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형 아기는, 이 누나가 낳아줄 거야.
2017.03.16.
미선의 물음에 제아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미선이 도준을 알아본 걸까.
“걱정하지 마라. 윤영이한텐 비밀로 할 테니까.”
“……죄송해요.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요.”
“똑 닮았구나. 제 아빠랑…… 말이다.”
“이모가 어떻게 오빠 아빨 알아요?”
“윤영이가 아무 말도 안 해줬니?”
“……?”
“이준이 아빠도 같은 보육원 출신이야. 나와 네 엄마, 아빠, 그리고 이준이 아빠까지.”
“말도 안 돼요! 이모가 뭘 잘못 안 거 아니에요?”
제아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말을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미선이 잘못 안 걸 거라고.
제아가 보았던 연희는 절대 보육원 출신의 남자를 만날 여자가 아니었다. 그 콧대 높고 얼음 같은 여자가 어떻게…….
도준을 보며 어떤 회상에 잠긴 듯 소매로 눈물까지 찍어내며 미선이 중얼거렸다.
“피는 못 속이나 보구나. 우리 토끼들이 이준이 옆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걸 보니. 재경 오빠도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는데.”
제아의 시선도 저절로 수돗가로 향했다. 미선의 말대로 수돗가에서 찬물로 얼굴과 손을 씻는 도준의 뒤로 여자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오빠랑 그분이랑…… 많이 닮았어요?”
“아주 똑 닮았어. 아름답다는 말은 남자한테 쓰는 말은 아니다만, 이준이처럼 이준이 아빠도 정말 아름다운 남자였어. 괜히 핏줄이겠니. 그래도 이준이가 좀 더 남자답게 생긴 것 같구나. 분위기도 좀 더…… 차가워 보이는 것 같고. 이준이 아빤 참 따스하고 다정한 남자였는데.”
“……상상이 안 돼요.”
미선이 피식, 웃었다.
“제아 너도 윤영이랑 똑 닮았잖니.”
“울 엄마 무섭게 생겼거든요?”
“그건 무서운 게 아니라 고양이처럼 예쁘게 생긴 얼굴이라고 하는 거야.”
추운 날씨임에도 찬물로 머리칼과 얼굴을 흠뻑 적신 도준이 눈을 감고 젖은 머리칼을 터는 모습은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오빠 아빠도,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제 아들마저도 나 몰라라 하는 차가운 그 여자의 심장도 녹여버렸나 보구나.
“제아 너라도 이준이한테 잘해주렴.”
“네?”
“불쌍한 아이다. 제아 네가 부모 대신 네 오빠, 사랑으로 보듬어줘.”
미선의 말에 제아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 있음을 느꼈다. 더 묻고 싶었지만, 미선은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문 채 들어가 버렸다.
다시 수돗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6살 난 수진이가 도준에게 수줍게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어린 수진이가 민망할 정도로 도준은 손수건을 받지 않고 무뚝뚝하게 보고만 있었다.
“오빠, 뭐 해? 꼬마 아가씨가 내미는 손수건 받지 않고.”
곁에 다가서서 말을 해도 도준이 꼼짝도 하지 않자, 제아가 다시 말을 해주었다.
“이럴 땐 손수건을 받고 ‘고마워, 꼬마 아가씨.’라고 말해주는 거야.”
도준의 시선이 천사 같이 새하얀 미소를 짓고 있는 제아에게 향했다가,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는 작은 여자 아이에게 향했다.
어려운 말이 아닌데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새까맣게 타들어가 버린 마음은 감정을 드러낼 만한 여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천사들이 그의 마음에서 감정이라는 새싹을 조금씩 돋아나게 해주었다.
‘급하게 안 해도 돼요. 조금씩, 천천히, 표현해 주세요.’라고 다독이면서.
도준은 어색하게 손을 뻗어 여자 아이가 내민 손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았다. 그러곤 다시 손수건을 내밀며 여자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고마워, 꼬마 아가씨.”
도준의 옅은 눈웃음에 수진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더니 눈을 질끈 감으면서 빽 소리를 질렀다.
“나 커서 오빠랑 결혼할 거예요!”
“수진이 너 나쁘다, 나랑 결혼한다면서!”
“내가 이 아저씨랑 결혼할 거야! 으아아앙!”
남자 아이가 씩씩거리며 수진에게 불쑥 튀어나왔다. 수진이에게 질세라 다른 여자아이들도 불쑥 튀어나왔다.
짧은 시간 동안 도준 바라기가 되어버린 여자 아이들이 차례대로 울음을 터뜨리고 수돗가는 이내 아수라장이 되었다.
