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너란 여자, 나만 미치도록 유혹한다는 거.
2017.03.02.
제아는 벌레라도 닿은 듯, 강훈의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그래도 그의 품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는 변함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쌍욕을 팍팍 퍼부으면서 남자 구실 못 하게 있는 힘껏 걷어차 주고 싶었다. 제 몸을 가두고 있는 이 팔뚝이라도 와드득 물어뜯어 뜯어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좋지 않은 형제 사이를 목격한 그녀로선, 자신 때문에 형제 사이가 더 벌어지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그래도 배울 만큼 배운 놈이니, 대화 먼저 해보자.
“한강훈 이사님, 이러는 거 엄연히 성추행입니다.”
“큭.”
뭐가 웃긴지 강훈이 큭큭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가 기분 나쁘게 귓가를 파고들었지만, 제아는 최대한 냉랭한 표정을 유지했다.
“지금 이 일은 발설하지 않을 테니, 놔주세요.”
“싫다면?”
“일 크게 키워봤자 좋을 거 없잖아요. 저한테도, 그리고 한 이사님한테도.”
“내가 도준이 녀석보다 널 만족 못 시켜줄 것 같아서 그래?”
하아, 정말 상상력이 뛰어난 남자였다. 제아는 기가 막힌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생긴 건 그 녀석이 나을지 몰라도, 밤일은 내가 더 잘할걸? 계집애처럼 생긴 녀석이 힘이나 제대로 쓰겠어?”
우악스럽게 손목을 틀어쥔 손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목을 후덥지근하게 하는 숨결, 머리가 띵하도록 독한 향수 냄새.
강훈의 모든 게 제아를 숨 막히게 했다.
“마지막 경고예요. 저한테서, 떨어지세요.”
“안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건데?”
“제가 발길질을 아주, 잘하거든요. 남자 구실 못 하게 아주 제대로.”
하지만 제아는 바로 뱉은 말을 후회했다.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다리 사이로 강훈의 다리가 성큼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젠 다리도 들어 올릴 수 없다. 손도 잡혀 있다. 제대로 몰린 상황이었다.
“이보세요, 한 이사님.”
“강훈 씨라고 불러봐. 도준이한테 부르는 것처럼 말이야.”
진한 쌍꺼풀이 진 느끼한 눈이 제아의 얼굴과 목선을 노골적으로 더듬었다. 강훈의 손등이 뺨을 쓸어내리자, 마지막 남은 인내심이 툭, 끊겨버렸다. 도저히, 못 참겠다.
“이 개자식아, 나한테서 더러운 손 떼라고.”
씹어뱉듯이, 침착하게 욕을 뱉어내자 강훈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가늘어졌다.
“부산에서 봤을 땐 꽤 순진하다 싶었는데, 앙칼진 면도 있군. 하긴, 여자는 튕겨야 제 맛이지. 정복하는 재미가 있거든. 특히 침대에선.”
“튕기는 게 아니라 너 같은 새끼는 내 취향 아니라고. 말귀 못 알아먹어?”
욕까지 해줬는데도 도무지 말 귀를 못 알아먹나 보다.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강훈이 제아를 더 벽으로 몰아붙였다.
“도준이가 얼굴이면, 나는 손이야.”
“……?”
“내가, 손을 쓰는 스킬이 아주 뛰어나거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훈의 거친 손길이 제아의 치마에 와 닿았다.
순간적으로 치민 화에 제아는 손을 번쩍 들어 강훈의 뺨을 휘갈겼다.
짝―!
얼마나 세게 쳤는지 강훈의 고개가 확 돌아갔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이 쏘아보는데도 제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도 손 스킬은 아주 뛰어나거든요. 치한 퇴치하는 손 스킬.”
이런 놈은 매가 약이라고 생각하면서 몸을 트는 순간 어깨가 틀어잡혔다. 몸이 거칠게 돌려지고 강훈의 커다란 손이 제아의 가는 목을 단번에 움켜쥐었다.
