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너랑 있으면 내가 참 나쁜 놈이 되는 것 같아.
2017.04.20.
제아는 퇴근하기 전 경리 부서에 들렀다. 헬퍼 월급에 회사 월급까지 많이 올랐다고 하지만 당장 사채를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루 종일 고민한 끝에 생각해낸 게 바로 사내대출이었다. 이제 겨우 1년 남짓 된 재직 기간, 대출 한도도 걱정이 되었지만 밑져야 본전이니까.
경리팀도 물갈이가 되었는지 앉아 있는 얼굴들이 모두 낯설었다.
“제가 사내 대출이 가능할까요?”
“사내대출 원칙은 2년 이상 재직해야 가능한데.”
뉴페이스인 박민선 과장이 제아를 힐긋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문 팀장님은 사장님 직속 부서인 비서팀이자 특별 전략기획팀 소속이라 재직연수가 부족해도 가능해요.”
팀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자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휘둥그레진 제아의 눈에 기대감이 어렸다.
“사내 대출 한도가 얼마나 되나요?”
“얼마나 필요한데 그래요?”
“1억 정도?”
당연히 안 될 거라 생각해서 한 말인데 박민선 대리가 생긋 웃었다.
“가능합니다. 연 1% 대 이율로.”
“저, 정말요?”
제아는 순간 이성을 놓아버릴 뻔했다. 초록색 대문이 있는 집을 지킬 수 있다는 흥분감에.
“네. 그 대신 사장님 직속 부서만 특별히 해당하는 조건이라 다른 부서가 알아서는 안 돼요.”
“당연하죠! 내,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제아가 경리부서를 벗어나자 박 과장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경리팀 박 과장입니다. 문제아 씨가 사내 대출 상담을 받으러 와서 말씀해주신 대로 안내했습니다. 네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박 과장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
꿈이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떠보지만 사라지기는커녕 눈앞의 도준은 조각처럼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10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윤영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끔씩 이준이 제 딸을 보는 눈빛에서 불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종종 남매들의 일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다가 그 일이 터졌지만 제아가 아니라고 했다. 저 혼자 잘난 오빠를 동경한 거지 도준은 절대 아니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무릎 위에 놓인 윤영의 손이 손가락 마디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힘이 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내가 지금,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럽구나. 지금은, 그냥 가주면 안 되겠니?”
조용히 일어난 도준은 테이블 위에 명함을 올려놓았다.
“집에 대한 건 생각해보시고 연락주세요.”
도준이 사라지고 나서야 윤영은 막혔던 숨이 탁, 트였다. 대문을 넘어서 들어오는 도준을 본 순간, 시야에 혼란이 일어났다. 재경 오빠가 살아 돌아온 거라고 착각이 들 만큼.
하지만 안개 낀 듯한 뿌연 시야가 거치자 눈앞까지 성큼 다가온 건 재경이 아닌 도준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싫은 그 여자를 닮은 얼굴을 한 채 말이다.
윤영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골드 명함에 박혔다. 떨리는 손끝이 명함을 드는 순간, 어질어질 현기증이 난 윤영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제일 어패럴 대표 이사 한도준.-
불안함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
화연은 식사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남자, 여성 편력이 좀 심한 것 같아요. 일리안이라는 여자에 레이나 킴이라는 조선 호텔 상속녀까지?”
중용이 태연하게 화연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외모에 능력과 재력까지 겸비한 남자다. 그 정돈 감수해야지. 그래서 너도 갖고 싶은 게 아니냐.”
틀린 말은 아닌지라 화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일리안과 레이나 킴 모두 알아주는 재벌가의 레이디다. 그럼에도 그 남자는 어떤 여자도 공식적으로 드러내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있다.
“남자는 잡히지 않는 바람이야. 수많은 것들을 스쳐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바람 말이다. 한 사장에게 사랑은 바라지 마라.”
“할아버지!”
“한 사장의 다른 여자들은 모두 내연녀나 첩일 뿐, 제일 그룹 후계자의 안주인은 민화연이다.”
그제야 화연은 제 외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떠올렸다.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모든 권력은 여전히 제 손에 틀어쥐고 있는 노장이었다. 어차피 정략 결혼할 거, 사랑은 사치일 뿐.
“그런데 할아버지. 그 약 진짜 그쪽으로 효과 확실한 거예요?”
“넌 상황만 그렇게 몰아가면 된다. 이후는 이 할아비가 알아서 할 테니.”
“어떻게 하시려구요? 요즘 남자들은 여자랑 잠 한 번 잤다고 책임지고 그러지 않아요.”