제아는 그런 아이들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도준을 빤히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는 여자란 여자는 나이 불문하고 모조리 사로잡는구나, 이렇게 작은 여자 아이들까지.
그 사이 도준은 바짓가랑이에 대롱대롱 매달린 여자아이들을 향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말을 했다.
“난 너희들 중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어.”
그 한마디에 겨우 수그러들었던 울음이 또 터져 나왔다.
하지만 도준이 손가락을 입술로 가가져가며 쉬잇, 하는 제스처를 취하자 이내 뚝 그쳤다.
“그 대신.”
잔뜩 기대감 어린 눈빛을 한 명 한 명 마주쳐주며 도준이 말을 이었다.
“너희들을 닮은 아이들을 낳을 거야.”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나이가 있고 똑똑한 석우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 거짓말쟁이! 남자는 아기 못 낳아요! 여자만 아기 낳을 수 있다고 했어요!”
“석우 네 말이 맞아. 형은 아기 못 낳아.”
도준이 순순히 수긍하자 석우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거 봐, 내 말 맞지!”
그때 도준이 갑자기 멍하니 서 있는 제아를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말을 했다.
“형 아기는, 이 누나가 낳아줄 거야.”
잠자코 지켜보던 제아는 느닷없는 도준의 한마디에 넋이 나가버렸다. 오빠와 나의 아이라니,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그때 도준의 서늘한 손이 제아의 손을 꼭 잡았다.
“너와 내 아기, 낳아줄 거지?”
대답이 궁금한 듯 아이들마저도 일제히 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를 사랑하고, 또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용기를 냈고, 함께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냉정한 현실 앞에서 무너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 냉정한 현실에는 그녀의 부모님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현재는 밝았지만, 다가올 미래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불투명하다.
이 남자를 너무 사랑하는데. 이렇게 미치도록 사랑하는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는데…….
제아는 애써 밝게 웃으며 얼른 주제를 돌렸다.
“얼른 일어나서 점심 먹으러 가자! 늦게 간 아이는 불고기 떡볶이 못 먹을 수도 있거든?”
아이들은 아이들이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너도나도 달려가기 시작했다.
도준은 물기 어린 제아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도 같았다.
담담하게 바라보던 도준이 조심히 손을 빼려는 제아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이제 절대 안 놔줘.”
“…….”
“그러니까 그런 눈빛 좀 하지 마.”
“…….”
“불안하잖아.”
태산처럼 단단한 남자가 불안해하는 모습에 제아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때 우르르 달려가던 아이들 몇 명이 다시 몸을 틀어 달려왔다.
“안 돼요! 다른 여자랑 손잡지 마요!”
“제아 누나는 나랑 손잡아야 돼!”
탁, 귀여운 방해꾼들이 우르르 나타나 매정하게 그들을 갈라놓았다. 그저 손만 잡았을 뿐인데.
남자 아이 몇 명이 제아의 손을 양쪽에서 잡아끌었고, 여자 아이들도 양쪽에서 도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바람에 꼭 잡고 있던 둘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작은 천사들의 머리 위로 뿔이 솟은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작은 천사들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높은 허공에서 시린 공기를 오작교 삼아 둘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피식, 붉은 도준의 입술에 옅은 웃음이 어렸고, 배시시, 제아의 입술에도 행복한 웃음이 어렸다.
진짜 손은 아이들에게 잡혀 있었지만 도준과 제아는 서로의 눈을 손 삼아 꼭 잡은 채 아이들에게 이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도준은 맛있게 식사하는 아이들을 챙겨주는 제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미선에게로 향했다.
“시간 괜찮으시면 저와 잠깐 얘기하시죠.”
바로 앞에서 도준을 마주한 미선은 지금이 꿈만 같았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다 되었는데도 심장은 아직 떨림이란 걸 간직하고 있었다.
그 옛날 제 첫사랑이었던 남자와 똑 닮은 얼굴에서 그녀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준아.”
“한도준입니다.”
딱 잘라버리는 도준의 냉혹한 눈빛과 말투에 미선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도준과 함께 원장실로 향했다.
허름하고 좁은 원장실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느긋하게 소파에 앉은 도준은 미선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골드 명함을 확인한 미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제일 어패럴 이사라면, 제일 그룹 손자? 이준이 네가?”
“모르셨습니까?”
“……?”
“제 어머니가 제일 그룹의 한 회장님의 유일한 외동딸이라는 거 말입니다.”
“정말 몰랐어.”
