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아들 대신, 아들 같은 사위가 되면 안 됩니까?
2017.04.17.
“한지로,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야? 그 옷차림은 또 뭐고?”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지로가 패셔너블하게 입은 슈트 차림은 봤지만, 오피스룩의 슈트는 처음이었다.
씨익, 잘생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지로가 웃었다.
“특별 전략기획팀 신입 사원 한지로, 팀장님께 인사드립니다.”
“대체 무슨 소리야?”
묻는 소리에 대답은 하지 않고 지로는 살짝 부어 오른 제아의 뺨을 슬쩍, 손으로 어루만졌다.
“이런, 첫날부터 제대로 보호를 못 해줬네.”
“그게 무슨 소리냐구. 당장 대답 안 해?”
“말 그대로야. 나 제일 어패럴에 입사했거든.”
“누, 누구 맘대로?”
“들어오는 건 한강훈이 힘써줬고, 누구 마음대로라, 도준 선배 마음대로?”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는 제아를 지로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직 제아에 대한 마음을 접지는 못했다. 그렇게 쉽게 접을 수 있는 마음이었으면 애초에 10년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
얼마 전 도준이 갑자기 지로를 찾아왔다.
“한강훈과 나의 진짜 관계, 넌 알고 있겠지?”
강훈은 지로의 외할아버지가 밖에서 외도해서 낳은 딸의 자식이었다. 사랑받으면서 당당하게 자란 제 어머니와 다르게 꽁꽁 숨은 채 자라야 했다.
그리고 본인의 태생처럼 아들도 숨겨진 내연녀가 되어 낳았다. 어머니는 지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친아버지 덕분에 강훈은 지금 완벽하게 제일 그룹의 손자 노릇을 하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형제인 척하지만 실상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그들이 제일가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고 있었다. 사이가 좋을 리가 없다.
“할 말이나 해요. 선배 얼굴 보는 거 썩 좋지는 않으니까.”
“나와 같이 일해 보는 건 어때?”
“풉!”
신경질적으로 물을 들이키던 지로의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미친 놈 보듯이 도준을 보았다.
“내가 그 정도로 막돼먹은 새낀 줄 아나.”
“.......”
“선배 뒤통수 쳤음 쳤지, 강훈형 뒤통수치는 짓은 안합니다.”
그때 도준이 서류 봉투를 툭, 던졌다.
“서류나 보고 대답하지 그래.”
마지못해 서류를 본 지로의 날카로운 눈꼬리가 실룩거렸다. 탄탄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지로의 부모님이 부도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투명 경영을 한 탓에 주주와 직원들이 믿고 뜻을 모아 기다려주었고 덕분에 위기는 모면했다. 그런데 제 부모님 회사를 부도로 몰아갔던 배후가 강훈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또 은밀하게 뒷작업을 하고 있을 줄이야.
요즘 부모님의 한숨 소리가 부쩍 늘었다 했더니 또 강훈의 짓이었던 것이다. 결국은 제 어머니의 복수를 뒤에서 남몰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 개새끼, 진짜.
바닥에 침을 퉤, 뱉은 지로는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렸다. 꽉 다물린 잇새 사이로 살벌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나 책상머리 앉아서 하는 건 딱 질색인데.”
“나도 너한테 그런 건 바라지 않아.”
아쉬워서 찾아온 놈이, 더럽게 기분 나쁘게 말하네. 지로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한강훈을 찾아가서 제아에 대한 마음을 털어놔.”
“……선배, 미친 거죠?”
“마음속으로 했던 내 욕도, 한강훈에게 실컷 하고. 가감할 필요 없이 생각했던 그대로.”
그에게 엄청난 쌍욕을 퍼부었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지로는 괜히 헛기침을 흘렸다.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인 도준이 나직하게 제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찬찬히 듣고 있던 지로의 단순했던 머릿속이 탁, 트였다.
