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43화 (43/104)

43.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뭐가 문제지?

2017.01.30.

이른 아침인지라 아직 출근한 여비서는 아무도 없었다.

어색한 눈웃음으로 제아에게 인사를 건넨 인호는 집무실로 들어가는 도준의 뒤를 후다닥 쫓아 들어갔다.

닫힌 문을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야 인호가 다급하게 집무실 책상 앞까지 바짝 쫓아왔다.

“한 사장! 너 미쳤냐? 미쳤어? 그거 미친 짓이야! 불륜이라고!”

방음 처리가 철저하게 된 집무실인데도 인호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그는 도준이 일리안에게 클로버 반지를 건네며 커플링을 부탁한 걸 알고 있었다. 그걸 보며  드디어 첫사랑에게 고백하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회사로 바로 가는 날은 데리러 올 필요 없어.

그리곤 이른 아침부터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출장 가기 전에 급하게 마련한 평범한 국산차를 몰고서 말이다.

딱 봐도 그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인호는 미치도록 궁금했다.

대체 어떤 여자가 천하의 한도준을 이렇게 만들어놨는지. 이토록 오랫동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말이다.

그런데 때마침 전용 주차장에서 도준의 차와 딱 맞닥뜨렸다. 기다려도 내리지 않자 답답해서 차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보았다.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는 도준과 그에게 가려진 가냘픈 체구의 여자.

공과 사는 정확한 도준이 회사까지 여자를 끌고 올 정도라면, 딱 봐도 보이는 야릇한 상황에 으흐흐, 엉큼한 웃음이 속에서 연신 흘러 나왔다. 그런데 베일에 싸인 그 첫사랑이 제아일 줄은.

저 녀석은 뭐가 아쉽다고 하고 많은 열매 중에 왜 하필 금단의 열매를 탐하려는 건지!

제아가 버티지 못하고 넘어간 것도 이해가 되었다. 저 얼굴로 유혹하면, 어떤 여자가 안 넘어올까. 이복동생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것도 10년이나 떨어져 있었던 오빠였으니.

“한도준, 제발 정신 차리자. 그건 문 비서한테도 몹쓸 짓이야. 금단의 열매가 원래 더 맛있어 보인다지만.”

잔뜩 흥분한 인호를 향해 도준이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꾸를 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뭐가 문제지?”

도준의 말에 잠시 당황한 인호는 빠르게 생각을 끝냈다.

그렇다고 둘의 관계가 정상적인 건 아니었다. 친구라면 이 미친 짓을, 어떻게든 말려야 한다.

그런데 흔들림 없는 도준의 눈빛과 표정을 보건대, 보통 깊은 감정이 아닌 게 느껴졌다.

“네 첫사랑인 반지 주인이, 설마 제아 씨냐?”

혹시나 아니길 바라고 물었지만, 침묵은 곧 긍정의 대답이니…….

그 충격에 인호는 머릿속이 꽤 혼란스러웠지만 흐트러져 있던 퍼즐들이 제 짝을 찾아 딱딱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동생을 향한 지나친 집착, 지독한 소유욕이 넘쳐흐르던 눈빛과 행동 말투.

한국에 귀국한 이후로 도준의 모든 신경은 오로지 제아에게 쏠려 있었다.

맙소사, 내가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나한테 왜 말 안 했어. 한마디 해줬어도 이렇게 놀라진 않았잖아. 엄청 서운하다, 한 사장.”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꼈어. 이루어지지도 않은 짝사랑으로 설레발 칠 필요는 없으니.”

한 사장이 짝사랑이라니. 후아…….

인호는 생소한 눈빛으로 지독히도 낯선 모습을 하고 있는 도준을 응시했다.

“그래서, 지금은 짝사랑에 성공한 거고?”

“보시다시피.”

이유야 어찌되었든 저 냉동 로봇이 연애를 시작하고 짝사랑에 성공했다니 축하해주어야 할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깨를 은근하게 툭 치는 손길에 도준이 시선을 틀자, 기분 나쁠 정도로 히죽거리는 인호가 보였다.

