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너 지금, 어디야.
2017.04.27.
도준이 뻗은 손끝에 턱이 잡혀 고정됐다.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그의 눈빛은 절제된 미를 보여주는 짐승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과 마주한 순간, 마법에 걸려버린 제아는 그저 무기력하게 내려오는 입술을 바라보았다.
저 입술이 주는 지독한 감각을 떠올린 피부가 은밀한 열감을 품었다.
본능적으로 피어오르는 기대감. 그런데 끌어당겨지는 도준의 입술색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붉다. 그렇지 않아도 새하얀 피부가 오늘따라 창백해 보여서일까.
“읏!”
도준에게 아랫입술이 먼저 깨물리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마법에서 풀려났다.
‘……창백해?’
흐려졌던 제아의 동공에 총기가 어렸다.
‘오빠랑 새벽 2시에 헤어졌으니까.’
도준이 집으로 가는 데 걸리는 1시간. 새벽에 빠짐없이 하는 운동 2시간. 첫 스케줄을 위해 집에서 7시에 나간다고 했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그는 오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는 것.
본격적으로 침략하려는 입술을 피하자,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도준이 그녀를 보았다. 또렷한 동공과 비교되는 충혈된 흰자위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내가 왜 몰랐지?
“시간 여유, 얼마나 있어?”
손으로 제 가슴을 살짝 밀어내고 있는 제아의 행동을 거절로 받아들였나 보다. 정지 버튼이 눌러진 것처럼 도준은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제아를 응시하면서.
“다음 스케줄 또 있을 거 아니야, 나한테 시간 얼마나 할애할 수 있냐구.”
짧게 할 거면 하지 말라는 건가?
도준에게 있어 제아와의 육체적인 관계는 새롭게 발견한 오아시스였다. 마실수록 더 갈증이 나고 머무르고 싶은 마약 같은 오아시스. 뛰는 만큼 지치기는커녕 더 미친 듯이 달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레이스.
지치고 힘들수록 본능적으로 찾게 되는 것이다. 유일한 오아시스를. 배려라는 걸 망각한 채.
“30분 후에, 유 실장이 회사로 올 거야.”
대답과 동시에 도준은 불에 덴 듯 제아에게서 물러났다. 차가운 이성은 머리끝까지 차올랐지만, 가슴에 차오른 욕망도 변함없었다. 당장 손을 뻗어 품에 안고 온몸으로 눈앞의 존재를 더듬고 흡수하고 싶은.
“30분? 그럼 충분하네.”
작게 중얼거린 제아가 도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묵직한 남자의 구두 굽 소리와 가느다란 여자의 구두굽 소리가 15층 로비의 복도를 울렸다.
제아가 향한 곳은 집무실이었다. 소파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제 다리를 팡팡 손으로 두드렸다. 그 손짓의 의미를 알기에 도준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제아는 지금 새로운 방식으로 그에게 오아시스를 제공하려 한다. 다른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하게 반복하는 일상일 뿐이지만, 스스로는 절대 하지 못하는.
꼼짝도 하지 않는 도준을 향해 제아가 차분하게 물었다.
“오빠, 제대로 자본 게 언제야?”
그 한마디에 도준은 심장이 연속적으로 난타당하는 기분이었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잠 잘 시간도 없이 바빴던 연속적인 스케줄. 그런데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제아 때문이었다.
오아시스를 맛보았기에 한계에 다다른 몸을 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한계에 다다르자, 본능적으로 제 방식대로 오아시스를 찾은 것이다.
“지금 오빠에게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바로 잠이야.”
“…….”
“유혹은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지금은 잠이 먼저라구.”
말과 동시에 제아가 도준을 손을 살살 잡아끌었다. 연약한 힘에 이끌려 제아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소파 끝으로 긴 다리가 뻗어 나왔다.
이렇게 누워 있는 것 자체가 어색한 도준이 자꾸만 몸을 뒤척이자 제아의 손이 머리를 어루만졌다. 얼굴을 쓸어주고 어깨도 토닥여주었다. 어린 아이 달래듯이.
“오빤 좀 자야 해.”
자장가처럼 나긋나긋한 제아의 음성이 부드럽게 귓가를 건드렸다.
“그러니까 30분만 자자. 내가 옆에 있어줄게.”
도준의 머릿속은 굉장히 복잡한 실타래들로 얽혀 있는 상태였다. 그 실타래가 깨끗하게 풀리지 않는 한 제대로 된 숙면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토닥이는 손길과 나긋나긋한 음성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적정한 온기를 머금은 제아의 온기가 스며들고, 거짓말처럼 졸음이 쏠아졌다.
“잘 자, 오빠.”