천재와 둔재의 차이를 지로는 도준을 보면서 절실히 느꼈다. 한도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물론 싸움이라면 자신이 있다. 그런데 무슨 자신감으로 나한테 제아의 밀착 경호를 맡기는 거지? 나 꽤 매력적인 놈인데 말이야.
“그렇게 붙어 지내다가 제아랑 나랑 붙어먹으면 어쩌려고. 모르는 게 남녀 사인데.”
갑자기 도준이 시니컬한 미소를 짓는다. 오만함의 끝을 찌르는 자신감, 붉은 입술이 팽팽하게 휘어지는 게 남자가 봐도 꽤 요요한 미소였다.
생긴 건 진짜 끝내준다, 아무리 봐도. 게다가 머리까지 똑똑하니. 우리 제아가 넘어갈 만하잖아. 아, 빌어먹을. 기분 더럽네, 진짜.
“그럴 일은 없어.”
“하아, 자신감 끝내주네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결국 지로는 짜증스럽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얻는 게 없잖습니까!”
도준이 느른하게 몸을 뒤로 기댔다.
“너, 당한 만큼 한강훈한테 되돌려줄 수 없잖아. 당하고 앉아 있을 성격도 아니고.”
“.......”
“그거, 내가 해준다고.”
요점만 정확하게 치고 들어오는 도준은 거침이 없다. 오만하고, 당당했다.
“한강훈, 그리고 한태영. 내가 무너뜨려.”
그런 남자가 약속을 하고.
“그러니까 한지로, 제아 좀 부탁한다.”
어울리지도 않는, 뜻밖의 부탁을 한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게.
“내가 없을 때.”
사랑 앞에선 이 오만한 남자도 결국은 무릎을 꿇는다.
이 새끼는 사랑하는 것도, 짜증나게 멋있네.
***
지로는 신경질적으로 짧은 머리칼을 버릇처럼 툭툭, 털었다.
“말하자면 길어. 뭐 요점만 말하자면, 선배가 짜증나게도 날 믿나 보더라고.”
도준이 가장 경계했던 남자 1호가 바로 한지로이다. 그런 지로에게 도준이 경호를 맡겼따고? 이걸 믿어야 해, 말아야 해.
그러다가 퍼뜩 김 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강훈 이사의 친척 한지로. 설마…….
“한지로 너.”
“……?”
“스파이지!”
“아, 무슨 개소리야.”
“네가 우리 오빠 말 들을 성격이야?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면서? 이실직고 안 해?”
지로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장인데 얼마나 바쁘겠냐? 지금 후계자 싸움 지금 치열할 건데. 너랑 온종일 붙어 있을 수 없으니까 나한테 부탁한 거지.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옆에 찰싹 붙어서 널 잘 지키란다.”
“……정말이야?”
“야! 너 내가 성질은 더러워도 거짓말하는 거 봤냐?”
제 남자의 깊은 사랑에 감동받았는지 그제야 제아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드는 것 같다. 10년의 순정을 외면당한 쓰라린 사나이 상처는 보이지도 않은지 말이다. 지로는 과연 자신이 지금 잘하는 짓인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냥 있기에는 강훈에게 속은 게 억울하다. 도준의 말대로 덤비기에는 강훈은 태산이다. 그렇다고 모른 척하면 분명히 또 내 가족을 건드릴 테고.
“여튼 문 팀장님, 난 사원을 가장한 네 경호원이니까 나한테 일 시킬 생각하지 마라. 컴퓨터 다루는 거 세상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라는 거 알지?”
문 팀장이라 부르며 반말을 툭툭 내뱉는 남자를 제아는 기가 막힌 눈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번뜩 떠오른 건…….
“한지로, 너 우리 오빠랑 편먹으면 누굴 상대하는 건지나 알아? 알고 그런 소리를?”
“알아, 누군지.”
“알아? 어떻게?”
“한강훈한테 갚아줘야 할 빚이 있거든.”
