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넌 날 미치게 해, 참을 수 없을 만큼.
2017.02.23.
연희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내려오는 도준의 입술에 제아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제 어머니가 다가오는데도 서슴없이 키스를 하는 도준은 미친 게 분명했다!
“웁웁!”
뺨을 감싼 도준의 손을 떼어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도준은 더욱더 강하게 입술을 내리눌렀다.
거부해야 하는데, 입술을 꾹 누르는 기분 좋은 서늘함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그녀를 당당하게 드러내주는 도준의 의지가 미치도록 멋있다.
기어이 나도…… 미쳤구나.
미친 커플이야, 우린.
“이게 무슨 추태니? 당장 떨어지지 못해!”
기어코 앞까지 다가온 연희가 파르르 떨리는 고운 눈꼬리를 치켜뜨며 날카롭게 일갈했다.
보여줄 만큼 보여주었기에 도준은 제아에게서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그가 제아의 허리를 휘감아 제 뒤로 끌어당기는 순간…….
짜악―.
날카로운 소리가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매섭게 가르면서 퍼졌다. 작은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도준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어디 내 앞에서 할 짓이 없어서.”
급하게 따라온 수행 비서가 연희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주었다.
“아들이 뜨겁게 연애하는 걸 직접 보셨으니, 이제 약혼 자리 알아보지 마세요.”
“너희 둘, 더러워 죽겠어.”
―더러워 죽겠어.
속삭이듯이 흘러나온 연희의 말에도 도준은 덤덤함을 유지했다. 애초에 어머니에게 좋은 말을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제아 양.”
도준이 나오지 말라는 듯 뒤에서 손을 잡았지만, 제아는 조심히 그 손을 뺐다. 그리고 도준의 뒤에서 나와 그를 대신해서 연희에게 고개를 숙였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연희는 사과를 받는 대신, 후일을 기약했다.
“우리, 한 번 더 봐야 할 일이 생겼군요. 그렇죠?”
“네,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내가 여자로서 경고 하나 해줄까요?”
“어떤 말도 달게 들을게요.”
제아는 연희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더라도 들을 준비는 되어 있었다. 무책임한 엄마에게 쓴 소리는 할 수 있지만, 건방을 떨 수는 없다. 도준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분이니까.
“영양가 없는 사랑을 끌수록 손해 보는 건 여자예요. 세상에서 가장 믿지 못할 게 남자란 족속들이니까. 그건 내 아들이라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적당히 사랑해요.”
갑자기 연희가 생긋 웃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연희의 미묘한 미소에 제아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깊게 사랑할수록, 상처받는 건 제아 양일 테니까.”
한걸음 다가선 연희가 얼굴을 가까이 하자, 제아는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피하는 건 예의가 아닌 듯해 꾹 참고 버텼다.
향긋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순간, 연희의 마지막 속삭임이 이어졌다.
“우리 도준이한테 몸은 내주지 마요. 후에 알게 될 진실에 감당 못 할지도 모르니까.”
수행비서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연희는 차를 타고 사라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몸을 적시고 있는데도 제아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연희가 마지막에 했던 의미심장한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 도준이 손을 뻗어 제아의 손을 꼭 잡았다. 고개를 들자, 물기 젖은 도준의 눈동자가 그녈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써 알릴 필요는 없었잖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키스한 거야?”
“선전포고.”
“……?”
“옛 가족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여자다, 그러니까 건들지 말라고.”
도준이 제아를 품에 안았다. 도준의 품에 갇힌 채, 제아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마를 덮은 반창고도 모자라서 연희에게 뺨을 맞을 때 손톱에 긁혔는지 뺨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오빠 얼굴 오늘 수난 시대네. 게다가 오빠가 싫어하는 비까지 내리고. 최악의 날이야, 그치?”
비에 젖은 도준의 얼굴을 제아가 손등으로 쓸었다. 핼쑥한 얼굴에 여기저기 상처 난 얼굴이, 안쓰러웠다.
