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62화 (62/104)

62. 생일 선물, 끝내주지?

2017.04.06.

도준은 아주 잠깐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잠깐 동안, 비서들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속을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심한 눈동자.

“내가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 그럼요!”

신 비서가 자리를 내어주자 도준은 태연하게 테이블에 착석했다. 비서들도 일제히 주르륵 자기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갑작스러운 도준의 등장에 비서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상사라고 신 비서가 용기를 내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사장님 혹시, 비상 상황인가요?”

“…….”

“그게 아니면, 우연히?”

“…….”

“그럼 오신 이유가.”

“내가 문 비서랑 정식으로 교제 중입니다.”

부연 설명 같은 건 다 던져버린 느닷없는 선언이었다. 놀랄 노 자가 역력히 새겨진 표정의 비서들을 빠르게 지나친 도준의 시선이 끝에 앉아 있는 제아의 얼굴에 꽂혔다.

“내가 문 비서를 여자로서 좋아합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업무 지시하듯이 흘러나온 도준의 삭막한 고백. 비서들은 그 고백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님을 알면서도 심장이 팔딱거렸다.

“문 비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되돌아온 질문과 쏟아지는 눈빛에 제아는 잠시 당혹스러웠다. 그런데도 심장은 또다시 미친 것처럼 설렌다. 그가 흘려보내는 눈빛에, 말투에. 스스럼없이 자신과의 연애를 공개하는 도준의 진심에.

입술은 달달 떨리지만 차분하고 또렷하게 제아는 대답을 해주었다.

“저도, 사장님을…… 좋아합니다. 무척, 많이요.”

원하는 대답을 기어코 듣고야 만 도준이었다.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도준의 시선이 신 비서에게 향했다.

“그러니 문 비서 소개팅은 자제해줬음 하는데.”

“그, 그럼요!”

“내가 속이 좁은 편이라 그런 일이 발생하면 신 비서를 해고할지도 모릅니다.”

덤덤한 듯 부드러운 음성과 달리 의미는 살벌했다. 바짝 얼어붙은 신 비서를 향해 도준이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이걸 왜 저한테.’

신 비서가 눈빛으로 물었다.

“나와 문 비서와의 연애, 적극적으로 협조해주라는 뇌물입니다.”

“아…… 뇌물.”

“오늘 그 카드로 마음껏 쓰고 반납하도록 해요.”

도준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비서들도 일제히 따라 일어났다. 따라 나오지 말라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엔 비서들이 불복종했다. 놀란 건 놀란 거고, 보스는 보스이니까.

바의 주차장은 야외에 위치해 있었다. 새해의 시작을 축하하려는 건지 하늘에선 시린 바람과 함께 새하얀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도준이 코트 깃을 들어 제아의 머리 위로 들었다.

도준의 배려에 입구에 서 있던 여비서들의 입에서 소리 없는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눈 맞지 말고 얼른 들어가.”

나직하게 속삭이지만, 그의 마음은 제 여자에 대한 그리움에 벌써부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런 속도 모르고 제아가 수줍게 그의 허리에 팔을 휘감으며 몸을 더 밀착해왔다.

제아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좁은 코트 안에 갇혀서 도준의 몸에 밀착을 하고 있으니 뭔가 아쉽다. 아기 오리처럼 그에게 처음 눈을 떠버린 수줍은 본능이 자꾸만 뭔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오빠 따라가고 싶다.”

“집에 가는 거면 너 진작 데리고 갔어.”

“아, 우리 보스는 항상 바쁘지.”

작게 투덜거리는 제아를 보니 도준도 미련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다 누구 때문에 바쁜 건데.

“뒤에서 너 기다려, 얼른 가봐.”

아쉽지만 이젠 서로를 놓아주어야 할 때이다. 그런데 쉽사리 서로의 손이 서로를 놓지 못했다.

‘내가 먼저 오빠를 보내줘야 해.’

