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넌 나만 보면 돼, 나만 신경 쓰고.
2017.02.20.
제아도 윤영이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도준을 제 딸보다도 더 끔찍하게 아끼면서 오랫동안 친아들처럼 키운 윤영이었다.
그런 아들이 제 딸의 남자 친구라고 나타나면, 정말 끔찍할지도 모른다. 내 친아들과 친딸이 금지된 사랑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게다가 윤식이 휠체어 신세가 된 것도 그녀와 도준의 탓이나 마찬가지니까.
“휴…….”
대성 병원 엘리베이터에 오른 제아는 가슴을 짓누르는 모든 것들을 한숨 사이로 과감하게 흘려버렸다.
어차피 많이 바라지 않는다. 아주 조금만, 욕심을 내려는 거다. 그러니까…… 괜찮아.
스스로를 다독이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도착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제아는 제 눈을 의심했다. 도준의 병실에서 창밖으로 보았던 가늘고 우아한 뒤태의 여인이 눈앞에 있었다.
그의 어머니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비껴나간 것 같은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겹쳐지는 건 바로 도준의 얼굴이었다.
당혹스러웠지만, 피할 수도 없다. VVIP 회원인 만큼 10층의 병실은 딱 하나뿐이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제아는 연희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누구냐고 물어보면 비서라고 대답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연희의 차가운 눈동자가 제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 여자.’
그 여자 딸을 보고 있으니 마음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연희는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아가씨 이름이 문제아, 맞죠?”
“아, 네. 그런데 어떻게 제 이름을…….”
“어머니를, 많이 닮았군요.”
새하얀 피부에 아몬드형의 커다란 눈매.
눈동자는 순진했지만, 치켜 올라간 눈 꼬리는 절대 순진하지 않았다.
제아를 찬찬히 훑어보며 연희는 옅은 비소를 머금었다.
그 엄마에 그 딸.
피는 못 속인다더니 결국은 제 아들마저도 그 여자 딸에게 홀려버린 것이다.
“아들 녀석이 중요한 선약이 있다고 어미인 나를 바람맞혔어요.”
그리고 연희는 천천히 몸을 틀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도준이 보였다. 시선은 도준에게 고정한 채, 연희는 제아에게 말을 했다.
“문제아 양, 시간 괜찮으면 나랑 저녁 식사나 같이할까요?”
제아의 시선이 제 아들에게 향하는 것을 보며 연희는 생긋 웃어 보였다. 안심하라는 듯.
“내 아들이 어떻게 자랐는지 이야기도 듣고 싶고.”
그 식사 자리가 편한 자리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제아는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누가 뭐래도 도준의 어머니이니까.
그런데 무서운 속도로 다가선 도준이 제 몸으로 제아의 앞을 막아섰다.
“정문까지 직접 배웅해드릴 테니, 가던 길 가시죠.”
“난 네가 아니라 제아 양에게 물었다.”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모자는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내가 허락 못 합니다. 그러니까.”
“예의 없이 대화에 끼어드는 건 누구한테 배운 거니? 난 널 그렇게 가르친 적 없다.”
그녀의 말이 맞다. 어른이 먼저 베푸는 친절을 이유 없이 거절하는 건 버르장머리가 없는 짓이었다.
제아는 얼른 도준의 뒤에서 나와 연희에게 싹싹하게 웃어 보였다.
“저 시간 괜찮습니다.”
“한식당 예약이 되어 있는데, 괜찮나요?”
“저 뭐든지 잘 먹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제아는 몸을 틀어 저승사자처럼 어둠의 기운을 풀풀 풍기며 서 있는 도준에게 눈짓을 했다. 내 걱정 말고 병실로 가라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연희가 먼저 올라탔다. 그리고 따라서 타려는 제아의 손목을 도준이 잡았다.
“1층에서 기다려.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연희가 제아에게 무슨 목적으로 저녁 식사를 청했는지는 도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건 절대 고운 말은 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
그걸 안 이상 제아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둘이 같이 있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나보다도 중요한 저녁 선약이 있다고 하지 않았니?”
“그 선약, 방금 어머니가 채갔습니다. 그러니 따라갈 수밖에요.”
***
고급 한정식 식당에 도착했다. 전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식당에 들어서자 단아한 한복 차림의 여직원이 깊숙한 곳에 위치한 좌식 룸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좌식 룸에 앉자마자 코스별로 나온 음식들이 넓은 상을 채워나갔다. 한식이 분명한데도 지금까지 보지도 먹어보지도 못한 음식들 천지였다. 눈이 호강하고 혀가 감탄을 했다.
연희는 가감 없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제아를 차가운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꽤 유명한 식당이니 제아 양에게도 음식이 입에 맞을 거라고 봐요.”
“정말 맛있어요.”
