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55화 (55/104)

55. 하루 종일 네 노예가 되어주지.

2017.03.13.

빛이 완벽하게 차단된 침실, 도준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소리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도준은 가운을 대충 걸친 후 베란다로 향했다.

블라인드를 조금 올리자 겨울 아침의 시린 햇살이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흐릿하게 새어 들어왔다.

블라인드 사이로 엿보이는 넓은 정원을 응시하는 도준은 묵묵히 인호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건지는 모르지만 한일 일보만 오케이해서 기사 냈어. 아직은 우리보다 한 여사님 입김이 더 센 편이라.]

“제아 신변은 정확히 보호되었고?”

[사진 없이 기사만 나갔을 뿐이야. 그 파티에 참석한 이들은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도 떠들어대지는 못하겠지. 재벌들 파티에서 여자 문제야 흔한 일이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는 눈치야. 그리고 제일 그룹 후계자가 될지 모르는 한 사장한테 찍혀서 좋을 건 없으니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리다 잊을 테고.]

“방심은 금물이야. 언론사 쪽은 계속 주시하도록 해. 제아 신변 철저하게 새나가지 않도록.”

[알았어. 그나저나 기사 터뜨리라 해놓고 전화는 왜 안 받아? 한 사장 네가 전화를 안 받은 덕분에 내 전화만 불이 나도록 울렸다고. 본가에서 한 회장님 호출이야.]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도준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널찍한 침대에 파묻히듯이 엎드려 있는 제아는 완전히 잠에 취해 있는 상태였다. 오늘 하루는 꼼짝도 하지 못할 정도로.

흐릿한 어둠과 섞여 이불 사이로 반쯤 드러나 있는 나신의 선이 아름다웠다. 풍성한 머리칼이 매끄러운 등을 고혹적으로 가려주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 드러난 살결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는 알고 있다.

“꽤 빠르군. 바로 준비하고 본가로 가도록 하지.”

[각오하고 가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제아 집에 연락해 놔. 저번처럼.”

[뭐야, 설마 너희 둘?]

하지만 제 할 말을 마친 도준은 전화를 끊고 다시 침대로 다가갔다. 동그스름한 어깨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제아가 잠결에 꿈틀했다.

그녀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를 보지만, 그녀의 눈은 다시 스르륵 감기려 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도준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어렸다.

“잠깐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

“으음…… 어디?”

“본가. 갔다 와서 점심 같이 먹자.”

“나도 집에…….”

“쉬잇.”

하지만 제아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도준의 검지가 벌어진 제아의 아랫입술을 쓸어내린 것이다.

“유 실장한테 집에 연락해 놓으라고 했어. 그러니까 더 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잠기운을 못 이긴 속눈썹이 잘게 떨리며 다시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향긋한 복숭아향이 나는 머리칼에 다시 가볍게 입은 맞춘 후 도준은 침실을 나왔다.

***

도준이 본가에 도착했을 때 넓은 응접실엔 그의 어머니인 연희와 강훈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도준이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고 앉자 한 회장의 서릿발 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호통과 동시에 한 회장이 테이블 위에 있던 신문을 집어던졌다. 신문의 일면 기사 제목을 본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둔 J그룹 손자들의 난투극>

이니셜을 썼지만 J 그룹이 바로 제일그룹이라는 것을 웬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사이좋게 지내도 모자랄 판에 여자 가지고 난투극을 벌여? 못난 녀석들 같으니라고!”

한 회장의 매서운 눈빛이 얼굴이 성치 않은 두 손자에게 고스란히 쏟아졌다. 한 놈은 이마가 터지고, 한 놈은 얼굴이 터지고. 이런, 쯧쯧!

강훈이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한 회장을 향해 조심히 입을 열었다.

“회장님,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내 도준이 강훈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오해 아닙니다.”

“한도준!”

강훈이 격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도준은 한 회장을 직시하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한 이사님이 아름다운 제 파트너에게 잠시 호감을 보이긴 했지만, 그래서 주먹질을 한 건 아닙니다. 제일 백화점의 제안을 거부하고 단독으로 제일 아울렛을 진행시킨 점 때문에 한 이사님이 화가 좀 난 것 같습니다.”

“도준이 말이 사실이냐? 강훈이 네가 말해봐라.”

한 회장의 매서운 눈빛이 강훈에게 꽂혔다. 무릎 위로 불끈 쥔 강훈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라고 했다간 단번에 동생의 파트너에 눈독 들인 파렴치한 놈이 될 상황이었다.

