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지금 나한테 너, 허락해줄래?
2017.04.24.
비서팀과 전략기획팀 직원들에게 줄 커피를 사기 위해 들렀다가 우연히 둘을 목격한 제아였다. 처음엔 둘이 같이 있는 모습에 놀랐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창백하게 질린 윤영이 표정으로 보아 분명 뭔가 있는데. 그런데 윤영은 제아가 모든 걸 들었음에도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엄마 정말 이러기야?”
윤영은 지금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10년 전, 먼저 떠나달라고 한 것도 모자라 이준의 친엄마에게 돈을 받았다는 걸 알면. 보통이 아닌 제 딸이 어떻게 나올지 알기에 눈앞이 깜깜했다.
물론 윤영이라고 내켰던 건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상황을 해결할 돈이 없으면 세 식구 모두가 당장 한강에 투신자살해야 할 정도로 절망적인데. 그 당시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그러는 넌 왜 이준이가 돌아왔다고 엄마한테 말을 안 했어? 사장이 이준이란 것도!”
“말하려고 했었어! 근데 오빠에 대한 운만 띄우면 엄마가 질색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말해?”
“그래도 말했어야지! 너 얼른 다 말해. 이준이랑 지금 무슨 짓 하고 있는 거야?”
“내 대답 듣고 싶으면 엄마 먼저 말해줘.”
“할 말 없어!”
“말하기 싫다 이거지? 그럼 나도 말 안 해.”
씩씩거리는 두 모녀 사이에 양보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긴장감을 먼저 깬 건 제아였다.
“오천만 원, 추가 대출되나 알아볼 거야. 그러니까 오빠한테 전화해서 돈 필요 없다고 해.”
“제아야, 이건 자존…….”
“나 월급 올랐어. 이자 감당할 수 있다구. 몇 년이 걸려도 내가 원금이랑 이자 다 갚을 거야. 그러니까!”
‘엄마 딸의 마지막 자존심, 지켜달란 말이야.’ 그 말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다. 독하게 마음을 추스른 제아가 말을 이었다.
“오빠한테 다시는, 그런 부탁 하지 마.”
잔뜩 화가 난 듯 단호한 딸의 모습에 윤영은 만감이 교차했다.
오천만 원 가지고도 이렇게 펄펄 뛰는데 10억이 넘는 돈을 받은 걸 알면. 윤영도 자신이 염치없이 뻔뻔하다는 거 안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제아 너, 엄마가 분명히 말하는데 이준인 절대 안 돼.”
“……늦었어.”
“……?”
“미안해, 엄마. 나 지금 오빠랑…… 연애하고 있어.”
“너, 너!”
머리가 지끈거려 윤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왜 이런 상황이 온 건지, 그저 답답하고 참담할 뿐. 호흡을 고른 윤영이 흥분을 최대한 가라앉혔다. 훌쩍 커버린 딸은 소리 지르고 화를 내서 말을 들을 나이는 이미 지났으니까.
“제아야, 이준이를 향한 네 감정, 착각이고 혼동이야. 오빠로서 알고 지내는 것까진 뭐라 안할 테니, 지금 당장 그만둬. 엄마가 이해해주는 건 딱 거기까지야.”
“내가 어제 엄마한테 그랬지? 엄마 딸, 주제파악 할 줄 안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제아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윤영을 빤히 응시했다.
“내 부모님이든 오빠 부모님이든,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은 안 해.”
“……?”
“그 대신, 오빠랑 연애하는 것까지 뭐라고 하지 마. 엄마 딸 연애도 못 하고 노처녀로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제아의 말은 곧 선언이고 협박이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윤영의 눈에서 번쩍 불이 들어왔다.
“엄마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그거 몹쓸 짓이야! 알아? 왜 하필, 이준이야? 하고 많은 남자 중에!”
“하고 많은 남자 중에 고른 거니까 엄마가 좀 이해해주면 안 돼?”
“문제아!”
“반대하면 결혼 안 한다고 했잖아. 나도 반 양보했으니까 엄마도 반만 양보해줘. 응?”
“이준인 절대 안 돼!”
왜 안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제아는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 이 말을 했다가는 윤영과의 대화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혼자 갈 수 있지? 나 점심시간 거의 끝나서 들어가 봐야 해.”
무언가에 쫓기듯 제아가 커피숍에서 나갔다.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는 말이 떠오른 윤영의 눈가에 눈물이 젖어들었다.
“너까지 엄마 꼴 나고 싶어서 그러니? 이준이는 안 된다구, 제아야.”
빠른 걸음으로 제아가 사무실에 도착하자 김 비서가 쪼르르 달려왔다.
