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사람 미치게 해놓고, 잠이 와?
2017.04.10.
도준의 가슴팍이 거칠게 들썩이고 호흡이 흐트러졌다.
자발적인 그 선물, 절대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휘몰아치는 내면의 열기를 차분하게 다스린 도준이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원피스 지퍼에 닿는 순간, 차분하던 손길이 거칠어졌다.
지이이익―.
그런데 망설임 없이 지퍼를 거칠게 내리던 도준의 손이 멈췄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문제아.”
“…….”
“제아야.”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다. 가볍게 볼을 툭툭 건드려보지만, 제아는 쌔근거리는 숨을 토해내며 깊은 숙면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런.”
불만족스러운 숨이 길게 새어 나왔지만 거칠게 지퍼를 내렸던 손길은 다정해졌다. 지퍼가 내려간 만큼 다시 원상복구가 되었다.
살그머니 몸을 비틀어 제아를 침대에 눕힌 도준은 모로 누워 제아를 응시했다.
기분 좋게 취하기 시작한 타이밍에 술이 끊겨버린 상황. 그래도 짐승이 아닌 이상 자는 여자를 덮칠 수는 노릇이었다.
“아가씨, 지금 이 상황에 잠이 와?”
깊은 잠에 든 숲 속의 공주는 대답이 없는 법.
“사람 미치게 해놓고.”
목을 조여 오는 답답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치며 향한 도준의 목적지는 욕실이었다.
지금 절실한 건 뜨거운 몸을 식혀줄 얼음장 같은 찬물이었다.
***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무심코 확인한 제아의 입술 사이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디서 튀어나온 야한 토끼 한 마리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가슴 부분의 옷을 들추니, 맙소사! 톱 드레스라서 그런지 속옷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몸에 두 개는 걸쳤으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잠들기 전 한 발칙한 행동들이 선명하게 뇌리에서 리플레이가 되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토끼 머리띠를 빼버릴 생각도 못 한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술이 원수였다.
‘제아씨, 오늘 사장님 껌뻑 죽게 만들어주자.’
그 한마디에 혼탁해진 이성을 던져버리고 신 비서가 사비로 사준 이딴 옷을 입어버렸다.
머리띠는 뭐고 이 원피스는 뭐고, 가터벨트는 뭔데! 채찍만 있으면 완전 변태 호러물을 찍었을 판이다.
“설마 오빠가 날…… 취향 특이한 변녀로 보진 않겠지?”
걱정은 잠시 접어둔 제아는 살그머니 침실의 문을 열었다. 우선 코트를 찾아서 어떻게든 이 모습을 가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넓은 거실은 휑할 정도로 비어 있다.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소리 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술기운을 아직 몸에서 완전히 밀어내지 못한 상태였다. 미끄러질까 봐 바닥에 시선을 쳐박고 조심히 걸으면서 생각했다.
‘청소를 너무 잘해놨어!’
얇은 스타킹을 신은 발밑으로 닿는 대리석 바닥이 위험스러울 만큼 반질거렸다. 그런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단단한 무언가에 정수리가 닿았다.
“윽!”
살그머니 고개를 드니 나이트 가운을 몸에 걸친 도준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넘어질 뻔한 제아의 맨 어깨를 양 손에 움켜쥔 채 말이다.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 도준에게서 훅 끼쳐드는 찬 기운이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에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하, 하하하. 안녕…… 오빠.”
제아는 지은 죄가 있어 차마 도준의 눈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얼른 시선을 내렸는데, 웁스! 하필이면 또 왜! 느슨하게 벌어진 나이트가운 사이로 매혹적인 남자의 흉근이 아찔하게 시야를 자극했다.
“난 안녕 못 한데.”
안녕, 못 하다고? 결국 도준은 발칙한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직하게 새어 나온 도준의 음성에 제아의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피치를 올렸다.
그들이 서 있는 바로 옆에 소파가 있다. 소파에 먼저 앉은 도준이 맞은편 소파에 앉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옷차림이 미치도록 신경에 거슬렸다.
하지만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주 조신하게 제아는 다리를 오므리고 앉아 얌전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허벅지에 걸려 있는 가터벨트가 시야를 쿡쿡 쑤셨다.
‘가터벨트, 하 정말.’
다소곳하게 모은 손으로 가터벨트를 가려보지만, 역부족이었다.
제아가 기억하는 한 몸으로 덤벼드는 여자들을 도준은 가장 싫어했다. 이유는, 질려버릴 정도로 여자에게 너무 많은 육탄전 유혹을 받은 남자이기에.
그런데 알코올에 홀려 자신까지 똑같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도준이 가장 환멸하는 질 낮은 여자의 모습으로.
