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64화 (64/104)

64. 다른 여자 입술이 닿았잖아. 그래도 하지 마?

2017.04.13.

태연한 표정과 달리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레이나는 손끝까지 바들바들 떨려왔다.

하지만 이제 상관없다. 어차피 자극하려는 건 도준이 아닌 제아였으니까. 작전은 성공한 셈이었다.

레이나는 부러움 섞인 웃음소리를 숨기지 않고 흘렸다.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어? 애정 표현은 둘이 있을 때 하라구.”

그제야 제아가 놔달라는 듯 도준의 어깨를 약하게 주먹으로 통통 두드렸다. 짧았지만 강렬했던 키스를 끝낸 도준이 서서히 입술을 뗐다. 레이나에게 박혀 있던 시선도 빠르게 거두어들였다.

젖어 있는 입술을 매너 있게 엄지로 쓸어주며 제아를 내려다보는 도준의 눈빛은 다정하다 못 해 꿀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달콤했다.

그 눈빛에 레이나는 심장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제아에게 준 상처를 배로 돌려받은 느낌. 그녀 자신은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던 눈빛이니까.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제아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이런 건 소독 안 해도 돼.”

“다른 여자 입술이 닿았잖아. 그래도 하지 마?”

제아가 힐긋, 레이나를 보았다. 정적으로 서 있는 아름다운 레이나를 보고 있으려니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긴 했다.

설마 레이나도 우리 오빠를? 하지만 깨끗하게 접어버렸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스스럼없이 자신을 상대할 순 없는 거니까. 레이나는 지나치게 솔직하고 담담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단정 지었다.

“사고였잖아. 그런 거 오해 안 하거든요?”

“내가 찝찝해서 그래.”

“……?”

“내 것에 누가 닿는 것도 싫고.”

틀어진 도준의 시선이 레이나에게 꽂혔다.

“문제아 아닌 다른 여자가 나한테 닿는 것도, 끔찍하게 싫고.”

“오빠!”

독을 품은 혀를 서슴없이 놀리는 도준 때문에 오히려 당황한 건 제아였다. 하지만 레이나가 태연하게 응수했다.

“제아 씨, 제이드한테 한두 번 당해본 냉대 아니니 신경 쓰지 마. 난 친구로 인정해준 걸로 만족해. 치즈 가지고 주방으로 같이 가자.”

제아의 눈에 능숙하게 요리하는 레이나의 모습은 아름다워 보였다. 요리가 거의 끝날 때쯤, 인호가 레이나가 부탁한 케이크를 들고 도착했다.

곧이어 일리안이 비서인 금발의 미남 에릭을 대동한 채 나타났다.

역시나 부동산 재벌 상속녀답게 집들이 선물도 어마어마했다. 현관문 입구에 가득 쌓여 있었다. 제아가 들고 온 화장지와 세제가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드디어 음식 준비가 끝이 났다.

드넓은 대리석 식탁 위, 예술에 가까운 디테일을 자랑하는 음식들로 꽉 채워졌다.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에 찍어먹을 포카치아 빵, 카프레제 샐러드와 치즈맥, 폭립 누디, 그리고 까망베르 치즈로 만든 오리 가슴살 구이와 연어 스테이크, 비프 스테이크 등등……

짧은 시간에 만든 것치고는 굉장했다. 이래서 셰프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준이 사온 와인을 에릭이 능숙하게 오프너로 개봉했다. 피처럼 붉은 와인이 와인 잔에 채워지고. 집들이의 주최자인 레이나가 와인잔을 들었다.

“일리니 브랜드의 성공적인 한국 론칭을 위하여!”

잔들이 부딪히고 쌉싸름한 레드 와인이 목을 타고 소리 없이 부드럽게 흘러들었다. 제아의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친 도준이 몸을 숙여왔다.

“몸은 좀 괜찮나?”

제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트니, 은밀한 빛을 머금은 도준의 나른한 눈동자와 부딪혔다.

“그, 그럼 당연히 괜찮지! 보면 몰라?”

사실 제아는 아직도 나른한 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루 정도는 푹, 잠만 자고 싶을 정도로.

“너무 허약해, 넌.”

그걸 눈치 챘는지, 도준의 눈빛이 진중했다.

“아니거든요? 오빠가 너무 체력이……!”

확 달아오른 얼굴로 언성을 높이던 제아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느끼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엄청난 말을 뿜어낼 뻔했다.

