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61화 (61/104)

61. 넌 내 영혼이야.

2017.04.03.

애틋하게 파고드는 도준의 입술과 숨결엔 욕망이 아닌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제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묻지 않았다. 그저 받아주고 다독여줄 뿐이었다.

밀착되어 있던 몸과 입술이 떨어졌지만, 서로에게 얽혀든 시선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소복하게 내린 눈이 도준의 머리와 어깨에 꽤 내려앉아 있었다. 제아의 손이 꼼꼼하게 그 눈들을 털어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준이 갑자기 얼굴을 숙여왔다. 제아의 긴 속눈썹 끝에 맺혀 있던 차가운 눈의 결정이 도준의 입술로 스며들었다.

눈꺼풀에 와 닿는 서늘한 감촉에 동그랗게 눈을 뜬 제아의 손목을 도준이 잡아끌었다.

“같이 갈 곳이 있어.”

어릴 적 서로의 손을 잡고 자주 왔던 공원에 도착했다. 그가 이끄는 방향이 그들의 아지트이기도 한 오두막으로 향하는 샛길이라는 걸 눈치챈 건 시간이 꽤 지나서였다.

“여긴 갑자기 왜 온 거야? 어두워서 산을 올라가는 건 위험……?”

하지만 제아는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좁은 산책로 입구부터 시작되는 촘촘한 조명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게 대체…….”

인적이 드문 좁은 산책로에 이렇게 많은 가로등을 설치한다는 건 낭비나 마찬가지였다.

제아가 의문이 가득 어린 눈빛으로 도준을 응시했다. 설마 이것도 다 오빠가 한 거냐고.

“익명으로 작은 후원을 했을 뿐이야.”

별 거 아니라는 듯, 도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제아는 그저 유순하게 그의 손에 이끌려 좁은 산책로를 타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어 올라갔을까.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은 채 버티고 있는 오두막집이 보였다.

무려 10년 만이었다. 강렬했던 추억과 끔찍한 악몽의 시작. 이곳을 차마 올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는 제아를 도준이 뒤에서 안아왔다.

“이젠 혼자가 아니야.”

용기를 내라는 듯 손가락 사이로 도준의 손가락이 흘러 내렸다. 깍지를 낀 두 개의 손이 축축하게 얼어 있는 오두막집의 문에 닿았다.

“암호를 대야지.”

귓가에 와 닿는 나직한 속삭임. 제아는 조심히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톡, 톡톡톡, 톡, 톡톡톡, 톡, 톡톡톡.

“열려라, 참깨.”

제아의 입술 사이로 암호가 흘러나오자 도준이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오두막이 ‘끼익’ 소리를 내면서 좁은 내부를 드러냈다.

조심히 안으로 들어서자 도준이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 불을 붙였다. 초에 불이 붙고 일렁이는 촛불이 안을 환하게 밟혔다.

작은 간이 의자 두 개와 좁은 식탁. 천이 깔린 식탁 위에는 케이크와 와인, 그리고 와인에 곁들일 간단한 핑거 푸드 형식의 안주들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크리스마스도 그냥 흘려버렸더군.”

꽤 미안해하는 도준의 말투에 제아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남의 생일, 뭐가 중요하다구.”

그 중얼거림에 피식 웃음을 흘린 도준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3분 남았어.”

“뭐가?”

“우리가 함께할 새해.”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이는 도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있다. 그 반지를 본 제아도 목에 걸고 다니던 반지를 손가락에 끼었다.

도준이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자 서로의 손가락에 끼인 반지가 어긋나게 부딪혔다. 그 부딪힘에 내면에서 도사리고 있던 오두막의 악몽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도준의 비의 악몽, 그리고 제아의 오두막의 악몽. 서로가 서로의 악몽을 깨준 것이다.

작은 오두막 내부는 좁고 추웠다. 그런데도 제아는 입에서 해실해실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도준과 다시 이곳에 올 줄은 몰랐다. 서로의 손가락에 반지를 낀 채, 서로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 품고, 서로를 눈에 담은 채 말이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 일렁이는 촛불에 보이는 서로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시계의 초침이 정확히 12시에 닿는 순간,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케이크의 촛불을 껐다.

꺼진 촛불을 짧게 응시한 도준이 긴 몸을 일으켜서 오두막 창문 쪽으로 향했다.

도준의 손짓에 다가온 제아를 그가 품으로 끌어당겼다. 새까만 밤하늘, 시려 보이는 달이 떠 있었다.

“소원 빌어야지.”

도준이 나직하게 속삭이자, 제아는 조용히 웃었다.

“이미 빌었어.”

오빠가 평범한 남자였음 좋겠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말이다.

“오빠도 빌었어?”

