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비 오는 날은 딥 키스.
2017.02.16.
이번에도 도준이 뜻하는 바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제아였다. 밤에 키스하면 위험다고 경고까지 했으면서.
그들 뒤에 있는 퀸 사이즈 침대가 떠오르자, 순간 갈등이 일었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병실 침대는 왜 이렇게 넓은 거야?’
‘설마, 저 침대로 날 던져버리진 않겠지?’
허무맹랑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뒤집어놨지만, 제아는 소신 있게 생각한 바를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자신이 곁에 없어도 도준이 비의 악몽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등 뒤에 닿는 도준의 온기를 느끼며 제아는 비스듬히 고개를 뒤로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비가 오면 냄새가 더 진해지는 거 알아?”
도준에게서 흘러나온 청량한 체향이 페로몬처럼 짙게 뿌려지고 있었다.
“그래서 오빠만의 향기도 같이 진해져.”
맞닿은 등과 가슴에서 서로의 심장 소리가 세차게 고막을 울렸다.
“빗소리에 소리가 다 묻혀버려서 귀도 민감해지고.”
제아는 그를 보며 생긋 웃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냐는 듯이.
“서로한테 딱 집중하기 좋다는 거야.”
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함인지, 도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딱 한 번만 알려줄 테니까 잘 기억해.”
갑자기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끌어당긴 제아가.
“비 오는 날은 악몽을 꾸는 날이 아니라.”
제아는 살짝 까치발을 들었다.
“키스하기 좋은 날이라는 거.”
그러자 무방비하게 벌어진 도준의 입술 사이로 달달한 복숭아향이 예고 없이 스며들었다.
기분 좋게 꾹 눌리는 서로의 입술의 감촉에 취하는 순간, 창문을 짚고 있는 서로의 손끝에도 힘이 들어갔다.
제아의 말이 맞다는 걸 도준은 다시 한 번 깨닫는 중이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속 농밀하게 퍼지는 복숭아향이 그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가쁘게 내쉬는 제아의 숨소리가 아찔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감질나게 자극만 한 채, 기습처럼 치고 빠지듯이 제아의 입술이 멀어졌다. 하지만 가만히 지켜볼 도준이 아니었다. 창에서 손을 떼고 제아의 허리를 뒤에서 휘감아 제 품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이 정도 가지고는 부족해.”
제아의 가는 목을 타고 올라온 그의 손이 턱 끝에 당도했다.
“내 악몽을 지우기에는.”
말뜻을 알아차린 제아가 품에서 꿈틀거렸다.
“자, 잠깐! 밤에 키스하는 건 위험하다고 했잖아! 그래서 나는!”
‘뽀뽀한 거란 말이야.’라는 말을 차마 이을 수 없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도준의 짙은 눈동자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이었다. 느릿하게 차올라 서서히 집어삼켜버리는.
“키스하기 좋은 날이라며.”
나른하게 흘러나오는 음성부터 환자복을 입은 모습마저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섹시한 건지.
“제아, 너도 잘 기억해놔.”
그저 꼼짝없이 사로잡혀 내려오는 입술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키스와 입맞춤의 차이가 뭔지.”
소리 없이 다가온 서늘한 입술이 격렬하게 제아의 입술을 집어삼켜졌다. 제대로 알게 해주겠다는 듯이. 머리가 뱅글뱅글 돌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입술을 열어야지.”
맞닿은 입술 사이로 도준이 속삭였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녀가 수줍게 입술을 열자, 젖은 입술이 강렬하게 파고들었다.
거칠어진 호흡이 서로의 입술 사이로 넘나들며 도준의 입술을 받아들이는 제아의 고개가 점점 더 뒤로 꺾였다.
그런데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온몸을 태워버릴 듯이 거친 숨결이 서로의 입술 사이로 넘나들었다.
젠틀맨에서 야수로 돌변한 도준에게 조금씩, 먹히는 중이었다. 사정없이 아삭아삭 씹히고 쓰읍쓰읍 빨리고.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
“오늘은 여기까지.”
