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46화 (46/104)

46. 나란 남자 실컷 이용해 보라니까.

2017.02.09.

준환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제아와 도준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건 말건, 도준은 제 몸으로 준환의 시야에서 완벽하게 제아를 차단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것조차 거북하다는 듯이.

“내가 이 여자 남자 되려고, 무려 10년을 기다렸어.”

“……?”

“그런데 겨우 180인 주제에.”

도준이 한 걸음 바짝 다가서자 우월한 기럭지에 준환은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그따위 얼굴로 한국대 나왔다고.”

시선을 단번에 강탈하는 남자의 완벽한 외모에 비하면 제 외모가 오징어임을 실감하는 순간…….

“주제 파악 못 하고, 감히 내 여자한테 집적거려?”

가차 없이 찍어 내리는 남자의 오만한 눈빛과 말투에 준환의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겨져 내렸다. 그런데도 눈앞의 남자에게서 그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붓으로 터치한 듯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과 달리 준환을 내려다보는 눈빛과 표정은 섬뜩했다.

입만 벌리지 않았을 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물어뜯어버릴 포악한 야수 같다고 해야 할까. 잡아먹히고 싶다는 기묘한 생각이 들 정도로, 심장이 후들거렸다.

준환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절실하게 깨달았다. 제아가 말했던 섹시한 야수라는 게 뭔지 말이다.

“정중히 사과해.”

태생적으로 타고난 지배자의 기운 때문인지, 길게 늘어진 눈매 끝에 배인 오만함 때문인지. 준환은 홀린 듯이 굴복할 뻔했다. 왜 내가 사과를 해? 그러다 바짝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도준이 덤덤히 되물었다.

“싫어?”

아니, 정신 차리자고. 우선은 저 새끼가 내 차를 박았잖아? 그건 100% 저 새끼 과실이야. 준환은 바짝 약이 올랐다. 비싼 차로 들이박는 대범함까지 갖췄다고 해도 결국은 돈깨나 있는 망나니일 뿐이다.

증거가 되어줄 블랙박스에 CCTV까지 있다. 그러니 쫄지 말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이보세요. 사과는 그쪽이 나한테 해야 하는 거잖습니까!”

버티는 준환을 향해 도준이 비스듬히 상체를 기울였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건 나직하고 덤덤하기 그지없는 속삭임이었다.

“내가 전화 한 통으로 널 끝장낼 수 있다면, 믿어지나?”

“뭐, 뭐라구요?”

“대학 교수라는 네 부모님도, 그리고 동기인 신영숙까지.”

“하아!”

도가 지나친 협박에 눈을 확 구기는 준환을 향해 도준이 그의 슈트 주머니에 명함 한 장을 꽂았다. 골드 명함을 도로 꺼낸 준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일 어패럴 대표 이사 한도준>

제일 어패럴 사장이라면 영숙이의 직속상관? 게다가 제일 그룹 손자라는 뜻도 된다. 게다가 동강 건설은 제일 건설의 하청업체. 부모님이 재직 중이신 대학마저도 제일 그룹의 지속적인 후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가 갈리도록 화가 나지만, 준환은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거금을 들여 산 차의 뒷면이 심각하게 찌그러졌든 말든,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건 자신이라는 걸.

빌어먹을, 황금 수저 같으니라고!

“저기, 제아 씨.”

순간 도준이 손을 들어 보였다.

“이름은 부르지 말고.”

“예?”

“그 이름, 나만 부를 수 있어.”

슬쩍 도준의 눈치를 본 준환이 다시 말을 고쳤다.

“내가 실수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제아가 그제야 준환을 향해 새침하게 입을 열었다.

“뭐가요?”

“네?”

“뭐가 미안한데요.”

“아, 싫다는데 집적거려서요. 멋진 애인분…… 있다고 했는데 믿지 않은 것도.”

이번엔 뒤로 한 걸음 물러선 도준이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과할 거 또 있으시잖아요.”

화가 치솟았지만, 제아의 뒤에 버티고 있는 야수 한 마리 때문에 준환은 마지못해 다시 물었다.

“그거 말고 내가 또, 실수한 게 있습니까?”

“정 모르시면 알려드릴까요.”

“내가 모른다면, 제…… 흠흠, 당연히 알려주셔야죠.”

“대학, 스펙, 그런 걸로 사람 판단하고 무시하지 마세요. 저보다 좋은 대학에, 스펙까지 좋으신데 인성은 초졸 수준이잖아요. 여자 꼬셔서 데려다줄 매너 보일 시간에 인성 공부 다시 하세요.”