“네까짓 게, 감히 나를 때려?”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키나 체격이 월등한, 그것도 분노에 눈이 먼 남자에겐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숨이 탁 막혀오고 하얘졌던 머릿속이 정전이 온 듯 새까매졌다.
“감히 누구한테 도도한 척 콧대를 세워?”
제아의 입술 사이로 끊어질 듯한 숨과 함께 그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도준…… 오빠.”
하지만 너무 작아서 강훈은 듣지 못했다.
“한도준을 믿고, 네까짓 게 감히 나를 무시해?”
강훈의 눈이 위험스럽게 번들거리는 순간 그가 손을 뻗어 제아의 목 부분을 거칠게 찢어버렸다. 얇은 옷이 버티지 못하고 찢겨 나가자 제아는 얼떨결에 한 손으로 흘러내리려는 옷을 급하게 부여잡았다.
“너한테 똑똑히 알려주지. 한도준보다 내가 위에 있다는 걸 말이야.”
지금 강훈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도준에 대한 자격지심이, 불타오르는 분노가 눈앞의 여자에게 모조리 집중되었다.
오늘 한 부회장 대신 주주들에게 연설을 해야 할 사람은 도준이 아닌 자신이어야 했다. 한도준 그 자식이 아니라, 나 한강훈이어야 한다고! 똑똑히 보여주리라. 한도준보다 자신이 더 월등하다는 것을.
“잘난 척은 다 하더니, 여자 보는 수준하고는.”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목이 꽉 잠겨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제아는 그저 붉게 충혈이 된 눈으로 죽을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다른 손이 제아의 드러난 등에 닿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쿵쿵 소리를 내더니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도준, 그가 나타났다.
***
도준이 연설을 끝내고 내려왔는데도 제아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으로 치자면 겨우 10분 남짓. 여자가 화장을 고친다면 10분은 꽤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무엇보다 도준은 자신의 동물적인 감각을 믿는다. 그런데 그 동물적인 감각이 얼른 제아를 찾아보라고 외치고 있었다.
컨벤션에서 나와 긴 복도를 따라가던 도준은 파우더 룸 앞을 지키고 있는 강훈의 경호원들을 발견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지극히 태연하게, 일정한 보폭으로 파우더 룸 앞까지 걸어갔다.
“한 이사님이 이 안에 있나 보군.”
경호원들은 대답 대신 도준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파우더 룸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호원이 막아섰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저 안에 제아가 있다.’
도준의 예리한 본능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잠시 뒤로 물러났다가 전광석화처럼 두 명의 경호원들에게 덤벼들었다. 정확한 펀치에 두 명의 경호원이 순식간에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도준은 경호원들을 넘어서 굳게 닫혀 있는 파우더 룸의 문을 어깨로 들이박았다. 그래도 꼼짝하지 않자 발로 거세게 몇 번 걷어차자 잠금 장치가 부서지면서 문이 열렸다.
안으로 도준이 들어서자 새하얀 어깨를 드러낸 채 흘러내린 옷을 움켜잡고 있는 제아가 보였다. 찰나의 장면이었지만 상황 파악은 충분히 되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으면서 최고치로 차오른 아드레날린이 심장에서 폭발했다. 눈이 뒤집힌 도준은 강훈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윽!”
바닥에 쓰러진 강훈을 향해 다시 덤벼들어 발로 짓밟았다.
“너 같은 새끼는 죽어야 해.”
잇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차가운 음성과 표정이 악마와도 같았다. 그런데 뒤에서 갑자기 제아가 그의 등을 와락 껴안았다.
“그만해. 제발!”
꼭 껴안아 맞닿은 등과 가슴에서 거칠게 뛰는 서로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무시무시한 그의 모습에 제아는 겁이 났다.
“오빠, 제발…….”
속삭이는 듯한 그 한마디에 등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경직되어 있던 그의 몸이 서서히 이완되었다. 발길질이 멈추었다.
