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잡아먹지 않을 테니, 오늘 가지 말라고.
2017.02.13.
강훈은 집무 책상에 앉아 느긋하게 박 실장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대성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합니다.”
“상태는?”
“출혈이 좀 있었지만 심각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내일까지는 꼼짝도 못 하게 해야 해.”
“확인해보겠습니다.”
“이번에도 입막음은 제대로 했지?”
“걱정 마십시오. 음주 운전에 의한 단순 접촉 사고로 경찰 쪽에서 조사가 들어간 상태입니다.”
“지시한 건 미국 쪽에 잘 전달이 되었고?”
“네. 지금쯤이면 팩스로 받아보셨을 겁니다.”
“나가 봐.”
박 실장이 사진 몇 장을 강훈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갔다. 지금쯤이면 업무차 미국을 방문한 한 부회장이 윌리엄 맥리를 만나서 협상을 제시하고 있을 것이다.
“한도준, 미안해서 어쩌지? 일리니, 제일 백화점에서도 입점을 좀 시켜야겠어.”
강훈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제일 백화점이 국내 1위 백화점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던 건 연매출 80%를 차지하는 VVIP 고객 위주의 마케팅 덕분이었다.
짱짱한 매출을 뒷받침해주는 VVIP 고객들이 원하는 국내에 입점이 되지 않은 브랜드 중 하나가 바로 일리니였다. 명품 주얼리만큼 비싼 가격이 아닌데도 인기가 높다.
일리안의 화려한 인맥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친분이 있는 할리우드 스타나 재벌 또는 지인들에게만 판매가 된다. 결론적으론 돈이 있다고 쉽게 손에 넣을 수가 없다는 게 고객들의 구미를 당긴 것이다.
제일 백화점에서 일리니와 몇 번이나 접촉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런데 도준이 그 계약을 성공하기 직전이라니.
게다가 막강한 인맥을 자랑하는 베일에 싸인 상속녀 일리안이 한국까지 방문할 줄이야. 덕분에 일리안의 독특한 취향을 알아내기는 했지만. 둘 사이의 친밀 관계를 깰 수 없다는 걸 안다. 단지 살짝 숟가락만 얹으려는 것뿐이다.
사진 속엔 반라 차림의 늘씬한 여자 둘과 뒤엉켜 있는 일리안이 있었다. 왕실과 사돈을 맺고 싶어 하는 윌리엄이 이런 딸의 사진을 보면 아마도 노발대발하겠지.
사진을 응시하는 강훈의 눈가에 웃음이 어렸다.
***
김 박사와 인호의 성화에 못 이겨 도준은 결국 환자복을 입고 VIP 병실 침대 위에 불편하게 누워 있었다.
“오늘 저녁 스케줄 내일 오전으로 변경해놔.”
“어허, 한 사장. 김 박사님 말씀 못 들었어? 최소 3일은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하잖아.”
“멀쩡해. 부러진 곳도 없고 몇 군데 꿰맸을 뿐이야.”
“에어 백 때문에 그 정도인 줄 알아. 그리고 교통사고는 후유증 조심해야 한다는 거 모르나?”
“사지 멀쩡한 거 내가 알아.”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도준은 현기증이 일어나서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인호가 혀를 찼다.
“퍽도 멀쩡하다. 그나저나 이번 건도 조용히 넘어갈 거야? 증거가 이렇게 우리 손에 있는데도?”
인호가 서류 봉투를 그의 눈앞에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오토바이 사고를 냈던 남자가 인호에게 핸드폰으로 사진 한 장을 전송했다.
계좌 추적을 당하지 않기 위해 중간 브로커인 남자에게 돈 가방을 건네는 양복 입은 남자가 찍혀 있었다.