갑자기 얼굴이 따끔거려 제아는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소파 등받이에 느긋하게 팔을 올리고 다리를 꼰 채, 도준이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제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머리부터 시작한 도준의 시선이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눈앞의 작품을 평가하듯, 꼼꼼하고 세심하고 예리하게.
노골적인 눈빛을 감당 못 한 제아가 조심히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사람 민망하게. 나도 맨 정신이었으면, 이런 옷…… 안 입었거든.”
그런데 도준이 그답지 않게 뻔뻔할 정도로 씨익 웃었다. 붉은 입술과 대비되는 새하얀 치아가 고르게 드러났다.
입꼬리를 비틀리며 웃는 게 섹시하다는 거, 본인은 절대 모르겠지. 볼 때마다 적응 안 되는 요요한 미모다, 정말.
“생일 선물이.”
“……?”
“끝내주네.”
“……!”
말뜻을 알아차린 제아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선물, 끝내주지?’
아마도 약 한 시간 전에 제 입에서 나온 말이리라.
“마음에 들어. 그래서 다 용서가 돼.”
“뭐, 뭐가?”
“내 집에 이방인을 들인 것도. 사람 미치게 해놓고 잠들어버린 것도.”
“오, 옷 좀 걸치고 올게!”
제아는 벌떡 일어나 목적지도 없이 줄행랑을 치려했지만, 이내 도준에게 잡혀버렸다. 확 잡아당기는 손길 한 번에 몸이 무너져 내렸다. 얼떨결에 도준의 다리 위에 엉덩이를 안착해버렸다.
“어딜 가지?”
조금은 장난스러운 도준의 눈빛이 제아의 얼굴에 닿았다.
“선물, 내가 풀어보지도 않았는데.”
“저기 오빠,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잠깐 정신이 나갔거든? 그래서, 웁!”
당황한 듯 횡설수설하던 입술이 막혀버렸다. 곧이어 소파의 팔걸이에 얼굴이 닿았다. 침대처럼 넓은 소파의 용도가 이거였던가?
맨살에 닿는 가죽 소파의 감촉이 오묘했다. 엎치락뒤치락, 한참 동안 이어졌다.
달뜬 숨을 흘리며 목을 뒤로 젖힌 제아의 눈이 전면 유리창에 박혔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새하얀 눈꽃들이 흐드러지게 흩날리고 있었다.
열뜬 몸과 혼몽해진 시야로 바라보는 고층의 풍경은 참 매혹적이다. 돈 있는 사람들이 왜 펜트하우스를 고집하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이내 그 풍경은 시야에서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뒤에서 다시 덮치듯이 도준이 제아를 공격해왔다.
“선물, 아주 천천히 풀어볼 거야.”
***
이른 새벽, 도준이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제아도 눈이 떠졌다. 새하얀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있는 도준이 보였다. 그리고 누워 있는 곳이 침대라는 것도.
‘침대……구나.’
시작은 소파였지만, 마지막은 침대였다. 밀착되어 있던 몸의 온기가 사라지자 잠결에도 허전함이 느껴졌다.
외출 채비를 하는 도준을 보고 일어나려는데,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나른하게 늘어졌다. 손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랑을 나누는 게 굉장한 체력전이라는 걸, 두 번째 만에 몸소 체험한 것이다.
중독되는 게 이런 느낌일까. 나른하고 몽롱하다. 좀 더 느끼고 빠져들고 싶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직 새벽이니 더 자.”
상체를 기울여 제아의 이마에 부드러운 키스를 날리는 도준의 목에 넥타이가 비스듬히 걸려 있다. 그걸 본 제아는 새하얀 시트를 몸에 둘둘 만 채 침대에서 내려왔다.
제아의 손끝에 매끄러운 넥타이가 감겨들었다. 손가락이 정교하게 몇 번 움직이자 넥타이가 말끔하게 매어졌다.
“이런 건, 여자가 해주는 거야.”
넥타이를 매어주고 배시시 웃으며 올려다보는 제아를 도준이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 드러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들이켰다.
“출근하기 싫다.”
비틀어 올린 도준의 시선이 제아를 온전하게 제 눈에 담았다.
“오늘 하루, 재낄까?”
은밀한 유혹이 담긴 제안. 워커홀릭 도준 답지 않은 응석에 제아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일에 지장 주는 애인은 되기 싫어.”
“가끔씩 널 보면 화가 나. 나한테 너무 집착을 안 하는 것 같아서.”
“사랑하는 방식이 틀릴 뿐이거든? 얼른 출근이나 하세요, 사장님!”
제아가 그의 어깨를 탁탁 치며 돌려세우자 도준은 마지못한 듯 걸음을 옮겼다.
***
박 실장이 강훈에게 깜짝 놀랄 만한 보고를 올렸다.
“그 비서가, 문제아라고? 문이준 동생이었던, 그 문제아?”