“누구 때문에 나에겐 최고의 날이야.”
그 손을 잡아 도준이 입술로 가져갔다. 따스한 입김이 손바닥에 닿았다.
“이제 날마다 비가 내렸으면 하고 빌 것 같거든.”
도준이 다시 얼굴을 내렸다.
“비는 오고, 넌 내 품에 있으니.”
내려오는 입술을 다시 보고 있는 제아의 심장이 쿵쾅거린다.
“비 오는 날은 딥 키스.”
닿은 입술 사이로 도준이 속삭였다.
“그러니까 하던 거 마저 해야지.”
차가운 비에 젖은 입술과 달리 스며드는 숨결은 뜨거웠다.
병원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병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옷에서 전달되는 추위에 몸은 오슬오슬 떨렸지만 이상하게도 마음만은 따스했다.
병실 안에 들어온 둘의 눈이 마주치고, 곧이어 도준의 시선이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비 맞으러 다시 나갈까.”
“감기 걸리게 비는 왜 맞아?”
“너랑 키스하게.”
‘이 남자가 조금은 뻔뻔해졌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제아는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오빠 너무 엉큼해진 거 아니야?”
“나도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라고 말했을 텐데. 게다가, 밤이고.”
도준이 옷장에서 꺼낸 옷가지를 제아에게 주었다.
“먼저 씻어.”
두근, 심장이 또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느닷없이 얼굴이 달아오른 제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별말이 아닌데도 꽤 야하게 들린 것이다.
반응이 없자 도준이 돌아섰다.
“뭐 해? 그러다 감기 걸린다.”
“오, 오빠가 먼저 씻어. 환자는 오빠잖아.”
“난 밖에 있는 욕실에서 씻으면 돼.”
“아…….”
그제야 제아는 주섬주섬 옷과 수건을 들고 병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낯선 곳에서 씻고 있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씻고 나와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밤은 깊었고, 넓은 병실엔 둘 밖에 없다. 그리고 넓은 침대에 둘이서 잠이 든다.
문제는…… 과연 저 침대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아…… 자신 없다.
샤워를 하는 내내 제아는 재채기에 시달렸다.
샤워를 끝내고 나가자, 도준은 먼저 씻고 와서 소파에 앉아 있었다. 혼자 온갖 19금 상상을 하고 나왔건만 정작 그 장본인은 손에 서류를 들고 있었다.
젖은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구. 머리 안 말리는 건 여전하다니까?”
타박하는 듯한 제아의 작은 중얼거림에 도준도 떠오르는 추억이 있는 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제아가 욕실에서 드라이기를 가지고 나왔다.
“머리 말려줄 테니까 고개 뒤로 해봐.”
얌전하게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등받이를 지지대 삼아 도준이 목을 젖혔다. 간호사에게 들렀다 왔는지 이마에 붙어 있는 반창고도 새것이었다.
“문제아도 여전해.”
“뭐가?”
“나를 미치게 하는 네 복숭아향.”
덤덤한 그 말에 제아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래서 얼른 드라이어를 켰다.
위이이이잉―.
적막한 병실 공기가 드라이어 소리에 흔들렸다. 부드럽게 머리를 어루만져주는 제아의 손길이 좋은지 도준은 눈을 감고 있었다.
남자의 섹시한 부위 중 하나가 목울대라더니, 자꾸만 일정하게 목울대가 움직이는 도준의 목으로 시선이 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도준이 눈에 뭐가 들어간 듯 한쪽 눈을 찌푸렸다. 괜히 한눈팔면서 머리칼을 말려준 것에 흠칫한 그녀는 도준을 향해 몸을 숙였다.
“왜 그래? 눈에 뭐 들어갔어?”
그 순간 도준이 눈을 떴다. 서로의 시선이 끈적이게 얽혔다. 촘촘히 박힌 속눈썹의 결이 느껴질 정도로 거리가 가깝다.
