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내가 먼저 유혹할 때까지 기다려.
2017.02.06.
무심히 그녀를 내려다보는 도준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그런데도 계속 보고 있노라면 느껴진다. 무심하리만치 내리깐 눈빛에 갇혀 아우성치는 짙은 욕망이.
오빠가 아닌 한 여자를 향한 지독한 욕망에 사로잡힌 남자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문제아, 나도 남자야.”
제아를 주시하던 눈빛을 뗀 도준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새하얀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흑색 머릿결마저도 왜 이렇게 자극적으로 느껴지는지. 도무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을 지경이었다.
―나도 안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정상적인 남자야.
그가 예전에 했던 말이 아찔하도록 와 닿는 순간이었다.
제아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애꿎은 머리칼만 귀 뒤로 넘겼다.
데일 듯이 뜨거웠던 도준과의 세 번의 키스.
성적인 부분에 대해선 무지한 그녀였기에 그 이상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아쉬움만 느낄 뿐이었다. 아무리 마셔도 해갈이 되지 않는 갈증처럼.
‘설마 나도, 오빠를 원하는 걸까.’
풍덩, 끝도 없는 깊이의 바다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숨이 탁 막혀오는데도 점점 더 가라앉고 싶은 기묘한 욕망, 그게 도준을 향한 그녀의 감정이었다.
도준과의 사랑은 숨이 막혀온다. 그런데도 자꾸만 하고 싶어진다. 모든 걸 감내하면서까지 말이다.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도준이 느닷없이 팔을 뻗었다. 느릿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피하고 싶으면 피할 기회를 주려는 듯.
그 손길을 피하지 않은 제아가 얌전히 품에 안기자, 도준에게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 손길을 거부할까 봐 불안했던 것처럼.
한숨에 짙게 스며든 절제된 그의 본능이 느껴졌다.
“네가 싫다면, 평생토록 손끝 하나 안 대.”
냉랭한 밤공기 속, 미약하게 떨리는 그의 숨이 귓가에 닿았다.
“그러니까 사람 불안하게 그런 눈빛 좀 하지 마.”
시니컬하게 내뱉는 중저음에 조바심이 배어 있었다. 짙은 욕망이 점멸해버린 그의 눈동자는 차가우리만치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부드럽게 머리를 어루만진 도준이 품에서 그녀를 놓아주었다.
“날씨 춥다. 얼른 들어가.”
머리에 헬멧을 쓰려는 도준의 손을 이번엔 제아가 잡고 멈추게 했다.
침묵하고 있던 시간은 찰나였지만, 흐트러져 있던 감정들은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었다. 그래서 제아는 또렷한 눈동자로 그를 직시하며 물었다.
“내가 오빠랑 자면.”
도준이 쓰려는 헬멧을 다시 툭, 떨어트렸다. 진중하게 응시하는 눈빛이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럼 그다음은?”
도준에게 그새 배운 걸까. 그냥 가감 없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를 믿지만, 제아도 여자였다. 그리고 여자의 마음은 얕은 바람에도, 미약한 불안함에도 몸을 흔들어대는 나약한 갈대였다.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존재가 여자였다.
정복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갈망하는 남자가 여자의 심신을 정복한다면 그 후는 어떻게 될까.
특히나 도준처럼 남다른 승부욕을 가진 남자라면.
완벽한 금 수저로 갈아탄 도준은 많은 걸 쥐고 있지만 흙 수저를 평생 입에 물어야 할 그녀는 아니었다. 쥐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의 사랑에 이어 몸으로 통하는 사랑까지 확인하고 난 후, 문득 그 끝이 문득 궁금해졌다.
“오빠랑 나, 변함없을까?”
도준이 눈을 마주쳐왔다. 동공 깊숙이 침범한 그의 눈빛이 심장까지 단번에 쓸어내렸다. 제아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내가 변해.”
