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60화 (60/104)

60. 나 때문에, 네가 울었어.

2017.03.30.

잠시 생각에 잠긴 레이나는 갑자기 생긋 웃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이구나?”

역시나 레이나다웠다. 어떻게 된 건지 연유도 묻지 않은 채 말을 되돌렸다.

“그게 내가 제아 씨와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이유야?”

“…….”

“넌 아니라고 하지만 난 엄연히 네 친구야. 네 곁에서 오랫동안 널 지켜봤고 서로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해. 친구니까 내 스케줄을 조정하면서까지 모델 제의 수락한 거고. 내 친구가 사랑하는 여자한테 내가 잘해주었음 잘해주었지, 해를 입힐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제아를 계속 만나겠다고?”

“나 외국 생활 오래해서 한국에 아는 사람도 없고 또 제아 씨랑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성격도 잘 맞는 것 같아. 그래서 언니 동생으로 잘 지내고 싶어. 그러니 남자는 좀 빠져주는 게 어때?”

레이나는 당당해도 너무 당당했다. 도준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답답한 여자 같으니라고.

“근데 제이드 너도 대단해. 그 마음이 갑자기 생겨났을 린 없을 텐데. 어떻게 10년 동안 제아 씨한테 연락 한 번 안 할 수가 있어? 그러다가 제아 씨가 누구랑 연애하고 결혼하면 어쩌려고? 그럼 잊으려고 한 거야?”

“내가 왜, 10년 동안 나 몰라라 했을까?”

되돌아온 질문에 레이나가 조금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녀로서도 그건 감이 잡히지 않은 것이다.

“지키기 위해서야. 나부터 철저하게 모른 척해야, 다른 누구도 모를 테니까.”

어차피 제아의 존재는 은밀하게 수면 위로 반쯤 솟아오른 상태였다.

서로의 편의에 의해서 아직은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않고 있을 뿐. 숨겨야 할 이들에겐 숨겨야 하지만, 제대로 누를 수 있는 이들은 확실하게 눌러놓아야 한다. 눈앞의 레이나 같은 존재에겐.

“네가 말한 것처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정도가 아니야.”

“……?”

“가장 소중해. 유일하게 소중하고.”

얼음 같은 남자가 거침없이 드러내놓은 진심. 제 아무리 레이나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설픈 친구 사이라는 거 인정해주지. 그 대신.”

도준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여기까지.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

“네가 말한 어설픈 친구 사이라도 유지하고 싶다면, 제아한테 신경 꺼. 경고는 한 번뿐이야.”

제대로 놀랐는지 레이나의 커다란 눈이 한껏 격앙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준이 태연하게 테이블을 돌아와 레이나에게 몸을 숙였다. 그토록 원했던 남자의 달콤한 숨결이 살벌한 경고와 함께 레이나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내 유일한 약점을 알았다고 날 쥐고 흔들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걸 건드리는 순간, 내 이름을 걸고 너의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버릴 테니까.”

미련 없이 몸을 일으킨 도준의 옷깃을 레이나가 잡았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지만 그를 바라보는 레이나의 눈빛은 진지했다.

“널 감당하기에 제아 씬 너무 평범해. 그런데 왜…… 사랑하는 건데.”

도준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궁금해. 그러니까 대답해줘.”

“…….”

“친구로 인정해준다면서.”

참 미련이 많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쿨한 척하지만, 흔들리는 동공에 제 마음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내 눈에 유일하게 보이는 존재이니까.”

아기 오리가 눈을 뜨자마자 제 눈에 보이는 걸 제 어미로 보듯이 말이다.

제아를 위해 사는 게, 제아 때문에 사는 게, 도준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거스를 수 없는 순리처럼.

“그 존재가 없으면, 세상 살아갈 이유도 없겠지.”

테이블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레이나는 표정 변화 없이 중얼거렸다.

“짜증나.”

눈앞에 놓인 에스프레소를 입술로 가져가 우아하게 한 모금 머금었다.

“더 욕심나잖아.”

독한 쓴맛을 가졌는데도 또 마시고 싶은 커피는 마치 도준이라는 남자 같다.

“뺏고 싶어.”

***

안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윤식은 동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준이 급한 불을 꺼주기는 했지만, 한 곳이 더 남아 있었던 것이다.

동식은 10년 전에도 잘못된 찌라시를 물고 와서 확실하다고 했다. 그 말을 믿고 대량으로 사들인 주식은 곤두박질쳤다.

미안했는지 동식은 그에게 비싼 식사도 대접했고 소액으로 하는 주식 투자를 알려주어서 조금의 이익까지 보게 해주었다. 간간히 윤영에게 건네는 비밀의 용돈 출처가 바로 그곳이었다.

