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57화 (57/104)

57. 그래서 자꾸만 널 자극하고 싶어져.

2017.03.20.

“선배, 여자랑 키스 한 번 안 해본 숫총각이래.”

거짓말 아닌 거짓말이다. 떠나기 전에 오두막에서 제아와 키스를 한 도준이니까.

그리고 어제부로 도준은 숫총각이 아니다. 그녀가 처녀가 아닌 것처럼.

그 기억이 떠오르자 얼굴이 다시 화끈 달아올랐지만, 제아는 애써 태연함을 유지했다.

“그게 뭐가 어때서.”

대수롭지 않다는 대꾸에 지로의 짙은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어라, 이런 반응이 아닌데?

“너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묻냐?”

“알아.”

“근데 왜 그렇게 태연한데.”

“태연하지 않을 건 또 뭔데.”

“야, 네가 남자를 몰라서 그러는데!”

지로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한다?

“여자와 달리 남자는 생리적인 구조상 그걸 안 할 수가 없어, 어디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그러니까 내 말은……, 아씨! 근데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냐!”

말을 멈춘 지로는 벌컥 성질을 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는데.

좋은 의도로 도준에게 먼저 제안한 술자리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랑하는 여자의 행복을 빌어주자고.

성격은 좀 괴팍하지만 그는 마음을 거절당했다고 친구 사이까지 끊어버릴 만큼 모질지 못했다. 제아에게 상처를 주느니 남자답게 접기로 결심한 것이다.

물론 도준이 먼저 자존심을 굽히고 한 대 맞아준 게 큰 역할을 하긴 했지만.

―몸은 여러 여자와 섞고 마음만은 제아에게 주고 기다렸다? 그게 한지로라는 남자의 사랑 방식인가 보지?

하지만 도준이 전에 했던 그 말은 꼭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같은 남자로서 그건 너무 비겁한 공격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같은 남자끼리 툭 터놓고 말합시다. 솔직히 선배도 숫총각은 아닐 거 아닙니까? 아니, 여자랑 잠은 안 잤다고 쳐도 키스나 즐기는 정도는 했……?

―그게 뭐든지, 여자가 있어야 하지 않나?

도준이 태연하게 말을 가로채자, 지로가 팍 인상을 썼다. 세계 3위에 빛이 나는 3억 명의 미국 인구 중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뭔 개소리야.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을 하는 도준을 지로는 불신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나랑 장난합니까?’

‘내가 왜 너랑 장난을 하지?’

하긴, 그것도 또 그런다. 눈앞의 미친놈은 절대 농담이고 장난이고 모를 놈이니.

‘남자는 본능과 욕망에 충실한 짐승인 거, 남자라면 다 인정하는 사실인데. 같은 남자끼리 이러지 맙시다, 선배.’

‘그럼 한지로 네가 대답해 봐.’

‘……?’

‘나에게 유일한 단 한 명의 여자가 한국에 있어. 본능에 충실하게 해줄, 내 욕망을 터뜨릴 여자가 없다는 거지. 그런데 내가 무슨 짓을 어떻게 할 수 있지? 아니면, 여자가 아닌 상대를 잡고라도 풀어야 했다는 건가?’

그 말인즉슨, 제아가 아니면 여자로 안 보인다? 그래서 참았다? 아니, 못 했다? 눈앞의 남자는 지극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설마, 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로를 향해 도준이 시니컬한 미소를 짧게 흘렸다.

‘한지로, 내 성적 취향은 지극히 정상적이야.’

오만하고도 당당한 도준의 한마디에 지로는 말문이 탁, 막혀버렸다. 아마도 그래서 더 술을 미친 듯이 마신 것 같다.

어떻게 남자가 그럴 수 있지? 그게 가능해? 손만 뻗으면, 아니 가만히 있어도 미인들이 달라붙을 남자가, 그게 가능하냐고.

결론은 하나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30년이 흐른 지금까지 금욕적이라는 건, 분명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

회상에서 벗어난 지로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제아 너, 내 말 잘 듣고 생각해봐. 가만히 있어도 미인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그리고 자유분방한 미국이고, 혈기 왕성한 남자야. 그런 남자가 참는다고 금욕적인 생활이 가능할 것 같아?”