오늘도 그는, 사랑하는 제 여자에게 조련을 당하는 중이었다.
30여분 후, 15층 로비에 도착한 인호는 짧게 노크를 한 후 바로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있어야 할 도준은 보이지 않고 소파에서 살짝 고개를 튼 제아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그 손가락의 의미는 바로…….
쉿―.
“문 비……?”
영문도 모른 채 인호는 얼른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소파 팔걸이 끝으로 삐져나온 누군가의 긴 다리가.
인호를 향해 나직하게 속삭이는 음성이 청아하면서도 조심스럽다.
“오빠 좀 더 재우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뒷말은 눈빛으로 묻는 제아였다.
인호는 구두 굽 소리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발걸음에 힘을 주며 소파로 다가갔다. 믿기지 않지만, 정말 편안한 표정으로 잠이 든 도준이 보였다.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녀석이 좁은 소파에서 이렇게 편히 잠이 들 줄이야.
잠시 생각에 잠긴 인호가 조그맣게 대답을 했다.
“20분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음 스케줄 장소로 이동할 때 운전을 도준에게 맡기면 말이다.
***
허름한 판자촌 동네 입구에 고급스러운 외제 승용차 한 대가 들어섰다. 연희였다. 그녀는 한 회장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재경 군이 원했다.’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한 회장은 고집스럽게 침묵했다. 아무리 성질을 내보아도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다.
“박재경 씨, 죽을 때가 되니 그래도 핏줄은 생각이 나나 보네요.”
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연희는 어둠에 잠긴 판자촌을 감정 없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지긋지긋할 정도로 가난한 이 동네는 세월도 비껴갔나 보다. 변한 게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가장 행복했고, 가장 추악하고 끔찍했던 기억을 품고 있는 곳.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연희의 마음은 생명체 하나 없는 사막 같았다. 남의 가슴에 못질을 한 당신 때문에.
미동도 없이 운전석에 앉아 있던 박 비서가 조심히 몸을 틀어 연희에게 말을 건넸다.
“사모님, 출발할까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보다. 연희는 대답 대신 출발하라는 의미로 차 창문을 닫았다.
***
엘리베이터에 내리는 제아의 손에는 도준이 쥐어준 차 키가 있었다.
―오빠, 나 운전 초짜야. 그리고 이렇게 비싼 건 내가 부담스러워서?
―운전은 할수록 늘어. 그리고 주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거야.
―하지만…….
―돈 아껴준다고 생각하고 몰고 다녀. 너 때문에 마련한 차니까.
제아도 안다. 평범한 동네에 비싼 승용차가 들락날락거리는 게 시선을 끌 것 같아 도준이 장만한 전용차라는 걸. 바쁜 업무 때문에 몇 번 밖에 운행이 안 된 그 차가 한 달 가까이 주차장에 쳐 박혀 있다는 것도.
“이제 끝났냐?”
돌아서니 로비 소파에 앉아 있다가 다가오는 지로가 보였다.
“한지로, 너 여기서 뭐 해?”
“내가 너 경호원인 거 잊었냐? 집까지 안전히 모셔다 드려야지.”
“내가 언제 퇴근할지 알고?”
“퇴근을 하려면 이 로비를 지나야 한다는 것 정도는 내 머리로도 알거든?”
아무렇지 않은 듯 씩 웃는 지로를 보는 제아의 눈살이 살짝 가늘어졌다.
“데려다줄 필요까지는 없어. 이러는 거 과잉보호거든?”
“나도 첨엔 과잉보호라 생각했는데, 아침에 그 일 겪고 나니 이해가 좀 되네.”
“그거야 갑작스럽게, 뭐야 그 눈빛.”
“문제아, 그러게 나같이 평범한 남자랑 연애하지 그랬냐.”
밉지 않게 지로를 흘겨보던 제아는 갑자기 무언가가 번뜩 떠올랐다.
“한지로, 나 약속이 있는데 나 대신 운전 좀 해주면 안 될까? 운전은 해야겠고, 그 약속은 절대 늦으면 안 되고.”
“누굴 만나러 가는 건데?”
지로의 질문에 제아는 어색하게 대답을 돌렸다.
“혹시 울 오빠한테 보고 같은 것도 올려? 올리는 거면 나 집 잘 들어갔다고 메시지도 넣어주면 엄청 고마울 텐데.”
생글생글 웃어보지만 지로는 요지부동이었다.
“거절하면 우리 비서 동생들한테 네 번호 불어버린다?”
제아와 도준과의 연애를 알게 된 비서들은 새로운 교훈을 얻었다. 사랑은 먼저 움직이는 자만이 쟁취하는 거라는. 때마침 잘 사는 집안의 막내 도련님 같은 잘난 한지로가 특별 전략팀으로 입사를 한 것이다.