강훈은 기가 막혔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친척 동생인 지로에게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인심 쓰듯 그 절친을 회사에 추천해줬건만 그게 도준의 동생일 줄이야.
게다가 무능력한 김 부장이 그 동생을 스파이로 찔러 넣기까지 했다. 애초부터 스파이가 될 수 없는 여자였는데.
“빌어먹을! 대체 그딴 걸 왜 이제야 보고 하는 거야? 진즉에 조사를 했었어야지!”
애꿎은 화가 박 실장에게 튀었다.
“죄송합니다. 한도준 사장님이 워낙 옛 가족에게 무관심해서, 미처 조사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지켜보라고 지시 내릴까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알겠습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강훈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박 부장을 응시했다.
“그것부터 조사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그 두 사람, 진짜 이복남매인지 아닌지 말이야.”
“알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옛 여동생을 챙긴다고 하기엔 과한 부분이 있었다. 강훈이 그 비서와 대치할 때마다 도준의 반응은 마치, 제 여자를 보호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흥미로워졌다. 더러운 사랑인지, 순정인지, 단순한 옛 정인지.
“나를 물어뜯어? 한도준이?”
일리안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강훈이 비소를 흘렸다. 야수도, 약점은 있는 법이니까. 간절히 바란다. 그 여동생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를.
***
“제아 언니, 사장님이랑 즐거운 밤 보냈어요?”
“사장님이 끔뻑 죽죠? 남자들이 원래 그런 거 은근히 좋아한다니까요?”
“토끼가 아니라 고양이로 고를걸 그랬나?”
오전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빴기에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비서들이 제아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도준이 연애를 밝혀줄 땐 기뻤는데, 비서들이 이렇게 관심을 많이 보이니 이젠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때마침 레이나에게 전화가 왔다. 얼른 자리를 피한 제아는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세경 언니.”
[오늘 시간 어때?]
세련된 레이나의 음성이 부드럽게 흘러 나왔다. 도준이 커피숍에 나타나는 바람에 함께 하는 시간은 짧았지만, 연락처를 교환할 시간은 충분했다.
해외에서 유명한 셰프이자 모델인 그녀는 의외로 소탈하고 쿨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도준과의 관계를 안 후에도 그녀는 거리낌이 없었다. 동생 대하듯 편하게 연락을 했고, 다음에 만나면 도준의 과거를 서로 주고받자는 말까지 했다.
레이나는 이준이었을 때의 과거가 궁금했고, 제아는 미국에 간 이후의 그가 궁금했으니까.
“특별한 스케줄은 없는데, 왜요?”
[집들이를 할까 하는데 나 혼자 하긴 좀 힘들 것 같아서. 제아 씨가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시간이랑 주소 문자 주세요.”
[그리고 제아 씨가 제이드한테 집들이 오라고 말 좀 해줄래?]
“제가요?”
[내가 말하면 일 핑계 될 것 같아서.]
“그럼 언니도 제 부탁 하나 들어주세요.”
[뭔데?]
“제 친구가 언니 광팬이거든요. 오늘 가면 사인 한 장 부탁해도 되죠?”
[당연하지. 그럼 제이드랑 통화하고 나한테 메시지 한 통 넣어줘. 인원수에 따라 음식 양도 맞게 준비해야 해서.]
***
-오빠 7시 30분에 온다고 했어요.-
제아의 메시지를 확인한 레이나는 조선 호텔 사장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세경아!”
레이나의 아버지이자 조선 호텔과 조선 면세점의 사장직을 겸하고 있는 민석이 그녀를 반겼다. 3년 만의 부녀 상봉이었다.
“녀석, 1년에 한 번씩은 좀 들어오지 야속하게 그러기냐.”
“너무 바빠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아빠.”
“이제 그만 취미는 접고 경영을 한번 배워보는 게 어떠냐.”
민석이 그 말을 할 줄 예상하고 있었다. 민석의 옆에 앉아 애교스럽게 팔짱을 끼며 레이나가 본론을 꺼냈다.
“아빠가 힘 좀 써주면 안 돼요?”
“뭐를 말이냐?”
“제일 호텔이랑 미국에 전통한옥 스타일 호텔 짓는 합작 프로젝트 진행 중이잖아요. 한 회장님이 그 프로젝트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다고 하던데.”
“……그런데?”
“아빠가 한 회장님 만나서 제일 그룹에서 그 프로젝트 담당할 책임자, 제이드가 맡게 해줘요.”
“뭐?”
“제이드가 책임자 되면, 나도 취미 생활 접고 본격적으로 호텔 경영에 참여할게요. 네?”
“시도는 해보겠다만, 너무 기대는 말아라.”
“고마워요, 아빠!”
레이나는 민석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그녀로선 도준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건 곧 그녀에게 기회가 있다는 의미였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니까.