“좋냐?”

“……?”

“아주 좋아 죽겠지, 응? 이 엉큼한 녀석 같으니라고.”

딱딱하게 굳은 도준의 냉랭한 눈빛에 인호는 잠시 주춤했다. 내가 너무, 뺀질거리면서 놀렸나?

그만하려는 그 순간…….

“좋아 죽겠어.”

인호는 처음엔 제 귀를 의심했다. 도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지금 죽어도, 미련 없을 만큼.”

업무 지시하듯이 무심하게 연타를 날린 도준은 이내 시선을 태블릿 PC에 고정하며 주제를 바꾸었다.

“비서실과 집무실 청소, 내일 바로 용역 업체로 넘기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고정으로 뽑도록 해.”

“엥? 갑자기 왜?”

“청소나 시키려고 제아를 비서로 뽑은 게 아니야. 헬퍼 채용한 것처럼 진행해.”

인호는 명치가 꽉 막히는 느낌이었다.

“한 사장, 어차피 기본 청소는 용역에서 하잖아. 제아 씬 간단히 정리만 하면 되는…….”

“그래도 안 돼.”

인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도준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무심한 듯하지만 매서운 도준의 눈빛이 인호에게 향했다.

“제아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혀선 안 돼.”

“아이고, 열부 났네. 물 몇 방울 묻힌다고 문 비서 고운 손 안 트거든?”

“청소부 한 명 채용하는 게, 유 실장한테 그렇게 버거운 일이었나?”

“아, 아니, 누가 뭐 그렇대? 그건 아니지만 네가 워낙 깐깐하니까!”

“너 편하라고 제아에게 청소 따위 시킬 생각 하지 마. 그땐 아무리 유 실장이라고 해도 두고 보지는 않을 테니까.”

“크흡!”

인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집 전담 헬퍼가 문 비서라는 게 들통 나는 순간, 저 녀석이 나를 송두리째 집어삼키겠구나.

***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신 비서가 생긋 웃으면서 다가왔다.

“제아 씨, 오늘 치맥 어때? 내가 쏠게!”

“죄송해요, 선배님. 저 오늘 선약 있어서 전 다음에 같이할게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우리끼리 가자.”

여비서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제아는 굳게 닫힌 집무실 문을 응시했다.

출근한 이후로 도준과 인호는 지금까지 집무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화장실도 안 가고, 식사도 거른 채 말이다.

“휴…….”

한숨을 내쉰 제아는 퇴근을 하자마자 제 집이 아닌 도준의 집으로 향했다. 건물 정문 입구에서 방문증을 보이고 통과를 하자 때마침 인호에게 메시지가 왔다.

-한 사장, 오늘 무조건 11시 이후 퇴근합니다. 그 안에만 끝마쳐주면 됩니다.-

도준의 집에 도착한 제아는 가방 안에서 핑크색 고양이 앞치마를 꺼내 허리에 둘렀다.

“청소 준비 끝! 자, 이제 우렁 각시 노릇 좀 해볼까?”

3시간 만에 청소를 끝내고 건물 지하에 있는 대형마트에서 장까지 봐왔다. 아무래도 식사도 챙기지 않고 일하는 그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물론 도준이 집 안에서 음식 냄새가 나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 있었다. 도준의 입맛을 아주 정확하게 꿰뚫고 있으니까.

도준은 그녀가 윤영을 닮아 요리 솜씨가 좋다는 걸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김치볶음밥으로 만든 김밥만 만들고 싶었지만, 그것만 만들어놓으면 도준이 눈치를 챌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서브 메뉴로 참치 김밥과 샐러드 김밥까지 같이 만들어 놓았다.

“끝!”

캔들과 함께 온 집안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는데도 음식 냄새는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먹고 싶을 정도로 예쁜 색감을 자랑하는 김밥의 모양새를 보면, 이 정도 냄새는 애교 수준이니까.