준환에게 좀 더 다가선 제아가 또렷하게 눈을 마주하며 나직하게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내 남자 친구가 제때 나타난 걸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게 아니었으면, 허락도 없이 내 손 잡고 집적거리고 무시한 대가로, 그쪽 거기 눈물 확 쏟을 정도로 걷어차 줬을 테니까.”

내리깐 제아의 시선이 허리 아래 어딘가에 노골적으로 닿자 준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나 더. 신 선배님한테는 기꺼이 비밀로 해드릴게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10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통쾌한 기분은 바로 이런 거겠지? 준환을 등진 제아는 휙 돌아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제 남자의 팔짱을 꼈다. 기꺼이 그녀에게 팔을 내어준 도준이 옆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내려 제아를 응시했다.

“문제아, 멋지던데.”

“든든한 빽 있는 애인 믿고 나도 있는 척 좀 해봤어. 왜, 난 그럼 안 돼?”

새침하게 솟은 눈동자가 천진난만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앙칼진 내 고양이 같으니라고. 사랑스러워죽겠다는 듯, 도준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얼마든지.”

다른 여자와 달라도 너무 다른 이 여자 때문에.

“누가 너무 이용을 안 해줘서 썩어가는 중이라.”

재력과 권력, 하다못해 며칠을 지새워도 멀쩡한 괴물 체력까지.

“그러니까 능력 좋은 남자 친구 좀 실컷 이용해봐.”

그러려고 독하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으니까. 오로지 제아만을 심신에 각인한 채 버텨왔으니까.

“24시간 대기 중이니까.”

생긋, 웃음을 흘린 제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근데 그 남자가 신 선배님한테 우리 사이 말하진 않겠지?”

“알면 아는 거지.”

상관없다는 듯 도준이 대꾸하자 제아가 뽀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나 홍일점처럼 튀고 싶은 생각 전혀 없거든? 지금 회사 생활에도 만족하고. 내가 사장 애인이라면 여비서들이 날 편하게 대하겠어? 그리고 쉬쉬한다고 해도 사람 입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녀는 평범하지만, 도준은 그렇지가 않다. 그게 문제였다. 그래서 제아는 아직 둘의 사이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 새끼, 말 못 해.”

“오빠가 어떻게 알아?”

“허세 센 놈치고, 창피한 일 제 입으로 말하는 새끼 못 봤거든.”

하이에나의 근성을 타고난 놈이니 명함을 본 이상 입을 함부로 놀리지는 못하리라. 그제야 수긍이 되는 듯 고개를 끄덕인 제아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찌그러진 차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준환이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게 보였다.

“근데 보험사에 연락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보험사에서 알아서 처리할 테니 내버려두면 돼.”

“보험사가 어떻게 알고?”

“들이박은 순간 보험사 쪽으로 자동적으로 연락이 가.”

갑자기 제아가 뾰족하게 시선을 세웠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운전해? 오빠가 무슨 분노의 질주 빈 디젤이라도 되는 줄 알아?”

“통화 내용 듣다 보니 열 받잖아.”

“그런다고 비싼 차로 그렇게 들이받아?”

“그럼 어떻게 하라고, 네가 싫어하는 짓은 못 하겠는데.”

“내가 싫어하는 짓?”

모르겠다는 듯 제아가 묻자, 부드럽게 휜 눈매에서 스윽 내려온 시선이 살포시 얼굴에 와 닿았다.

“내 손에, 쓰레기 피 묻히는 거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아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럴 때 보면 은근히 과격하다니까. 저 단아한 외모 속에 도사리는 광포한 본성은 어마무시하다.

“문제아, 그러니까 상 좀 줘봐.”

제아가 끼고 있는 팔을 풀어 올린 도준이 그녀의 어깨를 꼭 감싸 끌어당겼다. 서로의 몸이 밀착된 만큼 도준이 비스듬히 얼굴을 숙였다. 착실하게 말 잘 들은 상을 달라는 듯이.

주먹에 피를 묻히는 대신 차선을 넘나들며 돌진해서 차를 박은 것, 그게 상 줄 일인가? 잠시 기가 막힌 듯 속눈썹을 빠르게 깜빡이던 제아는 이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입맞춤을 기다리는 도준의 새하얀 뺨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으니까.

쪽―.

깃털처럼 살포시 닿았던 입술이다. 그런데도 입술 점막 위로 여운 있게 감도는 서늘한 피부의 감촉 때문일까. 진한 키스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떨려왔다.

제아는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래도 앞으론 그런 무모한 짓 안 하겠다고 약속해.”

바라던 상을 받은 게 만족스러운 듯 도준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기꺼이 손가락을 걸어주었다. 유치한 어린 아이처럼 지장에 복사까지 마무리한 제아가 그제야 배시시 웃으며 다시 도준에게 팔짱을 꼈다.

