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오늘 밤 널 안고 싶은데.
2017.03.06.
넓은 호프집 내부의 테이블과 의자는 한쪽에 싹 밀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수십 명의 남자들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아가 눈빛으로 묻자 인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쟤네들, 저렇게 덩치는 커도 고등학생들입니다.”
인호의 말에 가만히 얼굴을 뜯어보니 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교복을 입고 있는 남학생이 몇 명 보였다. 게다가 도준의 모교인 남한고의 교복이었다.
“한 사장이 날 밝을 때까지 무릎 꿇고 반성하라고 했다네요. 내가 아무리 말해도 입 꾹 다물고 꼼짝도 안 하고. 한 사장도 술 잔뜩 취해서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안 하고.”
인호가 그중에서 꽤 덩치가 커 보이는 남자에게 제아를 데리고 갔다.
“어이, 학생. 이젠 무슨 일인지 말 좀 해줘봐.”
인호가 부드럽게 달래도 남학생은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답답하다는 듯이 인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아가씨가 그 곱상한 아저씨 애인이거든? 그러니까 이 아가씨한테는 말해도 돼. 그 아저씨가 여자 친구 말은 엄청 잘 듣거든. 너네 지금 바로 집에 갈 수 있다는 뜻이야.”
그제야 남학생이 힐끗 시선을 들더니 인호에게 톡 쏘아붙였다.
“하늘같은 대선배님입니다! 아저씨 아니거든요?”
“이 자식이, 그럼 나는 왜 아저씨냐? 걔랑 나랑 동갑이거든?”
“에이, 말도 안 돼요!”
“어헛! 이 자식이 그래도.”
이래서 남자는 다 커도 애라고 하는 걸까. 피식 웃음을 흘린 제아가 인호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남학생을 향해 상냥한 어투로 말을 걸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무릎 꿇고 있을 거야? 다리 안 아파?”
“정말, 선배님 애인 맞습니까? 아닌 것 같은데.”
수수한 제아의 차림새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남학생이 물었다. 하긴 한도준 씨를 봤으면 조금 의심이 되기도 하겠지.
“나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주고 나서 확인하면 되잖아.”
그제야 남학생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남학생은 현재 남한고의 주먹짱이다. 나름 남한파라고 이름까지 짓고 후배들까지 꽤 거느리고 있는.
그리고 바로 오늘 졸업을 앞둔 3학년들만 모여서 이 호프집에 모여서 술 한잔하기로 했다. 군기 빠진 후배 몇 명 기합도 줄 겸.
그전에 뒷골목에서 담배를 나눠 피우는데 호프집에서 잠깐 나온 지로와 정면으로 딱 부딪힌 것이다.
“니네 고딩이지? 어린것들이 건방지게 담배를 피워? 담배 안 끄냐?”
“아저씨가 뭔 상관이야. 얻어터지기 싫으면 신경 끄고 가던 길이나 가라고.”
불량해 보이는 학생들의 외관도 외관이었지만, 머릿수만도 20명이 넘었다. 다행히도 겁을 먹었는지 지로는 말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남학생도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몇 분 후, 어디서 구했는지 손에 먼지떨이를 든 지로가 다시 나타났다.
“왠 먼지가 이리 많냐.”
산발된 여자의 머리칼처럼 현란하게 흐트러지는 먼지떨이.
“어린놈의 새끼들이 담배를 피우면 쓰나.”
휙휙, 허공을 가르며 남학생들의 몸뚱이를 후려쳤다.
“게다가 어른한테 말하는 본새하고는.”
퍽퍽!
“윽, 윽!”
“싸가지들을 상실했어.”
여기저기서 리듬을 타듯이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지로가 먼지털이를 잘 휘둘러도 머릿수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짱인 남학생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네댓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뒤로 발라당 넘어져 버렸다.
“충고했을 때 어른 흉내 내지 말고 가지 그랬어. 아, 저, 씨.”