“내 것에 손대지 말라는 경고, 뼛속에라도 박아놓으라고 했을 텐데.”
비틀거리며 일어난 강훈이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어냈다.
“돈에 눈이 어두워서 먼저 유혹한 건 저 여자야.”
하지만 강훈의 그 말을 도준도, 제아도 믿지 않았다. 그 한마디에 서로를 의심하기엔 둘을 연결하고 있는 믿음의 고리는 굳건했다.
도준의 발자국이 찍힌 강훈의 새하얀 셔츠가 볼 만했다. 제아는 이 상황에서 말도 안 되게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제아가 도준의 재킷을 어깨에 두르고 나가려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강훈이 한마디를 내던졌다.
“여자를 만나도 수준에 맞게 가려서 만나야지. 수준 낮은 싸구려랑 연애질이라니, 창피한 줄 알아라.”
불끈 쥔 도준의 주먹이 올라가는 걸, 제아가 꼭 잡았다. 가만히 있으라는 듯, 참으라는 듯. 때려도 내가 때려.
그 메시지를 알아들었는지 마지못해 도준이 손을 내렸다. 강훈에게 다가선 제아는 손바닥이 아프도록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수준 낮은 싸구려한테 쌍 싸대기 맞아버렸네. 창피해서 얼굴 들고 다니시겠어요?”
이죽거리듯이 한마디 해주고 나니 제아도 속이 다 후련했다. 파우더 룸의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도준이 어깨에 걸쳐준 재킷을 순식간에 끌어올려 제아의 얼굴을 감쌌다.
“이것들이!”
그 뒤를 쫓아 나오던 강훈도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지는 소리에 당황한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도준 사장님, 그 여자분은 누구죠?”
“형제끼리 한 여자를 두고 싸운 겁니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형제끼리 여자 한 명을 추행한 건 아니시죠?”
경호원들이 왜 들어오지 않나 했더니 냄새 맡고 달려든 기자들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도준은 재킷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제아의 얼굴을 품에 꼭 안은 채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호텔 경호원들이 엘리베이터까지 쫓아오는 기자들을 막아섰다.
경호원의 호의를 받으며 무사히 주차장까지 내려온 도준은 제아를 조수석에 태운 후에야 인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각 언론사에 바로 연락해서 오늘 일 안 터지게 막아.”
통화를 끝낸 후에야 도준은 차에 올라탔다. 기자들이 올 수 없는 전용 주차장인데도 제아는 여전히 재킷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문제아, 여기는 안전해.”
“그래도 누가 주차장에 나타날 수도 있잖아. 주차장을 빠져 나갔을 때 창문으로 볼 수도 있고.”
재킷을 조금 내리긴 했지만 제아는 그래도 불안한지 슬그머니 눈만 내보이고 있었다.
상황답지 않게 그 모습이 귀여워서 도준은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러니 참을 수가 있나.
“여기까지 들어오려면 경비 몇 명을 통과해야 하는지, 들어올 때 직접 보지 않았나?”
그제야 재킷이 스르륵 미끄러져 내리면서 제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새하얀 목에 선명하게 나 있는 붉은 자국까지도. 안타깝고, 화가 났다.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가슴 속에서 또다시 뭔가가 치밀어 올랐지만, 가까스로 잠재웠다.
“문제아, 비싼 차들이 왜 불법인 걸 알면서도 선팅을 진하게 해놓는지 알아?”
“그냥 과시욕 아니야? 재수 없는 개멋 부리는 거잖아.”
“그럴지도. 근데 난 아니야.”
도준이 몸을 비틀어 제아에게 점점 더 다가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선을 내리자 야무지게 하고 있는 안전벨트가 보였다.
‘그럼 도대체 왜?’라는 눈빛으로 묻는 순간…….
“마음 놓고 너한테 이러려고.”