“제아 언니, 유 실장님한테 연락 왔는데 오후 6시까지 중역실에 회의 준비해놓고 퇴근하래요.”
김 비서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틀 가까이 회사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준은 외부 일정이 빡빡했다. 그렇다는 건 제아와 얼굴 볼 시간도 없다는 뜻.
기다렸다가 얼굴이라도 보고 갈 수 있으면 가라고 귀띔을 해준 것이었다.
“말해줘서 고마워.”
전략기획팀 사무실로 들어가는 제아를 보는 김 비서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 다시 봐도 부럽다. 사장님과 연애라니. 제아 언닌 전생에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이었을 거야.”
***
외곽에 위치한 요정의 야외 주차장에 차가 세워졌다. 차에서 내리려는 도준에게 인호가 펜을 내밀었다.
“들어가기 전에 버튼 눌러놓고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도준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녹음기능이 작동되도록 한 후 재킷 안쪽 포켓에 펜을 넣었다. 내부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밀실까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안내를 해주었다.
밀실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한 명이 문을 열자, 나이가 지긋한 50대 초반의 남성이 도준을 맞이했다. 중년 남자의 가늘어진 눈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도준의 얼굴에 예리하게 꽂혔다. 문상태 의원이었다.
갑자기 문상태가 큭, 하고 웃음을 짧게 흘렸다.
“자네, 꽤 재미없는 젊은이라는 거 아나?”
“재미와 전, 거리가 멉니다.”
“자네에 대한 자료가 너무 적어. 기업인들이 그렇게 자료가 적은 건 흔하지 않은 경우란 말이지.”
그가 말하는 자료라는 건 도준을 겁박할 만한 약점이 없다는 뜻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미국에서 지내다 왔고 이제 막 시작한 기업인에 불과하다. 또한 제일 어패럴을 맡은 이후로 최대한 투명 경영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도준이었다.
“나에 대해서 자넨 어찌 생각하나?”
“정치계의 확고한 이인자.”
가감 없는 도준의 돌직구에 순간 문상태의 눈빛이 번뜩, 했지만 이어지는 도준의 말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다음 대선 이후 일인자가 될 확률이 가장 높은 이인자. 맞습니까?”
그제야 문상태의 눈빛에 꽤 흐뭇한 기운이 돌았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자넨 아직 어느 줄에도 서지 않았더군.”
“저는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정치인과 기업인은 절대 끊어질 수 없는 관계야. 그래서 내가 자넬 만나자고 한 거지.”
“.......”
“어르신 건강 악화로 인해 꽤 많은 이들이 나에게 돌아서고 있네. 자네 아버지인 한 부회장도 그 중 한 사람이고. 그 노인이 많이 해먹었긴 했어, 안 그러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 회장의 하나뿐인 진짜 손자가 자네라고 하던데, 맞나?”
흠없이 완벽한 집안을 원하는 한 회장의 욕심 아래 복잡한 가족사를 그럴싸하게 포장을 해서 철저하게 숨겼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도준이 침묵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문상태가 미소 짓는다.
“나이가 들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핏줄에 연연하게 되는 법이지. 한 회장님도 다르진 않을 테고. 그래서 난, 확실한 사람과 손을 잡고 싶네.”
문상태는 지금, 한 부회장이 아닌 도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한 부회장은 그 노인에게 도움을 너무 받았어. 그래서 약점도 꽤 많이 잡혀 있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나?”
“…….”
“나에게 한 부회장은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할 인물이라는 뜻이야. 하지만 자넨 달라. 어떤 정치인과 연류도 되어 있지 않고 깨끗해. 그리고 한 회장님의 하나뿐인 손자이지.”
“…….”
“어떤가, 나를 믿고 내 줄에 서 보는 게. 똑똑한 젊은이니 어느 줄에 서는 게 이득인지는 금방 판단이 될 거라 보는데.”
“어느 줄에 서기에는 제 위치가 많이 미미합니다.”
모호한 거절이었다. 문상태는 적잖이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국내 1위 그룹인 제일 그룹의 후원을 받아야 막강한 정치 자금을 형성할 수 있다.
언론에 노출이 되어 있지 않은 인물로 기업인으로서의 이미지도 좋다. 이런 남자가 제 편이라면, 꽤 도움이 될 것이다. 해먹은 게 너무 많은 한 부회장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자네 아직 미혼이지? 내 막내딸이 아주 똑똑하고 예쁘다네. 딸 셋 중에서 가장 아끼는.”
“말씀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도준이 단호한 거절하자 문상태는 기분이 픽, 상했다. 젊은 것이 건방지게 말이야.
사실 그 노인네만 아니면 자신이 먼저 연락해서 이럴 필욘 없었다. 측근에게 보고를 받았다. 그 노인이 이 남자를 만나려고 한다고 말이다.