그중에서도 수란채와 육장은 정말 일품이었다. 음식을 담뿍담뿍 입에 넣으며 잘 먹는 그녀와 달리 도준은 음식에 아예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건 연희도 마찬가지였다. 결국은 제아 혼자만 음식을 먹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사모님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세요?”
연희를 부를 만한 마땅한 호칭이 없기에 차 안에서 이미 사모님으로 굳히기를 본 후였다.
“배가 별로 고프진 않군요. 그리고 도준이도 한식을 별로 선호하지 않아요. 입맛도 워낙 까다로워서 제 입맛에 맞는 음식이 없으면 손도 대질 않으니. 그러니 우리 모자는 신경 쓰지 말고 제아 양이라도 마음껏 들어요.”
제아의 눈이 상 위를 빠르게 스캔했다.
신선로부터 메로 구이, 수삼 더덕채, 칠절판이나 대하 튀김, 소고기 더덕 말이 등등…….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이 고급스러운 음식들을 도준이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섞여 있는 빨간 갈치조림과 메추리알은 그가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 반찬 한 가지로 도준이 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우곤 했으니까.
그런데, 입맛에 맞는 음식이 없다니.
상에서 시선을 뗀 제아는 연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오빠가 입맛이 많이 까다롭긴 해요. 옛날에도 좋아하는 음식이 없으면, 밥에 손을 안 대거든요.”
제아가 왜 그 말을 꺼냈는지 알 리 없는 연희가 차분하게 대꾸를 했다.
“음식 종류가 이렇게 많아도 반찬 투정이라니, 몸만 어른이지 여전히 어린애야. 그래서 내 보호가 필요해요, 도준이는.”
연희의 나긋나긋한 대답에 제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래도 연희가 좋은 엄마이기를 바랐는데. 그 작은 바람이 무참히 깨져버렸다.
제아는 젓가락을 들어 갈치 살을 능숙하게 발라내었다. 골라낸 새하얀 살점을 빨간 양념에 푹 담군 후에 도준의 새하얀 밥 위에 올려주었다. 오래전, 젓가락질에 서툰 오빠를 위해 상 위에 갈치조림이 올라올 때마다 했던 것처럼.
조금은 놀란 듯, 도준이 고개를 틀자 제아는 생긋 웃어주었다.
“도준 오빤, 갈치조림 이거 하나면 밥은 기본으로 두 그릇 뚝딱해요.”
찰떡같이 알아들었는지, 도준이 군말 없이 흰 밥을 듬뿍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아, 그리고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간이 딱 맞아야 잘 먹어요. 살짝 매콤하면서도 달달한 걸 좋아하거든요.”
말과 동시에 다시 움직인 제아의 젓가락이 간이 잘 배인 메추리알을 집어서 밥 위에 올려주었다. 도준은 그걸 또다시 듬뿍 떠서 입에 넣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 해달라고 하셨죠? 도준 오빤 갈치조림, 메추리알, 황태 무침, 소갈비찜, 감자볶음 중 하나만 있으면 잘 먹었어요. 그래서 엄마가 항상 상에 이 반찬들 중 두 개는 꼭 올려놨거든요. 그리고 밥을 다 먹고 나면 항상 물었어요. 제가 아닌 오빠한테.”
젓가락질을 잠시 멈춘 제아는 연희를 똑바로 응시했다.
“우리 아들, 또 먹고 싶은 음식 없니? 내일은 좋아하는 반찬 뭐 해줄까, 라구요. 그리고 오빠가 대답하면 그다음 날, 그 반찬은 어김없이 올라왔어요.”
‘그런데 사모님은 왜 모르고 계세요? 왜 아들이 뭘 좋아하는지,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았어요? 10년 동안, 어떻게 제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조차 모를 수가 있어요?’
제아의 눈빛에서 쏟아져 나오는 질문 세례를 받자, 연희의 차가운 유리 가면이 벗겨졌다. 고운 눈꼬리를 매섭게 파들거리면서 제아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도 끄떡하지 않은 채, 제아는 연희에게 음식을 권했다.
“입맛 까다로운 오빠 입에도 맞는 걸 보니 사모님 말씀대로 이 집 음식 솜씨가 훌륭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모님도 한번 드셔 보세요.”
도준이 돌아오기 전이었다면, 감히 엄두도 못 낼 행동들이었다. 과할 정도로 넘치는 자신감과 당찬 성격 때문에 오히려 사고를 치고 다닐 정도였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의 10년, 그동안 삶에 치이고 치인 그녀는 겁쟁이가 되어 있었다. 예전의 문제아는 내면에 꼭꼭 숨겨버린 채.
하지만 10년 만에 돌아온 도준이 그녈 툭툭 건드리고 자극해서 다시 끄집어내주었다. 항상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예전의 문제아를 말이다.