으르렁거리듯 나직하고 거친 도준의 음성이 귓가를 긁어내렸다. 혼몽한 눈을 뜨는 순간, 도준의 엄지손가락이 젖은 입술에서 제 흔적을 지워냈다.
“병원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병원만 아니었다면, 폭주해버린 야수가 제아의 모든 걸 산산조각 내서 집어삼켜버렸을 것이다. 그의 것으로 만들고, 그녀의 온몸에 각인을 새겼을 것이다.
등 뒤에서 제아를 안은 채 도준이 창가로 다가섰다.
아직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옅은 어둠 속에서도 쏟아지는 빗줄기가 보일 정도로 굵고 세차게.
“비 오는 날의 낭만 공식, 잊지 못하겠어.”
낭만 공식?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제아가 바라보자, 도준이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매혹적인 웃음을 흘렸다.
“네가 알려줬잖아.”
의미심장한 도준의 눈빛이 제아의 입술에 노골적으로 꽂혔다.
“비 오는 날은 딥 키스……라고.”
말 한마디도 끈적끈적하게 하는 도준 때문에 온몸이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머지않은 날, 도준 때문에 온몸이 녹아내릴 날이 올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뭐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정신을 다시 바짝 차린 제아가 그를 향해 핑그르르 돌아섰다.
“좋은 거 알려준 기념으로 영양제 링거 한 팩 어때?”
도준의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좁아졌지만, 감히 누구 분부라고 거부하겠는가. 이미 작정하고 덤벼드는 고양이 한 마리를 그는 절대 이길 수가 없었다. 주사 공포증이고 뭐고, 극복해내는 수밖에.
***
도준이 링거를 맞는 걸 본 후에야 제아는 집으로 왔다. 샤워도 할 겸 입맛 까다로운 도준을 위해서 집에서 음식을 좀 챙겨갈 생각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결벽증이 또 도졌는지 윤영이 주방 살림을 또 몽땅 엎어서 정리하고 있는 게 보였다. 냉장고에서 챙겨두었던 쇼핑백을 꺼내자 윤영이 웃으면서 딸을 응시했다.
“우리 집에 음식 도둑이 있는 줄 몰랐네?”
“사장님이 교통사고 때문에 입원해서 가서 밤새야 돼. 사먹기는 좀 그렇고 내가 음식 좀 챙겨온다고 했어. 엄마 음식 솜씨가 끝내주잖아?”
거짓말 반, 진실 반 섞인 변명이었다.
“사장이면 돈도 많으면서 간병인 쓸 일이지 왜 비서들을 부려먹어?”
“우리 사장님 오고 제일 어패럴 주가 상승하는 거 알지? 처리할 업무가 너무 많아서 사장님이 입원해서도 일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 그래서 비서들이 돌아가면서 업무 보조 해줘야 하구. 그러라고 월급도 200만 원이나 올려줬잖아.”
헬퍼 월급 비용으로 받은 300만 원 중에서 200만 원은 윤영에게 추가 월급이라고 입금했다. 계좌에 찍힌 액수가 꽤 큰지라 윤영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하긴. 월급을 그렇게나 많이 주니 부려먹긴 해야겠네.”
“그런데 갑자기 웬 주방 정리?”
“버릴 건 버리고 해야지. 엄마가 우리 딸 비서 첫 월급 기념으로 이번에 주방 용품 좀 질렀어.”
그제야 한쪽에 모아놓은 주방 용품으로 향했다. 냄비 세트, 프라이팬 세트, 그릇 세트 등등……. 하지만 그걸 본 제아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거 다, 이준 오빠가 사줬던 거잖아.”
어린 시절, 워낙 똑똑한 탓에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 과외를 해주었던 이준이었다. 그 돈으로 제아가 갖고 싶어 한 것들을 사주었고, 윤영의 주방 살림까지 하나씩 차근차근 새것으로 바꾸어주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걸 사주었을지 알기에, 버려지는 용품들을 보자니 속이 상했다. 마치 윤영이 품고 있는 도준에 대한 마지막 정인 것 같아서.
