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입으로 다 먹여줄 때까지, 못 나가.
2017.03.23.
김 비서가 인터폰으로 도준에게 여자의 방문을 알렸다. 그 사이 여자는 제아를 노골적으로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쪽도 한 사장 비서인가요?”
비서니까 비서실에 있는 건 당연한 건데, 대체 왜 묻는 거지? 제아는 여자가 묻는 의도가 도무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요.”
“아하.”
여자가 우아하고 상냥한 미소를 짓는 순간, 김 비서가 다가왔다.
“들어오시랍니다.”
“그럼 우리 또 봐요.”
여자는 김 비서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로 들어갔다. 제아는 여자가 집무실로 들어갔는데도 이상하게도 시선이 떼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그 전에 들어갔던 여자들과 달리 방금 그 여자는 미묘하게 신경이 쓰인다. 자신을 알고 있다는 듯 묻는 눈빛이 꽤 신경에 거슬렸다.
“대박! 정말 사장님 애인일까요? 스캔들 한 번 없던 우리 사장님이?”
“글쎄, 말 그대로 친구일 수도 있지.”
분명 여자 친구도 없다고 그랬는데. 하지만 제아는 미련 없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의구심을 떨쳐버렸다. 도준을 믿으니까.
***
집무실로 들어선 레이나는 애틋한 마음으로 도준을 보았다. 제 마음을 절대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남자였다. 드러내는 순간, 그나마 이렇게 마주 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몇 달 만에 보는 건데도 도준은 조금의 반기는 기색도 없이 덤덤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레이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했어.”
“친구니까 친구라고 하지.”
“사업 파트너야.”
“사업 파트너도 엄연히 친구거든? 서로 안 지 벌써 10년째야. 이제 친구로 인정해줄 때 되지 않았어?”
“연락도 없이 한 달 일찍 귀국한 이유가 뭐지?”
“제이드, 우리 몇 달 만에 보는 거야. 좀 반겨주면 안 돼? 정말 내가 조금도 반갑지 않아?”
“반갑지 않은 건 아냐.”
일말의 희망이 레이나의 얼굴에 스치는 순간, 도준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반갑지도 않아.”
“그게…… 무슨 뜻이야?”
“너에게 쏟을 감정 따위, 없다는 뜻이지.”
일말의 감정도 섞이지 않는 가차 없는 대답이었다. 레이나는 심장에 날카로운 못이 쾅쾅 박히는 느낌이었다. 아파도, 너무 아프잖아.
“제이드, 난 널 위해서 내 스케줄까지 조정해가면서 모델 제의 받아들였어.”
“생색내지 마. 전속 모델료 섭섭하지 않게 계약한 걸로 알고 있으니까.”
“친구라고 인정해주면 그깟 모델료 받지 않고 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모델료.”
“……?”
“꼭 받아가라.”
조금의 틈도 내주지 않는 건 여전하다. 그래도 레이나는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럴수록 더 탐이 나는 존재이니까.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다소곳하게 차를 들고 제아가 들어왔다.
“사장님, 차 가져왔습니다.”
“내가, 차를 시켰었나?”
도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차 차를 부탁한 적이 있는지. 하지만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던 제아와 시선이 얽히는 순간, 깨달았다. 트레이 위에 있는 따스한 홍차는 도준의 의지가 아니라 제아의 의지임을.
제아가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이 여자도 퇴치해줄까?’
전혀 예상 못한 제아의 당돌함에 도준은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못 말리는 문제아 같으니라고.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아듣는 제 여자가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게 바로 질투라는 건가.
고양이처럼 앙큼한 제 여자를 품에 와락 안고 싶은 걸, 도준은 가까스로 참았다.
“제이드 동생, 맞죠?”
레이나의 물음에 놀란 건 제아였다. 이 여자가 날 어떻게 알지?
제아가 동그란 눈으로 고개를 틀자, 레이나가 생긋 웃어 보였다.
“제이드는 모르지만, 아주 우연히 사진으로 봤어요. 둘이 어깨동무하고 찍은 사진.”
“아, 네.”
그제야 제아는 레이나가 비서실에서 왜 그렇게 빤히 보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반가워요, 난 제이드의 유일한 여자 친구 레이나 킴이라고 해요. 우리 친하게…….”
그때 도준이 일어나서 제아에게 다가서는 레이나의 앞을 막아섰다.
“회의 있으니까 넌 그만 가보지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문전박대하는 거야? 그럼 난 제아 씨랑 차나 한잔하고?”
“안 돼.”
“또 왜?”
“제아는 나랑 할 게 있어. 그러니 너 먼저 나가 봐.”