차가운 눈빛으로 미선을 한 번 응시한 도준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새 보육원 건물은 다음 달 안에 완공 예정입니다. 담당자가 다음 주중으로 찾아올 테니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고마워. 이준…… 아니, 도준아.”
미선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규모가 너무 작아서 정부의 지원도, 민간 업체의 후원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개별적으로 후원하던 이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힘들어지는 상황에 갑자기 제일 그룹에서 지원을 해주겠노라고 연락이 왔다.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도 끄떡없을 새 건물로 보육원을 옮겨주고 달마다 일정한 금액까지 지원을 해주겠다고 말이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 왜 갑자기 일어났는지 눈앞의 도준을 보고 있으려니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네 아버지가 여기 출신이라서, 그래서 도와주는 거니?”
갑자기 도준이 시니컬한 미소를 찰나로 보였다.
“철저한 착각입니다.”
“……?”
“사회 공헌은 기업의 필수 덕목입니다. 언론에서 적당히 떠들게 해줄 낙후된 보육 시설을 찾고 있었고, 저를 키워주신 분들이 자란 이곳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원장님도.”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도준이 스윽, 몸을 기울여 왔다.
“제 아버지란 사람을 마음에 두셨나 봅니다.”
제대로 마음을 들킨지라 미선이 화들짝 놀라 눈을 들었다. 하지만 찌르는 듯이 날카롭게 파고드는 도준의 눈빛에 얼른 눈을 피했다.
그런 미선을 한 번 바라본 후 도준은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궁금해지는군요.”
몸을 틀어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황량한 공터를 바라보며 도준이 덤덤히 물었다.
“제 아버지란 사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해가 저물고 나서야 제아는 아이들과 미선의 배웅을 받으며 도준의 차에 올라탔다.
노을 보육원의 후원이 점점 끊기는 상황이라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미선에게서 제일 그룹이 후원할 거란 이야기를 전해 들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들까지 규모가 너무 작다고 후원 안 해준다고 했대. 규모가 어느 정도 되어야 생색내기도 좋아서 그런가? 여튼, 노을 보육원 후원, 오빠가 힘쓴 거 맞지? 그치?”
운전을 하던 도준이 잠시 고개를 틀어 제아를 바라보았다.
“힘 쓴 건 모르겠고, 너 때문인 건 맞아.”
“내가 왜?”
부탁 정도가 아니라 일절 보육원에 대해선 언급조차 한 적이 없었다. 도준의 지금 위치를 이용하는 짓은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자신 때문에 도준이 곤란한 상황은 겪지 않기를 원하니까.
제일 그룹 손자가 아닌, 제일 어패럴 사장이 아닌, 그저 첫눈에 반했던 소년을 사랑하는 것 뿐이다.
그 사이 도준이 짧게 힌트를 주었다.
“워크숍.”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너한테 달려가느라, 광란의 질주 좀 벌였거든.”
그제야 제아는 그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촉박하게 나타났던 도준, 그리고 워크숍 다음 날 작은 언론사에서 그 일을 뉴스로 다루었던 것까지.
물론 워크숍에 늦지 않으려는 열성적인 사장이라는 포장으로 이내 수그러들었다.
겸사겸사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오로지 자신 때문에 도준이 달려왔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 했다.
“‘J 그룹 손자, 한밤의 광란의 질주’라는 제목으로 뉴스가 일면에 짧게 났었지. 뉘우치는 차원으로 사회 복지 쪽에 눈을 틀었고 나를 키워주신 분들이 자란 곳을 선택했을 뿐이야. 알아보니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고.”
제아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오빠가 오지 않았어도 난 정말 괜찮았어. 제일 어패럴 다니면서 자존심 따위 버린 지…….”
“내가 괜찮지 않아.”
도준이 손을 뻗어 제아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돌아온 이상, 더 이상 자존심 굽히지도 말고 고개 숙이지도 마. 어느 누구한테도. 그게 내 가족이라 할지라도.”
“오빠…….”
“항상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문제아 모습 그대로 유지하라고.”
도준이 잡은 손에 꼭 힘을 주었다.
“나를 마음껏 이용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기꺼이 이용당해줄 테니까.”
“…….”
“그러려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거니까.”
“내가 무슨 악녀야? 오빠를 이용하긴 왜 이용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이용하는 건 사랑이 아니거든?”
“그것도 사랑이야.”
“오빠!”
“네가 나한테 하는 건 뭐든지.”
“……!”
“나한테는 다 사랑이야.”
