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지금 당장 널 눕히지 못할 것 같아?
2017.03.27.
도준의 1분 1초는 정확한 스케줄에 짜여 있다. 하지만 윤식이 대답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렸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제아를, 만난 거냐? 아니, 만났으니까 이런 말을 한 거겠지. 그래, 그렇겠지.”
“…….”
“제아가 너한테 먼저 그러든? 널 사랑한다고, 옛날 추억을 들먹이면서 책임지라고? 그 녀석이 10년 전에도 너한테 일방적으로 키스한 건 내가 안다. 그래서 내가 오해까지 했고. 하지만 그 녀석이 그런다고 받아줄 필요까진 없다. 그 녀석 눈에 피 한 방울 안 섞인 잘난 오빠가 오죽 멋있어 보였을까. 그래서 우리 제아가 널 못 잊고 있다가…….”
“제아가 아니라 접니다.”
윤식이 횡설수설 내뱉는 말을 차분히 듣고 있던 도준이 느닷없이 말을 잘랐다. 10년 전의 첫키스, 그건 분명 도준이 제아에게 무력으로 앗아간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욕심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제아는 바보같이 그걸 또 혼자 뒤집어쓰려 했던 것이다.
“오두막집의 일도. 제아를 사랑한 것도. 돌아와서 제아를 유혹한 것도.”
“그, 그만해라!”
“제아를 잊지 못해서 돌아왔습니다.”
“네가 애가 뭐가 아쉽다고 대체, 왜…… 고집만 세고, 철없는 그 녀석을…….”
윤식은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도준은 덤덤한 눈빛으로 윤식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도, 그리고 어머니도. 판자촌에 살던 저에게 동정심만 느꼈을 뿐,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
“제아가 아니었다면, 전 아마도 얼마간 동정심을 받다가 잊힌 존재가 되었겠죠.”
도준은 아직도 뇌리에서 선명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초록색 대문을 넘어선 그날 이후, 밤마다 종종 들렸던 부부의 대화를.
“재경 오빠도 닮았지만, 그 여자도 많이 닮았어. 여보, 나 저 아이 엄마 노릇을 잘할지 모르겠어요. 차가운 눈이, 저 표정이, 그 여자를 너무 닮았어…….”
“노력해봅시다. 나라고 마음이 편하겠어? 하지만 이 집을 마련한 것도 다 재경이 사망 보험을 우리가 받은 덕분이잖아. 우린 그 아이를 나 몰라라 해선 안 돼.”
“그래도 꼭 호적에 올려야 했어요?”
“제아가 원하잖아. 우리 제아 고집, 당신 몰라서 그래? 착하고 똑똑한 아이니 우리 식구한테 해 입힐 일 없어. 사랑으로 보듬읍시다, 우리.”
도준은 내색 없이 버텼고, 보이지 않은 곳에서 피 나는 노력을 했다. 그를 거두어준 고마운 분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오로지 공부, 완벽을 머릿속에 새겼다. 어찌 보면, 그 전이나 그 후나 별 다를 바 없는 인생이었다.
제아의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이란 족쇄, 그 이후 제일 그룹이란 족쇄.
족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런 지독한 삶을 버티게 해준 게 바로 제아였다.
오로지, 순수하게 저란 존재를 인정해주고 보듬어준 존재.
느릿하게 감았다 뜬 시야 사이로 제아의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의 저를 존재하게 해준 게 바로 제아입니다. 그 고집으로 절 구해주고, 살게 해주고, 버티게 해주었습니다. 철없는 순진함으로 절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사랑이란 걸 하게 해주었습니다.”
나를 숨 쉬게 하는, 사랑하는 내 여자.
“이준아,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윤식은 덜덜 떨리는 마른 입술로 자꾸만 안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버틸 수 있습니까.”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부모에게조차 버림받고 필요 없는, 나약한 존재였다.
“저는 제아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아가 아니었으면 이미 스러져버렸을, 보잘 것 없는 생명.
씁쓸했던 옛 잔상들을 지워버린 도준은 다시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
“오늘 저와의 만남, 제아와 어머니께는 비밀로 하십시오.”
“제발, 이준아…….”
윤식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지만,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말이 어떤 말이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도준 자신의 지독한 사랑뿐. 죽어서야 겨우 꺼져버릴, 지독한 집착과 소유욕의 형상을 하고 있는 숨 막히는 사랑.
“정말 죄송합니다.”
도준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바닥에 엎드려 윤식에게 큰절을 올렸다.
“고마우신 분에게 단 한 번의 불효.”
“……!”
