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42화 (42/104)

42. 너를 버릴 바엔, 차라리 내가 죽어.

2017.01.26.

제아는 도준과 입술을 섞을 때마다 수줍고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발꿈치는 하늘을 향해 끝없이 치솟았다. 참 이율배반적인, 이런 걸 내숭이라고 하는 걸까? 키스가 길어질수록 목이 말라 갈구하는 것처럼 매달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드디어 도준이 입술을 뗐다.

“하아.”

흐릿한 가로등 빛에 물든 도준은 어느새 젠틀맨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보인다. 정제되지 않은 짙은 눈빛 속, 완벽한 젠틀맨의 가면에 숨어 있는 난폭한 욕망을 품고 있는 야수가.

그 야수가 얼마나 거칠고 광포한지. 그럼에도 얼마나 야릇하게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고 온몸을 떨리게 하는지.

제아는 미련이 짙게 배인 야릇한 한숨을 입술 사이로 흘렸다. 느릿하게 뻗은 도준의 엄지손가락이 촉촉이 젖어 있는 제아의 입술을 쓸었다.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지 마.”

“……?”

“지금 네 눈빛,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꽤 자극하거든.”

도준의 입술에 닿았던 야릇한 눈빛을 서둘러 내리려다가 제아는 다시 시선을 올렸다. 제 입술처럼 피가 잔뜩 몰린 그의 입술이 부풀어서가 아니었다. 아랫입술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상처로 봐서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오빠 입술에 피가…….”

그제야 도준이 대수롭지 않은 듯,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무심히 쓸었다. 제아의 머릿속에서 번뜩, 무언가가 지나갔다.

“한지로지!”

제아는 이내 발끈했다. 도준에게 지로를 때리지 말라고 했지만, 그 말이 지로가 도준을 때려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로가 아니라 도준에게 경고를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로가 아무리 작정하고 덤벼도, 도준에게 조금의 상처도 입히지 못할 테니까.

“때린 게 아니라 맞아준 거야.”

도준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도준의 터진 입술을 보고 있으려니 화가 치밀었다.

지로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27년 만에 처음으로 하는 연애를 축하해줄 거라 믿었다. 진짜 친구라면 말이다. 그녀 또한 지로를 진짜 친구로 생각하기에 절교까지 각오하면서 그를 떼어내려 했었다.

―보란 듯이 여자 만나고 연애해.

수많은 여자를 만나면 그중에 짝을 찾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지로가 제 짝을 찾으면, 정말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녀의 말에 지로는 정말 보란 듯이 수많은 여자를 만났고 연애했다. 물론 딱 3개월간의 방황으로 끝이 났지만.

3개월 만에 다시 찾아온 지로는 핼쑥한 얼굴로 간절하게 부탁했었다.

―문제아, 나 진짜 여자란 여자 다 만나보고 할 거 다 해봤어. 근데 그래도 안 되는데 어쩌냐. 진짜 친구라면 이 정도는 이해하고 받아줘야 되는 거 아니냐? 뜨거운 사랑은 아니어도 뜨거운 우정은 나눌 수 있잖아, 응?

진짜 친구라면…… 뜨거운 우정.

그 말에 심장이 동해 덜컥 알았다고 해버렸다. 그 후 지로는 약속과 달리 은근하게 남자 친구 노릇을 했지만, 그녀는 그러려니 하고 참아줬다. 물론 선을 넘으려는 순간은 단호하게 잘라냈지만.

그런데 정작 한지로는 그녀의 연애를 기뻐해주기는커녕 도준의 얼굴에 주먹질이나 해서 보낸 것이다.

“한지로, 내가 이걸 그냥!”

발끈하는 제아의 손을 도준이 잡아끌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신경 쓰지 마.”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남자들끼리의 일이야. 내 식대로 해결할 테니까.”

제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터진 입술이 안쓰러워 죽을 것 같았다. 속상했다. 그렇지 않아도 클럽에서 보았던 여자와 달리 해줄 것 하나 없는 자신인데.

그녀 때문에 단 한 번도 누구에게 맞은 적 없는 그가 처음으로 한지로에게 맞은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 얼굴을 내밀어 주어서 말이다.

“맞아주긴 왜 맞아줘? 내가 노력하라고 했지, 언제 참고 얻어터지고 오랬어?”

“정식으로 너한테 인정받아야 하니까.”

도준의 시선을 따라 내리자 그제야 그녀의 손에 끼워진 핑크 골드 반지가 보였다. 삼부 크기였지만 반지 전체에 촘촘히 박힌 다이아몬드가 눈이 부셨다.

다이아몬드 사이에 정교하게 새겨진 이니셜은 도준과 그녀의 이름이었다.

낯익은 디자인, 잡지에서 그렇게 탐냈었던, 주문 제작 받아 한정으로 제작해준다는 일리니의 리미티드 커플링.

“이 반지를 오빠가 어떻게?”

“일리안이 직접 세공해준 거야. 만족스럽나?”

도준의 다른 손에 들린 반지 케이스를 보는 순간, 제아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테라스에서 여자가 도준에게 내밀었던 반지 케이스와도 비슷했다.  그럼 그 여자가 설마?