제아의 옆에 바짝 붙어 앉은 도준은 잠시도 손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제아의 몸 어딘가에 닿아 있어야만 안심이 된다는 듯, 끊임없이 손으로 어딘가를 지분거렸다.

제아가 움찔거릴 때마다, 그에 맞추듯이 도준이 느긋하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별일 없었고?”

“응.”

“가끔씩 술을 먹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응?”

“선물, 말이야.”

“……?”

“푸는 재미가 있거든.”

“……!”

“다음엔 고양이로 부탁해.”

“오빠!”

확 붉어진 얼굴로 노려보는 제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도준을 일리안이 생소한 눈빛으로 똑같이 바라보았다. 지독히도 낯선 도준의 모습이라서.

‘제이드가 하면, 나도 가능할지 몰라.’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남녀 사이가 저런 느낌이라면, 한 번쯤은 연애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대체 어떤 남자가 나 같은 여자를 감당하지?

고심하던 일리안의 눈에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는 그녀의 비서이자 금발의 미남인 에릭이 눈에 들어왔다.

“에릭, 이참에 나랑 연애 한번 해볼래?”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에릭은 하늘같은 사장님의 말에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단박에 거절했다.

“일리안, 나는 어때?”

인호가 끼어들어 진지하게 물었지만, 일리안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넌 내가 거절하겠어.”

“내가 어때서? 나 인기 엄청 많거든?”

“넌 나와 유전자가 같아. 같은 유전자끼리는, 연애하는 거 아니거든.”

일리안의 간결한 대답에 모두들 웃었다. 집들이 분위기는 의외로 유쾌했다. 레이나의 음식은 훌륭했고, 도준이 사온 와인마저 완벽했다.

***

저녁 식사를 마친 일행은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일리안이 제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도준이 몰이하듯 제아를 소파 끝자리로 앉힌 후 그 곁에 앉았다.

와인에 곁들일 핑거 푸드를 간단히 준비해서 나온 레이나의 시선이 도준에게 향했다.

제아밖에 보이지 않는 듯,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친 도준은 오로지 제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놓고 도준의 옆에 앉은 레이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제아 씨, 제이드 고등학교 때 어땠어? 그때도 지금이랑 똑같았어?”

도준의 무릎 위에 손을 올린 제아가 몸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어떤 뜻으로 묻는 거예요? 공부, 아니면, 성격?”

“둘 다.”

잠시 생각에 잠긴 제아가 배시시 웃으며 도준과 눈을 맞추었다.

“공부는 당연히 잘했고, 성격은…… 말수 없고 호불호 분명하고 뱉어낸 말은 꼭 지키고. 비슷한 것 같아요. 아, 싸움을 엄청 잘했어요. 별명이 미친 흑표범이었거든요.”

“어머, 정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레이나는 도준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제아를 보며 반쯤 등을 돌린 도준은 레이나가 바짝 옆에 앉았는데도 관심이 없다.

단 한 번도 제 곁을 내어준 적이 없던 남자였는데. 사랑하는 여자가 옆에 있어서일까. 도준의 경계가 느슨해졌다.

지금은 그의 등을 보고 있지만, 머지않아 그와 얼굴을 마주할 날이 오겠지.

그들의 세계에서 연애와 결혼은 별개, 깨질 수 없는 법칙이다. 몇 명은 평범한 사랑에 도전하지만 극히 드문 경우였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부와 명예라는 건, 인간이라는 존재가 거부하기에는 너무 매혹적이니까.

우아하게 와인을 즐기던 일리안이 생각난 게 있는 듯, 도준을 응시했다.

“제이드, 너 나랑 스캔들 난 기사 일부러 내보낸 거지? 나를 방패삼아 제아 씨 숨기려구.”

“그럴지도.”

“좋아, 뭐 기꺼이 해줄 의향 있어. 그 대신 내 요구 조건 하나?”

일리안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도준이 냉정하게 잘라버렸다.

“한국 연예 신문에 대서특필 될 뻔한 너의 이상한 소문, 잠잠하게 해달라며.”

일리안이 찔끔 했다. 사실 그래서 강훈에게도 그런 자극적인 말을 한 것도 있었다.

“서로의 요구 사항이 충족되었으니, 조건 내걸 생각은 하지 마.”

“어휴, 정말! 돌아가는 머리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일리안이 화를 내든 말든, 도준은 다정한 손짓으로 흘러내린 제아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그 바람에 드러난 희고 긴 목덜미 뒤쪽, 피멍이 든 것 같은 작은 자국이 레이나의 눈에 들어왔다.