“제가 저질러야겠습니다.”
절을 한 후 다시 일어난 도준은 룸을 나가기 전 다시 한 번 돌아섰다. 낯빛이 어두워진 윤식을 바라보았다.
“김동식이란 친구는 멀리하십시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준은 룸에서 나와 고용인들에게 지시했다.
“조심히 모셔다 드리고 계속 주시하도록 해.”
***
도준이 그녀에게 넘긴 업무는 해도 해도 너무 많았다. 방대한 양의 자료를 취합해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파악해야 했다. 성공 요인을 파악해서 새로운 가상 기획까지 얹어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뇌가 수천 조각으로 나뉘는 고통, 어느 누구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맡은 업무는 어떻게든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이 자료를 도준이 실제로 참조해서 이용할 수도 있다고 했기에 대충대충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신 비서가 다급하게 제아의 자리로 다가왔다.
“제아 씨, 회사 홈페이지에 공지 된 인사 개편 공지 봤어?”
“아니요. 제가 지금, 그럴 정신이…….”
“지금 회사가 난리가 아니야. 대대적으로 인사 개편에 제아 씨가 제일 아울렛 온라인몰 총괄 책임자로 내정되어 있던데?”
“예에? 제가 총괄 책임자라구요? 그럴 리가요!”
“홈페이지 공지 들어가서 봐봐. 개별 메일도 왔을 건데,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어?”
그제야 허겁지겁 회사 홈페이지와 회사 메일을 확인한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총괄 책임자라니.
“이게 대체 어떻게.”
이 정도라면 귀띔 한 번 해줄 법한데, 도준은 제아에게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다.
때마침 사장 전용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외부 일정을 마치고 도준이 인호와 함께 회사로 복귀를 한 것이다.
비서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인호는 다른 비서들을, 도준은 제아를 집무실로 호출했다.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제아는 도준에게 따져 물으려 했다.
이렇게 감당 못할 일을 벌려놓고 왜 언질 한 번 주지 않았냐고 달려드는 순간, 도준도 달려들었다. 정확하게 입술로.
순식간에 허리가 휘감겼다. 청량한 향이 콧속에 스며드는 순간 도준의 품에 안겼고 말캉하고 서늘한 입술이 짧게 입술을 누르고 떨어졌다.
쪽―.
“다녀왔어, 문 비서.”
귓가로 스며드는 따스한 숨결과 나른한 음성에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화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아, 정말 바보 같아.
슬그머니 도준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내며 품에서 벗어났다.
“내가 총괄 책임자라니. 그거 오빠가 힘쓴 거지, 그렇지?”
“그렇다면.”
“오빠, 나한테 너무 막중한 자리야. 이제 겨우 1년 된 내가 그 자리를 맡으면 회사 내에서 말도 많을 테고. 뒤에서 얼마나 수군거릴지 몰라서 그래? 나도 그렇지만, 오빠 그거 권력남용이라고 막…….”
“얼마든지 그러라고 해.”
도준이 스윽 상체를 기울여 깊숙이 눈을 마주하는 바람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적응할 법 한데도, 망할 심장이 주책맞게 떨려왔다.
“나 같은 남자를 미치게 만든 건 너잖아.”
“……오빠.”
“그것도 능력이야. 스스로 올라가기 힘들다면 이용할 줄 아는 것도.”
“난 오빠 이용한 적 없어!”
발끈하는 제아를 도준이 가늘게 눈을 뜨고 보았다.
“넌 그것보다 한 단계 위의 능력을 가지고 있잖아.”
“……?”
“내가 너에게 스스로 이용당하게 하는 능력.”
뭔가 어긋나는 말인데도 묘하게 따져댈 수가 없다. 그만큼 도준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면 그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꿈이 현실로 되고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부당하다는 생각이 드나?”
제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도준이 피식 웃었다. 손을 뻗어 제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넌 충분히 자격이 돼. 지금까지 나에게 올린 보고서만 봐도 말이야.”
“……?”
“배우는 속도가 빠르고, 업무 캐치 능력도 뛰어나. 젊은 만큼 머리가 트여 있고 생각하는 것들도 새롭지. 제일 아울렛 몰은 기존의 쇼핑몰들과는 다른 형태로 온라인 고객들을 사로잡을 거야. 한정된 온라인 고객과 과포화 상태의 온라인 쇼핑몰. 그런 고객들을 제일 아울렛 몰로 끌어들이는 것.”
“…….”
“그게 바로 네가 할 일이야. 넌 충분히 할 수 있고, 그렇지?”