하루뿐인데도 적극적인 비서들의 관심에 지로는 지쳐 있는 상태였다.
“아씨, 그 참새들한테 알려주기만 해 봐!”
지로는 제아가 내민 차 키를 신경질적으로 낚아챘다.
“대리 운전은 해줘도 나 거짓말은 안 해! 그렇게 알아!”
결국 제아의 승리였다. 문제아란 여자는 포악한 짐승을 길들이는 데 타고난 선수였으니까.
***
40여 분 후, 제아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커피숍에서 연희와 마주앉아 있었다. 연희와 이렇게 둘이 앉을 날이 있을 줄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서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우리 도준이랑 헤어질 마음 있나요?”
“죄송합니다. 오빠랑 저, 쉽게 헤어질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을 거예요.”
연희도 그 대답은 예상하고 있었는지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이 물잔을 꼭 쥐고 있는 제아의 손가락에 닿았다.
“제아 양은, 그 반지에 박힌 다이아가 얼마짜린 줄 알아요?”
“……?”
“웬만한 집 값 한 채 정도는 우습죠. 크기는 작아도 최상급 다이아거든.”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지를 둘러싸고 있는 작은 큐빅들은 색깔이 오묘하게 영롱했다. 큐빅의 수가 너무 많아서 다이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이런 걸 장난감 반지처럼 쉽게 사줄 수 있는 남자가 제 애인이라는 것을.
낯빛이 새하얘진 제아를 보던 연희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제아가 타고 온 새하얀 준준형 국산차가 도로 갓길에 주차되어 있었다.
“저 차, 비싼 차는 아니지만 제아 양이 살 능력은 안 되는 것 같은데. 맞죠?”
‘도준이가 사준 거죠?’라고 묻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 작은 큐빅들이 모두 다이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 차는 받은 게 아니라 잠깐 렌트한 겁니다. 정말입니다…….’라는 구차한 변명 따위, 제아는 하지 않기로 했다.
“도준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나한테 말하고 싶죠?”
“……네.”
“그 말, 믿어주죠.”
너무 쉬운 연희의 대답에 제아가 고개를 확 치켜들고 연희를 응시했다. 무슨 꿍꿍이일까 생각하는 순간 연희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도준이의 지금 위치와 능력도 사랑하겠죠.”
“저기 사모님.”
연희가 손을 들어 제아의 말을 저지했다.
“드라마에서 많이 봐서 식상하긴 하지만 그게 현실이기도 해요.”
연희로선 좀 더 지켜볼 생각이었기에 이런 식으로 헤어짐을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막강한 배경이 되어줄 그 집안에서 연락이 온 순간, 계획은 변경되었다.
“얼마를 원해요? 내 아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대가로.”
“사모님, 저는 돈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도 할 마음 없습니다. 제가 성에 안 차는 건 알지만.”
힘이 들 때마다 몇 번이고 도준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참고 또 참았다. 도움을 받는 순간, 도준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누군가에게 왜곡될 것만 같아서. 절대 평범하지 않은 남자와의 연애를 시작한 순간, 각오했던 일이기도 했다.
고개를 든 제아는 조금의 거짓도 없는 눈빛으로 연희를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사모님께서 결혼을 허락해주시면, 최선을 다해서 좋은 며느리가 되도록 노력할 거예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 나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아요. 내가 절대 허락 못한다면 어쩔 거죠?”
“……연애할 거예요. 오빠가 절 원할 때까지,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면서 연애할 겁니다.”
그런 제아가 순진하다는 듯, 연희의 입가에 희미한 비소가 어렸다.
“도준이가, 제아 양이랑 평생 연애해줄 것 같아요? 지금이야 뭐에 꽂혔는지 모르지만, 한순간이에요. 재력과 권력에 눈이 멀어 처자식도 버리는 게, 남자란 존재거든.”
그 말을 하는 연희의 눈에서 서늘 퍼런 칼날이 번뜩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도준이는 제일 그룹 후계자가 될 거고 곧 약혼을 하게 될 거예요. 지금 헤어지지 않으면 내연녀나 세컨드가 될 텐데, 괜찮아요?”
“내연녀든, 세컨드든. 오빠가 절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예요.”
“무슨 자신감이죠?”
“사모님, 그건 자신감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오빠와 저 사이엔, 깨질 수 없는 믿음이라는 게 있거든요.”
주눅 들기는커녕 제 할 말을 똑 부러지게 하는 제아의 모습에 연희의 안면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럼 이번엔 질문을 바꾸죠. 도준이가 헤어지자고 하면, 그땐 헤어질 건가요?”