동식은 제 실수를 나 몰라라 하는 친구가 아니었고 그래서 그에 대한 믿음이 다시 쌓인 것이다.

그런 동식이 다시 정확한 정보라고 했다. 그래서 돈을 있는 대로 끌어 모아서 투자한 건데.

“자네 말만 믿었다가 다 날렸어. 그러지 말고 1억만 빌려줘. 내가 꼭 갚을 테니, 응?”

윤식은 절박했다. 가족의 전부인 이 집만큼은 꼭 지키고 싶었다. 이천만 원을 주고 유예 기간을 얻긴 했지만,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이 집마저 잃어야 한다.

[어허, 내 탓을 하면 섭섭하지. 나는 그저 조언을 해주었을 뿐이라고. 그래도 책임감을 느껴서 자네한테 천만원을 그냥 주겠다는 거 아닌가.]

“알지, 잘 알아. 천만 원은 안 줘도 되니, 1억만 어떻게 안 될까? 나 이 집은 꼭 지켜야 하네. 자네 빌려줄 능력 되잖아.”

그때 안방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제아가 들어왔다.

“아빠!”

윤식은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제, 제아야.”

“엄마 말이 정말이야? 아빠 사채 빌렸어? 그래서 우리 이 집 팔아야 해? 응?”

상처받은 딸의 눈을 보고 있으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윤식은 그저 옛날 잃었던 만큼만 적당히 벌고 빠지려 했을 뿐이다. 허울뿐인 가장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벌어다주지는 못하지만 자신에게 드는 치료비 정도는 감당하고 싶었으니까.

많은 욕심을 낸 게 아닌데, 왜 이 지경이 되어야 하는 건지. 가장으로서도 무력했고, 남자로서도 무력한 자신이 지긋지긋하다. 윤식은 저 때문에 고생하는 딸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다, 제아야.”

제아는 윤식의 휠체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식, 이제 안 한다고 했잖아.”

항상 밑바닥으로 내려앉아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초록색 대문이 있는 이 집이 있어서였다.

집은 있으니까, 집만 있으면 되니까. 그런데 그 집마저 잃게 된다면…….

제아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빠가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 중이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항상 제 편을 들어주던 딸이 눈을 맞추지 않고 침묵을 했다. 그 모습에 자괴감이 물 밀 듯이 밀려왔다.

“제아 너도, 아빠가 밉지? 무능력하고 사고만 치는 아빠가.”

잔뜩 주름진 윤식의 눈 끝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제아의 눈도 함께 젖어들었다. 원망은 잠시뿐이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제아는 씩씩한 표정으로 윤식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해. 다신 그런 말 하지 않는다고. 나한테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멋져. 누가 뭐래도 내 아빠니까.”

“제아야.”

“그래도 사채랑 주식은 안 돼. 알았지?”

제 품으로 파고드는 딸을 윤식은 꼭 끌어안았다. 집도 지켜야 하지만, 도준과 제아의 사이도 막아야 하는 상황이다. 윤식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

도준은 연희의 자택으로 차를 모는 중이었다. 겉모습은 얼음 조각상이었지만, 속은 용광로 안의 불꽃처럼 거칠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인호가 보고했던 내용을 아로새길수록, 분노는 깊어졌다.

―10년 전도 10년 후인 지금도, 지인인 김 동식이 흘린 찌라시에 홀려 주식에 손댄 거야. 10년 동안 꾸준히 문윤식 씨 주변을 맴돌면서 조금씩 도와주며 신뢰를 쌓고 있었더라고. 근데 중요한 건 그 사람은 문윤식 씨가 사들인 주식을 사들이지 않았다는 거지. 그리고 김동식 씨와 한 여사님 사람이 만나는 게 몇 번 잡혔어.

―문윤식 씨가 다른 대부 업체에 집을 담보로 1억을 또 빌렸더라고. 네가 준 이천만 원으로 우선 급하게 막긴 한 것 같은데 쫓겨나는 건 시간문제일 거다. 어떻게 할까.

자택으로 들이닥친 도준은 바로 연희가 있는 응접실로 안내가 되었다.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연희는 도준을 봤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도준도 연희의 환영을 바라지는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반가운 존재가 아니라는 건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도준은 소파에 앉지도 않고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바닥을 긁어내리는 듯 낮게 깔린 음성. 하지만 분노 게이지는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못 배운 본새 티 내지 말고 앉으려무나.”