그래서 연희의 눈에는 맹랑해 보일 짓을 저지를 수 있었다.
하지만 연희도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 어느새 유리 가면을 다시 얼굴에 쓴 채, 제아를 보며 차갑게 웃고 있었다.
“제아 양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한 보람이 있군요. 또 해줄 말 있나요?”
어디 또 지껄일 테면 지껄여보란 경고였다.
“10년이나 흘렀는데 오빠도 많이 변했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치며 제아가 끊었던 말을 이었다.
“저보다는 당사자인 아들한테 물어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아요.”
10년 전에 아들을 만나자마자 물어봤어야 할 말이었다. 뭘 좋아하니, 먹고 싶은 거 없니. 갖고 싶은 거 없니……. 그게 그녀가 알고 있는 엄마라는 존재인데.
―그래도 오빠 어머님, 좋은 분이시잖아, 그치?
예전에 물었을 때 도준은 분명 그렇다고 대답했다. 대체 어디가, 어떻게 좋으신 분인데? 돈, 돈이 많아서? 정말 돈 때문에 떠난 걸까. 똑똑한 도준이 연희가 어떤 엄마인지 모르고 갔을 리가 없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지금까지 단순하게 알고 있던 것들이 순식간에 뒤집혀버린 기분이었다.
그때 도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만 하고 그는 다시 재킷 안으로 핸드폰을 넣었다.
“유 실장님 전화는 받아야 되잖아.”
“식사 끝나고 내가 다시 전화하면 돼.”
도준의 눈빛을 보건대 제아를 연희와 단둘이 놔두기 싫은 눈치였다. 그때 연희가 끼어들었다.
“제아 양 안 잡아먹을 테니 나가서 전화 받고 오렴. 여자끼리 단둘이 오붓하게 대화나 나누고 있을 테니.”
“나가도 같이 나갈 겁니다.”
고집을 피우는 도준의 허벅지를 제아의 손이 상 밑으로 툭툭, 쳐서 신호를 보냈다.
“쓸데없는 말, 제아에게 하지 마십시오.”
연희에게 싸늘한 경고를 날린 후에야 도준은 마지못한 듯 룸에서 나갔다.
둘만 남자 제아는 긴장한 눈빛으로 도자기 인형처럼 차가운 여인을 응시했다.
분명 연희가 식사를 청한 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도준이 있는 이상 그녀는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리를 비우라고 도준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다.
“사모님이 워낙 바쁘셔서 오빠에게 신경 못 쓰는 건 당연한 건데, 제 말이 건방지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래도, 도준을 낳아주신 분이니까. 야속한 엄마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아니었다면 도준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테니까. 제아는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좋은 걸 알려줬는데, 죄송할 게 뭐 있어요? 나는 신경 쓰지 않으니, 제아 양은 얼른 식사해요.”
하지만 제아도 입맛이 이미 뚝 떨어진 후였다. 하지만 사준 음식을 남기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 엄마인 윤영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억지로 음식을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복스럽게 잘 먹는 거 싫어하는 어른 없어. 그러니 항상 밥은 복스럽게 먹어야 해.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는 제아를 주시하던 연희가 느닷없이 물었다.
“도준이, 사랑하나요?”
“푸웁! 콜록, 콜록!”
입안의 음식물들이 보기 흉하게 튀어나와 버렸다. 몇 번을 더 기침한 후에 벌겋게 충혈된 눈을 들자, 우아하게 작은 백자 잔을 들어 입 안을 적시는 연희가 보였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연희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묻는 의도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도준과의 관계를 알고 묻는 걸까. 오빠로서, 아니면 남자로서?
제아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았는지, 연희가 고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준이는 나보다도 옛 가족들을 더 사랑해요. 그러니 내가 제아 양을 어떻게 할까 봐 저 녀석답지 않게 행동하는 거겠죠?”
연희가 어떤 의도로 묻고 있는지 파악하고 싶지만, 유리알 같은 눈동자는 도무지 감정을 담고 있지 않았다. 말뜻대로라면 오빠로서 사랑하는 거냐고 묻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뭔가 시원치 않다.
그래도 우선 제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랑합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오빠로서도, 남자로서도.
음식 먹는 걸 포기한 제아는 상 위에 젓가락질을 올려놓았다. 똑바로 눈을 주시하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이번에는 제발 그렇다고 연희가 대답해주기를 바라면서.
“사모님도, 오빠 많이 사랑하시잖아요. 아닌가요?”
하지만 연희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면서 태연하게 다시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드러내놓고 만날 건가요?”
“죄송하지만 진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뭔지 여쭈어도 될까요? 전 도준 오빠만큼 똑똑하지 않아서 돌려서 말씀하시면 이해가 느립니다.”