남학생은 친구들에게 잡혀 있는 지로에게 다가가 이죽거렸다. 짙은 술 냄새로 보건대, 술을 꽤 많이 마셨다. 마신 술치고는 꽤 선전했지만 그래도 머릿수를 보고 덤볐어야지.
“야, 정신 차리게 몇 대 더 패주고 전봇대에다 던져버려.”
남학생이 담배를 다시 입에 무는 그때, 골목길 너머에서 길쭉한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남자는 대답이 없이 태연하게 골목길로 들어섰다.
“아씨, 오늘 더럽게 어른 흉내 낼라는 것들이 많네. 어이, 너도 이 꼴 나기 싫으면 그냥 지나가. 알았어?”
그런데 일정하게 울리는 남자의 구두 굽 소리가 묘하게 그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로등 빛에 남자의 윤곽이 드러났을 때 그 긴장감은 싹 사라져 버렸다.
말끔한 슈트 차림, 키는 컸지만 호리호리했고, 얼굴은 여자보다 더 고왔다. 남자의 외모에 홀려 남자의 차가운 눈빛을 미처 캐치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시해버렸다. 알아서 지나가겠지.
느릿한 걸음으로 순식간에 다가온 남자가 옆을 지나칠 때쯤, 몸뚱이가 반으로 꺾인 담배가 남학생의 얼굴을 맞고 떨어졌다.
“아, 씨……?”
욕을 마저 끝맺기도 전에 목과 턱이 남자의 손에 틀어 잡혀 벽으로 밀렸다. 버둥거릴수록 숨통이 조여왔다.
남자의 시선이 무릎 꿇고 있는 후배들에게 잠깐 향했다. 교복을 확인하더니, 피식 시니컬하게 웃는데 그 미소에 소름이 확 끼쳤다. 남자가 느닷없이 물었다.
“선배는?”
버둥거리면서도 남학생은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큭큭…… 하, 하늘이…… 컥…… 다.”
남자가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여서 알려주었다.
“남한고 39회 졸업생 문이준.”
남자의 미소는 아름다웠지만, 눈빛과 말투는 살얼음판 위를 거니는 것처럼 차가웠다.
“대선배를 봤으면, 꿇어야지.”
짱이 제압을 당했다. 게다가 상대는 하늘같은 대선배이다.
이준, 이준, 문이준. 10년이 흘렀어도 아직까지 학생들 입에서 오르내리는 전설.
학교에선 명석했던 학생회장이었지만 뒤에서는 미친 흑표범으로 불리던 대선배, 문이준.
도준이 통 크게 골든 벨을 울리고 선금을 얹어준 덕분에 호프집은 깨끗하게 비워졌다.
“담배는 나쁜 거야. 끊도록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로와 함께 룸으로 들어간 도준은 나오지 않았다. 술만 끊임없이 들어갈 뿐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인호가 아무리 타일러도 학생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룸에서 술을 마시는 도준과 지로는 이미 술이 들어갈 대로 들어갔다.
인호가 무슨 말을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러니 꼭두새벽임에도 제아를 부를 수밖에.
***
인호와 함께 룸 안으로 들어가자 내부는 더 가관이었다.
지로는 한 손에 먼지떨이를 쥔 채 소파에 뻗어 있었다. 하지만 도준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턱시도 차림은 그대로이지만, 보타이는 어디다 뒀는지 목 부분의 단추까지 한 개 풀려 있었다. 이마에 있는 밴드도 언제 떼어버렸는지 없다. 다행히도 상처는 흘러내린 앞 머리칼이 가려주고 있었다.
소주가 양주인 듯, 소주잔이 와인 잔인 듯, 그는 술을 마시는 모습조차 우아했다.
시선을 내리자 나뒹구는 술병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제아의 충고를 잊지 않은 듯, 그 사이엔 막걸리 병도 뒹굴고 있었다.
나, 웃어야 해, 말아야 해? 제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저게 취한 겁니다.”