촉촉한 무언가가 목에 와 닿아서 화들짝 놀랐다. 도준의 입술이 예민한 목의 살결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비스듬히 고개를 든 도준이 나른한 웃음을 머금은 눈빛으로 제아를 지그시 올려다보고 있었다. 색기 짙은 그 눈빛에 찌르르, 온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묘한 기대감에 드러난 맨 살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강훈과는 현저하게 비교되는 반응이었다. 거부감이 아닌 설렘, 기대감.
“넌 내 거잖아.”
“……?”
“내 거에 더러운 게 닿았으니 소독해야지.”
그의 입술이 다시 목 사이를 파고들어 예민한 살결을 진하게 머금자 제아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감 없이 가쁜 숨을 터뜨리며 떨림 가득한 음성을 토해냈다.
“나…… 유혹 안 했어. 한강훈이 부르는 대로 준다고 했는데도 거절했어.”
“알아.”
문제아 너란 여자, 오로지 나만 미치도록 유혹한다는 거.
“난 오빠 거니까.”
“나도 네 거야.”
수줍게 그의 어깨를 타고 올라온 가녀린 팔이 도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곤 귓가에 달콤한 숨결을 흘렸다. 풍성한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오빠 거 지켰으니까 상 줘.”
수줍은 유혹을 뱉어내는 눈과 입술을 짙게 가라앉은 도준의 눈빛이 응시했다.
“내 입술에다가.”
목을 타고 턱까지 올라온 뜨거운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달콤한 복숭아향을 흘리는 제아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어딘가를 더듬던 도준의 손이 버튼을 찾아내서 누르자 조수석 등받이가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
뷰티숍에 들어서는 제아의 얼굴은 귀까지 빨개진 상태였다.
포악한 야수가 되어 먹어치우는 그의 입술과 달리 그의 손은 젠틀맨이었다. 정직해도 너무 정직한 손은 그저 목의 살결만 부드럽게 어루만질 뿐, 엉큼하게 더듬지를 않았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몸에 남아 있는 끈적이는 열기는 여운이 강했다. 키스만으로 이렇게 달아오르게 하는 남자는 도준밖에 없을 것이다.
화려했던 최고의 아이템을 해제한 후, 정확히 1시간 만에 평범한 문제아로 되돌아왔다. 다사다난했던 오늘이 꿈만 같았다.
하지만 목에 남아 있는 붉은 자국과 몸 안에 도사리는 뜨거운 열기가 현실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스파에 마사지까지 받고 뷰티 숍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도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서는 제아의 목에 도준의 시선이 꽂혔다. 서늘한 손끝이 조심스럽게 목의 살결을 어루만졌다.
“네가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줄 거야. 다시는, 널 건드리지 못하게.”
낮게 읊조리는 도준의 말은 제아가 아닌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제아는 조심히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닿은 그녀의 귓가에 강인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나 한강훈 이사님 양쪽 뺨을 다 때렸어. 내 손이 얼얼할 정도로.”
“…….”
“그래서 하나도 안 억울해. 당한 만큼 내가 갚아줬고, 또 오빠한테 상까지 받았잖아?”
“…….”
“그러니까 나 때문에 형제끼리 싸우지 마.”
그러라고 도준이 보는 앞에서 강훈의 뺨을 때리고 한마디 제대로 쏘아붙인 것이다. 그런데도 도준은 대답이 없었다. 휴, 고집불통 오빠 같으니라구. 아무쪼록 그녀는 바랐다. 다시는 강훈과 엮이는 일이 없기를.
도준은 운전을 하는 내내 제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대화 한마디 없었지만 그냥 설레고 행복했다. 맞잡은 손이 따뜻하고 마음이 따스해서 행복했다. 그때 도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가 블루투스를 연결하자 낯익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도준 선배, 나 한지로입니다.]
제아가 무슨 말을 하려 하자 도준이 손을 들어 보였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이.
“무슨 일이지?”
[오늘 시간 괜찮으면 저랑 술 한잔하시죠.]