시선을 피한다고 피했는데, 이젠 도준의 입술이 눈에 보인다.
항상 그녀를 정신 못 차리게 몰고 가는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는 선수 중의 선수 한 입술.
이 입술이 주는 감각이 선명하게 온몸을 스치자 제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려고 했다.
하지만 도준이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지그시 감싸더니 힘을 주어 내렸다.
숨 막힐 정도로 가까워지는 거리, 쏟아져 내린 제아의 머리칼이 복숭아 향과 함께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같이 있는 순간마다 넌 날 미치게 해. 참을 수 없을 만큼.”
제아에게 속삭이는 순간, 농밀하게 흘러나오는 제아의 복숭아 향에 도준은 흠뻑 취해버렸다.
이성이 마비되고, 본능이 치명적인 자극을 당했다.
젖어 있는 머릿결, 촉촉함을 뿜어내는 살결, 수줍은 표정과 대비되는 도발적인 눈빛.
힘겹게 유지되는 이성의 끈이 위태롭게 가늘어지고 있었다.
말캉하면서도 촉촉한 입술이 가슴 떨리게 제아의 이마를 부드럽게 스쳤다.
올려다보는 야릇한 눈빛과 달리 결단을 내린 입술은 냉정했다.
“문제아, 너 오늘 그냥 집에 가라.”
***
“한 사장!”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인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살벌한 표정으로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있는 도준의 모습에 인호는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제야 도준은 차분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곤히 잠들어 있는 제아가 보였다.
어젯밤 가라고 놔주었는데도 그녀는 밀릴 대로 밀린 업무를 캐치한 건지 도와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시킨 일은 야무지게 처리를 하는 제아는 꽤 많은 도움이 되었고, 업무 처리에 속도가 붙었다.
그런데 문제는 새벽 2시가 넘자 고개를 몇 번 뒤로 까딱이더니 제아의 고개가 도준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너무 곤히 잠들어서 제아에게 어깨를 내어준 채 서류를 보던 도준도 어느새 스르륵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넓은 침대 놔두고 청승맞게 둘 다 웬 소파?”
“그럴 일이 있어.”
갑자기 인호가 은근하게 미소를 지으며 도준의 어깨를 툭 쳤다.
“혹시 소파는 2차전?”
대답 대신 살벌한 시선이 돌아오자 인호는 냉큼 입을 다물었다. 슬리퍼를 신고 일어난 도준은 이불을 가져와서 덮어준 후에 인호와 함께 10층 휴게실로 향했다.
“그러니까 전화는 왜 안 받고 그래. 한 여사님이 전화해서 나를 막 몰아붙이는데 끝까지 모른다고 했다. 박수도 같이 쳐야 소리가 나지. 어후, 누가 한 사장 어머니 아니랄까 봐 그분도 보통이 아니야. 식은땀 나서 죽는 줄 알았다.”
“어제 약혼녀 후보 한 명 데리고 병원까지 쳐들어왔더라고.”
“그래서?”
“쫓아냈지. 그리고 빌어먹을 타이밍으로 어머니랑 제아가 병원에서 마주쳤고.”
연희가 은밀하게 그의 약혼녀를 물색하고 다닌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준도 그에 맞는 대비를 했다.
미리 사전 조사를 했고 연희가 약혼녀로 내세울 만한 재벌가 여식들의 뒷조사는 모조리 해놓은 상태였다. 들이미는 순간, 거절한 명분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문 비서와의 관계를 실토한 거야?”
“그런 말 한 적 없어.”
우리 한 사장이 그럼 그렇지. 그럼 대체 어떻게 안 거지? 혹시 감시를 붙였나?
인호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의견을 말하려는 순간 도준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보란 듯이, 키스했지.”
“에라이, 미친놈아!”
“미친놈 소리 하려고 아침부터 쳐들어온 건가?”
차분한 도준의 물음에 그제야 인호가 표정을 싹 바꾸었다.