“술이 들어가니, 아마도 좀 과격해진 것 같습니다.”

“쯧, 그럴 거였으면 도준이 녀석이 움직이기 전에 네가 먼저 기획하고 움직였어야지!”

“……죄송합니다.”

“설득하라고 했더니, 술 처먹고 형제끼리 주먹질이나 해? 아주 잘하는 짓들이다! 다시 한 번 이런 일 생기면 둘 다 쫓아내버릴 줄 알아! 내가 핏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건 네 녀석들이 더 잘 알 테니!”

마뜩찮은 눈빛으로 두 사위를 번갈아 노려본 한 회장이 목을 가다듬더니,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도준이 너, 정말 좋아하는 여자라도 생긴 거냐?”

“아버지!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파티에 동행한 여잔 그냥 도준이 업무 비서일 뿐이라구요!”

연희가 끼어들었지만 한 회장은 도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네 녀석 좋아하는 여자 있다고 하지 않았냐. 그냥 흘러들었는데, 진짜인가 보구먼.”

“죄송하지만 아직은 말씀드릴 때가 아닙니다.”

“이 녀석아, 내가 알아야 약혼을 추진해줄 거 아니냐!”

도준은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한 회장의 속셈을 모르지 않았다. 미리 알아내서 집안이 아니다 싶으면 손을 쓰려는 걸.

“아직 한 여자에게 얽매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연애 먼저 실컷 즐기고, 약혼은 후에 생각해보겠습니다.”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연희가 도준에게 싸늘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도준이 너, 행실 똑바로 하고 다니지 못하니?”

“연애도 주먹질도 지겹도록 해봐야 후에 억울하지 않은 게 남자입니다.”

“연애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한다. 더러운 물에 발을 담그면?”

연희의 말을 가로챈 도준은 느긋하게 마지막 공격을 날렸다.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여자 좋아하는 건 아버지 피를 물려받았고, 눈이 낮은 건 어머니 피를 물려받았으니 말이죠.”

도준의 도발에 연희의 고운 눈 꼬리가 파릇하게 떨렸다. 하지만 연희를 제지한 건 다름 아닌 한 회장이었다.

“연희 넌 그만해라.”

능력도 외모도 출중한 손자 녀석이 도무지 10년 동안 여자한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은근하게 성적 취향이 독특하다는 소문까지 돌아서 내심 걱정을 했는데. 이번 기회에 보통 남자라는 걸 알게 된 한 회장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너 정도 위치의 기업인이면 공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미지 관리는 철저해야 돼.”

“알겠습니다, 회장님.”

도준이 순순히 대답을 하자 한 회장은 화실로 들어가 버렸다. 도준을 매섭게 노려본 연희도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연희가 사라지자 강훈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도준을 바짝 다가섰다.

“기사는 분명 막았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터뜨리라고 했어.”

너무 태연히 대답하는 도준의 모습에 강훈의 눈 꼬리가 씰룩였다.

“그게 뭐 자랑이라고?”

“나는 약혼을 안 해도 되고. 그쪽은 내게 막강한 권력이 흡수된 일이 없으니 안심해도 되고. 서로에게 이로운 일 아닌가?”

도준의 말이 틀린 건 아닌지라, 강훈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안심하진 마. 방심하는 순간, 내가 숨통을 물어뜯을 테니까.”

강훈에게 한걸음 더 다가선 도준이 시니컬하게 웃으며 살벌한 음성을 흘렸다.

“재기하지 못할 만큼 처절하게 말이야.”

“너, 너 이 자식!”

그때 화실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준이는 잠시 들어와라!”

화실에 들어온 도준이 맞은편에 앉자 잠시 눈을 감고 있던 한 회장이 눈을 떴다.

“대체 누굴 건드린 게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녀석을 미국으로 보내버리라고 압력이 들어왔다.”

아직 한 회장은 모르고 있다. 한 부회장이 정치계 쪽에 뒷돈을 얼마나 대주었는지,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리니 계약에 손을 뻗은 것도 모자라, 벌써부터 정치계 쪽의 힘까지 빌리려는 것이다.

“우선 경고 차원이라 좀 더 지켜보고 결정하겠다고 버티기는 했다만, 나도 버티는 데 한계가 있다.”

“…….”

“윗선과 연관되어 있는 건 쑤시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야 나도 약속을 지킬 것 아니냐.”

“…….”

“도준아, 윗선을 이용하는 것도 능력이다.”

“…….”

“핏줄이라고 봐주는 건 나도 여기까지다.”

