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지금 당장, 널 침대로 데려가라고.
2017.02.02.
그러면 안 되는데도 주책맞은 입은 주인의 의지를 거부한 채 제멋대로 움직여 버렸다.
“……나도.”
말리지는 못할망정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버린 것이다. 내게로 얼른 달려오라고.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곧이어 뭔가를 결심한 듯 도준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30분.]
“30분?”
[널 보러 가는 데 걸리는 시간.]
순간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30분 만에 우리 집으로 온다는 건지. 거의 끝과 끝인데 말이다. 그답지 않게 현실보다 마음이 앞선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마음은 이해하는데, 30분 만에 우리 동네까지 오는 건 무리야. 그러니까?”
[기다려, 갈 테니까.]
너무도 단호한 그의 음성에 제아는 결국 알았다고 해버렸다. 통화가 끝난 후에야,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이면 한강대교도 엄청 막힐 시간인데. 하지만 멍 때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키지 못할 말은 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알기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택시! 택시!”
부자 동네인데 택시는 왜 이렇게 안 다니는지, 비싼 수입 차만 보일 뿐이었다. 그나마 멈추어선 택시를 본 제아의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왜 하필, 모범택시인 거야.
제아가 타지 않자 차창 문이 내려가고 기사님이 물었다.
“아가씨, 탈 거요, 말 거요? 이 동네에서 택시 잡기 힘들 건데.”
“타, 타요!”
처음 타보는 모범택시는 승차감도 끝내줬다. 그게 더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승차감이 좋은 만큼의 대가를 돈으로 치러야 하니 말이다.
“저기 기사님, 혹시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이 시간엔 한강대교가 차로 꽉 들어차니 시간을 딱 말해줄 수 없지. 아마 최소 1시간은 넘게 걸릴 것 같은데.”
잠시 머뭇거리던 제아는 결국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가방을 쥐고 있는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녀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손을 들어 기사님을 향해 손가락 두 개를 정확히 보이며 흔들었다.
“택시비 따블로 드릴 테니, 어떻게 30분 안에 안 될까요?”
따블이란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던 택시 기사가 입을 열었다.
“30분은 불가능하고, 내가 50분 안에 도착하게는 해보지.”
제아가 오케이를 하는 순간, 택시에 속도가 붙었다. 이리저리 차선을 옮겨 다니기 바쁜 택시는 한강대교가 아닌 동네를 끼고 있는 좁은 길을 몇 번이나 옮겨 다니며 달리고 있었다.
“이건 오래 운전한 사람들만 아는 길이지. 아주 비상시에만 이용하거든.”
더블을 외쳐서 그런지 기사님은 상당히 신이 나 있었다.
“저기 기사님, 기사님이 봐도 30분 안에 도착하는 건 말도 안 되죠?”
“말도 안 되지. 차가 하늘을 날지 않는 이상.”
운전의 베테랑인 기사님의 말씀은 곧 진리.
제아는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도로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도준이 30분이라고 말을 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택시는 정확히 48분 만에 동네 앞 큰 도로에 도착했다.
카드를 내미는 그녀의 손이 후들후들 떨려왔지만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일은 헬퍼 월급이 들어오는 날이니까, 감당할 수 있어.’
그런데도 영수증에 찍힌 금액을 보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골목길로 접어드는데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도준이었다.
[어디지?]
그가 묻자 그녀의 걸음이 소리 없이 빨라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고급 세단도, 스포츠카도, 평범한 국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헐떡이는 숨을 집어삼키며 도준에게 태연하게 물었다.
“집이지! 오빠는 도착했어?”
[근처에 볼일이 있으니 20분 후에 큰 도로로 나와.]
“응!”
볼일이 있다는 그의 말에 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부리나케 달려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제야 어둠 속에서 도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핸드폰을, 다른 한 손엔 헬멧을 든 채 말이다.
“다녀왔습니다!”
가방을 소파에 집어던진 제아는 윤영에게 건성으로 인사를 하며 욕실로 뛰어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집에 있었던 척하려면 틀어 올린 머리만은 감아야 했으니까.
머리의 물기가 마를 틈도 없이 다시 집을 나왔다. 에일 듯한 추위에 물기 맺힌 머리가 꽁꽁 얼어붙는 느낌이었지만 이를 앙 다물고 걸음을 빨리 했다. 그런데 도로가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도준은 보이지 않았다.