“일리안이 새벽부터 갑자기 널 찾더라고. 계약을 못 할 것 같다는 둥, 어쩐다는 둥 횡설수설하는 게 술을 꽤 먹은 것 같더라고.”
“일리니 계약을 못 할 것 같다고?”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물어봐도 한 사장이랑만 이야기하겠다고 하니. 팰리스 호텔에 묵고 있으니 얼른 가봐. 그리고 오늘 저녁에 있는 제일 그룹 주주 파티, 자녀 동반으로 변경되었어.”
“자녀 동반이라.”
“한 사장의 공개적인 선 자리나 마찬가지라는 거지. 한 여사님이 직접 보고 네 약혼녀를 물색하려는 것 같은데.”
“…….”
“그러니까 왜 한 여사님 앞에서 키스는 하고 그래? 좀 숨겼다가 나중에 터뜨려도 좋을 것을. 이런 거 보면 한 사장도 참 융통성 없다니까.”
도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투덜거리면서도 인호는 차분하게 도준의 결정을 기다렸다.
“지금 당장 퇴원 수속 밟아.”
이마와 입술, 뺨과 코 끝, 눈꺼풀 위와 턱 끝. 속살거리듯 기분 좋게 간질이는 느낌에 제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 이제 막 뺨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드는 도준이 보인다. 그제야 졸음을 이기려다가 잠이 들었던 게 떠올랐다.
“맙소사, 나 좀 깨우지 그랬어. 오빠 혼자 또 밤새운 거야?”
“나도 네 덕분에 잤어.”
옆에 앉은 도준이 다정한 눈빛으로 얼굴을 깊숙이 들여다보자 제아는 수줍게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 아침에 얼굴 붓는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보지 마.”
이젠 오빠가 아닌 남자이기에 예쁜 모습만 보이고 싶은 제아였다.
“문제아, 어머니에게 너와 내 관계를 알린 이상 앞으로 꽤 고달플지도 몰라.”
아침부터 무슨 소리냐는 듯, 도준을 빤히 바라보던 제아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뭐라고 했구나? 설마, 제일 어패럴 사장 자리에서 내쫓겠대?”
태연하게 묻는 척했지만 제아는 목소리가 떨렸다. 설마 아들을 그렇게 바로 내쳐버릴 정도로 냉정한 여인이 아니기를.
“그건 아니고.”
“그럼?”
“오늘 오후 파티에 참석해야 하는 일정이 있어. 그래서 여자 파트너가 필요해.”
“업무적인 자리 아냐? 오빠 항상 파트너 없이 유 실장님이랑 같이 참석했잖아.”
“이번 파티는 의도가 좀 달라.”
“의도? 무슨 의도?”
“파티를 가장한 내 소개팅 자리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지. 어머니가 서두르는 걸 보니, 어제 꽤 열이 받은 것 같아.”
“그래서 그곳에, 나를 데려가겠다는 거야? 어머니 더 열 받게 하려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걸 다른 이들에게 보여줘야 할 거 아니야. 그래야 약혼시킬 엄두를 못 내지.”
“그래서 나를 만천하에 공개하겠다고?”
“얼굴만 공개하는 거야. 실체는 신비주의로 밀고 나갈 생각이고.”
도준이 부끄러워서 제아의 정체를 신비주의로 하려는 게 아닌 걸 안다. 이목이 집중되면, 피곤한 건 제아일 테니,공개는 하되 신비주의로 숨겨서 배려를 하는 것이었다.
“문제아, 겁이 나?”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금수저들의 모임에 흙수저가 끼어든다는 건 꽤 두려운 일이니까. 작은 실수 하나로 도준에게 먹칠을 할까 겁도 나고.
사실 제아는 도준과의 연애를 결심했을 때 나름대로의 명백한 기준을 정해놓았다. 냉정한 현실 앞에 주제 파악은 정확히 하고 욕심은 많이 내지 말자. 물러날 때가 있으면 과감히 물러날 거라고.