“저 싫다는 남자 붙잡을 마음 없습니다. 오빠가 헤어지는 걸 원하면 전 미련 없이 헤어질 거예요.”
누구 딸 아니랄까 봐 건방지고 당돌했다. 하지만 연희는 표독스러움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함을 유지했다.
“도준이가 헤어지자고 하면 그땐 돈 같은 거 못 받을 줄 알아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돈 필요 없습니다.”
제아를 빤히 응시하던 연희가 갑자기 생긋 웃는다.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
“내 돈을 받고 아들처럼 키운 그 아이를 나한테 떠넘긴 누구랑 제아 양이 다른지 말이에요.”
“무슨, 말씀이신지…….”
태연한 척 되묻지만, 제아의 음성은 아니기를 바라며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몰랐나 보네. 10년 전에 제아 양 어머니가 나한테 도준이를 설득한 대가로 돈을 받은 거 말이에요.”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충격은 해일처럼 몰려와 제아의 뇌를 세차게 흔들었다. 끝까지 당당하던 모습은 어느새 허물어지고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연희가 우아하게 웃었다.
“제아 양에겐 좋은 부모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도준이에게는 아니죠.”
살포시 짓는 우아한 미소와 달리 심장을 할퀴는 연희의 직언은 서슴없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진실 앞에 제아는 나약해졌다. 그제야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맞추어져 나갔다.
퍼즐이 완성될수록 너덜너덜해지는 심장. 얼마나 오빨 원망하고 미워했는데. 그런데 그게 모두…….
나, 오빠를 어떻게 봐야 하지.
제아는 도준에 대한 미안함에 가슴이 쓰려왔다. 눈가가 시큰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녀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참아냈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지만 애써 참고 연희의 눈을 당당하게 마주했다.
“저는, 제 어머니를 이해합니다.”
윤영이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그 돈을 받아서 뭘 지키려 했는지 너무도 잘 알기에. 제아는 윤영을 원망할 수 없었다.
“다 제가 무능력한 탓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이제 절대 없을 거예요. 약속드릴게요.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제아의 뒤통수에 연희가 마지막 한 방을 잊지 않고 날렸다.
“제아양 아버지가 주식에 투자하려고 또 사채를 썼다죠? 지금 사는 집도 팔아야 하는 상황이고.”
“……오빠 도움 받을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과연 그럴까. 이미 한 번 도준이가 빚은 갚아줬고, 사내 대출 받은 돈도…….”
연희는 의도적으로 말을 끊었다. 가늘게 떨리는 제아의 어깨를 보며 느릿하고 또렷하게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도준이 통장에서 나간 걸로 알고 있는데.”
그 한마디에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마지막 자존심이,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커피숍을 뛰쳐나왔다. 가까스로 참았던 눈물이 후드득, 볼을 적시고 흘러 내렸다.
***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도준은 집에 들어왔다. 현관문을 열고 발을 딛는 순간, 이젠 익숙해진 복숭아향이 코끝을 부드럽게 스쳤다.
겉보기에는 뭐 하나 변한 게 없는 똑같은 내부이지만 도준에게는 아니었다. 물건이 놓여 있는 위치나 미세한 각도, 집안 내부의 공기마저도 다르게 보이고 느껴졌다.
제아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새롭게 손을 댄 흔적, 불쾌한 자취.
―우선 1억은 오늘 문 비서 통장에 입금되었어. 오천만 원도 추가 신청하면 똑같이 처리할게.
차에서 내리기 전 인호가 한 보고였다. 그런데도 도준은 제아가 걱정이 되었다. 그 성격에 분명 또 바짝 갚으려고 무리하게 일을 할 할 텐데.
곰곰이 생각하던 도준은 결론은 내렸다. 제아가 그의 집 헬퍼를 다시 할 수 있도록.
“유 실장을 이용해야겠군.”
사내 대출까지 그가 손을 썼다는 걸 알면 제아는 분명 난리를 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하니 이렇게라도 보이지 않게 도와줄 수밖에 없는 도준이었다.
빈틈없이 매어진 넥타이를 목에서 풀어헤치며 침실로 향하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서울 지역번호가 찍혔지만, 도준은 그답지 않게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너머, 발신인이 고집스럽게 침묵했다. 참을성 있게 침묵을 받아준 후에야 도준이 고요하게 이름을 불렀다.
“문제아.”
[…….]
“제아야.”
흐릿한 바람 소리, 숨죽인 고요 속, 희미한 여자의 숨소리가 묻어났다.
귀로는 들리지 않지만 심장으로 느끼는 그 소리.
흐느끼는 듯 가늘게 떨리는 숨이 그의 가슴을 묵직하게 쓸어내리는 순간, 도준이 말했다.
“너 지금,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