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51화 (51/104)

51. 이 자리에서 당장 널 가지려면, 얼마면 되지?

2017.02.27.

도준이 팰리스 호텔의 스위트룸에 도착하자 실크 슬립 하나만을 걸친 일리안이 잠이 덜 깬 눈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제이드, 들어와.”

반나신이나 다름없는 일리안의 육감적인 몸매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도준의 눈에선 조금의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일리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가운을 걸칠 생각도 하지 않고 맞은편 소파에 늘씬한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러고는 반창고가 붙여진 도준의 이마와 흰 뺨에 그어진 손톱자국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얼굴이 볼만하네?”

도준은 일리안의 걱정 따위를 들으려고 아침부터 달려온 게 아니었다. 소파에 느른하게 몸을 기댄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꺼냈다.

“일리니 계약, 어떻게 된 거지?”

“아침에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어. 일리니 계약, 제일 백화점이랑 하라고.”

“이유는.”

“그전에 제이드 너, 한 부회장이 미국 출장 갔다는 건 알고 있어?”

한 부회장이 미국 출장을 간 틈을 타 연희가 오늘 밤 주주 파티를 연 것이었다.

제일 그룹의 실세는 한 부회장이었지만, 연희는 보이지 않는 제일 그룹의 실세였다.

한 회장의 하나뿐인 외동딸이었고, 경영에 참여는 못 하지만 막강한 대주주 중 한 명이었다.

도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부회장이 우리 아버지 만났어. 한국에서 찍은 내 사진 몇 장 들고.”

도준의 비상한 두뇌가 빠르게 돌아갔다. 화분에 이어 경상을 입은 교통사고는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었던 것이다.

어제 오후 일리안을 만나서 일리니 단독 브랜드 계약 체결을 한 참이었으니까. 그래도 찔리는 건 있는지 일리안이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열 받네. 감히 누구한테 협박질이야?”

차라리 한마디라도 화를 내면 좋으련만, 침착한 도준의 모습이 일리안은 더 무섭게 느껴졌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일리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이드 너도 잘 알지? 우리 아버지가 나를 왕실 며느리로 들이는 거에 목숨 건다는 거. 그래서 내가 SNS에 내 얼굴도 공개 안 하고 맘 편하게 노는 건데. 휴, 재수 없으려니까 한국에서 걸리네.”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그랬어.”

“취향 변하면 나랑 친구 안 하겠다고 한 게 누구더라? 너와 친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정도는 놀아줘야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새침하게 말을 받아치는 일리안을 보는 도준의 눈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도준 때문에 일리안은 고비를 몇 번 넘긴 적이 있었고, 도준은 일리안에게 사업적 도움을 받을 걸 빠르게 간파했다. 그래서 서로 친구가 되었다.

호탕하고 뒤끝 없는 성격까지 맞았지만, 조심성이 없는 게 일리안의 문제였다.

“제이드, 나 어떻게 할까?”

일이 터지자, 일리안은 나 몰라라 하고 또 도준에게 일을 떠넘겼다. 익숙한 일인지라, 도준은 생각에 잠겼지만 잠깐 뿐이었다. 위기의 상황에도 그의 똑똑한 머리는 명석하게 굴러갔다.

“넌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

***

도준은 정각 5시에 뷰티 숍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사실 몇 분 늦는다고 무슨 일이 나는 건 아니다. 제아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느 누구도 도준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도준은 아니었다. 10년이란 세월을 기다리게 한 만큼 이제 더 이상 제아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1초든, 1분이든.

대기실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그는 VVIP실의 문이 열리고 홍연의 뒤를 따라 다소곳하게 나오는 제아를 본 순간, 시선이 얼어붙어버렸다.

“한 사장님, 많이 기다리셨죠?”

뿌듯함이 섞인 홍연의 말조차도 그의 귀엔 지금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여자를 홀린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블랙홀처럼 깊고 검은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그윽함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섹시미와 오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다이아몬드를 머금은 듯 반짝이는 투명한 피부가 블랙 드레스 때문에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얬다.

우아한 웨이브컬이 제아의 갸름한 얼굴과 동그스름한 어깨선을 도드라지게 했다.

얼굴을 타고 내려온 그의 강렬한 시선이 그녀의 목선에 다다랐다. 새하얗고 긴 목선은 가냘팠고, 터질 듯이 솟아오른 가슴 선 밑으로 잘록한 허리가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돌아봐요.”

홍연의 지시에 제아가 비스듬하게 몸의 각도를 틀었다. 그가 직접 고른 블랙 레이스로 이루어진 롱드레스는 단정하고 우아한 드레스였다.

하지만 등 라인이 과감하게 파인 백리스 디자인에 치마의 뒤트임이 허벅지까지 트여 있었다. 그 사이로 드러난 각선미가 아찔하기만 했다.