제아가 묻자 도준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제발 평범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말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삶들이 그는 지긋지긋했다. 환멸감이 느껴질 정도로.

도준은 제 품에 있는 제아를 더 꼭 끌어안았다. 향긋한 복숭아향이 나는 머리칼에 입술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그들에게도 넌 버림받을 거다. 철저하게 이용당한 후에 말이야.

제 어머니였던 연희의 독언이 그의 귓가에 속살거리면서 맴돌았다.

“다신 너와 헤어지는 일 없게 해달라고.”

아침마다 눈을 뜨는 순간 얼마나 겁이 나는지 모른다. 내 품에 있는 네가 안개처럼 증발해버릴 것만 같아서.

“죽을 때까지 너와 함께 있게 해달라고.”

지독한 겁쟁이가 되어버리는 나를.

“네가 없으면 안 돼, 나는.”

세상이 모든 빛을 잃고 무채색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넌 내 영혼이야.”

그래서 난 오늘도…….

“영혼이 빠져 나가면, 그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이렇게 어린 애처럼 너에게 사랑을 구걸할 수밖에 없어.

“문제아, 사랑한다.”

10년이 지난 사랑 고백은 훨씬 더 지독했다.

***

차의 뒷좌석에 앉은 도준은 인호가 오늘 오전 메일로 전송한 기사를 태블릿 PC로 확인했다.

오두막에서 꼴딱 밤을 새우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컨디션만은 최고였다. 물론 그와 달리 제아는 아직까지도 침대에서 단잠에 빠져 있겠지만.

“유 실장, 이 기사는 그대로 내보내도록 해.”

인호가 룸미러로 그를 보면서 물었다.

“괜찮겠어? 벌써 두 번째인데.”“이번엔 내가 일리안을, 방패로 삼아야겠어.”

제아무리 그라도 한꺼번에 많은 적들을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는 있지만, 적이 많은 만큼 언제 방어벽이 뚫릴지 모른다. 방어벽이 뚫리면 타깃은 그가 아닌 제아이리라.

비겁하다고 해도 좋다. 미국 부동산 재벌의 상속녀라는 일리안의 타이틀은 수면 위로 솟아오른 제아의 존재를 잠시 가라앉게 해줄 것이다.

시간을 벌 수 있는 일을 그는 절대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어르신이 좋아하는 선물은 준비된 거지?”

인호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마지막 스케줄만 성공적으로 끝내면 험한 길을 돌고 돌지 않고 지름길로 직행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이다.

***

교외에 위치한 요정, 그 곳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좌식 밀실. 도준은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 앞에 앉아 있었다.

한 회장에게 미국으로 그를 보내라고 압력을 행사했던 보이지 않는 정치계의 실세, 박중용이었다.

중용은 관심 없는 듯 조용히 젓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도준에 대한 사전 조사를 끝냈고 보고까지 완벽하게 받은 상태였다.

계집애처럼 곱상한 얼굴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건 비상을 하기 위해 날개를 펼치려는 독수리. 이토록 눈빛이 살아 있는 젊은이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중용이 마지못한 척 운을 떼었다.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 우선 들어나 보지.”

“한 태영 부회장이 다음 대선 후보를 누구로 밀고 있는지 아십니까?”

“…….”

“바로 문상태 의원입니다. 어르신과는 척을 지고 있는 문병우 전 국무총리의 아들이지요.”

“나는 말을 돌리는 걸 싫어하네.”

“어르신을 먼저 배신하려는 한 태영 부회장이 아닌 제 편에 서 주십시오.”

박중용은 별다른 내색을 비추지는 않았다. 그 대신, 도준에게 향긋한 매화주가 들어 있는 백자 주전자를 들어 보였다.

“한 잔 받게나.”

중용이 따라주는 술을 도준은 두 손으로 깍듯하게 받았다.

“문병우는 내 상대가 되려면 한참 멀었어. 한 부회장이 왜 그런 무리수를 두겠나?”

상체를 반듯하게 틀어 술잔의 술을 깨끗하게 비운 도준이 두려움 없는 눈빛으로 중용을 응시했다.

“어르신 건강 악화에 대한 소문이 은밀하게 나돌고 있습니다. 더불어 시한부 권력이라는 말도. 혹시 아십니까?”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지는 몰랐군.”

중용은 느슨하게 대답을 했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대답. 감히 어느 누구도 그에게 그런 소문을 귀띔해줄 순 없었다.

아부만 할 줄 알지, 쓴 말은 절대 물어오지 못하는 족속들만 주변에 우글거리니.