레이나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장이 비서에게 볼일이 있다는데 감히 뭐라 하겠는가. 회사까지 쳐들어와서 사리분별 못하고 일을 방해하는 캐릭터가 되고 싶진 않았다.
잠자코 나가려고 했지만 그냥 나가기에는 뭔가 억울하다.
“제이드, 그래도 귀국했으니까 식사 한 끼 정돈 대접하는 게 예의 아니야?”
그래서 다시 돌아섰는데, 도준은 이미 그녀는 안중에도 없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다정한 눈빛으로 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나가 도준을 안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도준의 저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항상 차갑고 냉소적인 그였는데. 그 정도로 소중한 걸까.
서로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이복 남매의 사진을 도준의 지갑에서 우연히 보았다. 얼마나 꺼내 보았는지 코팅이 되었는데도 모서리 끝이 잔뜩 헐어 있는.
그것만 보아도 도준이 이복동생을 얼마나 애틋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단 한 번 보았던 그 사진은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다. 그리고 오늘 보자마자 그 동생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제아 씨, 우리 나중에 차 한잔할래요?”
“아, 네!”
레이나는 묘한 눈빛으로 제아의 손목을 잡아 제게로 끄는 도준을 바라보았다. 도준의 정적인 눈빛과 손짓은, 꽤 야릇했다.
지극히 단순한 동작인데도 야릇하게 만드는 게 바로 도준이란 남자니까. 그래서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않고 넘겨버렸다.
레이나가 집무실에서 나간 후에도 제아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도준이 제 다리 사이로 그녀를 끌어당겨 한쪽 팔로 허리까지 감싸버렸다.
“마셔.”
도준이 제아의 입술 바로 앞까지 복숭아 홍차를 대령했다.
“이 홍차를 내게 입으로 다 먹여줄 때까지.”
짙어진 도준의 눈빛이 서서히 그녈 옭아매기 시작했다.
“여기서 못 나가.”
홍차 키스를 한 지 불과 20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당황한 제아의 입술이 그의 이름을 흘린다.
“저, 저기 도준 오빠. 아니, 사장님.”
도준이 다시 한 번 홍차를 들이밀자, 제아는 홀린 듯이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러니까 먼저 자극하지 말았어야지.”
홍차를 내려놓은 도준의 손이 제아의 뒷머리를 움켜잡아 제게로 서서히 끌어당겼다.
“넌 질투하는 모습마저.”
서로의 입술이 비스듬히 와 닿는 순간…….
“나를 미치게 해.”
마지막 속삭임을 흘린 도준이 흡입을 시작했다. 보드라운 입술과 따스한 입안 내부의 감촉을 느끼며, 제아의 입안에 머금어진 복숭아 홍차를 조금도 남김없이.
***
“제일 아울렛 온라인 몰 총괄 책임자는 문제아 팀장으로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도준의 발표에 간부들로 가득 차 있는 회의실 안이 세차게 술렁이면서 여기저기서 항의가 터져 나왔다.
“어떻게 일개 사원에게 그렇게 큰 자리를!”
“우린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허, 다닌 지 1년도 안 된 애송이를 어떻게 믿고 팀장 직급을!”
“이상한 소문이 돌더니, 역시 그 소문이…….”
그 순간 도준이 ‘탕!’ 하고 손으로 책상을 거세게 내리쳤다. 그 소리에 간부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제일 어패럴의 사활이 제일 아울렛에 달려 있는 만큼, 외부에서 책임자를 앉힐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이런 인사 결정을 염두에 두고 MD 경력이 있는 특별 비서를 회사 내부에서 채용했습니다. 인사팀 김 부장이 MD 겸 비서 역할을 착실히 수행할 적임자를 올린 걸로 아는데, 사람을 잘못 뽑은 겁니까?”
서늘한 도준의 시선이 닿자 인사팀 김 부장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시선을 바닥에 내던졌다.
체력 좋고 막 일하기 좋은 직원을 골라서 올리라는 유 실장의 언질이 떠올랐지만, 여기서 그 말을 떠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보같이 이용당한 느낌이 격렬하게 들었다.
“제일 아울렛에 입점되는 브랜드 계약부터 분석, 관리, 기획, 마케팅 분야까지 모두 문 비서와 함께 진행한 만큼, 책임자로 적격입니다. 그리고 문 비서가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나를 구하는 걸, 여기 있는 모두가 목격했습니다. 여러분이 동상처럼 멀뚱멀뚱 보기만 할 때 말입니다. 마음 같아선 무능력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는 누군가를 내쫓고 그 자리를 주고 싶지만.”
여기 있는 간부들 모두가 화분이 떨어졌던 그 상황에 모두 있었던 만큼,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는 못했다. 그저 헛기침을 하거나 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으며 시선을 피할 뿐.
