 만큼 했잖아. 그치?”

“…….”

“나 들어가서 잘게. 엄마도 잘 자.”

몸을 틀어 주방을 벗어나는 제아를 윤영을 붙잡지 못했다.

***

조선 호텔 최상층에 있는 라운지 레스토랑 프라이빗 룸. 중용이 먼저 와서 도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먼저 와 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어르신.”

룸에 들어선 도준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중용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앉게나.”

그토록 기다렸던 중용의 연락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도준은 지금 이 자리가 꽤 불편했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본능적인 감이 얼른 이 자리를 끝내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도준은 재킷 안에서 볼펜을 꺼내 중용에게 내밀었다.

“한 부회장이 문 상태 의원에게 돌아섰다는 명백한 증거가 그 안에 있습니다. 어르신이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될 거라 봅니다.”

중용은 녹음된 대화 내용을 묵묵히 들었다. 그리곤 그 볼펜을 뒤에 서 있던 보좌관에게 건넸다.

“문 의원까지 자네를 탐낼 줄은 몰랐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어. 안 그런가?”

“과찬이십니다.”

중용이 눈짓하자, 갑자기 보좌관이 조용히 문을 열고 사라졌다. 곧이어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면서 향긋한 여자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지만 도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할아비 옆에 앉아라, 화연아.”

흰색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도준을 지나쳐 맞은편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명백한, 선자리였다.

“민화연, 하나뿐인 내 손녀딸이라네.”

“안녕하세요, 민화연이라고 해요.”

도준을 살짝 본 후 시선을 바로 내리며 살포시 웃는 여자의 미소는 단정했다. 탄탄한 뒷 배경에 아름다운 외모까지, 여자는 완벽했다.

그럼에도 도준은 어떤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제아를 제외한 모든 여자는 그에게 향기 없는 꽃, 조화일 뿐이니.

“한도준이라고 합니다.”

시선도 부딪히지 않은 채, 도준은 지극히 예의상으로 간결한 소개를 흘렸다.

“저번에 보니 식사를 통 안하던데, 혹시 한식이 입에 안 맞는 겐가.”

“아닙니다.”

“내 오늘은 특별히 자넬 위해 미국에서 유명한 셰프 음식을 준비했네. 음식 맛을 보면, 자네도 알지 모르겠군.”

도준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 유명한 미국 셰프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약속 장소부터가 조선 호텔이라는 건, 중용의 명백한 경고였다. 내 손녀와 맺어주려고 하니 건들지 말라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중용이 화연을 응시하며 물었다.

“한 사장, 우리 손녀딸 어떤가.”

“다른 남자들이 보면 한눈에 반할 정도로, 아름다운 분입니다.”

내 스타일은 아닙니다. 라는 말을 기분 나쁘지 않게 돌려서 말하는 도준을 보며 중용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재밌는 청년이군 그래. 우리 화연일 직접 봐도 거절할 텐가.”

너무 건방지지도, 그렇다고 너무 굽실거리지도 않게, 도준이 속을 내보였다.

“어르신, 이런 자리는 제게 부담스럽습니다.”

“고작 식사 한 끼야. 식사 한 끼에 책임지라는 말을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게. 우리 화연이가 정치, 경제 쪽에도 꽤 밝은 아이라네. 그렇다고 우리 대화에 끼어들 정도로 눈치 없는 아이는 아니니 없는 셈 치고 우리끼리 이야기 나누자고.”

별 걱정 다한다는 듯 중용이 웃었다. 그런데 도준은 그 미소가 더 걸렸다. 그럴 거라면 왜 불렀다는 말인가.

“자네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한 여사를 빼닮았더군. 어머님이 아주 미인이야.”

그제야 도준은 알았다. 왜 갑자기 가만히 있던 연희가 급하게 제아를 만났는지.

“자자, 한 잔 받게나. 남자란 자고로 술을 마시며 친해지는 법이지. 안 그런가.”

표정이 굳은 도준을 본 중용이 술을 권했다. 술잔을 깨끗하게 비울 때마다 술은 어김없이 채워졌다. 그런데 중용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게 이상해서 도준이 물었다.

“어르신은, 드시지 않습니까?”

“내가 며칠 전에 혈압으로 쓰러져서, 주치의가 며칠간은 술 담배를 자제하라고 했네.”

도준은 중용이 권하는 술을 거절하지 않고 계속 받아 마셨다. 화연을 거절할 것이기에, 중용이 따라주는 술까지는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머리가 어지럽고 슬슬 몸에서 열까지 나기 시작했다.

어젯밤, 늦은 새벽까지 찬바람을 맞으며 제아와 소주를 마셔서 몸살 기운이 올라오는 걸까. 아침까지 좋았던 컨디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도준은 갑자기 제아가 걱정되었다. 내가 이 정도인데, 제아는 괜찮은 걸까. 전화를 해서 확인을 해야겠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룸에서 나오자마자 도준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훅, 새어 나왔다. 확 달아오른 몸이 터져버릴 것 같지만 복도의 끝까지 흔들림 없이 걸었다. 복도 끝에 다다라 몸을 틀자마자 다리가 꺾였다.

그때 향긋한 향수 냄새와 함께 여자의 나긋나긋한 몸이 도준의 몸을 부축해서 잡아주었다.

“괜찮아요, 도준 씨?”

화연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힘겹게 시선을 내리자 그의 어깨와 허리를 꼭 붙들고 있는 화연의 손이 보였다.

“……나한테서 손 떼.”

“도준 씨, 어디 아파요? 몸이 엄청 뜨거워요.”

화연의 손을 털어내 보지만, 힘이라곤 하나도 없다.

“저리 가, 당장. 손…….”

몸에서 빠져나가는 힘만큼, 바닥 밑으로 가라앉는 의식.

도준의 몸이 푹, 고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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