지로가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챈 제아는 잠시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로가 말을 이었다.

“대답은 노우야. 그거 분명 문제 있는 거다? 아니, 절대 불가능해. 남자들은 생리적인 구조상 절대 그럴 수가…….”

“한지로 너도 그렇고?”

“야아! 거기서 내 말이 또 왜 나와? 네가 그러라고 협박했잖아! 다른 여자 안 만나면 친구도 안 해준다고! 난 널 잊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고!”

“그게 아니었으면 버텼고?”

“당연……하지.”

제아처럼 지로도 거짓말은 못 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대답에 자신감이 없었다. 당연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너도 하는 걸 오빠는 왜 못 한다고 생각해? 오빠가 컨트롤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남자인데.”

도준은 엄청난 컨트롤 능력을 밤부터 새벽까지 몸소 보여주었다. 자신은 꼴딱꼴딱 숨넘어가게 하면서도 끝까지 자제력을 잃지 않고 몰아붙이는 그는 최고였다.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 하시고, 어묵 국물이나 드시지?”

“너, 선배랑 결혼까지 할 거지.”

“가능하면 해야지.”

“가능하지 않으면 안 할 거고?”

“그럴지도.”

“무슨 말이 그러냐.”

“한국의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허락과 축복이 있어야 가능하거든?”

“그래서, 집에서 반대하면 연애만 하겠다고?”

“나도 그런 일이 없길 바라지만, 안 되면 죽을 때까지 연애만 하지 뭐.”

“혹시 선배가 그러자고 했냐?”

“우리 오빠가 드라마에서 나오는 나쁜 재벌남인 줄 알아? 도준 오빤 나랑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싶다고 했거든?”

“그럼 선배가 뭐 알아서 하겠지.”

“오빠한테 마냥 기대고 싶진 않아. 나도 나름대로 노력해야지.”

하지만 연희를 떠올리니 제아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그래도 결혼 전에 확인은 해봐라. 선배 진짜 밤일에 문제 있을지 모른다니까? 원래 허우대 잘난 것들이 더 그런 경우가 있어! 난 내 친구가 독수공방 하는 꼴, 절대 못 본다!”

제 일처럼 발끈하는 지로를 보며 제아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굳이 문제점을 찾자면 있긴 하다. 그녈 위해 1라운드로 끝냈지만, 그 1라운드가 지나치게 길다는 것.

30년 동안 금욕하던 숫총각이 폭발하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몸소 몸으로 체험했다.

하지만 제아의 미소를 오해했는지, 지로가 또다시 버럭버럭 성질을 냈다.

“어라? 너 그렇게 웃을 때 아니라니까? 생각만으로는 플라토닉한 사랑이 가능할 것 같지? 그 얼굴만 뜯어먹고 평생 살 것 같지? 그딴 거 개나 줘버리라 해. 남자는 자고로, 아야!”

결국 참다못한 제아가 어묵 꼬치로 지로의 머리를 내려쳤다.

“한지로, 좋은 말 할 때 그만해. 너랑 이런 주제로 이야기하기 싫거든?”

“아씨, 진짜 걱정되어서 해주는 말인데. 내 속도 모르고.”

‘그 걱정 넣어둬, 넣어둬.’ 심각하게 걱정해주는 지로의 표정에 그 말이 새어 나오려 했지만, 제아는 가까스로 참았다.

나의 애인이 얼마나 괴물 체력을 가졌는지, 말해줄 순 없는 노릇이니까.

“술이나 따르시죠, 나의 유일한 남자사람친구 씨.”

제아가 생긋 웃으면서 지로를 향해 술잔을 흔들어 보였다.

***

이른 아침부터 제일 어패럴 비서 팀은 초비상 상태였다. 점심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집무실로 들어가는 여자만 해도 벌써 4명째였다.

전깃줄에 주르륵 앉은 참새마냥, 3명의 비서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구경하는 중이었다.