“설마요.”
“멀쩡해 보이는데, 모든 사람을 다 투명인간 취급하는 게 술버릇이에요.”
설마 사랑하는 여자까지 투명인간 취급하지는 않겠지? 인호는 제아를 보며 생각했다.
“문 비서까지 투명인간 취급하면 답 없어요. 나가 있을 테니 한 사장한테 가봐요.”
인호가 룸에서 나가자 제아는 도준에게 다가섰다. 흐트러짐 없는 도준의 옆모습은 지금도 참 단정했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도준 오빠.”
단단히 취하긴 취했나 보다. 그녀가 나타났는데도, 이름을 불렀는데도, 반응조차 없는 걸 보니.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제아는 다시 그를 불렀다.
“이준 오빠.”
그러자 반응이 왔다. 술잔을 가져가던 손을 멈추고 도준이 고개를 틀었다. 바짝 핏발이 선 동공이 그녀를 담고 있었다.
“……문제아.”
제아를 보자 도준이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예뻐서 제아는 생각했다. 종종 술을 이렇게 먹여야겠구나.
“나 왔으니까 술 그만 먹고 집에 가자. 밖에 있는 후배들도 집에 보내주고.”
술잔 옆, 몸뚱이가 꺾인 담배가 수두룩했다.
“어후, 담뱃값이 얼만데.”
“담배 피우고 싶은데, 네가 없잖아. 그래도 참았어.”
정말 술에 취했나 보다. 그답지 않게 꽤 나긋나긋한 말투가 듣기 좋았다.
“잘했어.”
“담배 참느라 죽는 줄 알았어.”
쪽―.
다가온 입술이 무방비하게 벌어져 있는 제아의 입술에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의 입술은 멀어졌지만 싸한 소주의 끝 맛은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도준은 이제 미련 없다는 듯 몸통이 아직 꺾이지 않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도준이 다시 웃었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천진난만한 그의 미소가 낯설었다. 그런데도 그 미소는 여전히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마음을 설레게 한다.
느릿하게 뻗은 도준의 손이 제아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10년 동안 너만 생각했어.”
단연코 처음이었다. 지난 10년에 대해선 어떤 말도 꺼내지 않는 도준이었는데.
“그래서 버텼어.”
오로지 한 여자만을 품는 내 남자의 품이다. 제아는 손을 뻗어 도준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이대로 무너지면.”
독백 같은 그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절대 널 못 볼 것 같아서.”
애절한 그의 마음이 느껴져 눈가가 시큼해졌다.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돌아오면 되지, 왜 10년이나 버틴 건데. 바보 같아.
10년을 기다린 그녀라고 속이 편했을까. 그의 공백이 길어질수록 원망과 미움이 커질 거라는 건 왜 생각하지 못한 걸까.
“사랑한다.”
느닷없는 고백.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았던 달콤한 언어.
그런데 왜 하필 술 마시고 하는 건지. 그런데도 기뻤다. 얼굴을 든 도준이 깊숙이 눈을 마주치면서 다시 입술을 내렸다.
“내가 널 너무 사랑해서, 미칠 것 같아.”
맞닿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도준의 숨이 밀려들었다. 그때 룸의 문이 열리면서 인호가 고개를 쓱 내밀었다.
“어이쿠! 내가 타이밍을!”
입술을 뗀 제아가 도준에게 부드럽게 타일렀다.
“유 실장님 따라서 집 가는 거야. 알았지?”
도준이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포악한 야수가 이렇게나 얌전한 고양이가 되다니. 인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도준을 응시했다.
“실장님이 도준 오빠 집에 데려다 주세요. 전 친구 데려다 줄게요.”
“문 비서가 한 사장 데려다 주는 게 낫지 않아요? 친구분이 덩치가 훨씬 큰데.”
“제 친구가 눈 뜨면 유 실장님한테 덤벼들지 몰라요. 그리고 걱정 마세요. 제 친구는 제 발로 일어나서 갈 테니까.”