지로의 살벌한 표정에선 조금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틀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지로의 중얼거림이 제아의 귓가를 나직하게 긁어내렸다.
“그 새끼 무너지는 꼴, 내가 꼭 보고 만다.”
***
오늘은 한 회장에게 중간보고를 하는 날이었다. 간단명료하게 30분간의 보고를 끝낸 도준이 대문을 나서자 인호가 다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한 사장! 문 비서 동네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어.”
“그런데?”
“집을 내놨는데 우리보다 돈을 더 얹어서 사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하네. 아마도 한 여사님이 그 집을 사려고 움직이는 것 같아. 우리보고 어쩔 거냐고 묻는 뉘앙스가 돈을 더 얹어줬음 하는 것 같아. 어떻게 할까?”
도준은 잠시 손목시계를 확인해서 시간 계산을 했다. 아무래도 스케줄을 하나 빼야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다음 미팅, 인호 너 혼자 가줘야겠어.”
“중요한 미팅은 아니니 그러지 뭐.”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한 여사님 계시는 숍 주소, 핸드폰으로 메시지 보내놓을게.”
도준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차 키 내놔.”
***
연희는 오후에 있을 자원 봉사를 위해 숍 안 프라이빗 룸에서 컬을 말고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도준이 들이닥쳤다.
한겨울의 호수처럼 얼어붙은 아들의 표정에 연희가 우아하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숍 직원들이 조용히 자리를 비워주었다.
“필요도 없는 그 집, 사서 뭐 하시려는 겁니까?”
“흔적도 없이 부숴버릴 거다. 잡초가 돋아나는 공터로 놔둘 거야.”
연희도 그 집을 원한다. 그 집을 지켜주려는 자신과 달리 부숴버리기 위해서. 의자를 돌린 연희는 태연한 표정으로 아들을 마주 보았다.
“그 남자 목숨 값인 푼 돈, 원래 내게 왔어야 했어. 그런데 그들이 가로채서 그 돈으로 산 집이야. 그러니 당연히 내가 찾아야 하는 거 아니니?”
폭풍전야 같은 긴장감 속, 어머니와 아들의 눈빛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 집, 어머니가 포기해주세요.”
“내가 그 집 포기하면, 넌 뭘 해줄 거니?”
도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은 것 하나마저도 조건 없이는 절대 들어주지 않는 어머니라는 존재 때문에.
“원하는 게 뭡니까?”
“그 여자 딸과 헤어지라면, 헤어질 거니?”
“.......”
“못 헤어지겠나 보구나. 혹시 헤어지자고 하면 그 여자애가 죽는다고 협박이라도 할까 봐 겁이 나니? 하긴, 그 주제에 재벌가 아들을 만나는 게 쉽진 않겠지. 제 엄마처럼 모든 남자는 자기 손에 틀어쥐어야 직성이 풀리겠지.”
연희가 철저하게 착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헤어지는 순간 죽는 건, 제아가 아니라 도준 자신이라는 걸.
어머니란 여자에게 대체 뭘 바라고 찾아온 걸까. 대가 없이 들어줄 거라고 착각하고 찾아온 것부터가 도준에겐 오류였다.
차분하게, 씹어뱉듯이 도준은 내뱉었다.
“그 집을 사서 부수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예상했던 바였다.”
“그 분들을 속이고 빼앗고 계속 사들여 보세요. 그까짓 집, 내가 얼마든지 사줄 생각이니까.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시죠, 어머니.”
최후에 남는 게 부서진 집일지, 따뜻한 온기가 도는 가족의 집일지. 도준은 끝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돌아서는 도준의 뒤로 연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네게 그렇게 흥청망청 쓰는 돈이 다 누구 거라 생각하니?”
도준은 천천히 돌아섰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몸을 숙여 연희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어머니가 제게 대가 없이 뭘 주신 적 있습니까? 제 기억엔 대가를 모두 치른 걸로 기억하는데.”