휭하고 부는 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는 순간, 도톰한 아우터가 뒤에서 그녀의 몸을 폭 감싸 안았다. 곧이어 두툼하게 감싸인 몸이 돌려세워지고, 지독히도 낯선 모습을 한 도준이 눈앞에 서 있었다.
검은 무스탕 재킷, 두툼한 니트 목티, 블랙 진, 가죽 장갑까지. 옷차림은 반항아 포스가 물씬 나는 잡지의 표지 촬영 같은데도 그만의 단정함은 변함이 없었다. 결론은 뭘 어떻게 입어도 그만의 스타일로 소화가 된다는 것.
“따뜻하게 입고 나왔어야지.”
힘없이 깜빡이던 가로등 불빛이 다시 살아나서 그의 얼굴을 새하얗게 비추어 주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저 얼굴, 어쩔 거야.
“엄마한테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해서 대충 걸치고 나온 거야.”
거실에 윤영이 있기에 잠깐 집 앞 슈퍼에 나갔다 오는 척 하며, 얇은 경량 패딩 점퍼를 입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제 몸을 감싸고 있는 두툼한 아우터는 패딩이 아니라 무스탕이었다. 도준이 입고 있는 것과 사이즈만 다를 뿐, 디자인이 똑같은 무스탕. 그녀가 이렇게 입고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커플룩, 마음에 드나?”
도준이 손을 뻗어 무스탕의 지퍼를 채웠다.
“이것도 여자들의 로망이라고 사이트 검색에 나왔어?”
“여자들의 로망, 상상 이상으로 다양하게 많더군.”
미약한 불만이 배어 있는 그의 말투에 제아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실 도준의 가감 없는 차가운 성격을 알기에 이런 건 바라지도 않았었다.
그 대신 돈 자랑만 하는 연애를 하려고 할 땐 따끔하게 한마디 해줄 참이었다. 난 제일 그룹 손자가 아니라 한도준이란 남자랑 연애하는 거라고.
그런데 이번에도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본 걸까. 불쾌감 없는 적당한 돈 자랑에 평범한 연애의 묘미를 아주 톡톡하게 그녀에게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행복하고 설레게, 두근거리고 심장 떨리게.
“그래서 평생토록 해볼 생각이야.”
지퍼를 채워 올리는 손길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들자, 오롯이 그녀만을 담은 도준이 보였다.
“나를 만날 때마다 네가 설렜으면 해서.”
깊숙이 파고든 눈빛이 심장을 꽁꽁 동여매서 붙들었다.
“권태기 같은 거 느끼지 말고, 평생 내 곁에 있으라고.”
심장이 붙들린 채, 제아는 그의 허리를 양팔로 붙들어서 끌어당겼다. 가슴에 볼을 댄 채 자그맣게 속삭였다.
“오빠야말로 각오해.”
이래서 남자들은 여자를 모른다니까. 여자들이란 크고 작은 로망을 이루어주는 남자의 말과 행동에 설레는 게 아닌데.
“평생토록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을 테니까.”
사랑하는 남자의 존재 자체가, 여자들에겐 로망이고 설렘이다.
“찰거머리처럼 잘 붙어 있나, 지켜봐야겠군.”
무슨 소리냐는 듯 품에서 고개를 들자 그가 제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상가 벽에 바짝 세워진 오토바이 앞에 멈추어 섰다. 그제야 도준의 낯선 옷차림도, 빨리 도착한 시간도 이해가 되었다.
“오토바이 타고 온 거야? 이 추위에? 위험하게?”
제아는 그저 어안이 벙벙한 눈빛으로 오토바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네가 보고 싶다고 하니까.”
뒤에 바짝 붙은 그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래서 못 참고 달려왔잖아.”
날렵하고 쌔끈하게 빠진 오토바이의 디자인은, 꼭 제 주인 같았다.
제아의 손끝이 바이크의 머리부터 서서히 훑어 내리는 순간…….
“한번 타보든지.”
도준이 유혹을 한다.
“추위도 잊게 할 만큼, 매력적인 녀석이거든.”
제아의 손끝이 검은 헬멧이 닿았다. 나란히 걸려 있는 헬멧은 한 개가 아닌, 두 개였다.
“이미 뒤에 태우려고 작정하고 온 거 같은데?”
제아가 밉지 않게 흘겨보자 도준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들켰다는 듯.
“어렸을 땐 태워달라고 해도 안 태워주더니.”