그래도 화연이 불안한 듯 칭얼거리자 중용은 사람 좋은 웃음을 허허, 하고 흘렸다. 제 외손녀가 어지간히도 그 남자가 가지고 싶나보다. 이렇게도 날 못 믿고 불안해하는 걸 보니.
“그럴지도 모르지.”
“할아버지!”
“그런데 넌 그냥 여자가 아니야.”
수십 년 동안 뒷방에 앉아 청와대와 국회를 주물럭거리는, VIP가 어르신이라 부르는. 그게 박중용이었다.
“감히 박중용의 하나뿐인 손녀를 건드려 놓고 나 몰라라 할 순 없지. 암, 그렇고말고.”
한도준은 화연뿐만이 아니라 중용 자신도 탐이 나는 인재였다. 지금은 후계자 자리에 연연하고 있지만, 재계라는 우물보다 정계라는 드넓은 바다를 보도록 시야를 터주면 될 일. 시작이 비틀어지면 어떠나. 그 비틀어짐을 맞출 권력이란 걸 가지고 있는데.
화연과의 식사를 마친 중용은 윤 비서를 불렀다.
“제일 어패럴 한도준 사장이랑 조선 호텔에서 자리 한 번 마련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착오 없이 진행하도록 해. 만만치 않은 이니까.”
***
제아는 퇴근을 하자마자 윤영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잘됐구나.”
윤영의 입술은 웃고 있지만 속은 웃는 게 아니었다. 사채인 만큼 이자는 벌써 눈덩이처럼 불어 있었다. 하지만 고생만 하는 딸에게 더 부담을 주기는 싫은 윤영이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1년밖에 안 된 새내기한테 1억이나 대출해준대?”
“사장 직속 부서라서 주는 특별 혜택이거든요? 엄마 딸, 사장 비서에다가 이번에 승진까지 했잖아.”
자랑스럽게 웃는 딸의 모습에 윤영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 모든 게 도준이 뒤에 있어 가능한 일이란 걸 아니 말이다.
“한도준이라는, 그 사장 말이니?”
“엄마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TV에서 하도 많이 나와서 알고 있는 거야. 젊고 멋지고 능력 있는 CEO라고 하던데.”
“그래서. 사장 얼굴도…… 봤어?”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딸을 윤영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이 유난히 큰 것도 있지만, 거짓말은 절대 못하는 성격인지라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준이를 만났구나. 아니, 이미 만나고 있었어. 그런데 왜 엄마한테 말 안 해줬어? 이준이 돌아왔다고. 이준이 마음은 알고 있니.’
딸에게 물어야 할 말들이 수도 없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윤영은 꾹 참았다.
“신비주의인지 얼굴 공개는 안하더구나. 네 사장, 잘생겼니?”
“엄청 잘생겼지. 보는 여자마다 한눈에, 반해 버릴 정도로.”
“그래서, 너도 반했고?”
윤영이 빤히 바라보자 제아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엄마 딸, 오르지도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않거든?”
두 번째 대답은 진심이었다. 꿈도 꾸어서는 안 될, 감히 오르지도 못할 나무.
도준은 결혼까지 생각하지만 그건 지독히도 현실성이 없는 이상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랬기에 지금 이 행복을 깨버리고 싶지 않다. 간절하게 지키고 싶다.
‘엄마, 나 오빠랑 결혼은 못 할 것 같아. 그래서 오빠랑 사랑이라도 죽도록 하고 싶어. 오빠랑 헤어지는 날이 오면, 그땐 그 추억이라도 있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거든.’
배시시 웃는 제아를 윤영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 제아의 표정은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하다.
만약 도준과 뭔가 있다면 바로 제게 말하고 정면돌파 할 딸이다. 그토록 좋아하던 도준이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면.
‘엄마, 나 오빠랑 결혼할 거야! 오빠도 내가 좋대!’
그런 딸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는 건, 아직 그런 상황까지 가지 않았다는 뜻.
‘그래, 우리 애들이 그렇게 불효막심할 리가 없지.’
이준도, 그리고 제아도. 둘 다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부모를 끔찍이 생각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준이만 만나서 잘 말하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이성이 앞서는 차분한 애이니,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이준이, 이준이를 만나야겠어.’
윤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제아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드르륵, 도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너 때문에 잠이 안 와.-
도준에 대한 그리움이 잉크 번지듯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나도 보고 싶어. 지금, 엄청.’
정성스럽게 핸드폰 키패드를 꾹꾹 누르는데 핸드폰이 또 울렸다.