한심한 간부들을 보며 도준이 끊었던 말을 이었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니 능력에 맞게 온라인 몰 총괄 책임자에 앉힌 건데, 이의 있습니까?”
회의실 상석에 앉아 있는 도준의 살벌한 눈빛은 지금 이 순간 누가 나선다면, 그 사람을 쫓아내고 제아를 앉힐 기세였다.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죠.”
상석에서 일어난 도준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지금 각자의 메일로 인사 개편 발표가 갔을 겁니다. 확인하세요.”
도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각자 앞에 있는 태블릿 PC에서 메일을 확인한 간부들의 격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회사를 그만두라는 뜻이 내포된, 좌천이나 마찬가지인 인사이동이었다.
“한 사장님, 우리한테 이럴 수 없습니다!”
“부당합니다!”
“한 부회장님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맞소, 한 부회장님한테 이 부당한 일을 알려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역성에 도준이 태연하게 돌아섰다.
“한 부회장을 언급한 분들은, 한 부회장 사람이라는 겁니까?”
“……!”
“그럼 더더욱, 내가 걸러내야 할 적들이군요.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싸늘한 눈빛으로 간부들을 훑은 도준이 피식,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사형선고를 끝맺었다.
“고 연봉을 받은 만큼, 열심히 제 업무를 하셨어야죠. 제일 어패럴이 이 지경까지 안 되게 말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준은 회의실을 나왔다. 드디어 한 부회장의 가지들을 완벽하게 쳐내버리는 순간이었다.
굵직하게 윗선을 한 번에 쳐내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라 도준은 몇 달 동안 차분하게 중간 직급부터 제 사람들을 투입시켜놓았다. 한 번에 잔가지를 쳐냈을 때에도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말이다.
아수라장이 된 회의실을 도준이 빠져나오자 인호가 다급하게 다가섰다.
“한 사장, 긴급 상황. 문 비서 가족에게 붙여놓은 고용인에게 방금 연락이 왔어.”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도준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도준이 한국으로 돌아온 이상, 제일 그룹 일원인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제아와 그 가족들을 건드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걸 감안했다. 그래서 사람을 붙여놓은 지 꽤 되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지?”
“사채업자가 들이닥쳐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어. 문 비서한테 연락은 안 했는지, 비서실 들렀다 왔는데 아직 모르는 눈치더라고.”
“사채업자라.”
“그렇지 않아도 우리 쪽 사람이 사채업자와 접촉해서 어떤 상황인지 파악해놨다.”
“누구의 짓이지?”
한 부회장, 한 이사, 그게 아니면 한연희? 도준의 머릿속에 여러 사람이 스쳐지나가는 순간, 인호가 머뭇거리며 말을 했다.
“문 비서 아버지인 문윤식 씨.”
“……뭐?”
“문 비서 아버지가 주식을 하려고 사채까지 끌어들였나 봐. 그런데 사들인 주식이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그 돈이 다 날아갔고.”
“액수는.”
“1억. 그런데 이자도 1억이다.”
“지금 상황은?”
“사채업자들이 문 비서 어머니에게 돈 마련해오라고 협박하면서 문 비서 아버지를 끌고 나갔어. 정 안 되면 장기라도 팔아서 돈 갚게 하려는 심산 같은데. 우선 우리 쪽 사람들이 같이 있어서 당장 무슨 일이 날 것 같지는 않아. 어떻게 할까.”
도준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가 아는 윤식은 절대 사채에 손을 댈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지금 스케줄, 2시간 정도 미룰 수 있나?”
도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인호가 씨익 웃어 보였다.
***
사채업자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에 도착했다. 사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도준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무실의 문을 열어주자, 도준은 그 안으로 태연하게 들어섰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윤식의 뒷모습이 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윤식의 어깨는 10년 전보다 훨씬 앙상해져 있었다.
도준은 저 어깨에 몇 번이나 올라탔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인호가 테이블 위에 현금이 들어 있는 서류 가방을 올려놓았다.
“2억입니다.”
꽤 험상궂은 표정의 사장이 금액을 확인해보라는 듯, 자신의 수하에게 눈짓을 했다. 수하가 서류 가방의 돈을 확인하는 사이, 도준은 윤식에게 다가갔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 바짝 메마른 공허한 눈이 도준에게 향하는 순간, 윤식은 헛것을 본 듯 몇 번이나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이, 이준이? 우리 이준이냐, 정말?”
도준은 대답 대신 윤식의 얼굴을 차분하게 뜯어보았다. 그러다가 오른쪽 뺨에 있는 멍과 터진 입술을 발견했다.
“유 실장, 서류 가방에서 이천만 원 회수해.”
도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가방을 회수하려는 도준의 사람들과 가방을 지키려는 사채업자들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천만 원을 빼려고 하자 화가 난 사장이 벌떡 일어나 도준에게 다가왔다.