-혹시나 해서 찍어놓은 사진입니다. 그리고 이주 전부터 음주 운전 사고를 내고 덮어쓸 젊은 사람을 찾고 있더라구요.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인호가 알아본 결과 가방을 건네는 사진 속의 남자는 강훈 쪽 사람인 박 실장의 말단 수하 중 하나였다.
“이번 건들은 다분하게 형제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들춰내서 좋을 게 없다는 뜻이지.”
“그러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잖아. 벌써 두 번째야.”
“몸에 스크래치 나는 정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 큰 걸 잡기 위해서라면.”
“그건 좀 시간이 걸릴 거야. 몇 년 전 일에다가 돈 세탁을 교묘하게 해서 추적하기가 힘들어.”
“그래서 기다리잖아. 한 부회장이 전직 대통령에게 정치 자금을 대주고, 그 대가로 제일 그룹에 유리한 경영권을 따냈기 때문에 그 자리까지 올라왔으니까. 지금도 꾸준히 그러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그거 터뜨리면 제일 그룹도 타격이 꽤 클 거야.”
“상관없어. 난 어차피 한 부회장만 물러나게 하면 되니까.”
“한 회장님도 한 부회장님이 어떤 짓을 했는지 다 알고 묵인하신 걸 수 있어. 다 제일 그룹에 득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한 회장님이 고얀 놈이라고 널 내쳐버리면 어쩌려고.”
“내가 직접 나설 일은 없을 거야. 언론사 한 곳에 살짝 흘려주기만 하면 되니.”
한 부회장과 강훈을 제일 그룹에서 몰아내는 게 바로 연희와의 계약 조건이었다.
도준이 한 회장의 신뢰를 얻어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는 것. 그 후 도준이 그녀의 아바타가 되어 움직여 주는 것. 그게 바로 연희가 원하는 레퍼토리였다.
하지만 도준은 생각이 달랐다. 애초에 제일 그룹에 관심도 없었다. 계약 조건만 이행하고 나면, 미련 없이 털어버릴 생각이었다. 제일 그룹이 산산조각이 나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우선 스케줄은 이틀 후부터 정상적으로 조정해 놓을게.”
“오늘 있을 일리안과의 미팅, 내일 오전으로 잡아놔.”
“한 사장, 너 쉬어야 해. 오늘 계약 체결 안 한다고 일리안이 미국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일리안은 한국 문화와 한국 미인들에게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내가 아주 끝내주는 동생들을 소개해줬다니까?”
“사업은 곧 신용이야.”
“이미 일리안에게는 연락해놨어.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오케이하던데? 한 사장 정밀 검사 끝나면 그때 다시 미팅 잡자고.”
“다시 연락해.”
인호가 기분 나쁠 정도로 씩 웃으면서 출입문을 응시했다.
“문 비서가 밖에서 대기 타고 있는데. 그럼 돌려보낼까?”
“유 실장이 연락한 건가?”
“연락은 무슨! 문 비서도 두 눈으로 똑똑히 너 사고 나는 거 목격했거든? 너 같으면 사랑하는 남자가 그렇게 피 철철 흐르는 거 봤는데 돌아가겠냐? 문 비서 엄청 걱정하고 있어. 그러니까 딱 하루만 쉬자. 알았지?”
“…….”
“그나저나 문 비서 보통 성격 아니더라?”
무슨 말이냐는 듯 도준이 인호를 응시했다.
“너 사고 나는 거 보고 폭풍 눈물을 흘릴 땐 언제고, 경찰이 사고 낸 놈 끄집어내니까 달려가서 그 남자 거시기를 사정없이 발로 차버리던데? 보는 내가 다 눈물이 찔끔 나더라. 그리고 여자가 무슨 욕을 그렇게 걸쭉하게 잘하냐?”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상상이 되기에 도준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문제아, 성질머리하고는.
“이만 나가보지 그래.”
“어허, 밀실 데이트를 즐기겠다 이거군. 알겠어. 방해꾼은 사라져주지.”
병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아는 인호가 나타나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실장님, 이제 들어가도 돼요?”