쿵! 제아는 심장이 꺼진 바닥 밑으로 무한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추락해버린 심장처럼 마음도 내동댕이쳐졌다. 시선도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뭐든지, 서슴없이, 가감 없이 대답하는 게 도준이니까. 그런데 이런 무서운 솔직함마저도 이젠 좋아. 어쩌지?
떨어진 시야로 검은 손끝이 다가와 제아의 턱 끝을 잡아 올렸다.
“널 향한 내 사랑이.”
비스듬히 틀어져 그의 얼굴이 다가온다.
“숨도 못 쉬게 할 정도로 지독해지겠지.”
홀린 듯이 눈을 감자, 차가운 공기에 얼어붙은 서늘한 입술이 짧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야.”
제아는 짧은 입맞춤과 함께 기울어진 만큼 뒤로 물러서는 도준의 목을 와락 감아서 끌어안았다.
“나쁜 버릇, 오빤 꼭 고쳐야 돼.”
사람을 들었다 놨다, 지옥에 갔다 천당에 갔다, 오락가락하게 하는.
“사람 헷갈리게, 중요한 건 가장 뒤에 말하는 버릇.”
그것마저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몹쓸 남자.
“물론 오빠의 그런 것까지도 사랑하지만.”
보지 않아도 소리 없이 입꼬리를 당겨 웃는 도준이 느껴졌다.
얄미워, 정말.
그래서 그녀는 그의 귀에 바짝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오빤 더 애가 타야 해.”
의도적으로 귀를 간질이는 애틋한 숨결.
도준의 호흡이 살짝 흐트러지는 게 느껴졌다.
“10년 동안 연락 한 통 하지 않은 벌이야.”
제아는 쓸어내리듯 그의 목을 감쌌던 팔을 천천히 풀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흐트러진 호흡만큼 흐트러진 그의 짙은 눈빛을 마주하며 생긋 웃었다.
“그러니까 좀 더 기다려.”
남자의 사랑을 흠뻑 받은 여자는 당당하고 매력적이다. 어떤 모습이든, 어떤 상황이든.
온몸을 꽉 채우는 도도한 자신감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와 말을 끝맺었다.
“내가 먼저 유혹할 때까지.”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숨 막히듯이 서로를 옥죄는 사랑놀이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도준이 아닌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
어젯밤 제아가 아찔하게 그를 건드려놓은 덕분에 도준은 잠을 설쳐버렸다.
그는 지금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고 있는 중이었다. 광포한 야수로 돌변해서 제아를 무지막지하게 집어삼켜버릴 자신에게서 지켜주려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속도 모르고, 아쉬움 가득 어린 눈빛으로 키스해달라고 바라봐버리면 어쩌라는 건지. 그래서 좀 알아달라고 경고를 해준 건데, 도준은 그답지 않게 후회라는 걸 하는 중이었다.
제 손으로 제아의 손에 치명적인 약점을 쥐여준 기분이랄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주도권을 빼앗긴 채 제대로 제아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점심이 지나서야 회사에 도착한 도준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제아부터 찾았다. 여비서들 끝에 새침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아가 보였다.
머리를 푼 게 예쁘다고 했는데도 기어코 또 머리를 틀어 올렸다. 그 덕분에 도드라지게 보이는 가늘고 긴 목덜미가 유혹적이었다.
‘저것도, 유혹 아닌가.’
바보같이 그런 착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시선조차 떼지 못할 정도로 중증인 자신과 달리 제아는 한번 봐줄 법한데도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제대로 애를 태우려고 작정을 한 게 아니고서야.
집무실에 들어온 도준은 인호가 메일로 보낸 변경된 스케줄을 빠르게 확인했다. 빈틈없이 짜인 일정이 내일까지는 마음껏 제아를 보지 못할 거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때마침 인호가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또 실실 웃으며 그를 쳐다보는 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돌려서 말하는 건 딱 질색인지라 도준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인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했다.