하지만 물러나기 전까지 부딪히는 장애물은 과감히 넘어보기로 말이다. 겁이 나냐고? 천만에, 만만에 말씀이었다.
금수저를 문 인생도 대단하지만, 흙수저를 문 주제에 금 수저를 손에 넣는 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
제아는 차분한 눈빛으로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이젠 돈이 넘칠 대로 넘치는 재벌가 남친. 그리고 그 재벌가 남친이 며칠 전 분명히 말했다.
―그러니까 능력 좋은 남자친구 좀 실컷 이용해 줘봐.
드디어 제대로 이용해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오빠가 다른 여자 파트너 데려가는 거 보느니, 차라리 내가 가.”
제아는 도준의 목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능력 좋은 남친, 지금 이용해도 되는 거지?”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이자, 도준이 목 깊은 곳에서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나 오늘 풀 옵션으로 장착해줘. 그럼 오늘 오빠 파트너 역할, 제대로 해줄 테니까.”
***
도준이 제아를 데려간 뷰티 숍은 건물 외관 자체의 럭셔리함도 럭셔리함이었지만 5층 건물이 통째로 뷰티 숍이었다.
옷이 마르지 않아서 대충 도준의 옷을 걸치고 왔는데 입구를 통과하기 민망할 정도로 입구가 화려했다.
“저기 오빠, 도저히 못 들어가겠어. 이 꼴로 저 문을 통과하는 건 저 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넌 예의 차릴 필요 없어. 예의는, 저 문이 차릴 거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럭셔리한 문을 열고 나온 여자 두 명이 제아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고객님, 저희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여직원들은 친절했고, 표정과 자세는 깍듯했다.
“오후 5시에 데리러 오지.”
도준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여직원들을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원장실에 들어가자 평범한 외모의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반가워요. 원장 김홍연이라고 해요.”
“아, 안녕하세요!”
유명한 연예인 스타일리스트, 김홍연? 그제야 제아는 왜 뷰티 숍에 연예인들로 꽉 차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홍연의 눈길이 날카롭게 제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번에 훑어 내리면서 들고 있는 차트에 무언가를 기록했다.
“오후 2시까지 얼굴 마사지와 레이저 시술, 전신 마사지와 스파가 이어질 거예요.”
“그렇게나 많이요?”
“한 사장님이 정중히 부탁했어요. 최고의 여자에게 최고의 아이템을 장착해달라고.”
홍연의 한마디에 제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최고의 여자라 해도, 최고의 아이템을 장착하려면 아이템이 잘 장착되도록 얼굴과 몸을 최적화해야겠죠?”
“아, 네.”
“이런 거 물으면 실례인가? 한 사장님 애인, 맞죠?”
제아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도준과 당당하게 연애를 하기로 했지만 가십 거리가 될 수 있는 이들에게는 입단속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절대 도준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제아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제아의 침묵에 홍연이 생긋 웃는다.
“하긴, 나도 그 마음 이해해요.”
“……네?”
“우리 숍 다니는 내로라하는 재벌가 딸부터 유명한 여자 연예인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신랑감 후보가 한 사장님이에요. 그러니 그 마음 오죽할까. 여자의 질투와 시기심이 무섭긴 하지.”
“저기, 그게 아니라.”
“그래도 어떻게 해요. 그렇게 능력 좋고 끝내주게 생긴 연인을 뒀으면 각오해야 하는 일 아니겠어요?”
제아를 바라보는 홍연의 눈빛은 묘했다.
“걱정하지 말고 용기를 가져요. 평범한 신데렐라가 최고의 왕자님을 뺏기지 않도록 내가 최선을 다할게요.”
지금 홍연의 눈빛은 마치, 클럽에서 그녀를 변신시켜주던 지연의 눈빛 같았다. 그녀 자신보다도 더 적극적인 눈빛이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홍연이 제아에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오늘 한 사장님이 아가씨를 침대에 데려가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아주 끝내주게 변신시켜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