“그래서 오래 쓴 거야. 10년 넘게 썼으면 오래 쓴 거지.”
“엄만 이준 오빠가 아직도 밉고 원망스러워?”
“문제아, 너! 엄마가 이준이 이야기는 하지 말랬지!”
윤영의 눈빛이 매서워졌지만 제아는 이 대화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도준과 사랑을 하기로 한 이상, 피할 수 없는 주제였다.
“이준 오빠, 이젠 이해해주면 안 돼? 나도 처음엔 그냥 밉고 원망스러웠는데 이젠 아니야. 오빠 우리한테 할 만큼 했잖아. 그리고 친엄마가 살아계시는데 돌아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하필이면 떠난 시기가 그렇게 맞아떨어졌다는 게 문제지.”
부지런히 움직이던 윤영의 손이 잠깐 멈추었다.
“엄마는 이준이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아.”
그 말에 제아의 얼굴이 환해지는 순간, 윤영이 말을 이었다.
“이미 내 품에서 떠난 자식, 깨끗하게 잊어주는 게 도리니까. 그러니 제아 너도 이준이 잊어라. 다신 그 이름 꺼내지도 말고.”
정리하는 윤영의 손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엄마.”
더 이상 그 이야기는 하기 싫다는 듯, 윤영이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넌 도대체 지로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니?”
“아, 갑자기 지로 이야기가 왜 나와? 지로는 그냥 친구란 말이야. 남자 사람 친구란 말도, 아얏!”
윤영의 손이 제아의 등을 후려친 것이다.
“남자 여자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어? 지로처럼 괜찮은 애가 또 어디 있다고!”
“괜찮으면 엄마가 지로 데리고 살던지. 아얏!”
두 번째 등짝 스매싱이 이어졌다. 파리채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아귀 힘 때문인지 맨 손으로 맞는 것도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그러다 번뜩,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같은 남자는?”
“뭐?”
“이준 오빠 같은, 남자는 싫어?”
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은 윤영의 눈빛, 표정.
“제아 너 설마, 이준이 기다리는 거야? 그래서 지로도 모른 척하고 연애도 안 하고 이 꼴로 이러고 있는 거냐고!”
“누가 그렇대? 엄마가 옛날부터 그랬잖아. 오빠만 한 남자 없다고. 그래서 물어본 거지! 이제 완벽하게…… 남남이기도 하고.”
“엄마가 몇 번을 말하니, 이준이 기다리지 말라고! 그리고 오빠랑 남자랑 같니, 같아?”
제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같지 않으니까, 이렇게 죄책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같지 않으니까, 엄마한테 물어보는 거잖아.”
조심스러운 제아의 반문에 휘둥그레진 윤영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10년 동안 남매로 지냈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이준이가 돌아올 일도 없지만, 제아 너 꿈에라도 그런 상상하지 마라. 알았니?”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제아는 윤영에게 묻고 싶었다. 왜 도준과의 사랑이 끔찍하다는 건지.
“문제아, 대답 못 해?”
거짓말은 태생적으로 하지도 못하고, 하기도 싫다.
“난 그래도 이준 오빠 같은 남자가 좋아!”
그녀 딴에는 윤영에게 하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제아는 쇼핑백을 손에 들고 현관문으로 내달렸다.
이젠 멈출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너무 늦어버렸어.
‘엄마, 정말 미안. 도준 오빨 사랑해버려서.’
***
도준의 팔뚝을 더듬는 간호사의 손길은 음미라도 하는 듯이 느려도 너무 느렸다.
수줍게 웃으며 도준의 얼굴을 응시하는 간호사의 눈이 황홀한 듯 풀려 있었다. 링거를 빼러 가는 데만도 이 남자 얼굴을 가까이서 보겠다고 간호사들끼리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연장자인 그녀의 승리였다.