아직 건재한 노인의 권력, 제일 그룹 후계자가 될 남자.
절대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조합이었다.
“이유가 뭐지?”
“제가 특이체질이라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심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러니 의원님이 가장 아끼는 막내따님은 더 좋은 남자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의미였다.
“알겠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두게. 내 제의를 거절하면, 앞날이 평탄치만은 않을 거야. 똑똑한 젊은이라면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아야지. 내 사위가 되면 난 절대 자네를 버리지 않아.”
정계나 재계나 가장 정확한 편을 만들어주는 건 바로 결혼, 오래된 불변의 법칙이었다.
“의원님의 첫 번째 제의는 신중히 생각해보겠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제의는, 거두어주십시오.”
문 상태가 나눈 대화는 재킷 안에 있는 볼펜 모양의 녹음기에 착실하게 저장이 되고 있었다.
***
늦은 오후가 되어 회사에 도착했을 때 도준은 꽤 지쳐 있는 상태였다.
기업인과의 만남은 단순하게 득실 관계만을 따지지만 정치인과의 만남은 눈치 싸움이고 기 싸움이었다.
특히 오늘 만남이 그랬지만, 중용에게 내밀만한 확실한 증거를 만들어주었니. 이제 남은 건 중용의 선택만 남아 있다.
15층 중역실에 도착하자마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중역실 안, 한 부회장의 사람들은 대부분 걸러졌고 그의 사람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30분 만에 끝날 회의가 길어졌고 한 시간 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제아를 보는 시간조차 허용이 되지 않을 만큼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그였다.
1년이라는 기간 내에 모든 걸 끝내야 하니까. 어느 정도 자료는 모아졌고, 거의 고지에 다다랐다.
한 부회장이 비자금을 조성하고 현 대통령에게 정치 자금을 대서 사업적인 계약을 따냈다는 증거만 좀 더 확보해서 언론에 흘리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중용이 눈만 감아준다면, 그 이후는 그가 손을 대지 않아도 척척 진행이 되리라.
한 부회장이 무너지고 제일 어패럴만 입지를 다지면 한 회장이 원하는 걸 손에 쥐여주리라. 그러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니 윤영의 번호가 떠 있었다. 전화를 걸자마자 윤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준아, 제아가 알아버렸어. 입금해준 오천만 원 다시 돌려줄 테니 계좌 알려줄래?]
“가지고 계세요. 비상금은 있어야 합니다.”
[……언제 시간 되니?]
“스케줄 확인 후에 다시 연락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래, 알았다.]
전화를 끊고 중역실에 혼자 남은 도준은 몰려드는 피로함에 잠시 눈을 감았다. 보지 않아도 두 모녀가 한 바탕 했을 게 눈에 훤했다. 둘 중 누구 하나 호락호락 양보하지 않았을 테니. ……이를 어쩐다?
“하아.”
그런데도 제아가 보고 싶다, 미치도록. 그때 달달한 복숭아 향기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눈을 뜨자 그의 앞에 향긋한 차를 내려놓는 손이 보였다.
촘촘히 박힌 다이아 반지를 끼고 있는, 여자의 가는 손가락. 낯이 익고, 그리웠던.
“……제아야.”
그 이름이 흘러 나왔다. 머리를 틀어 올려서 드러난 단정한 옆얼굴에 눈빛이 닿았다. 힐끗, 곁눈질을 한 제아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도준이 손목을 잡아끌자 제아가 얌전하게 품에 안겨왔다. 도준의 다리 위에 앉은 제아는 목에 팔을 두른 채 어깨에 살포시 얼굴을 기댔다.
“나 혼자 남아서 오빠 기다린 거 알아? 하루라도 안 보면 못 잔다는 누구 때문에 퇴근할 수가 있어야지.”
투덜거리듯 작게 웅얼거리는 음성마저, 그리웠다. 보드랍고 따스한 여체, 산뜻한 체취까지.
제 여자의 모든 걸 각인하고 있는 몸이 기억을 되살리자 지쳐서 늘어졌던 몸 곳곳의 세포가 바짝 곤두섰다.
“진짜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재주는 타고 났다니까.”
살그머니 올려다본 제아가 눈웃음까지 살살 흘리니, 도준은 미칠 노릇이다. 너야말로, 사람 미치게 하는 재주 타고났잖아.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그 말을 도로 집어삼켰다.
“원래 남자는 자기가 더 사랑하는 여잘 만나고, 여자는 자기를 더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야 행복하대. 들어봤지?”
그딴 말들, 도준은 조금의 관심도 없다.
“나 있잖아. 바보같이도 내가 더 오빠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근데 오빠가 날 더 사랑하는 것 같아, 그것도 엄청. 그래서 행복하나 봐.”