“쓸데없는 말이라고 판단되면, 이번 달 아예 못 쉴 줄 알아.”
“어헛! 듣고서나 그런 말 해. 그리고 정당한 내 휴일을 빌미로 그렇게 협박하면 쓰나?”
“제일 어패럴에서 사장 다음으로 연봉이 높은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휴일은 애초에 연봉 계약할 때 너에게 명시했던 부분이고.”
하여간, 융통성은 진짜 없다니까. 잠시 눈살을 찌푸린 인호가 집무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우연히 들은 정보를 그대로 전달해주자면. 오늘 저녁 약속 잊지 않았지? 잘나가는 여비서들한테 어울릴 만한 능력 좋은 남자들로만 골라서 데리고 나와. 알았어?”
“…….”
“물론 문 비서가 천하의 한도준을 놔두고 다른 남자한테 한눈을 팔 일은 없겠지. 안 그래? 난 그냥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들은 신 비서의 통화 내용을 전달했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
너스레를 떨며 인호가 소파에 앉았는데도 도준은 한참 동안 업무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제아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회사에 온 지 한 시간 만에 스케줄 때문에 퇴근을 한 도준에게선 연락 한 통 없었다. 그의 직속 부서인 비서실에 있으면 실컷 얼굴을 볼 줄 알았는데.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 딱 두 번, 그것도 뒷모습만 본 게 오늘 그를 본 전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아침에 고개를 들고 볼걸 그랬나 보다.
그런데 도준과 비밀 연애를 하고 나니 괜히 의식이 되어서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책상을 정리하는데 드디어 도준에게 연락이 왔다. ‘한 사장님’이라고 뜬 걸 보자마자 제아의 입가에 배시시 소리 없는 미소가 어렸다.
-어디야.-
-회사지. 곧 퇴근할 건데 오늘 비서실 회식 있어. 신 비서님이 저녁 쏘기로 했거든.-
-회식, 갈 건가?-
-당연히 가야지.-
-안 가면 안 되고?-
-나 지금 비서들이랑 사이 엄청 좋거든요? 퇴근 후 회사직원들이랑 사적으로 밥 먹는 거 첨이라서 떨리기까지 하거든? 이런 것까지 속 좁게 간섭하지 마시죠, 애인님.-
도준에게서 바로 오던 답장이 툭, 끊기자 순간 제아는 불안해졌다.
속 좁다는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장난으로 한 말인데, 도준에겐 먹히지 않은 것 같았다.
신 비서가 안내한 곳은 ‘로망’이라는 회사 근처의 고급스러운 일식 선술집이었다. 그런데 선술집에 들어서자마자 낯선 남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들을 반겼다.
그제야 신 비서가 생긋 웃으며 여비서들에게 넌지시 귀띔을 해주었다.
“친한 대학 동기랑 동기 직장 동료들이야. 후배들 자랑 좀 했더니 소개팅 시켜달라고 해서. 직장도 빵빵하고 집안까지 다 괜찮은 남자들이래. 잘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한 번 놀고 마는 거니까 그냥 가볍게 먹고 마시고 헤어지는 거야. 오케이?”
남자들을 빠르게 훑어본 윤 비서가 먼저 조심히 물었다.
“회사 어디 다니는데요?”
“동강 건설 다녀. 최소 대리급 이상이니, 걱정은 하지 말고.”
동강 건설이란 말에 눈을 반짝이는 여비서와 달리 제아는 갑작스러운 이 자리가 불편해졌다. 남자가 있는 자리라는 걸 알았다면, 애초에 거절했을 텐데.
다른 남자들을 볼 바에야 차라리 집에서 핸드폰으로 도준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 비서님, 저는 그냥 빠지는 게.”
“빠지기는! 머릿수 딱 맞게 나오라고 했는데. 밥통 같은 우리 회사 남자들보다 훨씬 괜찮은 남자들이야. 이제 제아 씨도 연애도 하고 해야지, 안 그래? 부담 갖지 말고 우선 앉아 봐.”