앉지 않으면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도준은 연희를 사선으로 둔 채 소파에 앉았다. ‘먼저 흥분하는 쪽이 지는 거다.’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제가 떠난 직후,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분들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이유가 뭐냐고 묻는 겁니다.”

“누가 그러니? 내가 그 사람들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고.”

“김동식. 이래도 시치미 떼실 겁니까?”

찻잔을 내려놓은 연희가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좀 더 파헤쳐서 증거를 들이밀면, 그럼 인정하시겠습니까?”

“그냥 거슬릴 뿐이야. 거슬리면 치워버려야 하는 거 아니니?”

유리알처럼 차가운 연희의 동공이 가늘게 웃음을 머금었다.

“어머니와는 비교되지 않는 위치와 환경에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굳이 신경을 쓰고 거슬려 하는 이유가 뭐냔 말입니다.”

“그렇게 소중하니?”

연희가 느닷없이 묻자 도준에게서 반사적으로 날카로운 반응이 튀어나왔다. 그게 흐뭇한지, 연희가 이번엔 입술로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소중하나 보구나.”

그녀가 원했던 반응이었다.

“……건들지 마십시오.”

“싫다면? 난 꼭 치워버려야겠다면?”

연희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아주 철저하게. 그 비웃음에도 도준은 흔들림 없이 태연하게 제 할 말을 흘렸다.

“‘내 목덜미를 물어뜯어버릴 것 같은 잔인한 눈빛이야, 그래서 네 눈빛이 싫어.’라고 어머니가 제게 그러셨죠. 기억나십니까?”

“…….”

“계속 건드려보세요. 기꺼이 물어뜯어드릴 테니.”

침묵을 고수하던 입을 연희가 드디어 열었다.

“너 때문이고, 네 아버지 때문이야.”

“…….”

“그 식구들이 불행한 건, 너라는 존재를 거두어서라고.”

연희가 도준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해 왔다. 처음이었다. 차가운 눈동자 너머에 서린 격렬한 감정의 기복. 원망이었고, 분노였다.

“이용해 먹는 남자나, 그 남자에게 동조한 친구들이나. 다 똑같이 벌레만도 못한 존재들 아니겠니? 그러니 치워버려야지. 네 말대로 치울 위치와 환경에 내가 있으니 말이다.”

도준은 노을 보육원의 원장에게 물었었다. 내 아버지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냐고.

‘다정하고 착했어. 거기다 똑똑하기까지 했지. 본인보다는 항상 남을 배려하는 그런 남자였어. 어딜 가든 눈이 부신 존재. 얼굴도 아름답고, 마음도 아름다운. 보는 사람마다 모두 반해 버릴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였어.’

눈이 부신 존재, 벌레만도 못한 존재. 지극히 상반되는 표현이지만, 같은 남자를 표현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남자를. 아버지란 남자의 진짜 모습은 오로지 하늘만이 알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인심 쓰는 척, 널 거두어들이기까지 했지. 넌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아이였잖니? 그것도 모자라 돈을 받고 나에게 팔아넘기기까지 하다니.”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는 잔인한 눈빛, 지금 도준을 보는 연희의 눈빛이 그러했다. 물어뜯은 목덜미에서 피가 흐르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넌, 죽었어야 했어.”

배 아파 낳은 아들에게 독설을 뱉는 연희를 보며 도준은 생각했다. 그렇게 눈이 부신 존재는 왜 제 아이를 가진 여자에게 이런 분노를 심어준 걸까. 대체 왜.

아마도 그 전이라면 그 독설에 심장이 할퀴어 너덜너덜 해졌을 텐데. 의외로 멀쩡했다.

도준은 덤덤하게 고개를 틀어 창밖을 응시했다. 눈이 뒤섞인 비가 내리고 있다.

비다. 비……. 끔찍이도 싫은 비. 그리고 어머니란 존재.

두 개의 끔찍함이 맞물려 있는 상황이었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자 귓가에 제아의 달콤한 음성이 새어들었다.

―오빠는 모르지? 비가 굉장히 낭만적이라는 거.

―비 오는 날은, 키스하기 좋은 날이라는 거.

예고 없이 스며들던 농밀한 복숭아 향, 입술에 닿았던 아찔한 감촉.

비 오는 날의 낭만 공식이었지. 비 오는 날은 딥 키스…….

문제아, 문제아, 문제아.

그 이름을 떠올리자 심장을 할퀸 상처가 아물고 피가 멎는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악몽 따위에 휘둘리지 않게 된 것이다.

그와 달리 연희는 악몽의 늪에서 아직까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지도.