도준은 순간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고른 드레스가 이 드레스가 맞나?

우아하면서도 섹시했고, 고상하면서도 파격적이었다. 제아의 얼굴이, 그리고 떨어지는 몸매의 선이 그 드레스를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다.

너무 점잖아도, 너무 야해도 안 되기 때문에 적당한 디자인을 고른다고 고른 건데.

“오빠?”

제아가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자, 그제야 도준이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도준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심장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원래도 멋있었지만 턱시도 차림의 도준은 숨이 멎을 정도로 멋있었다. 이마에 붙어 있는 밴드조차 그의 완벽함에 흠집을 낼 순 없었다.

지금의 그는 완벽하고 또 완벽했다.

새삼 느껴졌다. 이 남자가 자신에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남자인지.

다가선 도준이 내민 팔에 팔짱을 끼는데 그녀의 손끝이 떨려왔다.

‘예의상이라도 예쁘다고 해주면 안 되나?’

예쁘다는 말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는데. 무심하리만치 반응 없는 도준이 그녀는 조금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괜한 서운함에 푹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귓가에 도준의 나직하면서도 무심한 음성이 들려왔다.

“……예뻐.”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자, 여자의 심장을 잡아채는 나른한 눈빛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지금까지 봤던 여자 중에, 최고 말이야.”

무심한 듯한 도준의 음성은 제아의 심장에 단번에 스며들었다. 위험하고, 아찔하게.

“오, 오빠도 멋있어.”

제아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시선을 피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킬 힐 때문인지 그녀의 발목이 꺾이며 몸이 휘청거렸다.

단번에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바짝 끌어당기는 강인한 그의 손길.

그 손길에 제아는 심장까지 바짝 쪼이는 기분이었다.

“조심해야지.”

“킬 힐이 익숙하지 않아서.”

제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였지만, 몸은 아니었다. 드러난 등의 맨살에 그의 손이 닿자 피부가 데일 듯이 뜨거워졌다. 맙소사, 이렇게 스치기만 해도 떨릴 수가.

터질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도준에게 들릴까 봐 제아는 작게 투덜거렸다.

“이게 옷이야? 속옷만 입고 있는 기분이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

“……뭐?”

제아가 자신의 귀를 의심한 순간, 바짝 붙어 있던 도준의 단단한 몸과 뜨거운 손길이 사라졌다.

도준이 차의 조수석 문을 열어주자, 제아는 조신하게 올라탔다. 긴 드레스는 처음 입어본지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등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서 불편했는데, 등이 가려지니 그제야 그녀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차에 올라탄 도준이 또다시 시동을 걸지 않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서늘했지만, 짙은 동공은 데일 듯이 뜨거웠다. 그녀의 온몸이 녹아내려 버릴 것처럼.

“왜 그렇게 쳐다봐?”

도준이 점점 몸을 틀어 다가가자 제아가 의자에 바짝 몸을 붙였다. 그래봤자 고작 몇 센티미터 차이인데.

처음엔 지극히 단순한 의도로 다가간 거였다.

하지만 야릇하게 떨리는 제아의 고혹적인 눈동자와 내리깐 시선 끝에 걸리는 유혹적인 입술, 빠르게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그녀의 가슴을 본 순간, 그는 고민에 휩싸였다.

일정이고 뭐고, 그냥 확 의자를 뒤로 젖히고 덮쳐버리고 싶었다.

최고의 여자로 만들어 놓으라고 했더니, 이렇게 남자의 본능을 자극하는 아찔한 요부로 만들어 놓다니.

가까스로 불기둥처럼 솟아오르는 욕구를 내리누른 도준의 목 깊숙한 곳에서 잔뜩 억눌린 허스키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안전벨트 해야지.”

“아.”

머쓱하게 웃는 제아의 미소가 천진난만했다. 지금 모습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알지 못한 다는 듯.

***

도준이 제아를 데려간 곳은 제일 호텔이었다. 생화의 아찔한 향기가 진동하는 호화스러운 컨벤션 내부에 제아의 동그란 어깨가 잔뜩 경직되어 올라갔다.

도준은 제아의 가는 허리에 두른 팔을 더욱더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럴 생각이거든? 나 버리기만 해봐. 확 물어버릴 테니까.”

보통의 여자라면 ‘괜찮아.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돼.’라고 속마음을 숨길 테지만, 역시나 그의 제아는 달라도 확실하게 달랐다.

버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듯, 앙큼한 고양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진심 어린 협박을 하고 있으니.

“아이쿠, 한 사장.”

“한 사장님!”

컨벤션에 들어서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도준을 알아보고 몰려들었다. 한 회장이 한 부회장이 아닌 도준을 후계자로 지목하려 한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돌고 있었다.