무슨 말이냐는 듯 인호가 바라보자 제아는 도준의 품에서 벗어나 지로에게 갔다. 소매를 야무지게 걷어붙이고 지로의 등짝을 냅다 후려쳤다.
짜악―.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인호는 흠칫 놀란 눈빛으로 제아를 보았다. 그와 동시에 지로가 테이블에 박고 있던 머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으악! 어어? 이게 누구야. 우리 제아 님 아니야? 나 버리고 선배한테 간 나쁜 여자.”
“나쁜 여자한테 더 맞아볼래?”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지로의 날카로운 눈매는 잔뜩 풀려 있었다. 그래도 눈앞에 제아가 있는 게 좋은지 헤벌쭉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는 먼지떨이를 흔들어 보였다.
“나 오늘 착한 짓 했으니까 예뻐해줘, 응?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담배를 피우길래 내가 혼쭐을 내줬어!”
혼쭐을 내준 건 네가 아니라 오빠겠지. 작게 중얼거린 제아는 지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일어나.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지로를 집에 데려다 준 후 집에 도착하자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제아의 입술 사이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늘 깨진 택시비만 떠올려도 손이 후들거렸다. 침대에 눕자마자 인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한 사장 샤워까지 깨끗하게 하고 침대에서 잠들었습니다. 걱정할까 봐 말해주는 거예요.-
메시지를 본 제아는 배시시 웃으면서 다시 잠에 들었다. 취중진담이긴 했지만 도준에게 사랑 고백을 들어서인지 기분 좋게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
제아로선 오랜만에 가족과 오붓하게 지내는 주말 저녁이었다. 기분 좋은 윤영 때문에 저녁 식탁이 푸짐했다. TV까지 부모님과 함께 시청한 후 밤 10시가 되어서야 샤워를 한 후 제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핸드폰을 확인해도 도준에게 온 부재중 메시지나 전화도 없었다.
“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겠지?”
워낙 바쁜 몸이니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을 접었다. 연락 횟수에 연연하는 여자 친구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
이불을 돌돌 말아 다리 사이에 끼운 채 잠이 드려는 찰나, 인호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네, 실장님.”
[문 비서, 혹시 한 사장 만나고 있습니까?]
“아침에 그렇게 헤어진 후에 오빠한테 연락 한 통 없었는데요?”
[이상하네. 그럼 이 시간에 갈 곳이 없는데. 경비실에 확인해보니 이른 오후에 나갔다고 하고. 혹시 문 비서 동네에 있는 그 집에 가서 확인 좀 해줄래요?]
“무슨 집이요?”
[아, 문 비서는 모르나?]
“……?”
[한 사장이 말 안 했나 보네.]
핸드폰 너머, 인호가 뜸을 들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29-8번지 문 비서 집 근처 아닙니까? 거기에 한 사장이 집 한 채 지은 걸로 알고 있는데.]
번지수를 보니 굉장히 근접한 주소였다. 그러다 번뜩,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게 있었다.
몇 달 전부터 그녀의 집 맞은편에 나란히 있던 집 세 채가 허물어지고 그곳에 공사가 들어갔다. 집 바로 너머에 위치한 집인지라 윤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평범한 이 동네에 안 어울리게 무슨 집을 저렇게 넓고 호화스럽게 짓나 몰라. 젊은 남자가 사들였다는데.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넘겼는데, 설마.
[내가 메시지로 비번 알려줄 테니까 한번 들러줄래요? 한 사장 그렇게 잔뜩 취하고 난 다음날은 몸 컨디션이 워낙 안 좋아서. 꼭 확인을 해야 해요.]
“예, 알겠습니다.”
거실을 나서자 어느새 윤영과 윤식도 안방으로 들어갔는지 불이 꺼져 있었다. 살금살금 소리 나지 않게 나온 제아는 공사가 끝난 그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과는 불과 5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단단해 보이는 나무문을 한 번 바라본 후에야 그녀는 초인종 밑에 있는 번호 키를 눌렀다.