그래서 그녀는 이 남자의 얼굴을 마음껏 보면서 천천히 링거를 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참아줄 만큼 도준은 착한 남자가 아니었다.
“3초 안에 링거 빼요.”
“……네? 하지만 그러면 아플.”
“내 얼굴 구경 시키려고, 대성 병원에 억대 회원가를 지불하는 건 아니니.”
자비심 없는 도준의 말에 새하얗게 질린 간호사는 링거를 빼고 후다닥 병실에서 나갔다. 그제야 도준은 피곤한 듯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입맛이 없다는 그의 말에 제대로 된 저녁을 먹게 해주겠다고 사라진 제아는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병실은 넓은데도 도준은 답답함을 느꼈다. 창밖을 바라보니 빗줄기가 약해져 있었다.
제아가 몸으로 직접 알려준 비 오는 날의 낭만 공식.
피식, 웃음을 흘리며 도준은 생각했다.
‘효과가 나쁘지는 않군.’
이제 비가 오면 악몽보다는 제아에게 키스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머릿속을 채울 것 같았다.
병실을 나서자 때마침 올라오고 있는 전용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인호는 정신없이 바쁠 테니 제아일 것이다. 팔뚝에 남아 있는 링거의 흔적을 손으로 문지르며 차분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여자가 내렸다. 그런데 여자는 맞지만 제아가 아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여 보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제게로 걸어오는 여자는 그의 어머니인 연희였다.
하루에 두 번이나 방문할 어머니가 아닌데.
그의 시선이 연희의 곁을 차지하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로 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은 화려한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진한 장미향의 향수가 그의 코끝을 찌르듯이 파고들었다.
‘지독하군.’
머리를 맑게 해주는 상큼하고 달달한 복숭아 향과는 다른 인위적인, 거부감이 드는 향수 냄새에 도준이 미세하게 미간을 구겼다.
“마침 나와 있었구나. 정연아, 내 아들 도준이야. 인사하렴.”
완벽한 메이크업이 되어 있는 여자의 이목구비마저도 인위적으로 화려했다. 도도한 눈빛으로 정연이라는 여자가 그에게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도 그녀의 눈빛이 환자복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을 빠르게 훑어보는 걸 도준은 놓치지 않았다. 상품 가치를 평가하듯이.
“또 웬일입니까?”
두 여자를 반기지 않는 게 그의 말투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주 중으로 너와 정연이, 식사 자리 마련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네가 다쳤다고 하니 정연이가 문병을 오겠다고 기특하게 그러잖니? 병원에 확인해 보니 저녁도 안 먹었다면서. 근처에 괜찮은 한정식 식당 예약했으니 늦은 저녁 한 끼 같이 하자꾸나.”
도준은 제 어머니가 이렇게 길게 말을 하는 걸 처음 보았다. 그것도 가식적인 미소와 함께 말이다. 그새 병원에 전화해서 그의 저녁 식사 여부까지 확인을 했나 보다.
물론 아들이 밥은 잘 챙겨먹었는지 걱정이 돼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안다. 그녀 자신에게 도움이 될 집안의 딸을 물색해서 데리고 오기 위한 사전 확인 차원일 뿐.
“저녁 선약이 있습니다. 그러니 식사는 두 분이서 오붓하게 하세요.”
도준은 연희에게 1차 경고를 했다. 아들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줄 때, 인조인간 같은 저 여자를 데리고 꺼지라고 말이다.
“업무와 관련된 선약이니?”
지금 알면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준은 제 어머니가 실망감 느끼지 않게 대답해주었다.
“지극히, 사적인 저녁 약속입니다.”
“취소해라. 업무적인 게 아니면 이보다 더 중요한 사적인 약속은 없으리라 보니까.”
연희는 반항기 가득한 아들을 향해 어림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회사로 쳐들어가면 일을 핑계로 빠져 나갈 테지만, 병원에 입원을 한 상태라면 이야기가 틀려진다. 거절할 만한 핑계가 없는 것이다. 전화로 불러내면 나오지 않을 아들이란 걸 알기에 정연을 데리고 아예 쳐들어온 것이다.