도준의 허리에서 손을 거둔 제아가 까치발을 들었다. 하지만 도준은 입술이 아닌 뺨에 입을 맞추었다. 얼굴에 닿는 눈송이보다 더 스치듯이 가벼운 무게감으로.

‘뭐야, 시시하게.’

그 눈빛을 이해했는지 도준이 피식, 웃었다.

“입술에다 하면, 나 오늘 너 집에 못 보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아를 내려다보는 도준의 눈빛은 다정하고 따사로웠다.

“집에 들어가면 메시지 남기고.”

“내가 애야?”

제아가 조금은 뾰로통하게 대답을 하자 도준이 피식 웃었다.

“애가 아니라서 걱정하는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준은 주차되어 있는 차에 올라탔다. 곧이어 그를 쏙 빼닮은 마이바흐가 우아하게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차의 뒤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돌아선 제아는 그제야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호기심 레이저를 무시무시하게 쏘고 있는 세 쌍의 눈빛이 느껴진 것이다. 아,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한다……. 대략 난감한 상황이 다가온 것이다.

***

집무실을 벗어나려는 강훈의 사무실로 일리안이 연락도 없이 들이닥쳤다. 수도 없이 연락을 할 땐 받지도 않더니, 저녁이 되어서야 바람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러고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집무실의 소파를 차지하고 앉았다.

일리안의 비서가 내민 계약서를 마지못해 훑어보던 강훈은 가장 핵심적인 계약서 사항 몇 가지가 꽤 눈에 거슬렸다.

제일 백화점 독점 체결이 아닌 제일 어패럴과의 계약도 예정대로 진행하겠다는 게 첫 번째, 일리니 제품의 유통에 대한 모든 권한을 일리안에게 일임하겠다는 게 두 번째였다.

“아버지가 그쪽 협박에 응해준 건, 이번 기회에 망나니 같은 딸의 버릇 고치려는 아버지의 고집일 뿐이니 착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맥리가에 감히 협박이라니, 오해입니다. 사진은 기사를 막아주었다는 증거 차원으로 내민 것뿐인데. 맥리가와 친분을 쌓아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강훈이 남자다운 미소를 지으며 매끄럽게 받아쳤지만, 일리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지는 시늉은 해줘야 할 것 같아 마지못해 찾아온 거니 계약서 내용 고칠 생각하지 말고 사인이나 해요. 그 마음까지도 변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묻죠. 제일 백화점과 일리니 브랜드를 독점 체결할 마음은 없습니까? 대한민국 1% VVIP는 제일 백화점이 독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홍보도…….”

일리안이 단호하게 강훈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제일 어패럴과는 계약을 꼭 진행해야겠어요.”

강훈은 일리안에게 태블릿 PC를 돌려 화면을 보여주었다. 오늘 아침, 일리안과 도준의 스캔들이 터졌다.

<미국 부동산 재벌 상속녀와 국내 J그룹 손자와의 은밀한 데이트>

이니셜을 썼고 기사에 실린 사진 속 인물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지만 재계에서 알 만한 이들은 모두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아찔한 반라 차림의 상속녀가 일리안이고 그 여자를 주시하고 있는 J그룹 손자가 도준이라는 것을.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까?”

“즐기는 게 뭐 어때서.”

태연한 일리안의 대답에 강훈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시니컬한 웃음을 흘린 일리안이 짧은 원피스를 입었는데도 요염하게 다리를 바꾸어서 꼬았다.

“내가 여자 좋아한다고 남자 좋아하지 말라는 법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너무도 당당하게 드러낸 일리안의 성적 취향에 강훈은 잠시 당황을 했다.

“제이드가 그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예요. 내 성적 취향을 되돌릴 만큼.”

그런 강훈을 재밌다는 듯 바라본 일리안이 육감적인 상체를 테이블 위로 기울이며 속삭였다.

“제이드는 포악한 야수예요.”