철컹―.
육중한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조심히 걸음을 들이자, 추운 날씨에도 이제 막 깔린 파릇파릇한 잔디가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발에 밟혔다. 집 몇 채를 허물고 지은 집이라서 그런지 정원 넓이마저 어마어마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서 불을 켜는 순간, 제아는 오늘로서 두 번째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린 시절, 미래에 살고 싶은 집에 대해 무심코 흘렸던 말들이 현실이 되어 눈앞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따스한 원목으로 지어진 내부 구조, 벽난로와 함께 앤티크한 인테리어,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계단, 어둑한 하늘을 아낌없이 비추어주는 투명한 지붕까지.
“말도 안 돼.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
한껏 격앙된 제아의 커다란 동공이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우선 도준이 이곳에 있는지 확인 먼저 해야 한다.
따스한 온기가 도는 내부를 보건대 왠지 도준이 이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안방으로 추정이 되는 방의 문을 열자, 거실의 새하얀 불빛이 넓은 방으로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널찍한 침대가 보였다. 침대 맞은편의 베란다는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가 있어서 정원을 통해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다.
그녀는 다시 침대로 시선을 옮겼다. 그제야 침대에 길쭉하게 늘어져 있는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도준 오빠?”
어깨를 흔들자 시체처럼 꿈쩍도 하지 않던 도준이 꿈틀, 했다.
“대체 여기 왜 있는 거야?”
‘그리고 이 집은 또 뭐고.’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았다. 잠에서 막 깨어난 그를 몰아붙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제아야.”
꽉 잠긴 허스키한 그의 음성이 귓가를 나른하게 훑어 내렸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지금 몇 시인 줄이나 알아? 밥은 먹었어? 아니, 안 먹었지. 먹었을 리가 없지. 이 시간까지 쫄쫄 굶고 무슨 짓이야, 정말!”
밥 먹었냐고 묻는 게 웃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도준이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게 보였다.
“내가 못 살아, 정말! 여기 있어. 내가 뭐라도 사올 테니……. 꺄악!”
몸을 틀어 나가려는데 도준이 몸을 일으키더니 순식간에 제아를 품으로 낚아챘다. 푹신한 침대가 출렁이도록 제아의 몸이 파묻혔다.
손목을 틀어 잡힌 채 제아는 도준을 올려다보았다. 이마에 흐트러진 부드러운 머리칼, 아직 잠기운이 역력한 흐릿한 눈매가 찌르듯이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두근두근.
“왜, 왜 이래…… 갑자기.”
‘사람 심장 터지게, 그렇게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라고 차마 말은 못 하겠고. 미묘한 자세와 분위기에 제아는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가지 마.”
짙은 색기가 묻어나는 도준의 눈빛이 천천히, 그녀의 온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내려온 얼굴이, 제아의 목덜미에 파묻혔다.
“샤워했구나.”
목덜미에 스며드는 도준의 뜨거운 숨결에, 정신이 몽롱해지는 걸 느끼며 가까스로 대답을 했다.
“자기 전이니까, 당연히 샤워했지.”
“복숭아향이, 짙잖아.”
도준이 다시 얼굴을 들고 가만히 제아를 내려다보았다.
거실에서 스며드는 밝은 빛을 등진 도준의 얼굴은 꽤 어두웠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젠틀맨을 유지하는 겉모습과 달리 짙은 동공 속에서 벗어나려고 아우성치는 포악한 야수가.
“……키스해도 돼?”
서서히 내려오는 입술을 제아는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지금, 밤인데.”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이 갈고리처럼 뻗어 나와 심신을 마비시켰다.
“보내고 싶지가 않네.”
포악한 야수가 젠틀맨처럼 묻는다.
“문제아, 자고 갈래?”
오늘 밤 널 안고 싶은데. 허락해줄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