자신을 향한 그의 지독한 사랑이 뼈저리게 와 닿았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지독한 사랑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좋다. 숨이 막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멈출 생각은 없다.
그때 지로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지로야. 갑자기 무슨 술이야. 나 술 못 먹는 거 알면서.”
제아가 통화를 하면서 도준의 눈치를 한번 슬쩍 보자, 그가 눈빛으로 허락을 해주었다.
그날 이후, 정말 사이가 좋아진 걸까? 미심쩍긴 했지만, 사랑 못지않게 우정도 중요하니까.
“알았어. 바로 갈게.”
통화를 끊자마자 도준이 묻는다.
“어디로 데려다주면 되지?”
“오빠 정말 괜찮아? 지로랑 둘이 만나도?”
그답지 않은 쿨한 반응이 제아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젠 내 여자잖아. 그 정도 믿음은 있어.”
믿음이었구나. 그리고 또 하나는 오만함에서 나오는 자신감이었다. 제아가 자신을 두고 다른 남자를 볼 리 없다는. 비스듬히 시선을 튼 도준이 목까지 올라온 제아의 폴라에 닿았다.
“볼 자신 있으면 건드려보라고 하던지.”
“……?”
“내 여자라는 영역 표시, 온몸 구석구석에 해놓은 걸로 아는데. 아닌가?”
왜 폴라 니트를 입었는지 안다는 은밀한 눈빛, 색기 짙은 웃음.
어젯밤의 일, 아니 오늘 아침까지 그와 했던 은밀한 행동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제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포장마차에 도착했다. 제아가 들어가자 지로는 혼자서 소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안주는 어묵 국물과 순대 볶음이었다.
제아가 맞은편에 앉자마자 지로가 툭 말을 내던졌다.
“오늘 술, 제아 네가 사는 거다.”
“헐, 억울하게 이건 또 무슨 법칙이래?”
억울하다는 듯 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뭐가 불만인지 지로가 확 인상을 썼다.
“그렇게 눈 뜨지 마.”
이젠 눈 뜨는 것도 맘대로 못하게 하네. 제아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사나이 심장 떨리니까.”
그 말과 동시에 지로는 다시 소주를 들이켰다.
“네가 나 차버렸잖아. 그러니까 술 한 잔 정도는 사라.”
지로는 상처받은 짐승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제아는 지로에게 고마웠다.
변함없이 곁을 지켜주고 지금도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소중한 친구이니까.
“그래! 이 누님이 살 테니까 안주 팍팍 시켜라! 친구 좋은 게 뭐겠어?”
그놈의 친구. 이 계집애는 오자마자 술을 당기게 하네.
지로는 신경질적으로 연거푸 소주를 들이켰다. 확 취해버리고 싶은데 취하지를 않는다. 취하면 안 되는 그때는 완전히 넉다운이 되어놓고.
그래서 보기 좋게 도준에게 형님이라고 받들겠다는 미친 소리까지 지껄여놓고.
뒤늦게 자고 일어나서 조각조각 맞춘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다. ‘자존심도 없는 수컷 같은 놈아!’라고.
그때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는데 지로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도준의 메시지였다.
<내 여자, 눈으로 보기만 해. 닿지도 만지지도 말고.>
‘하아! 아주 눈꼴 시려 죽겠네!’
그때 못다 한 말이 있는지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남의 여자, 가슴에 담지도 말고.>
정곡을 찌른 말에 지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직까지도 제아만 보면 설레는 가슴과 두근거리는 심장을 어떻게 알았는지.
‘무서운 새끼 같으니라고.’
속으로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힐끔, 눈앞의 제아를 보았다.
“선배랑 있다 왔냐.”
“응.”
배시시 웃는 게 아주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사나이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놓고 말이야, 지는 행복한 표정을 지어?
하지만 이미 승패는 갈라졌다. 제아가 자신이 아닌 도준을 선택한 것도 있었지만, 자신도 제아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도준은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제가 사랑하는 여자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와 행복하기를…….
직설적인 성격답게 지로는 서론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 혹시, 선배랑 잤냐?”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제아는 술이 사레 걸렸는지 컥컥거렸다.
“야아! 네가 왜 그런 걸 물어?”
발끈하는 걸 보니 아직 거기까지 가진 않았나 보다. 하긴, 제아가 그렇게 만만한 여자는 아니니까. 아니, 못 갔을지도. 지로는 의자를 끌어당겨 제아의 옆으로 갔다.
“내가 친구로서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사나이 의리를 저버리고 하는 말이니 잘 들어라.”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지로가 속삭이자, 제아의 얼굴이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