-그래서 달려와 버렸어.-
마지막 메시지에 이성이 툭, 끊겼다.
“엄마, 지로랑 지연이가 지금 포차라고 나오라네? 잠깐 나갔다 올게!”
대문을 박차고 나왔지만 좁은 골목길은 스산하기만 하다. 어디에도 도준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골목길을 더듬던 시선이 홀린 듯이 맞은편 오른쪽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육중한 대문을 여는데 묘하게 심장이 쿵쾅거린다.
드넓은 정원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유려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 실루엣이 돌아보는 순간, 제아는 비글처럼 그에게 내달렸다. 번쩍 점프를 해서 도준의 품으로 와락 안겨들었다.
거칠게 안겨드는 제아를 도준은 거뜬히 품으로 받아 높이 들어올렸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내려다보는 제아의 시선에 사랑이 듬뿍 묻어났다.
‘보고 싶었어.’
그 눈빛에 도준도 온 마음을 다하여 대답했다.
‘내가 더 보고 싶었어.’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고 나서야 따스한 온기가 어린 집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도준은 제아에게 모른 척 물었다. 그래도 제아가 자신에게 먼저 그 말을 해주기를 바랐으니까.
“사내 대출 신청했던데.”
“뭐야, 그런 것까지 보고가 올라가?”
흠칫, 작은 어깨가 솟아올랐지만 제아는 태연한 척 대답을 했다.
“내 전속부서라서 특별 혜택을 받으니, 당연히 보고가 올라올 수밖에.”
“아, 그렇긴 하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제아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돈이 왜 필요한지 물어보면, 대답해줄래?”
“아니.”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단호했다. 손을 깍지 낀 제아가 도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가만히 감은 눈꺼풀이 평온해 보였다.
“내 도움 받을 생각은 없고?”
“도움 받을 거야. 혹시 내가 대출 받게 되면, 오빠 승인해줄 거지?”
“……그래.”
제아는 모른다. 경리팀에서 제아가 대출 받는 순간, 도준의 통장에 있는 돈이 입금이 될 거라는 걸.
“제아야. 너랑 있으면 내가 참 나쁜 놈이 되는 것 같아.”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뜨려는 제아의 눈을 도준의 손이 가렸다.
“50미터 반경에 네 부모님이 계시는데도 나쁜 짓이 하고 싶어져.”
시야는 가려졌지만 입술 점막 위로 느껴지는 숨이 말해준다. 도준의 입술이 다가왔다는 걸.
“그러니까 제아 넌 눈 뜨지 마.”
부모님 몰래 하는 나쁜 짓은, 더욱더 심장을 강하게 틀어쥐고 조인다.
“나쁜 짓은 내가 다 할 테니까.”
제아를 마음에 품은 순간부터인지 모른다. 키워주신 분들에게 불효라는 걸 시작한 게.
“넌 그냥 가만히 있어.”
***
다음 날 도준은 회사에도 들리지 못한 채 두 번째 일정 장소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업무용 핸드폰이 아닌 지극히 사적인 핸드폰이, 발신자는 윤영이었다.
예의 바르게 전화 통화를 끝낸 도준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
“30분 정도 여유 있지? 회사로 가도록 해.”
인호는 뭐라고 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또 도졌고만. 나도 서러워서 얼른 연애를 하던가 해야지.’
어젯밤 애틋한 연인이 만났다는 걸 알 리 없는 인호는 제아가 보고 싶어서 저러는 거라고 단정 지었다. 제아와 연애를 시작한 이후로 이런 일은 빈번했으니까.
회사 근처에 위치한 커피숍으로 들어가자 벽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윤영이 손을 들어보였다.
“이준아.”
윤영은 바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웃고는 있지만, 입가가 경직되어 있었다.
“방금 나온 거라 따뜻할 거야. 복숭아 홍차, 아직 좋아하지?”
“네.”
도준은 일회용 컵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홍차를 한모금 마신 후 무심히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자, 차마 운을 떼지 못하는 윤영이 보였다.
그래서 도준은 윤영이 말을 하기 편하도록 먼저 말문을 텄다.
“집에 대한 건, 생각해보셨어요?”
“그래서 연락했어.”
“제 도움, 받으셨으면 합니다.”
느릿하지만 확고하고 흐트러짐 없는 말투였다. 그제야 윤영이 시선을 들어 도준과 눈을 마주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 사이로 드디어 그 말을 뱉어냈다.
“염치 불구한 거 아는데, 나한테 오천만 원만 빌려줄래? 빌릴 사람이, 너밖에 없구나.”