새까만 머리칼과 달리 붉은 빛이 감도는 것 같은 눈동자는 그 남자를 쏙, 빼닮았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연희는 고개를 틀어버렸다.
“그래도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란 사람이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
“마지막에 양심은 지킨 아버지였으니까요. 어머니와 헤어지는 대가로 한 회장님께 받은 돈을 쓰지 않고 제 앞으로 해놓으셨다고 하더군요.”
“뭐, 뭐라고?”
처음 듣는 소리인지 연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액수는 얼마 안 되니 기대하지 마십시오. 한 회장님이 보유하신 재력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한 액수이니. 누구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제가 워낙 똑똑하지 않습니까?”
“……!”
“돈 불리는 재주가 탁월해서 꽤 거대해졌거든요. 어머니에겐 빌린 것만 있을 뿐, 제가 쓴 건 없습니다.”
***
부동산을 들렸다가 집으로 향하는 윤영은 꽤 신이 나 있었다. 집을 내놓자마자 사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기존 시세보다 훨씬 더 높은 금액으로 말이다.
빚을 갚고도 몇천만 원은 남는다는 생각에 희망이라는 게 생겼다. 김 씨가 좀 더 액수를 올려볼 테니 기다려보라고 해서 우선은 알았다고 했다.
거실과 현관문 앞의 전구가 나가서 전구까지 사서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윤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혹시 재개발 들어가는 거 아냐?”
가만히 생각해보니 맞은편에 있던 집 세 채를 나란히 사들여서 허물고 지은 고가의 집도 그렇고. 만약 재개발이 들어가는 거라면 좀 더 버텨야 하는 게 맞다.
갑자기 윤영은 마음이 급해졌다. 윤식이 들어오면 그 빚을 언제까지 갚아야 하는지 정확히 캐물으리라 생각했다.
식탁 의자를 끌고 현관문 앞까지 가져간 윤영은 잠시 멈칫했다. 전구 가는 게 무섭지만 유일한 남자는 휠체어 신세. 빼도 박도 못 하고 제 손으로 전구를 갈아야 한다.
“휴.”
마지못해 의자 위로 느릿하게 전구를 들고 올라갔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벼룩이가 개집에서 나와 거칠게 짖었다.
‘택배 올 게 있나?’
우편 배달부부터 택배 기사까지, 오래된 동네인 만큼 모두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였기에 윤영은 스스럼없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을 했다.
“대문 열렸으니까 그냥 들어와!”
가만, 택배라면 분명 용수가 온 걸 텐데.
“용수야, 아줌마네 현관문 전구 좀 갈아줄……!”
몸을 튼 윤영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대문 안으로 천천히 들어서는 남자는 건너 건너 사는 정숙의 아들 용수가 아니었다.
큰 키에 모델처럼 쭉 뻗은 체형, 몸에 하고 있는 비싼 명품보다 더 명품인 누군가를 쏙 빼다 박은 얼굴. 윤영의 입에서 저절로 어떤 이름이 새어 나왔다.
“이, 이준아.”
양손에 선물 세트를 가득 든 채 대문 안에 발을 들인 도준이 윤영을 가만히 응시했다. 10년 만에 보는, 한때 어머니였던 여자를.
일정한 보폭으로 다가가 쇼핑백을 내려놓고 윤영의 손에 들린 전구로 손을 뻗었다. 전구를 주지 않으려는 듯 윤영이 손에 힘을 줬다.
“전구 가는 거, 무서워하시잖아요.”
전구를 손대면 이상하게 전기가 통할 것 같아 무섭다고 했던 윤영과 제아, 도준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한마디에 윤영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그제야 전구를 들고 의자에 오른 도준이 능숙하게 전구를 교체했다.
어두웠던 마당이 환해졌다. 새 전구가 하나 더 있는 걸 발견한 도준이 물었다.