“……!”

“당신 같은 하이에나 목덜미는 단번에 물어뜯어버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일리안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계약은 이대로 진행하는 걸로 알고 가겠어요.”

짙은 장미향을 흩뿌리며 일리안은 강훈의 집무실에서 미련 없이 사라졌다.

“하아!”

혼자 남은 강훈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비즈니스까지 이용할 줄은 몰랐다. 고고한 척은 다 하더니!

도준이 여자에게 관심 없다는 소문은 그저 철저한 이미지 관리에 불과했다. 여성 편력이 없는 완벽한 재벌 3세라면 이미지가 꽤 좋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결국은 뒤에서 은밀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의 첫사랑이자 약혼녀가 될 뻔했던 레이나. 스파이로 찔러 넣었던 비서. 그리고 부동산 재벌 상속녀까지. 여성 편력이 어마어마한 놈이었다.

“개자식 같으니라고.”

***

양주에서 소주, 와인으로 이어진 3차 자리. 술을 섞어 마신 탓에 네 여자는 이미 꽤 취한 상태였다.

“사장님이 제아 언니 바라보는 눈빛 봤어요? 우아하게 움직이던 그 손길까지. 어후, 완전 꿀이 뚝뚝. 정말 한독종 맞나 몰라.”

“워크숍 최고의 수혜자는 제아 언니라니까요. 내가 사장님 파트너였으면 그 애인 자리 나였을 수도 있는데.”

“세희 씨, 꿈 깨라.”

“신 비서님, 제가 뭐 어때서요?”

정작 당사자는 입 다물고 있는데 비서들의 수다는 폭발했다. 부러움에 아쉬움에 서러움에. 다양한 감정이 녹아들어간. 어찌어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도준과 연애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바로 워크숍 커플 게임 쪽으로 흘렀다.

도준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던 제아는 굳이 부정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술이 꽤 취해서 그런지 김 비서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제아에게 바짝 몸을 기울여왔다.

“제아 언니! 사장님이랑 키스는 해 봤을 테고. 혹시 잠도, 잤어요?”

“김 비서! 그런 걸 물으면 어떻게 해!?”

“풉!”

느닷없는 질문에 신 비서가 나무랐지만, 제아의 입에선 와인이 뿜어져 나온 후였다.

몽롱하게 흘러들던 잠기운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꽃다운 나이의 비서들은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제아가 침묵하자 비서들은 오히려 열광했다. 무언의 침묵은 곧 긍정이니.

이번엔 본인이 당사자라도 되는 듯 상기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던 윤 비서가 물었다.

“사장님, 설마 침대에서도 일하는 것처럼 완벽한 건 아니죠? 체력이나 테크닉이나 그런. 외모는 그런 거랑 거리가 멀잖아요. 완전 젠틀, 그 자체인데.”

침대에서의 도준은 젠틀맨이라기보다는 굶주린 야수 같았다.

능수능란하게 요리해서 느릿하게 배를 채우는 거친 포식자.

제아는 몇 번이고 숨이 막히도록 먹히고 또 먹히는 무한 충전 먹잇감.

끊임없는 반복에도 지치지 않고 정신 못 차리게 끌어가는 남자.

“맞다고 하지 말아줘요, 제발. 그럼 진짜 부러워서 다시 워크숍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 같단 말이에요!”

제아는 그저 웃을 뿐이다. 뭐라고 대답을 하기가 참…….

“아휴, 마시자 마셔! 부러우면 지는 거다!”

신 비서가 잔을 높이 치켜들자 비로소 도준의 침대 미스터리는 종료되었다.

술잔이 오가고 또 오갔다. 자신이 술을 마시는지, 술이 저를 마시는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제아는 점점 더 취해갔다. 결국 제아는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신 비서가 도준의 카드로 결제한 영수증을 계산해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좀 쓰기는 썼네. 300만 원이 넘었어.”