“넌 그때 미성년자였어.”
“오빠도 미성년자였거든?”
“나는 망가져도 되지만, 너는 안 되니까.”
제아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자, 도준은 피식 웃으면서 오토바이로 다가갔다. 긴 다리로 한 번에 올라탄 그가 헬멧을 쓰는 모습을 제아는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완벽한 단정함이 트레이드마크인데도 잘 빠진 오토바이와 한 몸이 된 그의 모습은 근사했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그의 손짓에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그녀의 머리 위로 헬멧이 씌워졌다.
“그럼 지금은 왜 태워주려는 건데?”
손에 가죽 장갑까지 끼워준 후에야 도준의 팔이 제아의 허리를 휘감았다.
“이젠 동생이 아니니까.”
가뿐하게 몸이 들림과 동시에 제아는 그의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뭐든지 나와 함께할, 내 여자이니까.”
도준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제아는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문제아, 마음껏 소리 질러도 돼.”
“아무리 무서워도 소리 안 지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출발이나 하시죠.”
그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오토바이가 거칠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순식간에 붙는 스피드가 굉장했다.
오토바이가 이내 도로로 접어들었다. 휙휙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밤풍경은 차를 탔을 때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두툼한 무스탕을 입었는데도 매서운 추위가 스며들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왜 남자들이 스피드를 즐기는지 온몸으로 절실하게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소름이 확 돋는데도 구미가 당긴다고 해야 할까.
“꽉 잡아!”
엄청난 소음에 섞인 도준의 말을 못 알아들을 법한데도, 제아는 이번에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의 허리에 두른 손을 야무지게 깍지 끼자, 오토바이가 바람을 가르며 더욱더 스피드하게 치고 나갔다.
슬쩍 내다보니 앞서 가는 오토바이 무리가 보였다. 이젠 마음도 통하나 보다.
그녀는 도준이 뭘 하려는지 감이 잡혔다. 거리감이 꽤 있는 오토바이 무리들을 추월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더 이상 속도를 낼 수 없을 것 같은 오토바이가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스피드에 박차를 가했다.
강한 바람과 엄청난 스피드에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오싹함이 발끝까지 관통했다. 도준이 오토바이를 모는 실력은 가히 감탄할 만했다.
절대 가까워질 수 없다고 생각한 거리가 바짝 좁혀지고 있었다.
“오아, 하이잉(오빠, 파이팅)!”
바람에 섞여 말도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지만, 제아는 어느새 신이 나 있었다. 스피드와 내가 이렇게 잘 맞을 줄이야. 그의 말대로 제아는 뭐든지 함께하는 여자였다.
오싹함에 벌벌 떨면서도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오토바이 무리와의 거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U자형으로 멋지게 휘어진 도로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역시나 오토바이 무리들도 위험을 감지했는지 그 도로에서는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제아는 묘한 불안함에 사로잡혔다. 오빠도 저기서는 속도를 줄이겠지? 죽고 싶지 않은 이상.
하지만 그건 철저한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그녀를 태운 도준의 오토바이는 속도를 유지한 채 드러눕다시피 도로와의 입맞춤에 들어갔다.
“으아아아아악!”
제아는 차마 지켜볼 자신이 없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오른쪽 어깨에 딱딱한 도로가 닿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순간, 서늘한 바람이 이내 어깨를 강렬하게 후려쳤다.
눈을 뜨자마자 휘휙 스쳐 지나가는 오토바이들이 보였다. 앞이 아닌 뒤로 빠르게 사라지는 오토바이들. 마의 도로에서 도준은 가뿐하게 오토바이 무리들을 추월한 것이다.
“야호!”
그 순간 신이 난 제아는 저도 모르게 있는 힘껏 환호성을 내질렀다. 입 밖으로 환호성이 터져 나오자 막혀 있던 머리가 확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매서운 바람에 얼어붙은 몸과는 다르게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상쾌함이 짜릿했다.
온 신경을 쏟아 부어서일까, 강추위에도 이상하게도 몸은 나른해졌다. 그래서 도준의 등에 꼭 매달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얼마나 달렸을까. 오토바이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고 이윽고 멈추었다. 질주가 끝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도준은 긴 다리로 오토바이를 지탱하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어느새 그녀의 동네였다.
몸을 비스듬히 튼 도준이 제아가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걸 도와주었다. 아쉬운 듯이 헬멧을 벗자, 도준도 헬멧을 벗었다.