“전구 나간 곳이 또 어딥니까?”
“거, 거실이긴 한데 안 해줘도?”
하지만 도준은 이미 현관문 안으로 들어선 후였다. 식탁 의자를 가지고 들어가 거실 한가운데 놓고 서슴없이 의자 위로 올라갔다. 윤영이 그 뒤를 빠르게 따라 들어왔다.
“고맙구나. 커피라도 한잔하고 갈래?”
“주시면요.”
윤영이 주방으로 사라지자 도준은 거실 소파에 앉아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10년이나 흘렀는데도 변하지 않는 건, 이 집과 저 개뿐인가 보다. 윤영이 차를 들고 나와 도준에게 내밀었다.
“미국에 갔다고 들었는데, 완전히 들어온 거니?”
“한국 들어온 지 꽤 됐습니다. 빨리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 아니다!”
격하게 손사래를 치는 윤영은 도준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윤영은 도준을 반기지 않았다. 10년이란 공백 때문인지, 오래전 일 때문인지. 윤영이 도준을 불편해하고 어려워하는 게 느껴졌다.
해야 할 말만 하는 가감 없는 성격인지라, 도준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집, 내놓으셨다면서요?”
“그걸 네가 어떻게?”
“돈, 많이 급하시죠?”
살짝 치켜뜬 윤영의 커다란 눈을 보고 있으려니 도준은 제아가 떠올랐다.
“그 돈 제가 드린다고 하면 받으실 생각 있으세요?”
“이준아, 나도 양심은 있어. 너에게 도움 받은 건 한 번이면 족해.”
그 도움이라는 건 아마도 10년 전의 그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지금까지 그를 제일 그룹에 묶어놓은 연희와의 거래.
“제 어머니가 그 집을 사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도 이 집을 사려고 합니다.”
윤영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런 누추한 집을 사서 뭐하겠다고.”
“어머니는 사서 이 집을 부수려 하고.”
“……?”
“저는 이 집을 사서 돌려드리려고 합니다.”
무릎 위에 놓인 윤영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제 돈 받는 게 부담스러우시면. 이 집, 저에게 파세요. 명의만 제 이름일 뿐, 지금처럼 그냥 쭉 사시면 되세요.”
“…….”
“그게 아니면, 어머니와 제가 경쟁해서 최고가에 이 집을 팔길 원하시는 겁니까?”
침묵을 유지하던 윤영이 차분하게 떨리는 시선을 들어 도준을 응시했다.
“이준아, 하나만 묻자. 왜 이렇게까지 도우려고 하니?”
‘어머니의 하나뿐인 딸을, 제가 사랑합니다.’
“네 어머니가 하는 걸 막으면서까지 도대체 왜.”
‘그리고 어머니 딸도, 저를 사랑합니다.’
“네 마음은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어.”
‘서로 미친 듯이, 죽도록.’
“너 할 만큼 우리에게 한 거 다 알아.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우리 신경 쓸 필요 없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들을 씹어 삼키자, 윤영이 말을 끝맺었다.
“넌 우리 식구도 내 아들도 아니잖니. 이제 우린 완벽하게 남이야, 이준아.”
도준은 윤영이 타준 따스한 유자차를 입안에 짧게 머금었다.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거 압니다. 철저하게 남이라는 것도.”
철저하게 고립이 되어 외톨이가 되었던 10년 전은 심장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이라는 성을 주고 ‘도준’이라는 이름을 주어 철저하게 남이 되게 해준,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해준 제 어머니란 여자에게.
나른하게 열린 도준의 입술 사이로 바닥에 깔린 듯 낮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안 되겠습니까?”
잘 들리지 않아 윤영이 좀 더 귀를 쫑긋 세우는 순간, 도준이 내리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윤영을 똑바로 주시하고 느릿하고 또렷하게 물었다.
“아들 대신, 아들 같은 사위가 되면 안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