제아는 어느새 묘하게 설득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면 안 되는데. 홀린 듯이 도준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제야 제아는 도준이 매번 올리는 보고서마다 점수 내듯이 평가를 해준 게 떠올랐다. 잘한 부분은 살리라고 콕 짚어주었고, 아닌 부분은 날카롭게 파고들어 따져들고 비판했다. 조금의 자비도, 인정도 없이 매정할 정도로.
그런 도준에게 서운한 적도 있었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니, 내색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목이 막혀와 제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러려고 나를 특별 비서로 채용한 거야? 지금까지 나한테 준 업무들이 모두…… 하아!”
제아는 얼마나 기가 막힌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 남자의 철두철미함은 도대체 끝이 어디일까. 아니, 시작이 어디일까.
“오빠 사전에 계획되지 않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있긴 해?”
도준이 손을 뻗어 다시 제아를 품에 끌어당겼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가녀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바로 너.”
작은 중얼거림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예상치 못한 나약한 대답에 바짝 곤두섰던 마음은 깨끗하게 무너져 내렸다.
“오늘 너무, 피곤한 하루였어.”
천군만마가 쳐들어와도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태산이, 그녀 앞에서만 꼭 이렇게 나약함을 드러냈다.
“문제아.”
태산 같은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소파로 이끌었다.
“10분만 재워줘.”
결국 제아는 그의 손에 무력하게 끌려가 소파에 앉았다. 제아의 다리 위에 머리를 올린 도준은 눈을 감았다.
길게 몸을 늘이자 그렇지 않아도 길쭉한 몸이 더 길어지고 긴 다리가 소파 팔걸이를 넘어섰다.
“기획안, 어디까지 진행되었지?”
시선을 내리자 여전히 눈을 감은 도준의 섬세한 얼굴이 보였다. 재워주라더니, 또 일 타령이다.
“끝나긴 했어. 수정할 데가 있는지 검토 중이야.”
“보고해봐.”
“잔다면서.”
“네 목소리 들으면서 잘 거야.”
“자면서 어떻게 들으려구?”
눈을 감은 채 도준이 옅게 웃는다.
“네 목소리는 꿈에서도 들려.”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말이야?”
“궁금하면 확인해보던지.”
“왜 하필 업무 보고야?”
“……못 버티니까.”
앞이 흐린 도준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제 다리 위에 누운 도준에게 상체를 숙이며 귀를 좀 더 쫑긋 세웠다.
“뭐라구?”
“공 앞에서는 버티지만, 사 앞에서는 못 버티니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순간, 도준도 눈을 떴다. 딱 얽혀버린 시선, 서로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마저도 끈적이게 얽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점점 더 야릇하게 변해가는 집무실 안의 공기 속…….
“내가 소파라고…….”
도준이 은밀하게 속살거린다.
“지금 당장 널 눕히지 못할 것 같아?”
짙게 가라앉은 동공 깊숙한 곳에서 광포하게 꿈틀거리는 건, 포악한 야수의 욕망이었다. 젠틀맨을 유지하도록, 공적인 업무를 보고하라는 뜻이었다.
도준이 얼른 시작하라고 빤히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지체하면, 한입에 꿀꺽 잡아먹어버릴 것 같은 뜨거운 시선으로.
“오, 오픈 한 달 전부터 한시적으로 회원 혜택을 줘서 확 끌어당기는 것부터!”
야수의 욕망이 심장에 꽂혀드는 순간, 제아는 발작적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공적인 업무를 흘리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옷이 벗겨져 소파에 드러눕게 될 제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도준은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읊어대는 제아를 눈에 담은 후, 다시 눈을 감았다. 제아는 절대 모르리라. 아직까지도 이렇게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그에겐 더 자극적이라는 것을.
제아의 표정은 순진하게 놀랐지만, 눈빛만은 그날 밤의 열기를 품고 있었으니까.
더듬거리듯 떨리던 제아의 음성은 점점 더 차분한 톤으로 바뀌었다. 가만히 내려다보자 도준은 잠이 든 듯,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제아는 자장가처럼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끝까지 보고를 했다.
그가 듣는지 듣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 10분이라도 그가 깊이, 편하게 잠들었으면 할 뿐이었다.
***
레이나는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며 제일 어패럴 사옥 본관에 들어섰다. 몇 번이나 전화를 했는데도 그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부재 중 전화를 봤을 텐데도 전화 한 통 해주지 않는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감정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남자.
그런데도 그만 보면 심장이 반응을 하고 욕심이 솟구친다.