“알겠습니다.”

“나가 봐라.”

도준이 일어나서 화실을 나가자 한 회장은 그제야 옆에 놓여 있던 봉투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아찔하게 슬립만 걸친 아름다운 여자와 호텔에서 함께 찍힌 도준의 사진이었다.

“미국 부동산 재벌의 외동딸이라. 뭐, 나쁘지는 않지만…….”

한 회장은 우선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 여자가 얼마나 제일 그룹에 이득을 줄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

점심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달려왔다. 그런데 도준을 맞이한 건 텅 빈 집과 침실, 침대뿐이었다.

제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몇 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제아의 공백을 느끼는 순간 심장이 저릿했다.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한 걸까. 때마침 제아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어디야?]

도준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집이야.”

[어디 집? 오빠네 집? 아니면…….]

“너와 내 집.”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내 해맑은 음성이 다시 들렸다.

[우와, 벌써 왔어?]

“점심 먹기로 했잖아. 넌 어딘데.”

[나 오빠네 집 맞은편 도로로 나가는 중. 지금 바로 나올 수 있지? 갈 데 있는데.]

“바로 나갈게.”

전화를 끊고 나가자 때마침 길가에서 무거운 짐을 양손에 들고 낑낑거리며 나오는 제아가 보였다.

“오빠!”

그를 발견한 제아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도준이 나가자마자 나른한 잠기운을 힘겹게 이겨낸 제아였다.

며칠을 내리 잠만 자도 모자랄 만큼 잠의 유혹은 끈질겼지만, 할 일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도준의 집으로 달려가서 청소를 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윤영의 부탁을 받고 막 집을 나온 참이었다.

도준이 얼른 달려와 그녀의 손에서 무거운 짐들을 받아냈다. 그 짐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음식 냄새에 잠시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잠깐뿐이었다.

다정한 눈빛으로 제아의 얼굴 탐색을 끝낸 도준이 물었다.

“몸은 괜찮아?”

도준의 물음에 제아는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수줍은 눈빛으로 도준을 올려다보았다.

“사랑을 듬뿍 받았는데, 안 괜찮을 건 또 뭐 있어?”

잠기운을 못 이겨 헤맬 때는 언제고, 지금 눈앞의 제아는 너무도 쌩쌩했다. 아니, 활력이 넘쳐 보였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제아의 눈빛이 유난히도 반짝였다. 그 눈빛을 보며 도준은 직감했다. 제아가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을.

“……할 말 있으면 해봐.”

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보는 제아는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이 팽팽해지는 모습에 도준의 동공이 짙게 가라앉았다.

모르면 모를까, 그 입술이 얼마나 매혹적인 향과 자극적인 맛이 나는지 알고 있다.

도준의 시선이 입술에 가 있는지도 모른 채 제아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내가 어디를 가야 되는데, 오늘 내 기사 노릇 좀 해주면 안 돼?”

“…….”

“안 될……까? 하긴 오빠 바쁘니까, 그냥 나 혼자……!”

“차에서 키스해준다고 하면.”

도준이 팔을 뻗어 제아를 와락 품에 끌어안아 귓가에 바짝 입술을 댔다. 그리고 은밀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네 노예가 되어주지.”

잠시 놀란 눈을 하고 있던 제아가 발꿈치를 세워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쪽―.

그리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귓가에 바짝 입술을 댄 채 수줍게 속삭였다.

“이자 먼저 주는 거야. 원금은 차 안에서.”

수줍은 제아의 유혹에 도준의 심장이 흔들렸다.

“드레스 룸에 가면 내가 트레이닝복이랑 재킷 꺼내놨어. 차 가지고 나올 때 그거 입고 나와, 알았지?”

감히 누구 말씀이라고 거절할까. 도준은 그 옷의 용도가 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묻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도로 쪽으로 차를 가지고 나오자 제아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면 되지?”

“노을 보육원. 우리 엄마, 아직도 보육원에 한두 달에 한 번씩 음식 왕창 만들어서 보내. 옛날엔 엄마 아빠가 직접 가셨는데 연세도 있으시고 하시니, 이젠 내가 대신 가. 가서 일도 도와주고, 아이들도 보고.”

1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한 노을 보육원은 개인이 운영하는 만큼 작고 낙후된 곳이었다.

하지만 쌀쌀한 초겨울 공기에도 작은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표정은 티 없이 맑고 깨끗했다.

부모님이 버려지고 자란 이곳에 오면 제아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이곳은 그녀에게 고향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그와 함께 이곳에 오고 싶었다.