“CF 여신 전지윤도 마다했는데, 신유라는 오케이할까요?”

“한류고 뭐고, 신유라도 3분 안에 문전박대라고 장담해. 우리 사장님이 보통 사장님이니?”

“지금 가장 뜨고 있는 한류 여배우에 남자들이 데이트하고 싶은 여자 연예인 1위잖아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거성 그룹 회장이면 집안도 빵빵하고. 그런데 예쁘긴 진짜 예뻐요. 뜯어고친 테가 하나도 안 나. 정말 자연 미인인가?”

다른 비서들과 달리 제아는 묵묵히 일을 하는 중이었다. 특별 비서인 만큼 다른 비서들과 맡은 업무가 달랐고 도준은 유독 제아에게만 엄청난 업무량을 떠넘겼다.

그래서 유명한 여자 연예인들이 제 애인의 집무실을 들락날락거려도 신경 쓸 만한 겨를이 없었다.

“근데 오늘 왜 이렇게 연예인들이 일정도 안 잡고 쳐들어오는지, 신 선배님은 아세요?”

“오픈을 앞둔 제일 아울렛 메인 모델이 되고 싶어서 물밑 작업 하는 거지. 국내에서 가장 큰 초대형 아울렛에 유일하게 서울 외곽에 위치한 면세점이기도 하고. 최고의 스타를 메인 모델로 내세운다고 언론에서도 떠들어댔잖아. 기획사 통하는 것보다야 연예인들이야 제 얼굴이 명함 아니겠어?”

“맙소사, 우리 사장님한테 미인계를 쓰려구요?”

“연예인들 입장에선 든든한 스폰서 겸 애인을 얻는 거지. 그것도 젊고 잘생긴 재벌 3세 애인.”

그때 집무실에서 호출하는 인터폰이 울렸다.

“사장님, 신 비서입니다.”

[복숭아 홍차랑 아메리카노 한 잔 부탁해요. 차는 문 비서가 가지고 들어오도록.]

“알겠습니다.”

노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정한 명품 코트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신유라는 몸매가 훤히 드러난 슬립 같은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집무 책상에 육감적인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신유라는 제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얼마나 가까운지 조금만 몸을 숙이면 아찔한 가슴 둔덕이 도준의 얼굴로 쏟아 내릴 지경이었다.

“사장님, 차 어디에 놓을까요?”

“이쪽으로.”

제아는 트레이를 들고 집무실 책상으로 다가갔다. 굳이 반대쪽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정중하게 신유라에게 부탁했다.

“손님, 엉덩이 좀 치워주세요.”

‘얜 또 뭐야?’ 하는 눈빛으로 신유라가 제아를 쳐다보았다.

“한 사장님 비서는 눈치가 없네. 저쪽에다 두고 얼른 나가.”

제 수족 부리듯이 명령하는 말투에 속에서 불길이 일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신유라의 엉덩이 바로 옆에 차를 놓았다. 그리고 똑바로 도준을 응시하며 물었다.

“더 시키실 일은 없나요?”

가까이 오라는 도준의 손짓에 다가가긴 했지만 유라의 늘씬한 다리가 가로막고 있었다.

이걸 비켜주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제아가 고민하는 사이…….

“좀 비켜주지 그래.”

도준이 먼저 말을 했다. 얼떨결에 유라가 책상에 기대었던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한 사장님,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에요?”

“내가 지금 담배가 무척, 당겨서 말이야.”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도준이 손가락 사이에 새하얀 담배를 끼우고 빙글빙글 돌려보였다.

유라의 다리가 있던 자리에 제아가 도착하자 도준이 손목을 틀어잡아 상체를 끌어내렸다. 서로의 코끝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도준이 지극히 무심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문 비서.”

“네, 사장……님.”

“내가 담배를 피울까, 말까.”

담배 피우는 걸 보든지, 키스를 해주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복숭아 사탕이 지금, 없습니다.”

새침한 제아의 대답에 도준은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복숭아 홍차를 내려다보았다. 도준이 이 차를 시킨 데는 이유가 있겠지.