“에이, 넘치는 게 돈인 우리 사장님이 그런 걸로 뭐라고 하겠어요?”

잠시 생각에 잠긴 신 비서가 갑자기 생긋 웃었다.

“카드를 쓴 만큼, 우리가 사장님의 연애를 도와주면 되는 거 아니겠어?”

무슨 말이냐는 듯 비서들의 시선이 일제히 신 비서에게 향했다.

“내일이 우리 사장님 생일인 거 다들 알지?”

김 비서와 윤 비서가 급하게 핸드폰을 찾아 입력된 스케줄을 확인했다.

“뇌물 받은 값 제대로 해줘야지. 나한테 엄청 좋은 생각이 있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제아를 가볍게 흔들어 깨운 신 비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제아 씨, 혹시 사장님 집에 가봤어?”

겨우 눈을 뜬 제아가 몽롱한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신 비서가 은밀하게 제안을 했다.

“오늘 사장님 생일이야.”

흐릿한 정신에도 제아는 생각했다. 이상하다, 오빠 생일은 3월인데.

“사장님 생일 선물 준비했어?”

“선물……이요?”

“준비 못 했구나. 좋아, 우리한테만 맡기라구. 최고의 이벤트를 준비해줄 테니까.”

신 비서의 말이 메아리치듯 제아의 귓가에서 울렸다.

“제아 씨, 오늘 사장님 껌뻑 죽게 만들어주자. 안 그래도 사장님 노리는 여자들 많은데 이 참에 제대로 사로잡아야지. 너무 순종적인 여자는 매력 없다니까? 밤에 섹시한 여자는, 어떤 남자도 거부 못하는 법이거든.”

연애 경험 없는 노처녀 신 비서가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김 비서와 윤 비서가 가담했다. 당사자인 제아마저 혼탁해진 이성 따위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적당한 음주는 기분을 달래주지만 과한 음주는 사람 자체를 변신시킨다. 하지 않던 생각을 하게 되고, 행동으로 옮기는 추진력까지 덤으로.

양주, 소주, 맥주, 와인. 뒤죽박죽 섞어 마신 술 때문에 네 여자는 용감무쌍했다. 생각한 바를 행동에 옮길 만큼.

***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마지막 일정이 마무리가 되었다. 도준이 차에 올라타자 기다렸다는 듯 인호가 보고를 했다.

“문 비서 부모님이 집을 내놓는 즉시, 나한테 먼저 연락이 올 거야. 그리고 경리팀 박 과장한테도 지시한 대로 말해놨고.”

무슨 일이 있는지 말조차 하지 않는 제아는 절대 도준의 도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또한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제아가 원하는 대로 해주되, 그저 보이지 않게 뒤에서 손만 써놓았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도준의 시선이 손에 들린 서류가 아닌 핸드폰에 꽂혔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제아에게선 연락 한 통 없다. 분명 집에 도착하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설마, 아직까지 여자들끼리 술을 마시고 있는 건가? 쿨한 애인이 되고 싶은데도 자꾸만 신경이 그쪽으로 분산이 되었다.

업무 전용 핸드폰을 꺼내자 고스란히 카드 사용 내역 메시지가 와 있었다. ‘레옹’이라는 바에서 카드가 긁힌 게 밤 8시인데 그 이후로 카드가 쓰인 내역이 없다.

도준의 손이 불안하게 핸드폰을 자꾸 만지작거리지만, 핸드폰은 조용했다.

아파트 전용 주차장으로 차가 도착했다.

“한 사장.”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도준이 돌아서자 인호가 씩, 웃었다.

“생일 축하한다.”

인호가 제 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걸 본 후 엘리베이터에 타는 도준의 입술 사이로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생일이라.”

문이준으로 살았을 때는 3월이 생일인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도준이 된 순간부터 그의 생일은 1월 1일이 되었다. 그래도 어머니라고 연희가 잘못 알고 있는 그의 생일을 그녀만의 표현법으로 정확히 짚어주었다.