“자, 오늘도 우렁 각시 노릇 끝!”

나가기 전 집 안의 냄새나 정리정돈 상태, 먼지 상태까지 깔끔하게 확인한 후에야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낸 제아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 시각, 도준의 집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에 오른 인호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본드 걸에게 무조건 11시 이후 퇴근이라고 호언장담했건만. 지독한 일벌레가 초고속 업무 능력을 자랑하며 1시간이나 일을 빨리 끝내버린 것이다.

오전에 도준이 했던 살벌한 협박이 머릿속을 꽉 채우자 인호는 미칠 것만 같았다. 제아에게 수십 번 전화도 하고 메시지도 넣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때였다.

“혹시, 55층 사세요?”

그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젊은 여자가 도준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도 도준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냉랭함마저도 마음에 드는 듯 여자는 매혹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여자는 자신과 꽤 여러 번 마주쳤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도준에게 관심이 간 것이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대체 어떤 남자기에 내게 눈길을 주지 않는 거지?

그러다가 소년과 남자의 모호한 경계선에 있는 남자의 방부제 외모에 그녀는 오히려 홀딱 빠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가장 비싼 최상층 펜트하우스인 55층이라면 재력도 갖추고 있다는 뜻. 그러니 더욱더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드디어 그녀의 까다로운 이상형을 충족시키는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용기 있는 여자가 완벽한 남자를 얻느니.

“저는 40층 사는 김혜연이라고 해요. 같은 건물 사니 우리 친하…….”

“됐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인지. 말꼬리를 툭 잘라버리는 싸가지는 그렇다 쳐도 살짝 찌푸려진 남자의 아름다운 눈매에 묻어나는 건 노골적인 귀찮음이었다.

“이봐요! 이웃이 아는 척을 했으면 얼굴이라도 보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여자는 생각했다. 저 남자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아서, 내 얼굴과 몸매를 보지 못해서 나온 무 매너라고. 여자가 발끈하는데도 도준은 여전히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을 한 채 무성의한 대답을 되돌렸다.

“불필요한 건 보지 않는 성격이라.”

내 외모가, 불필요한 거라고? 어디 두고 보자구! 내 얼굴과 몸매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눈 끝이 뾰족하게 곤두선 여자가 도준의 앞까지 바짝 당겨왔다.

확 찌르는 짙은 향수 냄새에 도준은 차갑게 얼어붙은 눈빛을 들었다. 막상 치고 들어올 땐 언제고, 찌르듯이 파고드는 자극적인 도준의 눈빛에 여자는 아주 잠시 얼어붙었다.

가까이서 본 남자의 얼굴은 더욱더 매력적이었다. 피부도, 이목구비도, 차가운 저 눈빛도.

“나한테 관심 있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시크한 저 싸가지조차. 여자는 나른하게 퍼졌던 눈동자를 또렷하게 치켜떴다.

“아, 아니 뭐 관심 있긴 한데, 그냥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사촌이니?”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준이 말을 툭, 잘랐다.

“나한테 관심 꺼요.”

도준은 여자의 눈앞에 목에 걸고 있던 반지를 꺼내서 달랑달랑 흔들어 보였다.

“보시다시피, 임자 있는 몸이라.”

반지에 빼곡히 박힌 다이아몬드가 새하얀 빛을 받아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그쪽은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니.”

그러곤 할 말 다했다는 듯, 다시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살벌해진 여자의 분위기를 눈치챈 인호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아, 하하하! 반갑습니다, 혜연 씨!”

“기가 막혀서 정말! 재수 없어!”

인호가 급하게 수습에 나섰지만 여자는 붉은 입술을 삐죽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버렸다.

이렇게 섹시한 아가씨를 모른 척하는 것도 모자라서 무시하다니! 인호에게 있어 그건 죄악이었다.