도준은 외모와 능력까지 완벽한 미혼남인 데다가 재벌가 자식들이 일으키는 작은 스캔들조차 없이 깨끗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그를 사위로 탐내는 집안들이 많았다.

결론적으로 재계에서 지금 가장 이슈가 되는 인물이 도준이었고, 연희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도준의 주가가 가장 높을 때, 튼튼한 줄이 되어 줄 집안을 고르려는 것이었다.

도준은 아무리 사람들이 몰려들어도 제아를 놓지 않았다. 그녀의 허리를 꽉 붙든 채 제 옆에 꼭 밀착시키고는 놔주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졌다. 찌르듯이 파고드는 여자의 눈빛에 돌아보니 차분하게 그들에게 다가오는 연희가 보였다.

“도준이 왔니?”

제아는 자신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연희가 대단해 보였다.

“한 여사, 한 사장이 능력만 출중한 줄 알았더니, 인물이 아주 훤해.”

“아들을 아주 잘 두었어요.”

“한 여사, 한 부회장님이 미국에서 돌아오면 가족끼리 식사 한번 합시다. 내가 자리 마련할 테니.”

연희가 나타나고 나서야 도준이 말했던 소개팅이라는 의미가 실감되었다. 재벌가는 당사자가 아니라 당사자의 부모님이 소개팅을 하는 것이 진리인 듯했다.

“그런데 아들 옆에 있는 여자분은 누구지? 혹시 한 사장이 약혼이라도 한 건가? 금시초문인데.”

연희에게 흘러든 질문이었지만 도준은 그 질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업무적인 질문만 하는 그들에게 먼저 ‘제가 사랑하는 여자입니다.’라고 생뚱맞게 말할 순 없으니까.

그리고 그는 연희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공개를 하려고 했다.

“제가.”

‘사랑하는 여자입니다.’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연희가 도준의 말을 가로챘다.

“아들이 아끼는 여비서예요. 제일 어패럴에서 이번에 채용한 여비서인데 출중한 외모만큼 능력도 아주, 뛰어나다고 하더군요.”

차갑게 웃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도준에게 꽂혔다. 어디 밝힐 테면 밝혀보라고.

“유 실장을 대신할 인재가 드문데, 오죽하면 이 자리까지 데리고 왔겠어요. 그렇지 않니, 도준아?”

“제가 굉장히 아끼는 걸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어, 머, 니.”

도준은 꽉 다문 잇새 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연희가 제일 어패럴 비서라고 밝혀버린 순간, 제아의 신상이 반쯤 공개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만 그가 사랑하는 여자라고 밝히는 순간 모든 게 달라진다. 순식간에 제아의 신상은 파헤쳐질 것이다.

언론이 평범한 신데렐라를 놓칠 리가 없다. 상대하려면 상대하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한 부회장과 강훈을 먼저 꺾은 후에. 그리고 연희는 그걸 꿰뚫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연희가 차갑게 웃었다. 지금은 도준보다 그녀가 더 힘이 있었다. 언론이든 제계든, 도준보다는 그녀가 더 실세였다.

‘넌 아직 내 적수가 못 돼.’

제 아들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고 해도 제아를 향한 마음의 깊이만큼은 간파한 게 맞아떨어졌다. 보호해주는 데도 한계가 있을 테니까.

“바쁘신 와중에도 제일 그룹 연말 주주 총회에 참석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한 태영 부회장님께서 업무상 부재인 이유로 제일 어패럴 한도준 대표이사님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안내가 흘러나오자 도준이 고개를 틀어 제아를 응시했다.

“연설만 끝내면 여기서 나갈 거야. 그러니 여기 앉아서 쉬고 있어.”

제아가 고개를 끄덕였는데도 도준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연희의 눈이 제아에게 고정이 되어 있었다.

“파우더 룸 얼른 갔다 와서 여기 꼭 앉아 있을게.”

제아가 슬그머니 손으로 떠밀자 그제야 도준은 걸음을 옮겼다. 파우더 룸에 온 제아는 클러치를 열어 홍연이 선물해준 립스틱을 꺼냈다.

‘한 사장님한테 이 립스틱 실컷 먹게 해요, 알았죠?’

홍연의 노골적인 농담을 떠올리자 얼굴이 다시 확 달아올랐다. 립스틱 뚜껑을 열자 붉은색의 발색 좋은 컬러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샤넬 립스틱을 바르게 되다니.”

색이 옅어진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려는 순간, 뒤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쪽 정체가 뭐야?”

비추어지는 대형 거울을 통해 날 선 눈빛으로 모여 있는 여자들 무리가 보였다. 여기서도 피할 수는 없구나. 제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저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또 있어?”

하아, 이것들이 초면에 반말이네.

“한도준 사장님 비서입니다.”

그리고 제아가 다시 거울을 향해 돌아서서 립스틱을 바르려는데 한 여자가 다가와서 립스틱을 쳐버렸다.