“근데 오빠 스케줄 벌써 끝났어?”

제아가 인호에게 받은 일정대로라면, 도준은 지금 이 시간에 절대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유 실장한테 말하고 1시간 여유 내서 온 거야. 너 데려다주려고.”

도준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흘렸다. 지금쯤이면 틀어져버린 일정을 조율하느라 인호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겠지. 제아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 데려다주고 다시 여기 오려면 1시간 넘잖아! 그냥 나 혼자 갈 테니까 오빤 일 보러 가. 응?”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제아를 눈에 담으며 도준은 생각했다.

다른 남자가 널 보는 것만으로도 난 화가 나거든.

“불안해서 안 돼.”

꼭지가 돌아버릴 정도로,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그럼 나 모범택시 타고 갈게!”

무서운 집착과 소유욕에 사로잡힌 도준의 상태도 모른 채 제아가 그를 향해 빙그르르 돌아서서 눈을 마주쳐왔다. 오롯이 그만을 담고 있는 그 눈빛에 치밀었던 분노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제어가 되지 않는 지독한 자신을 유일하게 잡아주는 존재가 나름대로의 협상안을 제시했다.

“일 제치고 달려오는 거, 그것도 여자들이 로망이래?”

“문제아.”

“미안하지만, 난 아니야. 내가 탄 택시 번호를 오빠가 외워주고, 오빤 예정대로 일하러 가는 거. 난, 그게 로망이야.”

잠시 말을 멈춘 제아가 갑자기 그를 향해 생긋 웃었다.

“이 멋진 남자가 내 남자구나. 그게 언제인지 알아?”

도준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대체 이번엔 무슨 말로 날 설득하려고.

“난 일에 열중하는 오빠가 젤 멋있어. 그러니까 오빠 여친이 백조 되게 하지 말고 얼른 달려가서 제일 어패럴 살려주셔야죠. 오빠 회사, 그리고 내가 다니는 회사. 아직 갈 길이 멀잖아?”

장화 신은 고양이 캐릭터처럼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제아가 귀엽게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돈 많은 남친님, 택시비 주세요. 참고로 카드는 사절입니다.”

하아, 이걸 거절할 수도 없고. 도준은 옅은 한숨과 함께 지갑에서 십만 원권 수표를 한 장 꺼내 제아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도착하면 연락할게.”

받아든 수표를 살랑거리면서 제아는 미련 없이 모범택시를 잡아 올라탔다.

택시가 출발하기 전, 열린 창 문 틈으로 그에게 안녕을 고하는 손을 응시하며 도준은 인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바로 갈 테니 일정 그대로 진행해.”

제아를 태운 택시가 멀어지고 나서야 도준은 따스한 온기 대신 찬 공기만이 가득한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제아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곁에 없으면 지독히도 느껴지지 않는 공기 같은 존재, 그게 바로 제아였다.

넌 날 불안하게 만들어. 네가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정확히 한 시간 후 제아에게서 문자가 왔다. 차 안에서 그 문자를 확인한 도준은 시니컬하게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문제아, 나란 남자 실컷 좀 이용해 보라니까.”

-집 무사히 도착, 택시비하고 남은 돈은 킵해놓을게. 그리고 내일 데리러 오지 마. 바쁜 오빠가 데리러 오는 것보다 버스 타고 가는 게 편하니까.-

***

퇴근을 하기 전, 오늘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는 집무실의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실컷 봐놓을걸.’

여비서들과 함께 1층 로비에 도착하자 김 비서가 조그맣게 외쳤다.

“우리 사장님이에요!”

오늘 단 하루도 보지 못한 도준이 임원들과 함께 로비에 있었다. 오늘 유일한 회사 내부 일정이 제일 어패럴 사옥 본관이 아닌 서관 건물 브리핑실에서 있었는데 이제 끝난 듯했다.

다시 외부 일정을 나가려는지 블랙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도준은 여비서들을 등지고 있었다. 비록 뒷모습일 뿐이지만 그 모습조차 그리웠기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시야에 무언가 이상한 게 포착이 되었다.

도준이 서 있는 바로 위쪽, 나선형으로 둘러진 2층 난간 위에 놓인 큰 화분이 불안하게 몸을 흔들거렸다. 그걸 본 순간,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사장님!”