“와아, 제아 누나다!”

제아를 알아본 아이들이 우르르 도준의 차 주위로 몰려들었다.

다가오지 못하고 경계하는 아이들도 몇 있었지만,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도준의 차와 도준을 구경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우와, 이 차도 짱 좋다!”

“예쁜 오빠 왔다!”

남자가 분명한데 여자보다 예쁘게 생긴 도준이 신기한지,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는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도준은 의외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제아는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과 어우러진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실 그 전까지 기사 노릇을 해준 건 바로 지로였다. 하지만 천하의 한지로도 어린 아이들만은 무서워했다. 상대할 줄을 모르니 얼굴이 벌개져서 차 안으로 도망가 버렸다.

하지만 제아가 모르는 게 있었다. 도준도 지금 무척 당황스럽다는 걸.

도준으로선 처음 상대해보는 아이들이었다. 악한 마음이 없는 해맑은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제아는 동상이 되어버린 도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 해, 웃어주지 않고. 설마 아이들도 겁주려는 건 아니지?”

그래도 도준은 웃어줄 줄 몰랐다. 그런데 그때 한 남자아이가 도준의 앞으로 씩씩하게 튀어나왔다.

“형한테 축구로 도전장을 내밀어요!”

바람이 거의 빠져버린 축구공을 옆구리에 낀 채 불쑥 튀어나온 당돌한 꼬마 아이를 도준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왜요? 자신 없어요? 축구하기 싫으면 제아 누나 옆에서 떨어져요! 제아 누나는 커서 나랑 결혼한 거란 말이야!”

꽤나 날 선 남자 아이의 경계심을 느낀 도준은 무릎을 구부려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용감한 꼬맹이, 넌 이름이 뭐지?”

“나 꼬맹이 아니고 김선우거든요! 그리고 나 7살이에요!”

“그 도전, 받아들이지.”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함께 작은 운동장으로 향하는 도준의 늘씬한 뒷모습을 보며 제아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어른들의 눈에는 지로보다 도준이 더 무섭고 위험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지로를 보고는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접근도 못하던 아이들이 도준에게는 금세 다가선 걸 보니.

무엇보다 춥다고 밖으로 나오기 싫어하는 여자 아이들도 도준의 외모에 홀딱 반했는지 밖으로 나와 도준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갔다.

저 얼굴은 정말 나이 불문 다 먹히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제아의 옆에 때마침 노을 보육원의 원장인 미선이 나와 반겨주었다.

“미선 이모!”

“아이쿠, 우리 제아 왔니? 세상에, 또 뭘 이리 많이 가지고 왔어? 와서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미선과 함께 윤영이 싸준 음식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제아는 힐끔 운동장 쪽을 바라보았다.

추운 날씨에도 재킷을 벗어던진 도준은 얇은 니트 하나만 입고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 아이들은 이름도 모른 채 예쁜 오빠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그제야 노을 보육원의 원장인 미선의 시선도 운동장으로 향했다.

“그때 그 무섭게 생긴 남자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제아 애인이니?”

“아, 아니에요! 원장님!”

대답과 달리 거짓말을 못하는 제아의 성격상 얼굴은 애인이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마. 난 내 친구인 윤영이보다, 제아 널 더 아낀다. 그거 알지?”

차마 그가 제 오빠였던 문이준이라는 말은 못 하고 끙끙거리는 제아를 보며 미선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들어가자. 아이들 배고프니까 이걸로 점심 준비하자꾸나.”

“엄마한텐, 진짜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윤영이 싸준 음식들을 냉장고에 넣고 다시 요리해 푸짐한 점심상이 차려지자, 제아는 미선과 함께 운동장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부르려고 나갔다.

힘이 넘쳐나던 남자아이들이 지쳐 있는 걸 보니, 도준이 제대로 놀아준 모양이었다.

“맛있는 점심 먹자! 축구 그만하고 얼른 와!”

제아가 운동장을 향해 외치자 아이들이 “와아, 밥이다.”라고 외치며 우르르 수돗가로 몰려들었다.

어느새 친해졌는지 도준도 양쪽 팔에 아이들을 대롱대롱 매단 채 수돗가로 걸어왔다.

그런데 도준을 본 미선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면서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재경…… 오빠?”

다행히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제아가 걱정스럽게 미선을 바라보았다.

“미선 이모, 괜찮아요? 얼굴이 창백해요.”

“저 남자 혹시, 네 오빠였던 문이준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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