“업무적인 선약보다 오늘 저녁 선약이 제겐 더 중요합니다. 어머니와의 식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중요한 저녁 선약이라는 거죠.”
그것도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하는, 지극히 사적인 감정이 듬뿍 들어가 있는 저녁 식사이니까.
명백한 거절에도 연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최대한 상냥한 음성으로 말을 했다. 미소 짓는 입술과 달리 유리 같은 차가운 눈동자로 응시하면서.
“도준아, 난 네 의견을 묻는 게 아니란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도준이 시니컬한 미소를 픽, 흘렸다. 그사이 탐색을 마친 정연이란 여자는 마스카라에 파묻힌 긴 속눈썹을 떨면서 외모답지 않게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이 여자, 어머니가 작성한 약혼녀 명단 상위랭킹에 되어 있는 여자입니까?”
드러내놓고 공격했는데도 연희는 지극히 태연했다.
“1위는 아니지만 상위 랭킹에 있는 아가씨는 맞아. 하지만 정연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1위가 될 수도 있겠지?”
연희는 정연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살며시 팔짱을 끼는 정연을 보니 도준이 단단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걸 본 도준이 정연의 앞으로 걸어갔다.
“통성명이나 하죠. 제일 어패럴 대표 이사 한도준입니다. 그쪽은?”
“한성그룹 오형택 회장님 차녀 오정연이라고 해요. 외가는 거의 정치 쪽에 몸을 담그고 계셔서 따로 말씀은 드리지 않을게요.”
당당하게 집안 스펙을 읊는 정연희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이런 나를 거부할 수 있겠느냐고.
“한성그룹 차녀, 오정연이라.”
도준이 잘생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흐릿하게 웃자, 정연의 눈빛이 황홀하게 풀렸다. 이 남자는 이마에 큰 반창고를 붙이고 환자복을 입고 있는데도 너무 눈이 부시다고 생각하면서.
도준의 차가운 눈빛이 연희에게 향했다. 최소한의 기본 매너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연희의 착각을 산산조각 내줄 수밖에. 그가 얼마나 못되고 차가운 아들인지 보여줄 때였다.
도준의 상체가 정연을 향해 반쯤 기울였다. 가까워지는 아찔한 얼굴과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청량한 향기에 정연은 취해버릴 것만 같다.
그녀의 동공이 탁해지는 순간, 귓가에 도준의 숨결이 닿았다.
“압구정 호빠에서 진상 떨기로 유명한 여자는 취미 없어.”
“……!”
“특히, 특이한 취향 있는 난잡한 여자는 더더욱 별로거든. 언론사에 사진 넘기기 전에 알아서 꺼져주시지.”
도준이 기울였던 상체를 곧추세우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정연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못하고 씩씩거리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버렸다.
“저녁 식사 예약, 이제 취소하세요.”
씩 웃으면서 말을 하는 도준을 연희의 차가운 눈동자가 말없이 응시했다. 이렇다 할 화도 내지 않고 표정 변화도 없었다.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해드릴까요?”
“아직까지 그 더러운 때를 벗지 못해서야. 이래서 자라온 환경이 중요하다는 거다.”
싸늘하게 한마디를 던진 연희가 미련 없이 돌아서자, 도준도 미련 없이 등을 졌다.
그런데 병실에 다다르기도 전에 도준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연희의 목소리가 꽤 컸다. 그에게 들으라는 듯이.
“아들 녀석이 중요한 선약이 있다고 어미인 나를 바람맞혔어요.”
돌아서자 연희와 함께 있는 제아가 보였다.
빌어먹을 타이밍이었다.
살짝 몸을 튼 연희가 다시 생긋 웃으면서 도준을 응시했다.
“문제아 양, 시간 괜찮으면 나랑 저녁 식사나 같이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