덤덤한 눈빛만큼 덤덤한 음성이 도준의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계약대로 제일 그룹은, 어머니에게 안겨드릴 겁니다.”

단, 제일 그룹이 온전하리라는 보장만 못 할 뿐이었다.

“그러니 고마워하세요.”

계약을 지키려는 순수한 의도는 오로지 그 대가가 제아의 가족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분들 덕에 제가 살아남아, 어머님께 이용당해주는 중이니 말입니다.”

“……!”

“벌레만도 못한 존재들에게, 도움을 받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도준에게 찻잔이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받아든 이태리제 찻잔은 손 악력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파들파들 떨리는 연희의 눈꼬리. 흥분하면 지는 거다.

고로 오늘의 승자는 도준이었다.

유리에 깊게 배인 손에서 피가 뚝뚝 흘렀지만 도준은 태연하게 바닥에 떨어진 커다란 조각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오늘이 12월의 마지막이군요.”

너무 바쁜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크리스마스도 챙기지 못하고 넘겨버렸다.

내 여자, 서운하지 않을까. 이 와중에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건 제아에 대한 걱정이었다.

마냥 아이 같더니, 그의 여자가 된 후는 오히려 의젓해졌다. 연인이 되면 없던 응석도 생긴다는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머니.”

제아와 예쁜 아이들을 낳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꼭 보셔야 하니.

“그리고 건강하세요.”

꼭, 말입니다.

“부모에게 환영받지 못한 존재는 버림받는 법이야.”

몸을 튼 도준의 뒤로 연희의 악 받친 음성이 들려왔다.

“그들에게도 넌 버림받을 거다. 철저하게 이용당한 후에 말이야.”

잠깐 걸음을 멈추었지만, 도준은 이내 미련 없이 집을 빠져 나왔다.

***

지독히도 담배가 당기는 순간이다.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도준은 긴 몸을 차체에 기대었다.

제아의 동네에 도착하자 비는 어느새,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새하얀 눈이 그의 몸 위로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이 하얀 눈이 제 몸에 있는 새까만 더러움을 씻어 내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골목길에서 총총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가녀린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제아, 제아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같았다.

“오빠!”

사랑하는 제 여자가 품으로 폭 안겨들었다. 도준의 가슴에 코를 박고 한참 동안이나 킁킁 냄새를 맡던 제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에 물린 하얀 담배를 보더니 손을 뻗어 담배를 휙 낚아챘다.

쪽―.

얼어붙은 입술 사이로 생명을 불어넣는 달콤한 복숭아향이 스며들었다.

“담배 피우고 싶어서 달려왔구나?”

배시시 웃는 제아의 얼굴을 도준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길고 단단한 그의 손가락이 조금은 부어 있는 제아의 눈두덩이를 가볍게 쓸었다.

“눈이, 부었네.”

제아가 울었다.

“피곤해서 자꾸 하품을 했더니 눈물이 계속 흐르는 거 있지!”

제아는 멋쩍은 듯 웃어 보이지만 그는 알고 있다. 나 때문에, 네가 울었어.

연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식구들이 불행한 건, 너라는 존잴 거두어서라고.’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존재를 악착같이 붙들어 잡은 건, 바로 제아였다. 그 덕에 그는 살았고, 제아의 가족들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도준은 알고 있다. 비록 오래된 집이라도 초록색 대문이 있는 그 집이 제아의 가족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 집을 잃어야 하는 게 얼마나 큰 아픔일지.

일부러 잠시의 여운을 두면서 도준은 바랐다. 제아가 그에게 말을 해주기를.

모든 걸 알고 왔는데도 제아는 고집스럽게 말을 하지 않는다. 피딱지가 굳어 있는 도준의 손을 보곤 걱정만 할 뿐.

“손 또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넌 눈이 왜 그러는 건데. 너야말로 무슨 일 있었잖아.

“오빠 요즘 너무 다치는 거 아니야? 어쩌다 다친 건데?”

자꾸 다치고 상처 받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나 같은 놈 때문에.

“어휴, 내가 못 살아!”

그런데도 널 놓지 못할 정도로, 너무 사랑해서 미안하다.

제아의 눈은 그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도준은 제아를 다시 품에 와락 안아버렸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격렬하게.

“……사랑한다.”

잠시 방황하던 제아의 가녀린 팔은 조심스레 도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리면서 다시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비 오는 날은 딥 키스.”

“……?”

“그래서 달려왔어.”

“……아.”

그의 말뜻을 눈치 챘는지 품에서 고개를 든 제아가 얼굴을 붉혔다. 얼굴을 내려 제아와 눈높이를 맞추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키스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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