“장난해? 우리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딱 봐도 몸으로 일하는 비서네, 맞지? 도준 씨가 너 같은 거랑 사귈 리는 없고. 몇 번이나 잤어?”

바닥에 데굴거리다가 끊어져버린 붉은 립스틱을 여자의 구두굽이 짓이겨버렸다. 왜 남의 선물을 허락도 없이.

제아는 앙칼진 눈꼬리를 들어 앞의 여자들을 쏘아보며 태연히 물었다.

“내가 정확히 대답해야 할 만큼, 한도준 사장님과 관계있는 분 계세요?”

4명의 여자들은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분해서 씩씩거리는데 어느 누구도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아는 여유롭게 생긋 웃으면서 여자들에게 다가섰다. 그녀들과 달리 흙 수저이지만 그게 그녀들에게 무시당할 이유는 아니었다.

“없나 보네요. 그럼 대답은 생략하는 걸로.”

립스틱을 짓밟은 여자에게 제아가 태연하게 손을 내밀었다.

“47,000원.”

“……?”

“내 립스틱 밟았으니, 물어줘야죠.”

그것도 그녀가 처음으로 갖게 된 샤넬 립스틱을 감히. 좀 더 싸게 최저가를 찾을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바르지 못하는 걸 감안하면 이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너, 너!!!!!!”

기가 막힌 듯 발을 동동 구르는 여자의 모습을 제아가 핸드폰으로 찍었다.

찰칵―.

“뭐 하는 짓이야??”

“립스틱 값 안 주면 한도준 사장님한테 청구할 거예요. 사장님한테 이 사진 보여주고, 이 분이 제 립스틱을 안 물어줬다고 증거 사진 보여줘야 되니까.”

제아가 생긋 웃자, 여자의 짙은 눈꼬리가 바르르 떨리더니 클러치를 열어서 수표 한 장을 내던졌다.

제아는 바닥에 떨어지려는 10만 원권 수표를 낚아채서 클러치에 넣었다. 저런 골 빈 여자들의 돈은 뜯어줘야 제 맛이라고 생각하면서.

태어나서 온실 화초처럼 자란 그녀들은 절대 산전수전 다 겪은 악바리를 상대할 수 없는 법.

“그럼 전 이만.”

제아는 여자들을 태연하게 지나쳤다. 문을 열자마자 막 노크를 하려던 남자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제아는 뒷걸음질로 다시 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남자도 태연하게 파우더 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은 본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훈이 매너 있는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여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숙녀분들, 자리 좀 잠시 비켜주시겠습니까?”

앙칼진 눈빛으로 제아를 노려본 여자들이 파우더 룸을 나가고 제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강훈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파우더 룸 안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그쪽은 남아야지.”

문이 닫히기 전 체격 좋은 남자들이 문 앞을 막아서는 게 제아의 눈에 보였다.

닫힌 문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강훈의 시선이 제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한도준의 신임을 톡톡히, 받고 있는 여비서군. 별 볼일 없는 스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를 배신하면서까지.”

제아는 뭔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배신이라니, 대체 무슨 배신?

“그 이유가 뭐지?”

그녀야말로 묻고 싶었다. 부산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고. 전생에 원수라도 졌냐고.

“이렇게 꾸며놓으니 몰라볼 뻔했잖아.”

“이보세요, 한 이사님.”

하지만 강훈은 제아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도준이가 너 같은 거랑 진지하게 만날 일은 없을 테고. 뭔가 특별한 매력, 아니면 잠자리 기술이라도 있는 건가?”

매너를 상실한 눈빛과 말투. 뭐라고 해봤자 들을 생각도 없는 남자와 같이 있어서 뭐할까. 더러운 건 피하는 게 상책이지.

제아는 당당하게 파우더룸을 탈출하려고 했지만 강훈에게 다시 붙들리고 말았다.

양팔 사이에 제아를 가둔 강훈이 제아의 맨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한도준이 만졌던 어깨.”

느릿하게 움직이는 강훈의 손이 어깨를 타고 목선으로 올라왔다. 오감을 들썩이게 했던 도준과는 확연히 다른 불쾌한 손길에 제아는 소름이 끼쳤다.

“한도준이 만졌던 목.”

능글거리는 그 말에 고개를 이리저리 틀어보지만 강훈의 손길은 집요했다.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벗어나려는 제아의 어깨를 강훈이 거칠게 움켜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여비서, 나한테 한번 제시해봐.”

죽어도 겁에 질린 모습은 보이지 않으리라. 제아는 두 눈에 힘을 잔뜩 준 채, 강훈을 노려보았다.

“이 자리에서 당장 널 가지려면, 얼마면 되지?”

느글거리는 강훈의 손이 목 뒷부분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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