“문 비서, 부탁 하나만 합시다.”
“……?”
“이왕 푹 쉬는 거, 영양제 한 대 맞았으면 하는데 한 사장이 죽어도 싫다네요. 우리 한 사장 링거 한 대 맞힙시다.”
말뜻을 알아차린 제아가 배시시 웃었다.
“저만 믿으세요.”
“그럼 문 비서 믿고 간호사한테 말해놓을게요.”
제아가 병실에 들어가자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도준이 보였다. 환자복을 입었는데도 전혀 초라하지 않은 남자의 모습에 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이마에 붙여진 큼지막한 반창고가 보였다. 그래도 이 정도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하얀 얼굴이 붉은 피에 범벅이 된 걸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했다.
“실장님 말씀대로 퇴원할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야 해. 알았지? 그나저나 몸은 괜찮아?”
그래도 혹시나 하고 물었는데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전혀 안 괜찮아.”
“어디? 어디가 아픈데?”
찢어진 이마를 몇 바늘 꿰맸고, 찰과상 조금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동그란 눈으로도 깜짝 놀라 그를 살피는 제아의 손목을 도준이 확 잡아당겼다.
그의 품으로 고꾸라지듯이 안기자, 도준이 야무지게 틀어 올린 제아의 머리에서 밴드를 풀었다. 폭포수처럼 머리칼이 쏟아져 내린 긴 목 사이에 얼굴을 묻은 도준이 깊게 숨을 들이셨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달달하고 상큼한 복숭아 향이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것 같았다.
“하아, 이제 살 거 같다.”
나직한 중얼거림에 제아는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수줍은 속삭임을 돌려주었다.
“나도 살 것 같아.”
“너란 여자, 말을 너무 안 들어. 집으로 가라니까.”
“오빠 다친 거 봤는데 내가 어떻게 집에 가. 우리 오빠는 내가 간호해줘야지.”
목에 파묻었던 얼굴을 든 도준이 갑자기 눈을 깊숙이 부딪혀왔다.
“그럼 자고 가.”
“……뭐?”
“그렇게 걱정되면, 24시간 간호해줘야지.”
“그러긴 한데.”
말끝을 흐리는 제아의 시선이 얼른 넓은 병실 안을 훑었다. 병실이라기보다는 원룸형 오피스텔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내부가 넓게 잘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침대는 아무리 봐도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이곳에서 밤을 새면 분명 저 침대에서 같이 자야 하는데…….
‘널 볼 때마다, 또 다른 내가 나를 끊임없이 유혹해. 지금 당장, 널 침대로 데려가라고.’
그런 말까지 들었는데 덜컥하니 침대에 같이 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답을 주저하는 제아를 보던 도준이 갑자기 미간을 좁히며 눈을 감았다.
긴 손가락으로 콧등을 짚고 있는 그의 얼굴이 유난히도 창백해 보였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의사 부를까?”
“핸들에 세게 부딪혀서 머리가 좀 아파.”
“의사를?”
안 되겠다 싶어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제아를 도준이 다시 품에 꽉 끌어안아버렸다.
“잡아먹지 않을 테니.”
목을 간질이는 그의 숨결이 데일 듯이 뜨겁다. 그 숨결에 찌르르, 그녀의 숨결도 떨려왔다.
“오늘 가지 말라고.”
들이마신 숨에 도준만의 청량한 체향이 유혹하듯이 파고들었다.
“재워줘, 문제아.”
속삭이듯이 귓가를 파고드는 그의 간절함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오빠 그거 알아?”
도준의 품에서 벗어난 제아는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그의 옆에 모로 누웠다. 그리곤 그에게 손을 벌렸다. 품에 안기라는 듯이.
도준이 몸을 틀자 기다렸다는 듯 제아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도준도 팔을 뻗어 제아의 몸을 강하게 휘감았다.