누가 어떻게 그 자국을 남긴 걸까. 감히 상상이 되자 유치한 질투심이 솟아나려 했지만, 가까스로 내리 눌렀다.

도준의 과거를 말하는 제아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고, 그런 제아를 응시하는 도준의 눈빛도 다정했다.

매끄럽게 제아와 대화를 나누는 레이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질투 따위 전혀 나지 않아. 당장 떼어낼 수 없다면 철저히 이용할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느긋하게 때를 기다릴 것이다.

도준이 그녀와 항상 유지하던 50센티 정도의 안전거리가 처음으로 좁혀졌다. 오늘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레이나였다.

***

다음 날 출근을 하는 제아는 또 다른 의미로 바짝 긴장이 되었다. 오늘부터 특별 전략기획팀 소속으로 업무를 동시 진행할 예정이었다.

‘내가 그 막중한 자리를 잘 지켜낼 수 있을까.’

고속 승진을 했다는 기쁨이나 기대감보다 걱정이 먼저 앞섰다. 15층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뜻밖의 인물이 제아를 반겼다.

“조현영?”

제아가 온갖 무시를 당하면서도 제일 어패럴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현영의 역할이 컸다. 그런 직장 동료에게 제대로 연락 한 번 못 했다는 미안함도 잠시뿐, 현영이 깜짝 놀랄 소식을 전했다.

“현영이 네가 특별 전략기획팀으로 발령 났다고?”

제일 어패럴 내에 전략기획팀은 있었지만, 제일 아울렛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단기적으로 기획, 관리할 특별 전략기획팀이 꾸려졌다. 사장의 집무실이 있는 층에, 사이좋게 비서실과 나란히.

그 말인즉슨, 도준이 완벽하게 제 사람들을 이끌고 경영을 시작하겠다는 뜻과도 같았다. 그런데 현영이 특별 전략기획팀이라니.

“현영이 너 혹시.”

“……?”

“아니야. 내가 미쳤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현영이 도준과 알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현영은 자신과 입사 시기가 많이 차이 나지 않으니까. 그런데 현영이 흔쾌하게 묻지도 않는 대답을 했다.

“네가 생각하는 거 맞아.”

“……내가 생각하는 거?”

“나 한 사장님 사람이야. 한 사장님 지시로 온라인 기획팀에 입사한 거구.”

제아의 입이 딱, 벌어졌다.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가는 현영과의 기억들.

입사할 때부터 제아에게 유난히 살가웠던 현영, 제아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부서원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유일하게 제 친구가 되어주었던 직장 동료.

그러다 퍼뜩, 떠오른 건…….

“사장님 특별비서 지원서, 그것도 사장님이 시켜서 그런 거야?”

현영은 그저 웃을 뿐이다. 하지만 그 미소가 뜻하는 바를 알기에 제아는 기가 막힐 뿐이다. 대체 도준은 언제부터 그녀의 인생에 그렇게 철저하게 손을 뻗고 있었던 걸까.

***

현영과의 해후를 끝낸 제아는 도준의 집무실을 청소했다. 담당자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제아는 제 손으로 도준의 집무실을 관리하고 싶었다. 오직 자신만이 어떻게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해야 도준이 편히 업무를 볼 수 있는지 아니까.

깨끗하게 청소를 한 후 걸레를 빨기 위해 로비 끝에 위치한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우악스러운 손이 제아의 입과 손목을 틀어잡고 비상계단으로 끌고 갔다.

탁―.

비상계단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제아는 불청객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인사과 김 부장이었다. 입을 틀어막은 손에 배어 있는 찌든 담배 냄새에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이내 날아온 손이 제아의 뺨을 거칠게 올려붙였다.

“악!”

느닷없는 손찌검에 미쳐 피할 틈도 없었다. 화끈거리는 뺨을 손으로 감싼 채 제아는 김 부장을 노려보았다.

“네년이 감히 날 배신해?”

김 부장의 벌렁거리는 콧구멍과 벌어진 두툼한 입술 사이로 소름 돋을 정도로 거친 숨이 쏟아져 나왔다.

마음 같아선 똑같이 김 부장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똑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살짝만 쳐도 쌍방 과실로 인정될 수 있으니까, 참자. 한국의 법은 참 거지같으니까.

“저랑 부장님은 부서가 다릅니다. 제가 배신하고 말고 할 게 없다고 보는데요.”

차분하게 말을 하며 제아는 CCTV가 설치되어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CCTV만 있어 봐라. 당장 신고한다, 내가!