“소문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한부 동아줄을 잡느니, 좀 더 기다려서 튼튼한 동아줄을 잡는 게 당연한 이치이니까요. 어느 줄을 잡느냐에 따라 기업인들에겐 득과 실이 천차만별로 벌어집니다.”

중용이 계속 해보라는 눈짓을 했다.

“어르신에겐 외동따님에 외손녀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뿐인 사위는 어르신 때문에 지금은 대접을 받고 있지만, 정치계를 휘어잡을 카리스마가 없으신 분이시죠.”

“…….”

“결론은 어르신의 뒤를 이어 밀어줄 실세가 없는 상황입니다. 어르신 상대가 안 된다고 하더라도 문병우 전 총리는 확고한 2인자입니다. 1인자가 사라지자마자 순식간에 치고 오를, 2인자.”

거침없이 찔러드는 말투가 서슴없었다.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새파랗게 젊은 기업인이, 그의 눈을 두려움 없이 직시하며 쓴 소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럼 자네는 왜 시한부 동아줄을 잡으려는 게지?”

“저는 어떤 동아줄도 잡을 생각 없습니다.”

중용은 도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새하얀 눈썹을 꿈틀, 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마치 젊을 적 제 모습을 보는 것처럼.

“그저 어르신은 어떤 일이 벌어지든 지켜만 봐주십시오.”

정중히 부탁하는 거지만 쉽게 말하자면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훗날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한 부회장을 위해서 검찰이나 언론을 움직이지 말라는.

중용은 자신의 판단이 다시 한 번 옳았음을 떠올렸다. 남자는 진국이었다. 오늘 시간을 낸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정치계 초짜이면서도 젊은 나이에 판세를 읽을 줄 알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다.

차분함과 냉정함이 엿보였고, 대담함과 행동력도 갖추었다. 게다가 두뇌는 물론 외모까지 말쑥했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을 했으니, 중용은 드디어 본론을 입에 담았다.

“자네, 내 손녀딸 한번 만나볼 텐가.”

생각지 못한 엄청난 제안이었다. 권력과 재력에 조금이라도 욕심이 있다면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죄송합니다, 어르신. 저는 정치 쪽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 엄청난 제안을 도준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 거절했다.

“허허. 누가 정치계 쪽으로 나서라고 했나? 사심 없이 내 손녀딸 한번 만나보라는 거지.”

“책임질 만한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이 내 앞에서 노인 같은 발언을 하는군. 당장 약혼을 하라는 게 아니네, 나는. 우선 만나보고 연애를 하다가 맞지 않으면 헤어질 수도 있는 거지.”

“연애든 약혼이든 결혼이든, 제게는 일맥상통하는 의미입니다. 저는 단 한 여자와 그 모든 걸 함께할 생각이라서요.”

“그게 내 손녀딸일 수도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의 보이지 않는 최고 실세 박중용이 지금 그를 탐내고 있었다. 제 손녀딸의 사위로. 그래서 도준은 섣불리 여자가 있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한 회장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바로 눈앞의 왜소한 노인이라는 걸 알기에.

“정계와 재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평범하게 사랑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죽을 때까지 평범하게 사는 건. 그 모든 평범함을 제아와 함께하는 것. 그게 그의 마지막 목표이자 꿈이었다.

“뭐 그렇다면야. 우선은 일어나 보게. 내 나중에 다시 연락하도록 하지.”

생각할 시간을 갖겠다는 중용의 대답이었다.

도준은 일어나서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후 룸을 빠져 나왔다. 밀실에서 나오자마자 도준은 제아가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도준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잘 벼른 칼날이 들어선 것처럼 번뜩이던 눈동자가 풀리면서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입 꼬리가 나른하게 비틀렸다.

“제아야.”

날카롭게 중용에게 직언을 날리던 도준의 음성은 잔잔한 호수처럼 다정했다.

일정한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는 도준을 지켜보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도 손에 핸드폰을 든 채였다. 도준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여자가 생긋 웃었다.

“할아버지, 나 그 남자 마음에 들어요. 그것도 무척.”

중용의 하나뿐인 손녀딸, 화연이었다. 재계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얼음 같은 남자라고 들었다. 오로지 일만 하는, 차갑고 삭막한 겨울밤 같은 남자.

하지만 소문과 달리 남자의 외모는 달콤한 생크림이었고, 미소는 따사로운 봄 햇살이었다.

“그 남자, 갖고 싶어요.”

***

새해 1월 1일 저녁, 신 비서가 비서팀을 소집했다. 선약이 없으면 옆구리 쓸쓸한 여자들끼리 뭉쳐서 새해를 맞이하자는 좋은 의도였다.

장소는 청담동의 헤네시라는 위스키 바. 지로와 지연과 자주 왔던 곳이라 익숙한 곳이었다. 좋지 않은 집안 분위기에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파이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가기로 했다.