제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그제야 연희가 입가에서 미소를 싹, 거두었다.
“옛정이란 게 무서운 거니 만나지 말라는 안 해요. 내가 뜯어놓는다고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도준이도 아니니.”
“…….”
“돈을 뜯어먹든 옛 가족 놀이를 하든 상관은 안 하겠지만. 이상한 소문 돌지 않게 조심해 줘요. 아니면, 내가 미리 제아 양에게 용돈이라도 좀 줘야 하나? 원하는 액수 있어요?”
이거구나, 이게 목적이었어.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드라마처럼, 왜 돈 많은 사람들은 돈 없는 사람들이 항상 돈을 바란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찌 보면 깨질 수 없는 흑백 고정관념이었다.
몸은 바르르 떨려왔지만,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웃었다. 돈이 없다고 자존심이 없는 건 아니니까. 흥분하는 순간 추해지는 건 바로 나니까.
“사모님이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 저 용돈 받을 나이 한참 지났어요. 그리고 돈도 벌 만큼 벌고 있구요.”
“그래서 내가 주면, 거절하겠다는 건가요?”
“돈 싫어하는 사람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돈은 받을 이유 없어요. 정 용돈 주시고 싶으시면 내년 설에 절 올릴 테니까 그때 주세요. 그 용돈은 기쁘게 받겠습니다.”
“누구랑은 틀리군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제아를 보며 연희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시간 길게 끌기 싫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도준이 내가 제일 그룹 후계자로 밀 거예요. 그러려고 데리고 왔고, 그럴 만한 재목이 되는 아이니까.”
“……그런데요?”
“도준이 앞길 막을 만한 짓은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가족이란 걸 빌미로 돈을 받고 싶으면 차라리 나한테 받고 깔끔하게 떨어지던지.”
제아는 하마터면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만약 도준과 연애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아마도 난리가 날 듯싶었다.
“내가 사는 세계에서 도준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내 아들이니까. 진흙탕에서 뒹구는 걸 내가 주워온 줄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죠. 정말 도준일 사랑한다면 쥐 죽은 듯이 그림자처럼 내 아들 만나요. 무슨 짓을 하든, 눈감아줄 테니까.”
연희가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쌍욕들이 머릿속에서 무수히 떠올랐지만 참았다. 하지만 더 이상 식사를 지속할 순 없었다.
“오늘 잘 먹었습니다.”
룸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는 연희의 뒤를 제아는 말없이 따라갔다. 연희는 예의를 넘었지만, 그녀는 예의를 지키기로 했다. 더러운 예의에 똑같이 행동하면 정말 진흙탕이 되는 거니까.
차로 가기 전, 연희가 다시 몸을 틀었다.
“내 손으로 내가 내 아들을 끄집어 내리는 일 없도록 제아 양이 도와줘요. 도준일 정말 아끼고 사랑한다면.”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제아가 의외로 순순히 대답하자 연희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말귀를 잘 알아먹은 것 같으니, 다행이군요. 그럼 우리 다시는 보는 일 없도록 해요.”
연희가 돌아서는 순간, 제아가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말을 했다.
“사모님도 아들을 아끼고 사랑해주세요. 그리고 지켜주세요!”
연희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제아가 한숨과 함께 몸을 틀자, 도준이 보였다.
“문제아.”
빠르게 다가온 도준이 제아의 안색을 살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손을 뻗었지만, 제아는 그 손길을 피해버렸다.
차 안에서 연희가 지켜보고 있을 건데.
허공에서 멈추어버린 손을 잠시 바라보던 도준이 손을 떨어트렸다. 그사이 연희의 차가 갔는지 확인하려고 제아가 고개를 틀었다.
“돌아보지 마.”
하지만 도준의 서늘한 손이 제아의 뺨을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넌 나만 보면 돼.”
“오, 오빠!”
“나만 신경 쓰고.”
“미쳤어? 오빠 어머님이 보시면 어쩌려고 그래!?”
버둥거리는 제아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자 선팅이 짙게 된 차의 창문이 반쯤 내려갔다. 그 위로 그들을 주시하는 연희의 눈이 드러났다.
“실컷 보라고 해.”
약점이 드러났다고 연희에게 휘둘릴 생각, 도준은 추호도 없었다. 이왕 드러난 거, 정확히 보여주리라. 문제아는 내 약점임과 동시에 나를 터지게 할 다이너마이트라는 걸. 어떻게든 지켜낼 내 여자라는 걸.
“그러라고 하는 거니까.”
제아의 뒤 어딘가를 차갑게 주시하던 도준은 고개를 비틀어 서슴없이 입술을 내렸다.
“한도준!”
차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화가 잔뜩 난 듯, 연희가 그녀답지 않게 소리를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