제아는 사랑을 논하며 진지하지만 도준은 다른 의미에서 진지하다. 저열한 욕구, 내가 이렇게 음탕한 놈이었나, 생각하는 중이었다.
얇은 블라우스 안에 있을 연약하고 보드라운 피부를 기억해낸 손이 미칠 것처럼 간지러워졌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이 블라우스, 찢어버릴 수 있는데.
지분거리는 듯 움직이는 도준이 손길에 제아의 촉각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가 짙게 각인해놓은 감각들이 얇은 피부 밑에서 들끓었다.
하지만 제아는 아랫입술을 터질 듯이 깨물면서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오늘 엄마 만난 거 알아.”
“…….”
“오천만 원, 빌려주지 마.”
은밀하고 끈적이게 움직이던 도준의 손이 정지했다.
“오빠한테 물어볼 게 너무 많은데 안 물어볼래. 묻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도준이 제 인생의 언제부터 개입되어 있는 건지, 어디부터 개입되어 있는 건지, 앞으로 어디까지 개입이 되어 있는 건지.
제아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처럼. 깊이를 알 수 없고, 정도를 알 수 없이 끝이 없는 심연. 그 심연에 빠져버린 스스로도 이렇게 허우적대고 있으니.
“근데 이건 물어볼래. 생각해 보니, 단 한 번도 오빠한테 물어본 적이 없더라구.”
제아의 손이 단정하게 매어진 도준의 넥타이에 닿았다. 수많은 생각을 하는 머리 때문에 만지작만지작, 넥타이를 타고 흐르는 손끝이 아무 생각 없이 움직였다.
“왜 떠난 거야?”
질문은 단정한데 도준의 셔츠 위를 노니는 무책임한 손끝은 고약할 정도로 아찔했다.
미친 놈. 스스로에게 욕이 나왔다. 눈을 내리자 대답을 기다리는 제아가 그를 응시하고 있다.
차분하고 깨끗한 동공을 보는 순간, 저 맑은 눈이 가득 차오르는 열감으로 혼탁해지는 걸 보고 싶어졌다.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이 파팟 하고 끊어졌다. 이성을 앞지른 본능의 승리였다.
아직까지 셔츠를 만지작거리는 제아의 손을 도준의 손이 움켜잡았다. 생각보다 아귀힘이 셌다.
“대답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
“자꾸만 자극하잖아. 네 손이.”
“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넌 그냥이지만 나한테는 유혹이야. 그리고 그 유혹에, 나 지금 막 넘어갔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도준은 지독히도 섹시했다.
그 손가락을 도준이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 떠올리자 이상하게도 몸이 달아올랐다. 그때 감당 못 할 한마디가 도준의 입술 사이로 덤덤히 흘러 나왔다.
“……하고 싶어졌어.”
제아의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흡, 하고 새어 나왔다. 서,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가. 그런데 느릿하게 시선을 올린 도준이 정확히 쐐기를 박았다.
“지금. 너랑.”
도준은 몰라도 제아는 지금 이 상황이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여긴 너무 밝고, 그리고 회사고, 그리고…… 아, 몰라! 우선 도망치자!
“오빠 바쁜데 내가 괜한 말로 방해했나 봐. 얼굴 봤으니까 됐어.”
도준의 다리에서 내려온 제아는 태연한 척,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문으로 다가섰다. 손잡이를 돌려 당기자 문이 서서히 틈을 보였다.
드디어 탈출구가 확보……?
그때 고급스러운 커프스단추가 보이면서 뒤에서 뻗어 나온 팔이 문에 손을 댔다.
“네가 먼저 대답해 봐. 그럼 나도 대답해줄 테니까.”
나직하게 읊조리는 어투가 지척이다. 등 뒤, 도준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지금 나한테 너, 허락해줄래?”
“……!”
“아, 이런 데서 안으면, 내가 널 존중하지 않는 건가.”
젠틀맨처럼 정중히 허락을 구하지만 묻는 의미는 저열하게 음탕하다. 그런데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다.
제아는 도준에게 어깨가 틀어 잡혀 서서히 몸이 돌려졌다. 문과 단단한 남자의 몸 사이,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여, 여기, 회사야.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문제되는 게 그것뿐이면…….”
“……?”
“허락한 걸로.”
귓가에 바짝 붙은 숨결이 스며들어 단번에 제아의 심장을 옥죄는 순간…….
탁―.
가라앉은 정적 속, 제아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게 드러났던 마지막 탈출구가, 막혀버렸다.
“방금 전에 네가 그랬잖아. 15층에 너와 나뿐이라고.”
웃음기가 배인 허스키한 음성이 지독하게 섹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