“그 여자, 설마 일리안이었어?”

재미 교포 출신인 미국 부동산 재벌의 유일한 상속녀, 일리안. 패션업계에선 떠오르는 샛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얼굴이 노출되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더욱더 유명해진 상속녀였다. 그 여자가 그렇게 엄청난 여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마, 그 엄청난 여자를 마다하고 나를 선택한 거야?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선택할 것도 없어. 일리안과 난 철저하게 친구 사이니까.”

부와 능력, 외모까지 겸비한 여자를 마다할 남자는 극히 희박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하지만 철저하게 친구 사이라고 믿기엔 그녀와 나눈 대화가 꽤, 인상 깊었다.

제아의 미심쩍은 표정을 읽었는지 도준이 말을 했다.

“일리안은 양성애자야. 게다가 취향이 꽤 독특하지.”

“……?”

“아름다운 여자의 벗은 몸을 보고, 영감을 얻거든.”

세차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잠시 정지되었던 제아의 뇌가 빠르게 돌아갔다.

천재는 역시나 평범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여자의 벗은 몸을 보고 영감을 얻다니. 지극히 섬세하고 정교한 일리니의 디자인이 이해가 되었다.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게, 나였어? 그러니까…… 내 벗은 알몸을 보고 싶어서?”

“일리니 디자인에 영감을 주고 싶다면 기꺼이 연결해줄 순 있는데.”

“돼, 됐어! 일리니는 좋아하지만, 내 벗은 몸 보여주는 건 사양할래.”

“이 반지 받으려고, 3일이나 그녀한테 아바타처럼 끌려 다녔어.”

“누가 그렇게까지 하랬어, 바보같이!”

“너한테도 로망이라면서.”

또다시 도준의 뜨거운 눈동자가 격렬하고 깊숙하게 심장 깊숙이 치고 들어왔다. 어느새 깍지 낀 서로의 손, 도준의 네 번째 손가락에도 같은 반지가 끼어져 있었다.

단단히 얽은 손을 들어 올린 도준이 제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데일 듯 뜨거운 그의 입술 감촉이 손등을 파고드는 아찔한 감촉에 제아는 떨리는 숨을 가쁘게 토해냈다.

“인질도 돌려주었으니, 잘 간직해.”

“인질? 어디?”

그제야 도준이 납치해갔던 인질이 떠올랐다. 흐릿하게 웃음을 머금은 도준의 눈동자가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꽂혔다.

“클로버 반지, 그 안에 있어. 일리안이 귀찮게 한다고 꽤 투덜거렸지.”

어두웠던 과거도, 밝지 않은 앞으로의 미래도 버리지 않고 모조리 안고 가겠다는 도준의 의지가 느껴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섬세함과 로맨틱함에 제아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깍지 낀 손만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꼭 잡을 뿐이었다.

서로의 손가락에서 유난히도 빛이 나는 반지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과거의 커플링과 현재의 커플링이 동시에 존재하는 반지.

서로의 손에 나란히 끼고 있는 반지는 보기 좋았지만 그녀도 바보가 아니었다.

“우리 아직 당당하게 이 반지 낄 때 아니잖아. 그치?”

얽힌 깍지를 푼 제아는 허전하게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어서 반지를 낀 후 도준에게 내밀었다.

“오빠가 해줘.”

“…….”

“나 충분히 기다릴 수 있으니까.”

느릿하게 내민 도준의 손이 제아에게서 반지가 걸려 있는 목걸이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서로의 상체가 가까워지고, 도준의 입술 사이로 낮은 음성이 묵직하게 새어 나왔다.

“미안하다는 말, 할 생각 없어.”

“바라지도 않아.”

“기다려줘. 이 반지를 네 손에 다시 끼워주는 날까지.”

“나, 아주 착하게 기다릴 거야. 그 대신…….”

그의 말을 되새기는 순간, 서늘한 감촉이 그녀의 목에서 느껴졌다. 도준이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채운 것이다.

제아는 고개를 들고 올곧은 눈빛으로 도준을 뚫어지게 직시했다.

“난 절대 세컨드 안 해.”

도준을 아무리 사랑해도, 그가 모든 사랑을 내게 유일하게 준다고 해도.

“햇빛도 없는 곳에서 시들어 버리기 싫어.”

아무도 보지 않는, 존재감 없는 그늘에선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나를 버려.”

오빠가 없어도 어차피 시들겠지만…… 어차피 시들 거, 당당하게 햇빛을 받으면서 시들 거야.

제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 도준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확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제아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는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너를 버릴 바엔, 차라리 내가 죽어.”

***

이른 아침, 제아는 거울 앞에서 10분째 고민 중이었다.

‘머리를 확 틀어 올려? 말아?’

틀어 올리자니, 도준이 했던 말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내리자니 비서의 본분이 불끈불끈 치솟았다.

결국은 그녀는 머리를 말끔하게 틀어 올렸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도준의 연인이 된 만큼 더욱더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한 것이다. 비록 그를 뒷받침해줄 금 수저는 안 되더라도 능력은 키우기 나름이니까.