신 비서가 억지로 밀어서 자리에 앉히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회식 장소 어디야.-
-로망이라는 일식 선술집이야. 왜? 데리러 오게?-
-지금 스케줄이 언제 끝날지 몰라.-
답장을 확인하는 순간 제아의 어깨가 추욱 처졌다. 남자들하고 있다고 하면 당장 달려올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바쁜 사람을 쓸데없는 일로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잠깐 있다가 일어날 거니까.
그때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코트도 벗지 말고, 머리도 풀지 마. 술도 마시지 말고.-
도준의 메시지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얼른 먹고 집에 가라는 뜻이겠지.
“제아 씨는 어떤 남자 스타일 좋아합니까?”
하필이면 신 비서의 대학 동기가 제아에게 호감을 내보였다.
“키 크고 잘생기고 똑똑하고 섹시한, 야수 같은 남자요.”
‘적어도 넌 아니랍니다.’라는 의미로 생긋 웃어준 제아는 옆에 앉은 신 비서에게 넌지시 말을 했다.
“신 비서님, 저 집에 일이 생겨서 먼저 일어나봐야 할 것 같아요. 어쩌죠?”
“집안일이라면 당연히 가봐야지! 한준환, 네가 좀 데려다 줘.”
“아니에요! 분위기 좋은데 더 노세요. 저는 알아서 갈게요!”
선술집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코트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울렸다.
도준 오빤가?
뒤에서 자꾸만 빵빵거리는 클랙슨 소리에 바짝 손에 힘이 들어가 핸드폰 통화 버튼이 연결된 줄도 몰랐다.
설마 또, 다리 구경하는 변태 자식 아니야?
그녀가 눈살을 확 찌푸리며 돌아서자 국산 차 치고는 꽤 고가인 풀 옵션의 SUV가 멈추어 서고, 내려간 창문 틈으로 남자가 고개를 쓱 내밀었다.
“제아 씨, 데려다줄 테니까 타요.”
신 비서의 대학 동기라는 준환이라는 남자였다. 굳이 괜찮다고 했는데도 기어코 따라 나온 것이다.
귀찮음이 솟아올랐지만, 신 비서의 친구라는 걸 떠올리며 그녀는 예의 바른 표정을 유지했다.
“술 드셨잖아요.”
“사케 한 잔 먹은 거라 괜찮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가서 노세요. 전 버스가 편하거든요.”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준환은 기어코 차에서 내려 제아에게 다가왔다.
“저 제아 씨한테 관심 있어서 그러는 건데, 좀 받아주시면 안 됩니까?”
서글서글 웃는 인상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난 이미 임자 있는 몸인데.
그것도 키 크고 잘생기고 똑똑한 데다 섹시한 야수 남친이 있단 말이다.
“죄송하지만, 전 그쪽한테 관심 없어요.”
“제아 씬, 내가 마음에 안 듭니까?”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사실은 제가 애인이 있거든요.”
부드럽게 휜 준환의 눈이 제아의 손가락에 머물렀다. 괜한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목까지 잠가 올린 코트 단추까지 풀고 반지를 내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준환이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제아의 얼굴에서 서서히 짜증이 배기 시작했다. 신 비서의 동기라도 해서 지키려고 했던 기본 매너가 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키는 180, 한국대이니 머리 똑똑한 건 알 테고, 얼굴도 이 정도면 잘생겼다 듣습니다. 그리고 섹시한 야수도 해당은 되는 것 같은데, 여기서 보여줄 순 없고.”
묘한 여운을 남기며 그가 씨익 웃자, 제아는 갑자기 소름이 확 돋았다.
“부모님은 모두 대학 교수이고, 동강 건설 최연소 과장이니 능력도 좋은 편입니다. 어때요? 이 정도면 이상형에 해당되지 않습니까?”