“오늘 비 온대.”
“12월에 내리는 비라.”
나직하게 속삭이는 도준의 음성에 나른함이 깃들어 있었다.
“오빠는 아직도 비가 싫어?”
“……이젠 네가 있잖아.”
“오늘 밤은 내가 지켜줄 테니까, 푹 자.”
“문제아 심장 소리, 오랜만에 듣네.”
참 이상하다. 오빠가 아닌 남자, 소년이 아닌 어른 남자가 된 도준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데도 부끄럽지 않았다.
홧홧한 열이 피어오르는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내가 이 남자를 이렇게 그리워했다는 게, 이렇게나 사랑한다는 게 절절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뜨거워졌다.
마냥 심장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게 사랑이 아니란 걸. 쿵쾅거리던 심장을 잔잔하게 떨리게 해주는 것도 사랑이라는 걸.
“심장 소리만 들어. 딴 건 느끼면 안 돼. 알았지?”
짐짓 무섭게 으름장을 놓는 제아의 말에 도준이 피식, 소리 없는 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이미 느껴버렸는데. 앙상했던 소녀가 따스하게 그를 품어줄 여자가 되어 있다는 걸.
“잘 자, 오빠.”
일정하게 그의 심장을 자극하는 제아의 심장 소리를 뇌리에 새기며 도준은 무거운 눈꺼풀을 내렸다. 쌔근거리는 그의 숨이 안정이 되자 제아는 조심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자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소년이네.”
긴 속눈썹이 눈을 덮고 있어서인지, 잠든 모습은 꽤 앳되어 보였다. 이 고운 얼굴로 항상 차가운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에 막 잠이 든 도준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한 사장!”
팔꿈치로 반쯤 몸을 세운 도준이 시니컬한 눈빛으로 들이닥친 인호를 응시했다. 단잠을 방해받은 것에 대한 짜증이 얼굴에서 잔뜩 묻어났다.
“노크 매너 좀 챙기지 그래.”
“미, 미안! 그게 아니라 한 여사님이 지금, 연락도 없이 갑자기 병원에 오셔서. 지금 올라오고 계셔서 하도 급해서!”
한 여사님이라는 말에 제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내가 빠져줘야겠구나.
“오빠, 내가 잠깐 나가 있을게.”
나가려는 제아의 손목을 도준이 움켜쥐었다.
“어딜 나가, 제아 넌 여기 있어.”
“오빠 어머니, 내가 아직 볼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상관없어. 어차피 알게 될 거.”
저런 겁 없는 놈을 봤나. 인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저기 한 사장, 너야 괜찮지만 문 비서는 내가 봐도 아니야. 문 비서 생각하면 여사님이랑 부딪히는 건 나중에 미루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인호의 언질에 그제야 도준이 마지못한 듯,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지 말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병실을 나가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엘리베이터에서 수행 비서들과 내리는 연희가 보였다.
“답답한 병실로 갈 필요 없이, 휴게실로 가시죠.”
연희의 차가운 시선이 도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어 내렸다. 10층 전용 휴게실에 도준과 연희는 서로 마주 앉았다.
한국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대면하는 모자 사이였다. 그런데도 반가움과 애틋함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잘 지냈냐는 인사 한마디조차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연희였다.
“강훈이 짓이니?”
“이런 유치한 짓, 그럼 누가 하겠습니까?”
“강훈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괜히 자극하지 마. 내가 원하는 건 한태영이야.”
“저한테 명령이나 하려고 연락도 없이 오신 겁니까?”
“더 이상 제멋대로 혼자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해주러 왔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어머니 비위를 맞추면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강훈이가 한태영을 빼면 아빠한테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너도 마찬가지야. 내가 아니면, 넌 이 자리에 절대 있지 못해.”
“어련하시겠습니까.”
도준의 이죽거림에 연희는 고운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지에 흠집 내는 유치한 짓은 그만해. 조만간 네 약혼 자리 알아볼 테니까.”