꿩 대신 닭.

이번에도 도준의 메시지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제아가 태연하게 되물었다.

“사장님, 복숭아 홍차는 싫으세요?”

“맛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제아는 복숭아 홍차를 입 안에 머금었다.

홍차를 머금은 입술을 과감하게 도준의 입술에 가져다 대는 순간, 신유라가 격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입 안에서 적정한 온도를 머금은 복숭아 홍차를 도준의 입 안에 흘려준 후에 제아는 태연하게 입술을 뗐다.

“더 시키실 없으시면 나가보겠……!”

확 끌어당겨지는 손목.

고꾸라지는 제아는 어느새 도준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제 무릎에 제아를 앉힌 도준이 나른한 눈을 들어 신유라를 응시했다.

“대체 언제까지 구경하고 있을 셈이지?”

“비서랑 대체…… 나한테 이러는 거, 무례하다는 생각 안 해요?”

신유라의 음성이 날카로웠다.

“좋게 말을 해도 꺼져주지 않으니 보여주는 수밖에.”

제아의 등을 나른하게 타고 올라온 도준의 손이…….

“내가 말했잖아.”

도준은 제아의 뒷목을 감싸고 서서히 얼굴을 내렸다.

“나 임자 있는 몸이니까, 그만 껄떡거리고 꺼져주라고.”

복숭아 향을 머금은 남녀의 입술이 야릇하게 와 닿자, 신유라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한 사장 당신, 후회할 거야! 나를 무시한 건 거성 그룹을 무시한 거라구!”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싸늘한 도준의 눈동자가 신유라의 얼굴에 꽂혔다.

“재력 그리고 권력.”

“……?”

“네가 있는 만큼, 나도 차고 넘쳐.”

“……!”

“그러니까 방해 그만하고 꺼져주시지.”

쾅하고 집무실의 문이 부서지도록 세차게 닫혔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도준이 다시 입술을 내렸다. 서로의 입술과 혀가 휘감기고, 숨결이 넘나들었다.

한참 후에야 도준이 입술을 떼자 가쁜 숨을 몇 번 내쉰 제아가 밉지 않은 시선으로 도준을 흘겨보았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다른 여자가 날 넘보잖아.”

“독기 품은 혀는 왜 가만히 둬? 혼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면서.”

“나도 한번 느껴보고 싶어서.”

“……?”

“내 여자가 나를 다른 여자에게서 지켜내는 기분.”

나른하게 휜 도준의 눈매와 부드러운 미소를 보고 있으니,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다. 가벼운 한숨과 함께 제아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오빠는 본인이 얼마나 나쁜 남자인지 모르지?”

그리고 얼마나 매력적이지도. 너무 매력적이어서,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정도로.

도준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제아 너도 모르잖아.”

다시 멀어진 도준의 입술이 복숭아 홍차를 입에 머금어 제아의 입술 안으로 흘려주었다.

“내게 접근하는 여자들을 상대하는 네 모습이.”

또다시 멀어진 입술이 홍차를 머금고 느릿하게 삼켰다. 움직이는 남자의 목울대는 참, 섹시하다.

“얼마나 섹시한지 말이야.”

비스듬히 진로를 변경한 입술이 폴라에 숨겨진 목덜미를 과감히 파고들었다.

“그래서 자꾸만 널 자극하고 싶어져.”

목덜미에 스며드는 뜨거운 숨결에 저절로 눈이 감긴다.

“그러니까 키스해줘, 문제아.”

지독할 정도로 섹시한 그의 음성에 홀려버렸다. 제아는 손을 뻗어 제 남자의 목을 휘감아 끌어당겼다. 아, 공과 사든 뭐든 난 모르겠다.

***

제아는 트레이를 들고 집무실에서 나왔다. 말끔하게 비워진 복숭아 홍차잔과 달리 아메리카노 잔은 입도 대지 않은 새것이었다.

제아가 나오자마자 김 비서가 급하게 다가왔다.