술을 잘 마시지는 못했지만, 왜 사람들이 속상할 때 술이 당기는지 이해가 되는 새해 첫날이라고나 할까.

“아, 양주 마시고 싶다.”

“저두요.”

“저두요.”

병맥주를 홀짝이던 신 비서의 말에 김 비서와 윤 비서도 맞장구를 쳤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제아가 입을 열었다.

“여기 제 친구들이 자주 오는 바라서 킵 해 놓은 양주가 꽤 있을 건데 확인해 볼까요?”

“에이, 양심이 있지.”

신 비서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제아가 싱긋 웃었다.

“제 친구들, 돈 많아서 킵해놓은 양주 거의 안 먹고 버려요. 그럴 바엔 먹어주는 게 오히려 더 좋은 거죠. 걱정 마세요.”

제아는 얼른 일어나서 헤네시 바의 매니저를 찾았다. 사실은 그녀들보다도 제아 자신이 술이 당겼다. 유일한 희망이던 초록색 대문 집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만 떠올리면 미칠 것 같았다.

제아가 테이블을 비운 사이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제아의 핸드폰에 무심코 시선을 던진 김 비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사장님-

“어? 우리 사장님 전환데요?”

그 말과 동시에 비서들은 일제히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엄연히 비서 팀의 막내에게 전화를 한다는 건 긴급 상황이란 걸 의미하니까. 하지만 그녀들은 모두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준은커녕 인호에게까지 연락 한 통 없었다. 그게 더 불안한지 신 비서가 다급하게 말을 했다.

“전화 받아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

바짝 긴장을 한 김 비서가 제아의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부드러운 음성이 그녀를 당황시켰다.

[제아야.]

‘한독종’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장이 이런 목소리를 낼 리가. 그것도 이름을 부를 리는 없다. 설마 한도준 사장님이 아닌가? 김 비서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전화는 받았다.

“한도준…… 사장님 아니세요?”

[누구지?]

“사, 사장님 맞으시죠? 저 김 비서입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이내 도준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이 출근하는 날은 아닌 것 같은데.]

“새해를 맞이해서 솔로들끼리 모여서 쓸쓸함을 달래자고 술 한잔하고 있습니다.”

[나의 비서들이 다 솔로라…… 정확한 건가?]

‘나의 비서’란 달콤한 단어에 김 비서는 순간 황홀함을 느꼈다.

나의 비서, 나의 비서. 그 단어가 뇌리를 꽉 채우는 바람에 도준이 제아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렀다는 사실은 깨끗하게 잊혀졌다.

“그럼요!”

[술집 주소 불러봐.]

김 비서가 전화를 끊는 순간 제아가 나타났다.

“짜잔! 제가 로얄 샬루트와 조니 워커 블루를 찾아왔답니다! 그것도 거의 새 걸로요!”

제아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고가의 양주에 비서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도준에게 전화가 왔다는 사실을 약속이라도 한 듯 잊어버렸다. 별말 하지 않았으니, 별일 없겠지.

곧이어 술병이 오가고 잔이 오갔다.

“애인이 무슨 필요니? 술만 있으면 돼, 그렇지?”

그러다 신 비서는 갑자기 생각난 듯 제아에게 물었다.

“맞다! 제아 씨, 준환이랑은 잘 되어가?”

“그날 이후로 본 적 없어요.”

“왜? 준환이가 제아 씨 꽤 마음에 들어했는데. 혹시 준환이가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우리 사장님이 제 애인이거든요.’라는 말은 차마 못 하고 제아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다.

“아니면 어떤 스타일 좋아한지 말해봐. 나 남자 친구들 꽤 많거든. 이렇게 비싼 술도 마시게 해줬으니 제아 씨 소개팅은 내가 책임지고?”

“문 비서는 안 됩니다.”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는 냉랭한 음성이 불쑥 튀어나와 신 비서의 말을 가로막았다. 비서들은 일제히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틀었다.

바로 시야에 들어오는 건 최고급 캐시미어 울 코트. 살짝 더 시선을 내리면 최고급 코트보다 더 최고급인 남자의 얼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남자가 제 보스라는 걸 깨달은 비서들은 자동이었다. 취기 어린 눈을 번쩍 뜨고 소파에서 일어난 비서들의 손이 모두 배꼽 위로 모아졌다.

“사, 사장님 오셨습니까!”

주르륵 정갈하게 선 비서들은 투철한 직업정신을 발휘해서 도준에게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제아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고 그 끝에 섰다.

갑작스러운 도준의 등장에 가장 놀란 건 제아였다. 터질 것처럼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면서 어깨가 긴장감에 바짝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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