―1월 1일, 네가 태어난 새해 첫날은 내게 최악의 새해였어.

씁쓸한 웃음을 흘린 도준은 카드키를 찍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때 눈앞에서 무언가가 팡 터졌다.

“사장님, 생일 축하드려요!”

토끼 머리띠를 한 신 비서와 김 비서, 윤 비서가 그의 집에서 폭죽을 터뜨린 것이다. 바닥에 내려앉은 폭죽 쓰레기를 도준이 무심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이 그를 불쾌하게 했지만 우선 내색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비서들이 이 집에 들어올 수 있는 건 모두 제아 때문일 테니까.

“사장님, 촛불 끄셔야죠!”

김 비서가 쪼르르 달려와 도준에게 촛불이 타오르는 케이크를 내밀었다. 정확히 세 개의 큰 초와 한 개의 작은 초가 케이크에 꽂혀 있었다.

그 케이크를 바라보는 도준의 눈빛은 섬뜩했다. 저주받으며 태어난 그날 따위, 축하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촛불 끄셔야 저희가 준비한 엄청난 생일 선물을 받으실 수 있어요.”

도준이 케이크의 촛불을 끄자 기다렸다는 듯 비서들이 침실로 등을 떠밀었다.

“오늘 저희가 쓴 300만 원만큼, 톡톡히 되돌려드렸어요.”

침실 문을 여는 도준의 뒤로 비서들이 한 입으로 외쳤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현관문 복도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침대 위에 설치된 레일 등만 켜진 침실 안은 아늑했다. 침대 벽에서 흘러내린 시선이 침대에 고정되었다. 새하얀 침대 위에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누워 있는 제아가 보였다.

선물이 제아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잠이 든 여자를 어떻게 하라는 건지.

침대에 걸터앉은 도준은 토끼 머리띠를 한 채 잠이 들어 있는 제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결에도 시선이 느껴진 건지, 제아가 홀연히 눈을 떴다. 얽혀드는 시선이 강렬했다.

느릿하게 몇 번 눈을 깜빡인 제아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의 넥타이를 확 잡아당겼다. 순식간이었다. 침대로 쓰러진 도준의 허리를 제아가 타고 오른 건.

이불 안에 숨겨진 제아는 완벽한 바니걸 옷차림이었다.

토끼 머리띠와 극적인 조화를 이루는 블랙 톱 미니 원피스. 그의 허리를 조이고 있는 늘씬한 다리는 검은 스타킹에 감겨 있다.

그런데 말려 올라간 치마 밑으로 보이는 무언가에 도준이 시선이 번쩍, 뜨였다. 저건, 가터 벨트?

그는 단연코 이런 코스프레 옷차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바니걸 차림의 제아는 취향저격이었다.

제아가 얼굴을 내렸다. 흘러내린 풍성한 머리칼이 그의 얼굴을 쓸고 내려온 입술이 달아오른 귀에 밀착되었다.

“한도준 씨, 생일 축하해.”

오렌지 빛 공기에 녹아든 복숭아 향에 섞인 알코올의 향이 진했다. 제아는 지금 단단히 취해 있었다. 술의 힘을 빌어 이런 발칙한 용기를 내다니.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도준은 묘하게 알코올을 흡입한 듯 심신이 둔탁해졌다. 그의 허리를 타고 오른, 바카디151보다 도수 높은 이 여자 때문에.

“이 지퍼, 오늘 밤 오빠만 손댈 수 있어.”

제아의 손이 도준의 손을 잡고 은밀하게 옆구리 쪽으로 잡아끈다.

“너 지금 뭐 하는…….”

쉿, 제아의 손이 도준의 입술을 꾹 눌렀다.

“생일 선물, 끝내주지?”

붉은 입술을 요염하게 당기며 웃는 제아는 도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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