“약혼 안 합니다.”
“겨우 제일 어패럴 하나 손에 쥔 주제에 잘난 체니? 넌 힘이 많이 부족해.”
“계약은 충실히 이행할 테니, 어울리지 않는 걱정은 마시죠. 누가 보면 진짜 아들 걱정하는 줄 압니다.”
연희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유리 같은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들이 아니라 나를 대신할 내 아바타를 확인하러 온 거야.”
제 할 말을 다했다는 듯 일어난 연희가 갑자기 돌아섰다.
“사고가 꽤 크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멀쩡하구나.”
“…….”
“착각하진 말아라. 아빠가 하도 성화라서 잠시 들른 것뿐이니.”
그리고 연희는 이내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가버렸다. 어차피 걱정 따위,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상처 같은 것도 받지 않았다.
도준은 덤덤히 일어나 휴게실을 나갔다. 열린 엘리베이터로 연희와 그녀의 수행 비서들이 타고 마중을 하려는 듯 인호도 같이 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도준은 고개를 틀었다.
한쪽 벽이 전면 유리창으로 된 너머로 비가 내리는 게 보였다.
제아의 말이 맞았다.
12월 중순의 밤하늘은 새하얀 눈이 아닌 굵은 빗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추적추적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걸 보고 있으니, 갑자기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
전생에 비와 무슨 악연이라도 진 걸까.
연희에게 버림받은 날도, 그리고 10년 만에 재회한 오늘도 하필이면 비가 내리다니. 기분 나쁜 축축함이 서서히 그의 몸을 잠식해 나갔다. 온몸을 꽁꽁 옭아맨 채 끝이 없는 나락으로 심신을 끌고 내려가려 했다. 숨이 탁, 막혀왔다.
병실로 향하는 한걸음이 힘겨웠다. 병실 문을 열자마자 뭔가를 찾는 그의 눈이 촉박해 보였다. 하지만 창밖을 내다보는 선 고운 실루엣을 발견한 그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문제아.’
그녀가 있다. 눈앞에, 한 공간에,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제아에게 다가갈수록 조였던 숨통이 서서히 느슨하게 풀렸다. 그런데도 가슴 한쪽은 여전히 무겁게 짓눌려서 풀리지가 않는다. 그의 어머니만 보면 숨이 탁 막혀오는 악몽이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그를 옥죄어 왔다.
도준이 바로 뒤까지 다가온 게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고 제아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내 말 맞지? 눈이 아니라 비가 와.”
병원 입구 세워진 검은 세단에 올라타는 뒤태가 가늘고 우아한 여자에게 제아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다.
저 여자가 오빠 친어머니구나.
도준에게 물어보지 않았지만, 여자의 직감이란 때로는 예리했다.
도준이 비가 오는 날을 끔찍하게 싫어하고 악몽에 시달리는 건, 바로 저 여자 때문이 아닐까.
“오빠는 모르지? 비가 굉장히 낭만적이라는 거.”
이젠 비의 악몽에서 도준이 벗어났으면 한다.
“그딴 거 나는 몰라.”
시니컬하게 말을 내뱉은 도준의 손이 유리창을 짚고 있는 제아의 손을 덮고…….
“비는 나를 숨 막히게 해.”
제아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들어가 깍지를 꼈다.
“그래서 끔찍하게 싫어.”
싸늘한 유리창의 한기가 맞닿은 손바닥으로 스며드는 순간…….
“비 같은 거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등 뒤에 도준의 가슴이 밀착되었다.
“그러니까 네가 알려줘 봐.”
귓가에 바짝 붙은 그의 입술마저 차갑다.
“비 오는 날이 왜 낭만적인 건지.”
입술만큼 차가운 속삭임이 제아를 유혹한다.
“비 오는 날이 기다려지게끔.”
내 입술 좀 뜨겁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