부드럽게 쏟아지는 머리칼 밑으로 드러난 날렵한 얼굴에서 강렬한 수컷의 향기가 진동했다. 대체 못하는 게 뭘까, 이 남자는.
“스트레스가 좀 풀렸나?”
“에이, 나 스트레스 같은 거 안 받거든요? 매사에 긍정적이고 밝은 거 몰라?”
항상 ‘난 괜찮아, 할 수 있어.’ 울고 싶어도 꾹 참고, 또는 남몰래 울며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텨온 게 10년이었다.
제아는 어두웠던 과거에 대한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어서 도준에게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지쳤다면서. 그래서 너답지 않게 참고 살았잖아. 진짜 네 모습은 안에 숨겨버리고.”
돌리지 않고 찔러 들어오는 도준의 말이 심장에 탁, 와 박혔다.
“그리고 지금은 나와 함께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아닌가?”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이 행복했다. 심장이 따스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은 부모님에 대한 죄송스러움 때문에 무겁게 일그러져 내렸다.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도, 도준은 그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다독이고 보듬으려는 중이었다.
태연한 척 웃으며 대답한다는 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려왔다.
“내 스트레스 풀리게 하려고, 일부러 오토바이 태워준 거야? 내가 싫어하면 어쩌려구.”
그가 피식 웃었다.
“그냥 좋아할 것 같아서.”
제아는 그런 도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스피드에 열광한다는 걸, 그녀도 오늘에서야 오토바이를 타보고 깨달았다. 그런데 도준은 어떻게 아는 걸까.
“내가 사랑하는 문제아라면, 말이야.”
그가 이토록 세심한 남자였을까. 이렇게 내게 집중하는 이 남자에 대해서 난 얼마나 아는 걸까.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는데 이젠 갈수록 자신이 없어진다. 양파 껍질처럼 자꾸만 새로운 모습으로 심장을 저격하고 파고드는 그에게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점점 더 깊이 빠져든다.
“오토바이에서 마음 가는 대로 크게 소리친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사는 거야.”
먹먹하게 가라앉은 제아의 눈빛을 깊숙이 바라본 도준이 허리를 휘감아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지 말고, 너답게.”
흘러내려 얼굴을 가린 머리칼을 그는 부드럽게 쓸어 올려주었다.
“네 뒤엔 항상 내가 있을 거니까.”
다가온 그의 얼굴이 그녀의 볼을 스쳤다.
“약속했잖아. 다신 떠나지 않는다고.”
그의 말에 야릇한 떨림이 심장으로 스며들어 제아는 눈을 감아버렸다.
“넌 나만 믿고 이 자리에 서 있기만 해. 내가 하나씩 해결해 갈 테니까.”
입술이 아닌 볼에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 다시 눈을 뜨자 멀어지는 그의 입술이 보였다.
“오늘 데이트는 여기까지.”
짙어진 눈빛은 뜨거운데도, 차가운 입술이 안녕을 고했다.
“잘 자, 내 여자.”
도준은 이제 간질거리는 말도 곧잘 했다. 그런데 느끼하기는커녕 사랑받는 느낌으로 가슴이 차올랐다. 볼 입맞춤으로 끝난 게 못내 아쉬워, 내리깐 속눈썹 사이에 미련이 듬뿍듬뿍 배였다.
“키스가 아니라서, 아쉽나 보지?”
귓가를 쓸어내리는 웃음기 배인 음성에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그래도 이런 건 꿰뚫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모른 척 좀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이런 건 포털 사이트 검색해도 안 나오나 봐. 모른 척해줘야 할 여자의 감정, 뭐 이런 거 말이다.
“무, 무슨! 하나도 안 아쉽거든? 날 뭘로 보고!”
제아는 이율배반적인 대답을 쏟아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길게 늘어진 그의 눈매가 야릇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헤어질 땐 너랑 키스 안 해. 특히 밤에는.”
귀까지 달아오른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도준이 나직하게 말을 했다.
“밤에 키스하면, 자신 없거든.”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순진하지만, 뭔가를 더 바라는 숨김없는 눈빛은 그의 본능을 아찔하게 자극한다. 바로 지금처럼.
“널 볼 때마다, 또 다른 내가 나를 끊임없이 유혹해.”
같이 있는 일분일초, 매순간, 그는 유혹을 당한다.
“지금 당장, 널 침대로 데려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