윤영은 잠을 설치면서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결론은 염치나 자존심이 생계를 이어가게 해주지는 않는다는 것.
초록색 대문이 있는 집을 떠나는 것만 생각해도 눈앞이 캄캄했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집인데, 그 집을 잃어야 한다니.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 집을 지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까짓 손가락질, 기꺼이 받을 각오 되어 있으니까. 가족을 위해서라면. 난, 엄마니까.
“계좌 알려주세요. 바로 이체해드릴게요.”
별다른 말없이 받아주는 도준이 윤영은 고마웠다. 그리고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이번 일을 빌미 삼아서 받아주라고 하면 어쩌나 하고. 그런데 뜻밖의 말을 도준이 먼저 했다.
“그 대신, 이번 일은 저와 어머니만 알았으면 합니다. 어머니와 제가 만난 것까지.”
불효는 도준 혼자 저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가 윤영과 윤식의 허락을 받을 때까지 제아는 최대한 몰랐으면 좋겠다.
제아의 성격상 알게 된 순간, 윤영과 트러블을 일으킬 게 분명하니까. 나쁜 역할은 오로지 도준 혼자만의 몫이다.
“제아가 경제적으로 제 도움을 받는 걸 싫어합니다.”
윤영은 갈등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도준은 흔들림 없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아 지금, 가장 바쁘고 힘든 시기입니다. 이 시기만 지나면 확실하게 회사 내에서 입지를 굳힐 거라. 제아 성격상 저와 어머니가 만난 걸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윤영도 그 말엔 침묵으로 찬성했다. 제아는 한 번 몰두하기 시작하면 끝장을 봐버리는 성격이다.
도준과 만난 걸 알면 하던 것들 다 때려치우고 윤영과 결판부터 내려고 할 것이다. 차라리 지금은 모른 척하는 게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준아, 내가 너한테 도움을 청하긴 했지만?”
그때, 도준의 재킷 안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도준이 윤영의 말을 정중하게 잘랐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지금 하시려는 말은 나중에 들을게요.”
“……?”
“스케줄 이동하는 중에 잠깐 들린 거라, 지금 바로 일어나봐야 합니다.”
“에구머니나. 내가 바쁜 사람을 무턱대고 불러냈구나.”
민망한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는 윤영을 도준은 잠시 바라보았다. 이대로 일어나기에는 뭔가 마음이 찝찝하다고 해야 할까.
“제 쪽은 약속 못 드립니다.”
도준이 불쑥 꺼낸 말에 윤영이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께는 꼭 허락 받고, 제아 데려갈 겁니다.”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식.
제아가 절대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걸 도준은 잘 알고 있다. 윤영과 윤식의 허락만은 어떻게든 받고 말리라. 진심이 안 되면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서라도 말이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 아, 그리고 이거 가져가려무나.”
윤영이 의자 뒤에서 묵직한 쇼핑백 몇 개를 힘겹게 꺼내서 내밀었다. 그의 예민한 후각은 쇼핑백 안에 든 게 무언지 단번에 간파했다.
“네가 좋아하는 반찬 좀 몇 가지 싸왔어. 어제 보니까 많이 야윈 것 같아서.”
짐이 무겁다고 절대 택시를 타고 왔을 윤영이 아니었다. 이젠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서, 왜 저 무거운 걸 들고 왔는지. 그저 내려다보는 무거운 도준의 눈빛에 윤영이 움찔했다.
“내, 내가 괜히 가져왔지? 비싸고 좋은 음식, 네 어머니가 어련히 잘 먹일 텐데.”
거두려는 윤영의 손을 도준이 꼭 잡았다. 한때는 고왔을 테지만 지금은 거칠어져 있는 손을 꼭 잡았다가 그 손에서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주세요. 가져갈게요.”
“입맛이 변했을 수 있으니 입에 맞지 않으면 버려도 돼. 알았지?”
“어머니 음식, 그리웠습니다.”
진중한 도준의 말에 윤영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버리지 않고, 다 먹을게요.”
쇼핑백을 받고 일어나는 도준에게 윤영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런 말 하는 거 염치없는 거 알지만. 10년 전의 일, 제아한테 말했니?”
도준이 돌아보았다. 잠시 바라보던 도준이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말할 생각 없습니다.”
도준이 사라지자 그제야 윤영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조만간 다시 만나서 꼭 말해야겠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그때 누군가 윤영의 앞에 털썩 앉았다.
“10년 전 일, 내가 모르는 게 뭐야?”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호락호락 물러날 마음이 없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제 앞에 앉아 있는 딸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