도준이 얼마나 바쁜지, 그리고 지로랑 술을 먹을 때가 아닌 걸 잘 알기에, 제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거절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제아를 물끄러미 한 번 바라본 도준은 흔쾌하게 오케이를 했다.
“30분 후에 연락하도록 하지.”
전화를 끊자마자 제아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오빠 아직 환자거든? 술은 무슨 술이야.”
“한지로, 지연이만큼 너한테 친한 친구라면서.”
“……응.”
“그럼 친해져야지.”
지로도 큰 용기를 내서 전화한 것이리라. 그 마음이 느껴졌다. 서로 성질 죽이고 노력해보겠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는 없었다.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지로가 좀 입이 거칠어. 그래도 때리지는 말고.”
도준이 미세하게 눈살을 구기자 제아도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도 친구보다는 연인의 편이니까, 슬쩍 귀띔을 해주기로 했다. 남자와 남자가 만나서 할 짓은 뻔하니까.
“아무리 오빠라고 해도 한지로한테 술로 절대 못 이겨. 걔 주량 거의 무한대거든. 양주, 소주, 맥주, 폭탄주 다. 확 가게 하고 싶으면 막걸리 먹여.”
***
집에 도착한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마, 이게 다 뭐야?”
거실 가득 넘쳐나는 고급스러운 식기와 용품을 윤영은 정리하느라 바빴다.
“뭐기는! 너 밤새우면서 고생했다고 사장 지시로 보내는 거라고 비서실장이 전화까지 왔어. 사장이 젊다더니, 너무 센스가 넘치는 거 아니니?”
윤영의 얼굴은 화색이 돌았다. 워크숍에서 받은 피부 숍 상품권을 준 이래 처음이었다.
“어쩜 그렇게 엄마가 갖고 싶어 했던 이태리 주방 식기랑 용품을 선물로 보내니? 효녀라고 칭찬을 다 하던데. 이런 것까지 이야기했어?”
신이 난 윤영과 달리 제아의 얼굴은 어두웠다. 어렸을 때부터 윤영이 노래를 불렀었다. 이태리 주방 식기와 용품으로 주방을 꽉꽉 채우고 싶다고. 그런데 그걸 잊지 않고 있다가 우르르 사서 보낸 도준의 마음이 느껴진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
엄만 오빠 잊는다고 했는데, 바보같이.
“내 정신 좀 봐. 밤새워서 일하고 오느라 피곤했지? 얼른 들어가서 쉬렴.”
방문을 닫았는데도 윤영의 환호성은 끊임없이 들려왔다. 다사다난했던 하루였기에 침대에 몸을 던진 제아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별안간 울리는 핸드폰을 더듬거리는 손으로 찾은 제아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문 비서!]
낯익은 음성에 눈이 번쩍 뜨이고 침대에서 몸이 벌떡 일어나졌다.
“유 실장님?”
[이 새벽에 전화해서 진짜 미안한데, 여기 좀 와주면 안 될까?]
“예에?”
시간을 보니 새벽 5시가 아직 안 된 시각이었다.
[내가 아주 죽겠어요. 얼른 와서 문 비서 친구랑 한 사장 좀 말려줘봐.]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어딘지 알려주세요.”
[내가 문자로 바로 주소 찍어 보낼 테니 지금 바로 와요.]
통화를 끝낸 제아는 부랴부랴 대충 옷을 입고 콜택시를 불렀다.
새벽이라 그런지 다행히 차는 막히지 않았고, 그녀는 30여 분 만에 인호가 찍어준 청담동 술집에 도착했다. 입구에선 인호가 초조한 듯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장님!”
“어이쿠, 문 비서! 얼른, 얼른!”
인호는 제아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손을 덥석 잡고 끌고 들어갔다.
“아주, 망나니 대 리틀 망나니. 세기의 만남이라니까요? 내가 못살아, 아주!”
빠르게 계단을 내려간 인호가 술집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제아는 숨이 탁, 막혀왔다.
“이게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