“이봐, 이자는 정확히 1억이라고!”
하지만 사장의 말은 들리지 않은 듯 도준은 태연하게 재킷 안에서 만년필을 꺼내 제 손가락에 끼었다.
무시당한 느낌에 화가 난 사장이 도준의 어깨를 잡으려는 순간…….
“내 말 안 들……, 윽!”
순식간이었다. 도준의 팔뚝에 목이 눌린 채 사장은 거칠게 벽으로 밀쳐졌다. 가늘고 흰 손가락에 들린 만년필의 날카로운 촉이, 사장의 동공 바로 위에 닿을 듯 위치하고 있었다.
“내 위치가 너 같은 놈이 말을 깔 위치가 아니야.”
호수처럼 잔잔한 도준의 음성과 달리 제 동공을 찌르듯이 겨냥하는 만년필의 촉 때문에 사장은 벌벌 떨고 있었다.
“정중하게 존댓말 쓰도록.”
사장이 미친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제야 도준이 사장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사장의 목을 눌렀던 팔뚝 부분의 옷을 몇 번이나 깔끔한 동작으로 털어냈다.
“이천만 원 회수했습니다.”
보고가 들어오자, 도준이 대부업체 사장에게 차분하게 경고를 되돌렸다.
“뺨의 멍, 터진 입술.”
“……?”
“손 끝 하나 대지 말라는 경고를 어겼으니, 이천만 원은 회수야.”
“그건 그쪽 사람들이 나타나기 전이었다고……요.”
억울한 듯 대들던 사장은 도준의 차가운 눈빛이 닿자, 얼른 ‘요’ 자를 붙였다. 곱상하게 생겨서 펜만 잡을 줄 알았던 손의 엄청난 아귀힘을 경험한 후였다. 게다가 뱀같이 간교한 자인 이상, 정확한 위치의 위아래는 구분할 줄은 알았다.
이 남자는 무조건 나보다 위다, 그것도 한참 위. 그걸 깨달은 것이다.
도준이 눈짓을 하자 인호가 생글생글 웃으며 사장에게 다가섰다.
“법적으로 정해진 최고이자율이 34.9%입니다. 대부업체 사장이니 그 정도는 알고 있죠? 그럼 문윤식 씨가 빌린 1억에 대한 최고이자율을 적용한 이자가 1억이 맞습니까?”
1억이라는 이자는 당연히 그 이자율을 넘어서 적용된 금액이었다. 그래서 사장은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럼 1억 8천으로 합의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인호의 말을 마지막으로 고용인들이 윤식의 휠체어로 향했지만, 도준이 저지했다. 그러곤 직접 제 손으로 윤식의 휠체어를 밀고 사무실을 나왔다.
건물을 빠져 나온 도준은 윤식과 함께 커피숍으로 갔다.
밀폐된 비즈니스 룸 안, 아직도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멍하게 앉아 있는 윤식이었다. 어색하게 흘러가는 침묵을 태연하게 깬 건 도준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채는 쓰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떨리는 눈빛으로 이준을 응시하던 윤식이 떨어지지 않는 입을 뗐다.
“우리 이준이, 많이…… 변했구나.”
도준은 대부업체 사장에게 회수한 이천만 원을 내밀었다.
“이 돈은 비상금으로 가지고 계세요.”
“내가 어떻게 이 돈까지 받아. 염치도 없이…….”
“어머니께는 제 도움 받았다고 하지 마시구요. 좋아하지 않으실 테니까.”
“이준아.”
“한도준입니다.”
“……?”
“지금은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이름을 가지고 있죠.”
“무슨 소리! 넌 지금도 내 아들이나 다름없다!”
윤식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격하게 대답을 했다. 그런 윤식을 찌르듯이 응시하며 도준은 물었다.
“지금도 저를 친자식처럼 생각하시는 겁니까?”
“……?”
“지금도 제가 아버지라 불러도 되는 겁니까?”
눈앞의 훤칠한 청년을, 제 친구의 아들인 이 청년을 진심으로, 마음으로 아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윤식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저를 친자식처럼 생각하시는 아버지께 묻겠습니다. 제가…….”
“……?”
“아버지의 소중한 딸을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예상하지 못했던 도준의 말에 윤식은 가슴이 꽉, 막혀버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사고가 정지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저 저기, 이준아…….”
“아버지.”
서늘한 도준의 음성에 말이 가로막힌 윤식은 침을 꼴깍 삼키며 너무도 변해버린 옛 아들을 응시할 뿐이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미치도록.”
무겁게 짓눌린 룸 안의 공기를 가르며 도준이 말을 끝맺었다.
“제가 제아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