사랑을 모르는 차가운 심장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지고지순한 심장을 가슴에 품고 있는 남자였다.
도준은 지금 제아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 10년이나 흘러 만났으니 그 애틋함이 오죽할까.
뜨겁게 사랑하는 걸 지켜봐줄 것이다. 뜨거운 사랑은, 그만큼 빨리 식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가 책임자로 확정이 되면 사업 파트너가 되어 같이 미국으로 다시 떠나면 된다.
때론 친구로, 때론 사업 파트너로, 때론 여자로. 쓰리 콘셉트 매력으로 다가서는 자신을 도준은 절대 거부하지 못하리라.
***
레이나의 집은 도준의 펜트하우스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딱 봐도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집들이 선물이라고 들고 온 화장지와 세제가 민망하게 느껴질 만큼.
셰프라서 그런지 넓은 주방에서 음식을 능숙하게 준비하는 레이나의 모습은 프로였다. 저 외모에 저 요리 솜씨, 정말 세상은 불공평하구나.
“제아 씨, 깜빡하고 치즈를 사오지 않았어. 치즈 종류가 좀 많이 필요해, 2층 마트에서 좀 사다줄래?”
레이나가 제아에게 신용 카드를 내밀었다.
“아니에요! 저도 치즈 살 돈은 있어요!”
“내 카드로 사올 거 아니면, 집들이 선물 안 받는다?”
제아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도준이 도착했다. 예상대로 시간 약속은 칼 같은 남자였다.
“제이드!”
아직까진 완벽하게 계획이 진행된다고 생각하면서 레이나는 차분하게 움직였다. 카드 승인 문자가 오는 순간 5분 안에 제아가 집에 도착하겠지.
집들이 선물로 사온 와인을 레이나에게 내밀면서도 도준의 눈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제아 씨 잠깐 마트에 갔어. 금방 올 거야.”
그때 핸드폰이 깜빡, 메시지를 알렸다. 제아가 마트에서 카드를 긁은 것이다. 태연하게 걸어간 레이나가 현관 복도 쪽의 조명을 켰다. 그런데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월세가 얼마인데, 조명도 제대로 확인 안 해준 거지? 내일 따져야겠어.”
신경질적으로 작게 말을 내뱉은 레이나는 서브 룸에 들어가서 사다리와 전구를 가지고 나왔다. 그걸 본 도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장 입고 사다리 타려는 건 아니지? 이런 거 할 줄 아니까, 손님은 가만히 있으세요.”
도준이 기본 매너는 지키는 남자라는 걸 알기에 레이나는 그가 나서지 못하도록 얼른 사다리에 발을 올렸다.
사실 전구 따위 단 한 번도 갈아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냥 괜히 전구를 만지작만지작하며 시간을 끌었다.
“사다리가 불안하네. 제이드, 사다리 좀 잡아줄래?”
“내가 갈 테니까 내려와.”
도준이 다가서는 순간…….
찰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경쾌한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 넷.
“꺄악!”
순간 레이나의 몸이 휘청거리며 사다리를 잡고 있던 도준의 몸 위로 떨어졌다.
쿵―!
뛰어난 운동신경답게 도준은 본능적으로 레이나를 몸으로 받아냈다. 잠깐의 아찔함이 지나고, 레이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제 아래 깔린 탄탄한 몸은 좋았지만 아쉽게도 입술의 각도는 살짝 어긋나 버렸다. 뭐 그래도, 옆에서 봤을 때는 완벽하게 입술이 밀착되어 보일 테니까.
레이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도준의 가슴에 손바닥을 올린 채 반쯤 몸을 일으켰다.
“제이드, 고마워.”
“무거워, 내려오기나 해.”
싸늘한 음성에 레이나는 얼른 도준의 몸에서 내려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도준은 당황한 기색은 없어 보였다.
“제아 씨, 사고였어. 오해는 당연히 안 하지?”
제아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쓴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어쩔 수 없는 사고에 의해 연출된 장면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 솟았다.
도준이 말했던 그 집착이라는 거, 제아도 만만치 않게 하고 있는 중이었다.
괜히 날카롭게 반응을 한 것 같아 제아는 레이나에게 괜찮다는 듯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럼요. 오해 안 해요.”
주방으로 향하려는 제아의 앞을 도준이 막아섰다.
“소독해줘야지.”
그 말뜻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거침없이 뻗은 손이 제아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비스듬히 각도를 튼 도준의 얼굴이 바짝 다가오고 두 개의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갑작스러운 키스였다. 소독이라고 하기엔 꽤 농도 깊은 키스, 본능적으로 눈이 감겼다.
하지만 도준은 아니었다. 무방비한 입술을 탐하면서도 눈빛만은 제아의 어깨 너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직설적으로 내리꽂히는 도준의 위험한 눈빛이 레이나에게 경고를 보냈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