우렁찬 그녀의 외침에 막 돌아서는 도준의 품으로 코뿔소처럼 돌진한 제아가 와락 안겨들었다. 얼마나 세게 안겼는지, 그녀를 받아낸 도준의 몸이 기우뚱 중심을 잃고 뒤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도준이 서 있었던 그 자리에 커다란 도자기 화분이 떨어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났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정적이 흐르고, 뒤늦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도준을 쿠션 삼아 떨어진 제아는 다행히 충격이 적었다. 그 순간에도 도준은 코트를 벌려 그녀를 꼭 감싸고 있었다.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제아의 뒷목을 감싼 그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 게 느껴지고 강인한 도준의 심장 박동이 가슴에 닿은 뺨으로 스며들었다.

“문제아…… 씨.”

흔들림 없는 나직하고 무심한 음성에 조심히 고개를 들자 나른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 곳곳을 세심하게 훑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저는 괜찮……아요.”

몸은 멀쩡했지만 심장이 멀쩡하지 않았다. 터질 것처럼 뛰는 그녀의 심장. 얼마나 놀랐는지 말과 달리 온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오빠도 괜찮은 거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 대신 제아도 눈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화분의 파편이 튀었는지 새하얀 도준의 뺨에 길게 그어진 생채기가 보였다.

“흠, 흠.”

“어험, 어험.”

그제야 지켜보는 눈들이 많다는 걸 의식한 제아가 몸을 일으키자 도준도 일어났다.

“사장님, 얼른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살짝 베인 것뿐이니, 호들갑 떨 필요 없습니다.”

흔들림 없는 도준의 서늘한 음성에 술렁이던 주변은 가라앉았다. 인호는 어느새 로비를 지키던 경비원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 비서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우연히…… 봤습니다. 사장님이 다친 곳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차분하게 대답하며 도준에게 웃어 보였지만, 얼마나 놀랐는지 입술 끝이 가늘게 경련이 일어났다.

내리깐 시선에 산산조각이 난 화분 조각이 닿자, 서 있는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저게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을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많이 놀란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그의 음성에선 진심 어린 걱정이 잔뜩 배어 있었다. 다칠 뻔한 건 그녀가 아닌 도준 자신인데도 말이다.

경호원과 대화를 끝내고 다가온 인호에게 도준이 말을 했다.

“유 실장, 문 비서가 많이 놀란 것 같으니 집까지 데려다주도록 해.”

“저는 괜찮?”

“내가 괜찮지 않습니다.”

단호한 그의 음성에 제아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도준은 남자친구가 아닌 그녀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이었다.

지켜보는 눈까지 많았기에 사장의 말을 거절할 만한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까지 벌컥거리는 심장 박동이 정상치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날 구해준 것에 대한 보상은 내일 다시 이야기하죠.”

인호가 내미는 차 키를 받아 든 도준은 제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몸을 틀었다. 그의 뒤로 주렁주렁 매달린 임원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그제야 여비서들이 제아에게 우르르 다가왔다.

“제아 씨, 괜찮아? 대체 그걸 어떻게 봤대?”

“그러니까요. 언니 아니었으면 사장님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언니, 진짜 최고였어요!”

여비서들의 말조차 제아의 귀에는 지금 들리지 않았다.

“문 비서, 나랑 같이 주차장으로 내려갑시다.”

“실장님,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생명의 은인을 데려다주지 않으면 한 사장이 날 잡아먹을 겁니다.”

도준의 성격을 잘 알기에 제아는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실장님, 차 가지고 회사 앞으로 나와 주시면 안 될까요?”

말을 하는 제아의 시선은 로비를 나서는 도준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늘은 마지막이 될 그의 모습을 멀리서라도 끝까지 눈에 담고 싶었다.

인호가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제아는 여비서들과 함께 로비를 나섰다. 임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회사 앞에 인호가 미리 주차해둔 차를 타는 도준이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차에 오르기 전 도준의 시선이 임원들 뒤를 더듬었다. 그리고 회사 출입문 입구에 서 있는 제아를 발견했다.

허공에서 애틋하게 얽힌 서로의 시선.

‘연락할게.’

‘연락 기다릴게.’

오가는 눈빛만으로 대화를 나눈 후에야 도준이 차에 올라탔다. 그가 탄 차가 움직이자, 그제야 제아는 주차장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틀었다.

끼이이이익―!

기분 나쁠 정도로 고막을 찢는 소리가 다시 시선을 틀어잡는 순간, 사거리 도로에서 무섭게 돌진한 차 한 대가 도준이 타고 있는 차의 뒤를 거칠게 박았다.

쾅―!

그 충격에 도준의 차가 꺾여 밀리면서 반대편 도로의 턱에 부딪히며 멈추어 섰다. 연달아 이어진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잠시 후, 운전석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도준이 비틀거리면서 내렸다. 새하얀 도준의 얼굴이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도준 오빠!’

다리에 힘이 풀린 제아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그의 얼굴을 물들이는 붉은 피가 그녀의 심장까지 물들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