“한 사장 너, 그 싸가지 좀 고치면 안 되냐? 자꾸 여자들한테 상처 주면, 명 짧아진다고 몇 번 말해. 여자들의 한이 얼마나무서운지 알아? 오뉴월에 서리도 내리게 한다잖아! 그게 아니면 연락처 따서 나한테 넘기던가!”

그제야 도준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인호를 응시했다. 짧은 비소가 그의 붉은 입술에 스쳤다.

“그럴 거면 난 진작 서리 맞아 죽었겠지.”

“진짜 여자 무서운 줄 모르네. 그러다 큰코다친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태연한 표정으로 양손을 들어 보인 도준은 다시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인호의 입술에서 짙은 한숨만 새어 나왔다. 처녀 귀신은 저런 놈 안 괴롭히고 뭐하나 몰라.

땡―.

드디어 55층 최상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서서히 열렸다. 그런데 그 사이로 내비치는 새하얗고 작은 얼굴.

도준이 내리려는 순간 그 앞에 선 인호가 갑자기 폴짝 뛰어올랐다.

“웨, 웬 놈의 모기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시야까지 딱 막아선 채 폴짝폴짝 열심히 뛰어대는 인호를 바라보는 도준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이 추운 날씨에 모기라니.

“유인호, 대체…….”

“떼이, 황금 같은 한 사장의 피를 빨아먹을 모기 놈들아, 몽땅 죽어라!”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인호는 자신보다 머리가 더 솟은 도준의 시야를 차단하기 위해 폴짝폴짝 뛰면서 한 손으로 작게 손짓을 했다. 얼른 몸을 숨기라고.

무방비하게 맞닥뜨린 제아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정면으로 딱 마주칠 줄이야!

그녀는 본능적인 반사 신경을 발휘해 대리석 바닥으로 몸을 날려 슬라이딩을 했다.

‘흐읍!’

무릎에 가해지는 통증에 흘러나오는 신음을 가까스로 삼킨 채 그녀는 얼른 무릎걸음으로 기어갔다.

인호는 살기 위해서, 제아는 황금 알바를 사수하기 위해서, 각자 나름대로의 이유로 재빠르게 움직인 결과 다행히도 도준이 내렸을 때 제아는 튀어나온 벽 뒤로 숨은 뒤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도준이 예리한 눈빛으로 바짝 긴장하고 있는 인호를 주시했다.

“유 실장, 너 오늘 꽤 수상해.”

“내가 수상할 게 뭐 있다고. 하하하! 그리고 내가 귀신을 속였음 속였지, 설마 천하의 한도준을 속일까.”

분명 뭔가 냄새가 나긴 하는데, 딱히 꼬집어낼 건 없었다. 그리고 도준의 관심은 오로지 일과 제아뿐, 잠깐 치솟았던 의심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평소의 포커페이스로 돌아온 도준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인호는 땅이 꺼져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호는 벽 너머로 쏙 튀어나온 작은 얼굴을 향해 얼른 사라지라고 손짓을 한 후에야 도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도준은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도우미가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미세한 기름 냄새가 공기에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대번에 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음식하지 말라고 당부하지 않았나?”

“당연히 했지.”

“이런 일 없도록 다시 한 번 당부해놔.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두 번은 봐주지 않으니까.”

도준이 싱크대에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린 도시락을 인호가 도로 꺼내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예쁘게도 쌌네. 참치 김밥에 빨간 이 김밥의 정체는…….”

감탄이 섞인 인호의 다음 말이 그의 발걸음을 제대로 잡았다.

“김치볶음밥으로 만든 김밥! 이야, 이거 또 새로운 맛이네.”

도준은 식탁으로 다시 다가갔다. 그 사이 인호는 두 번째 김밥을 입안에 넣고 있었다.

오색 빛깔을 뿜어내는 김밥이 차곡차곡 들어 있는 도시락을 응시한 도준이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고는 속이 빨간 김밥을 입 안에 넣고 음미하듯이 천천히 씹었다.

입안에서 고소하게 퍼지는 이 맛은 그리우면서도 익숙한 맛이었다.

“그 도우미, 나이가 어떻게 되지?”