갖. 고. 싶. 다. 미. 치. 도. 록.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한 여자에게 얽매일 남자가 아니다. 사랑 따윈 절대 할 수 없는, 깨지지 않는 얼음 같은 남자이니까.
그 아름다운 눈에 홀리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보인다. 감정이 메말라버린 삭막한 사막이.
그런 남자를 소유하기 위해선 남다른 이해력과 포용력,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걸 그녀 스스로 깨달았다.
‘제이드는 나한테 올 수밖에 없어. 어차피 결혼은 해야 할 테니까.’
확 조여서는 안 된다. 부담이 되지 않도록 맴돌다가 잡아채야 한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비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도드라지는 여자의 늘씬한 실루엣이 레이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흔한 웃음 한 번 흘리지 않는 그를 유일하게 미소 짓게 만드는 바랜 사진 속, 옛 가족이자 의붓동생이라는 소녀.
레이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생긋 웃으며 다가갔다.
“문제아 씨.”
그와 전혀 닮지 않았지만, 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아몬드형의 눈동자에 은근한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 사장한테 볼 일 있어서 왔는데, 제아씨랑 차 한잔해야겠다. 시간 괜찮아요?”
“죄송하지만.”
“거절은 사양이에요. 제일 아울렛 온라인몰 책임자가 제아 씨라던데,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럼 나를 내세워 마케팅을 하려면, 나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
“아직 모르나 보네요. 내가 제일 아울렛 메인 모델이라는 거. 일급비밀도 아닌데, 왜 아직 한 사장이 말을 안 해줬지?”
생글생글 웃는 레이나의 제안을 제아는 절대 거부할 수가 없었다.
***
집무실의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리면서 인호가 나타났다.
“한 사장!”
또다시 호들갑을 떨며 나타난 인호를 도준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날 또 이렇게 무시하지?”
도준이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내가 회사로 복귀를 하면서 뭘 목격했을까.”
“…….”
“레이나와 문 비서.”
도준이 손에 들고 있던 걸 놓았다. 드디어 도준이 반응을 보이자 인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회사 근처에 있는 티아라는 커피숍에 같이 들어가더라고.”
그 한마디에 도준은 바로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인호가 말한 커피숍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깊숙한 곳에 앉아 있는 레이나와 제아가 눈에 들어왔다.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 레이나와 달리 가녀린 뒷모습만을 보이는 제아의 표정은 알 수가 없다.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다가가 제아의 손목을 잡고 일으켰다.
“일어나.”
얼마나 놀랐는지, 휘둥그레진 제아의 눈이 쏟아질 듯 도준에게 향했다.
“사장님.”
“오빠, 라고 불러야지.”
호칭을 정정해준 도준의 싸늘한 눈빛이 레이나에게 향했다.
“너, 뭐 하는 짓이지?”
싸늘하다 못해 섬뜩함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짙은 색조화장이 된 레이나의 그윽한 눈매가 휘둥그레졌다.
“제이드.”
“제아 너는 얼른 퇴근해. 오늘은, 내가 데려다주지 못하니까.”
뭔가 할 말이 있어보였지만, 제아는 입을 꾹 다물고 커피숍을 나갔다. 도준이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
도준은 방금 전까지 제아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 앉았다. 희미한 복숭아 향이 느껴졌다.
“제이드 딱딱하게 왜 이래? 어차피 제아 씨가 온라인몰 총괄 책임자라면서. 그럼 당연히 메인 모델인 나와도 친해져야 하지 않겠어?”
“그 입 다물어.”
“제이드!”
“그 핑계를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나?”
정곡을 찌르자, 레이나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지만 이내 당당하게 다시 고개를 들었다.
“좋아, 인정해. 제아 씨한테 점수 좀 따려고 했어. 네가 얼마나 동생을 소중히 생각하는 줄 아니까. 네 진짜 가족이 누군지 아니까.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나랑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게 뭐 있다고 그렇게 싸고 도는 거야?”
도준은 레이나가 얼마나 영악한 여자인지 알고 있다. 쿨한 척하지만 수가 틀어지면 바로 돌아설 여자이니까. 그런 위험한 여자를 제아 곁에 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차피 한 번은 경고해야 했다.
도준은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난 동생이라고 한 적 없는데, 내 뒷조사라도 했나 보지?”
“제이드, 난 그게 아니라.”
당황하는 레이나 따위, 그는 관심 없다.
“뒷조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군.”
“……?”
“경고는 한 번뿐이야. 잘 들어.”
테이블 위로 비스듬히 상체를 기울인 도준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내 여자한테 접근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