“하아! 이런 미친년이. 니가 배신하는 바람에 내가 지금 어떤 꼴인지 알아? 네년이 사장한테 몸 팔고 한 자리 차지한 거 내가 모를 줄 아냐고! 네가 그래선 안 되지. 내 뒤에 누가 있는 줄 알고 날 배신해? 배은망덕한 년 같으니라고!”

마지막 말에 제아의 귀가 솔깃했다. 공사다망했던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김 부장이 스파이 제안을 했던 걸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 부장 뒤에 있는 배후, 어떻게든 알아내야 한다!

김 부장을 어떻게 자극해야 하나 고민하던 제아는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한낱 부장보다 우리 사장님한테 붙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아닌가요?”

“이년이 그래도! 지금 이게 오래 갈 줄 아나 보지? 넌 한 사장이 잠깐 즐기는 장난감에 불과해, 알어? 뒤늦게 끈 떨어졌다고 후회하지 말고 정신 차리라고!”

열이 바짝 올랐는지, 탁한 김부장의 눈이 희번덕대며 뒤집어졌다. 제아는 시치미를 뚝 떼고 태연하게 물었다.

“그럼 부장님 뒤에 누가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그래야 나도 판단을 할 거 아니에요.”

“……뭐라고?”

“아, 한 사장님보다 더 센 분 아니면 그냥 말하지 마세요. 들을 가치도 없으니까.”

“하아, 꽃뱀 같은 년! 그렇다면 기꺼이 알려주지!”

딱 거기까지였다. 김 부장이 제아의 예상대로 반응해준 건.

김 부장이 제아를 벽으로 몰아붙이고 양 손목을 벽에 붙였다. 김 부장이 얼굴을 가까이 하자 제아는 격하게 고개를 틀었다. 후덥지근한 숨이 소름 끼치게 목덜미에 닿았다.

“제일 백화점 한강훈 이사님이야. 네년을 회사에 꽂아주신 은혜로우신 분! 그분 뒤에는 한 태영 부회장님이 계시지. 그런데 은혜를 갚긴커녕 감히 배신을 해? 그래서 나를 물 먹여?”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혼탁해졌다. 나를 회사에 넣어준 사람이 한강훈 이사라니.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제아는 김 부장의 품에서 벗어나려 해보지만, 남자라고 손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CCTV도 없는 마당에 얌전하게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손목은 틀어 잡혔으니 못 쓰는 상황이지만, 무릎으로 사타구니를 가격하면 될 일.

김 부장이 눈치채지 못하게 제아는 슬그머니 한쪽 다리를 가운데로 움직이며 싸늘하게 경고했다.

“김 부장님, 지금 당장 절 놓아주시는 게 좋을 거예요.”

“듣고 나니 다시 내 줄을 타고 싶지? 그런데 어쩌지? 한 부회장님 줄을 타고 싶으면 나 먼저 상대해줘야겠는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김 부장이 더욱더 벽으로 밀어붙이려는 찰나, 제아는 잽싸게 무릎을 올렸다.

하지만 그 전에 김 부장이 갑자기 발라당 뒤로 나가떨어졌다. 자칫했으면 계단으로 굴러 떨어졌을 정도로 거칠게. 겨우 계단 난간을 잡은 김 부장이 숨을 헐떡이며 일어났다.

“이, 이 새끼 너 누, 누구야?”

산뜻한 남자의 스킨 향과 함께 고급 재질의 슈트에 감싸인 널찍한 등이 보였다.

제아를 등지고 서 있는 남자는 키가 컸고 어깨 깡패로 시작해서 날렵하고 다부진 실루엣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 문제아 팀장님 경호원이다, 어쩔래?”

아주 시건방진 말투까지도. 제아는 이 남자가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변태 양반, 지금 네가 문 팀장님한테 한 짓 CCTV에 다 찍혔거든? 저 CCTV는 사각 지대라는 게 없다고. 그러니 그만 꺼지는 게 어때?”

그제야 바로 머리 위에 있는 아주 정밀하게 붙어 있는 극소형 CCTV가 눈에 들어왔다.

“너, 너는!”

김 부장은 제 눈을 의심했다.

한강훈 이사의 지시로 은근슬쩍 찔러 넣은 인턴이 왜 나를? 우리, 같은 편 아닌가?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보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대 더 칠 듯 으르렁거리며 거리를 좁혀오자 덜컥 겁이 났다.

“나,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헐떡거리며 두툼한 몸을 끌고 내려가는 김 부장을 보며 중얼거리던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조만간 잘릴 놈이 이야기는 무슨.”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제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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