“어? 아, 글쎄. 한 번 보기는 봤는데 사진으로만 봐서 정확히 몰라. 근데 나이는 꽤 많을 걸? 갑자기 왜?”

찌르듯이 파고드는 서늘한 눈빛에, 인호는 심장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청소뿐만이 아니라 음식 솜씨도, 괜찮군.”

“한 사장 네가 봐도 그렇지? 문 비서가 뽑고 교육시켰는데 오죽할까? 근데 음식 솜씨까지 훌륭한 줄은 몰랐네? 하하!”

“도우미 월급, 50% 더 올려주도록 해.”

“그, 그렇게나 많이?”

“앞으로 요리도 종종 부탁할 생각이거든.”

“어, 그래, 그래! 그러지 뭐!”

“넌 바로 퇴근하지 그래.”

자꾸만 손이 가는 도시락을 인호는 아예 손에 통째로 들고 집어먹고 있었다.

“그 김밥은 이제 그만 내려놓고 말이야.”

도준이 다이닝 룸에서 나가자마자 인호는 격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은 항상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야. 사람 식겁하게.”

낌새를 챈 줄 알고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오늘 자신의 수명이 10년은 줄어든 기분이었다. 제 여자를 헬퍼로 부려먹은 걸 알면, 어후…….

얼른 제아와 만나서 다시 심각하게 상의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인호는 김밥 한 개를 다시 입안에 집어넣었다.

“우리 문드 걸. 김밥도 잘 만드네.”

***

같은 시각, 겨우 도준의 집에서 탈출한 제아는 버스 정류장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리석 바닥에 헤딩한 무릎이 쓰라리긴 했지만, 무릎을 반납한 대가로 황금 알바 자리를 지켰으니 나름 만족스러웠다.

“휴, 진짜 10년 감수하는 줄 알았네.”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한 사장님.-

도준에겐 퇴근 후 바로 집에 가서 쉴 거라고 했다. 전화를 받지 않은 게 좋을 듯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애틋하게 액정 화면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진 제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아버렸다. 목소리만 듣고 잔다고 하고 얼른 끊으면 돼!

“도준 오빠.”

[지금 어디지?]

흐트러지지 않은 단정한 음성이 나직하게 귓가로 스며들었다.

“어디긴, 당연히 집이지.”

거짓말을 하는 건 내키지도, 성격에 맞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차 한 대가 휭 하면서 도로를 지나갔다.

[차 소리 아닌가?]

“TV에서 난 소리야. 나 지금 거실에서 TV 보고 있거든!”

제아는 체념 섞인 표정으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잔다고 핑계대고 통화를 빨리 끝낼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다.

[그렇군.]

다행히도 도준은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목소리 들었으니까 이제 끊어야지. 길게 통화했다가는 그에게 거짓말을 한 게 들키기 십상이었다.

[이제 가려고.]

이제 자러 들어간다고 말해야 할 타이밍을 도준에게 또 빼앗겨 버렸다.

“이 시간에 가는 거야?”

오늘 바로 출장 간다는 말을 못 들었던 거 같은데.

제아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너한테.]

“아, 나한테 가는 거구나.”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제아는 깜짝 놀라 다시 되물었다.

“……뭐? 나한테!? 온다고? 지, 지금?”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밤 10시였다. 버스를 타고 가면 넉넉히 두 시간은 걸리니 그녀보다 도준이 더 빨리 도착할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택시를 타자니, 택시비는 또 어마무시했다.

후회해본들, 이미 전화는 받아버렸다. 집이라고까지 했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 봐도 그에게 오지 말라고 해야 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피곤하다고 하는 거야!’

단순하긴 하지만, 그나마 머리를 짜내서 겨우 찾은 핑계였다. 그런데 또 도준에게 말할 타이밍을 빼앗겨 버렸다.

[문제아, 보고 싶다.]

지극히 덤덤한 음성인데도, 느껴진다. 그리움이 짙게 배인 그의 마음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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