“엄청 멋지고 완벽한 분이신 건 아는데, 저 정말 애인 있어요. 거짓말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발 좀 비켜주실래요?”
“영숙이한테 모태 솔로라고 들었는데, 애인 있다고 거짓말을 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별로인가 보죠? 데려다주겠다고 쫓아온 성의까지 무시하는 걸 보니.”
제아는 잠시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정중히 몇 번이나 거절했다. 그리고 누가 쫓아 나와서 데려다주라고 했나?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했으면 엄청 큰일 날 뻔했네요. 선술집은 여기서 백 미터도 안 되니까, 다시 들어가시면 될 것 같은데요?”
“대학도 안 나왔다는데. 내놓을 만한 것도 아무것도 없고.”
준환의 말에 제아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이 미친놈이 여기서 왜 갑자기 또 대학 타령이야.
뾰족하게 날이 선 제아의 눈동자가 준환의 얼굴에 앙칼지게 꽂혔다. 그런데 준환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래서요.”
“내가 대시하면, 기분 좋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 그런 것도 신경 안 쓸 만큼, 난 제아 씨가 꽤 마음에 들거든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준환의 눈이 제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헐렁한 코트를 입어도 감추어지지 않은 날씬하면서도 육감적인 몸매를 더듬듯이.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핸드백을 쥐고 있는 손이 저놈의 면상을 날려버리라고 자꾸만 올라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신 비서님 친한 대학 동기니까 참자, 참자 또 참자.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는 더 신경이 쓰여서 못 만나겠네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데서 우물 파지 마시고 다른 데 가서 알아보세요.”
그를 지나쳐 가려는데 준환이 제아의 손목을 잡아채서 돌려세웠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목이 아릿할 정도로 아팠다.
“에이, 데려다준다니까요.”
“이봐요!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요? 싫다잖아요! 애인 있다잖아요!”
“그 애인 얼굴이라도 보여주든지. 물론 진짜 애인이 있다 해도 나보단 못할 것 같은데, 아닌가?”
참을 만큼 참았다. 진짜 끈질긴 놈 같으니라고! 뭣도 없는 여자는 뭣도 있는 네놈이 관심 가져주면 ‘네, 네, 황공합니다.’ 하고 덥석 안길 줄 알았냐!
그렇게 쏘아붙이려는 순간, 거리 옆 대로에서 시끄럽게 경적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끼이이익―!
묵직하면서도 거칠게 미끄러지는 차 소리가 고막을 긁어내렸다. 고개를 트는 순간 제아는 제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억대의 몸값을 자랑하는 벤틀리 한 대가 불법 유턴도 모자라 오토바이처럼 제멋대로 차선을 넘나들고 가로질러 그녀 쪽으로 돌진했다. 다행히도 차가 별로 없어서 망정이지,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콰아아아앙―!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차선을 넘어온 벤틀리는 갓길에 세워놓은 준환의 차를 뒤에서 고의적으로 들이박았다. 넋 놓고 지켜보던 준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악! 내 차! 뽑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제 몸값의 몇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차를 들이박은 벤틀리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멈추어 섰다.
차에서 내린 남자가 유유자적 그들 쪽으로 거침없이 다가왔다. 고가의 차도 주눅이 들 만큼 우아하고 고상한 남자에게서 제아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거침없이 두근거리는 심장, 온몸을 빠르게 감도는 혈류.
이유 없이 차가 들이박힌 준환은 명백한 피해자였다. 그런데도 제 차의 몸값보다 비싼 시계와 네이비 색 정장을 멋지게 소화한 남자의 아우라에 눌려 쉽사리 반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 당신 뭡니까? 대체 뭔데 남의 차를 그렇게 들이박냐고요!”
기럭지마저 우월한 남자는 오만한 시선으로 단번에 준환을 내리눌렀다. 손에 든 핸드폰을 흔들면서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나? 네가 집적거리는 이 여자 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