“신유라가 언니 나오면 회의실로 잠깐 오라는데요? 혹시 무슨 실수 했어요?”

회의실로 들어서자마자 신유라가 표독스럽게 손을 휘둘렀지만 제아는 가뿐하게 피했다. 호락호락하게 제 뺨을 내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겨우 비서 주제에 어딜 넘봐?”

“넘보는 게 아니라 연애하는 겁니다.”

그 당돌함에 기가 막힌 지 신유라가 신랄하게 퍼부어댔다.

“하아, 한 사장이 그래? 너 같은 거랑 연애하는 거라고? 착각하지 마. 넌 잠깐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해. 원래 남자들이란 존재가 꼬실 때는 간 쓸개 다 빼주듯이 속살거리고 단물 빠지면 가차 없이 버리거든. 그러니까 착각 그만하고 버림받기 전에 알아서 떨어져! 사장 꼬셔서 몸 판 더러운 년이라고 회사에 소문 내버리기 전에!”

“소문내세요.”

“너, 방금 뭐라고?”

“그 대신 나도 언론사에 제보할 테니까. 최고의 한류 여배우 신유라가 제일 어패럴 집무실까지 쫓아와서 몸으로 거래하려 했다고 말이에요. 저 같이 뭣도 아닌 평범한 여자의 가십보다 여배우 신유라의 가십이 더 사람들 이목을 끌 것 같은데. 아닌가요?”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협박은 신유라 씨가 먼저 했습니다.”

“하아! 그래, 제보하려면 해봐! 언론사 따위, 내가 다 막을 테니까! 나 신유라야. 거성 그룹 손녀딸 신유라라구!”

“막을 수 있으면 막아요. 거성 그룹 회장님과 저희 사장님 중 누가 더 언론사에 파워가 셀지 무척 궁금하네요.”

“야아!”

신유라는 눈이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신유라 씨 말씀대로 제가 언제 버림받을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저희 사장님이 저한테 푹 빠져 있거든요. 제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시는 분이라.”

신유라는 제대로 한 방 먹은 듯 눈꼬리를 파르르 떨 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당당하게 승리를 거머쥔 제아는 회의실을 나오면서 중얼거렸다.

“이런 독한 모습을 섹시하다고 한 건 아니겠지?”

곧이어 신유라의 날카로운 힐 소리가 비서실 로비를 어지럽혔다. 제아가 멀쩡하게 나타나자 김 비서가 조심히 다가왔다.

“신유라 더 화나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예요?”

“아메리카노가, 맛이 별로래.”

제아의 단순한 변명에 커피를 탄 김 비서가 발끈했다.

“아니 그럼 커피숍을 가든지! 지가 뭐라고 커피 맛을 운운해?”

“신경 쓰지 마. 이제 볼 일 없는 사람이잖아.”

“그러기야 하지만. 여하튼 사장님이 일정에 없는 손님은 이유 불문, 출입 금지시키라고 방금 지시했어요.”

그런데 제아의 뒤쪽을 응시하는 김 비서의 눈이 점점 휘둥그레졌다.

“대박, 신유라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여자야. 어떻게 쫓아내지? 저 여자도 연예인인가?”

김 비서의 말에 돌아서니 신유라보다도 아름답고 화려한 여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분명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등장했던 여자들과는 타고난 우아함과 흘러나오는 강렬한 포스가 남달랐다. 그래도 불청객은 불청객이었다.

“한도준 사장, 지금 안에 있나요?”

여자는 한국인이 분명한데 외국에 오래 살다 온 듯 억양이 생소했다. 제아는 여자를 향해 깍듯하게 돌아서서 말을 했다.

“저희 사장님과 일정 잡으셨나요?”

“일정? 그런 거 안 잡았는데.”

“죄송하지만 사장님께서 일정에 없는 손님은 받지 말라고 하셔서요.”

“그럼 이 말 좀 전해줄래요?”

“……?”

“제이드의 여자 친구 레이나 킴이 왔다고 말이에요.”

당당하게 말을 하며 생긋 웃는 여자의 붉은 입술이 매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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