능력 면에서라도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고 싶다. 민폐 끼치는 연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

제아는 목선에서 가늘게 반짝이는 목걸이를 빼서 손가락에 반지를 껴보았다.

“예쁘다…….”

자꾸만 실없는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배었다.

도준과 헤어진 건 어젯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옆에 있는 것처럼 그녀의 심장이 기분 좋은 설렘을 머금었다. 이래서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아는 손가락에서 뺀 반지를 입김까지 호호 불어가면서 조심히 닦았다. 세게 만지면 깨져버릴 것처럼 소중하고 소중하게.

출근길이 이렇게 설렜던 적이 언제였을까. 단연코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공원 길목, 갑자기 뒤에서 짧게 빵빵,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돌아봤는데 새하얀 차 한 대가 보였지만, 그녀가 모르는 차였다. 그래서 그녀는 무시한 채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빵빵―.

짧게 클랙슨을 울리면서 새하얀 중형 국산차가 느릿한 속도로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아침 6시 30분.

종종 이런 경우가 있었다. 평범한 옷차림에도 가려지지 않는 글래머러스한 몸매와 치마 밑으로 매끈하게 뻗은 각선미가 돋보여서인지 종종 쫓아오는 남자나 대놓고 뒤에서 구경하며 클랙슨을 울리는 놈들이 있었다.

물론 그것도 사람 많은 번화가에서 일어났던 일이었지, 소박한 동네에서는 단연코 처음이었다.

‘이런 몰상식한 변태 같으니라고!’

그런 꼴은 또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제아는 핸드백을 야무지게 어깨에 한 번 메고 몸을 휙 틀었다. 그러자 차도 멈추어 섰다. 짙은 선팅은 불법이라고 했는데도 운전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창문의 선팅이 짙었다.

톡톡―.

생긋, 그녀는 지극히 가식적인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손가락으로 차창을 두드렸다. 호의 있는 미소를 지어야 변태가 창문을 내릴 테니. 그런데 막상 창문이 내려가기 시작하자 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

‘서, 설마 차 안에서 그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여비서들도 몇 번 당했다고 했고, 지연에게도 이야기를 꽤 들었다. 그제야 너무 섣불리 행동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어떻게 하지? 때 묻지 않은 내 안구! 혼쭐은 내주더라도 우선 안전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그녀는 손을 들어 얼른 눈을 가리고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다. 그런데 불쑥 튀어나온 손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채 끌어당겼다. 그때 예감했다. 아, 정말 그 짓을 하는 변태가 맞구나.

그녀는 있는 힘껏 두 눈을 꼭 감았다. 절대, 절대 보지 않을 거야!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구역질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핸드백을 냅다 휘둘렀다.

“야, 이 변태 자식아. 이 손 안 놔? 어디서 감히 뭣 같지도 않은 걸 내보이려고 그래!”

지연이 퇴치했던 방법이었다. 변태의 자존심을 아주 제대로 깎아내려 버리라고. 그런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절대 거기서 눈을 떼지 말라 했는데. 그런데 솔직히 그건 자신이 없었다.

급기야 핸드백을 휘두르는 손까지 틀어 잡혔다. 끌어당기는 힘에 굴복한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순간, 귓가에 더운 숨결이 닿았다.

“좋은 아침.”

울림 좋은 남자의 음성에 눈이 번쩍 뜨였다.

차창 너머 비스듬히 고개를 내민 남자.

시린 아침 햇살보다 더 시리고 투명한 도준의 산뜻한 얼굴이 확대된 시야를 파고들었다.

“도준…… 오빠?”

반쯤 내려온 눈꺼풀에 가려진 나른한 눈동자가 그녀를 또렷하게 담고 있었다.

“아침부터 변태 취급이라니.”

살짝 비틀려 올라간 한쪽 입꼬리를 보건대, 꽤 재밌어하는 표정이었다.

“춥다, 얼른 타.”

차에 올라탄 제아는 내부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차의 비닐까지 그대로 씌워져 있는 걸 보니 새 차가 분명했다.

“갑자기 웬 국산 국민 자동차? 처음 보는 차라서 오해했잖아.”

“이목 끌어서 피곤한 건 내가 아니라 너일 것 같아서.”

“그러기야 하지만. 그런데 갑자기 아침부터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시간이 되는 날은 출퇴근 시켜주려고.”

“그러지 않아도 돼. 내가 아직도 마냥 어린앤 줄 알아?”

“어린 애라서가 아니야.”

운전을 하던 도준이 비스듬히 시선을 틀어 제아를 응시했다.

부드럽게 휘어진 길쭉한 눈매, 살짝 올라간 입꼬리, 예술적인 옆선까지. 진짜 사람 미치게 하는 얼굴이다, 저 얼굴은.

“내 여자니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어서.”

아침부터 느닷없이 심장 테러를 당해버렸다. 그것도 너무 무방비하게.

가슴을 찢고 튀어나올 듯이 거세게 뛰는 심장.

제아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행동이 아니라 말만으로도 이렇게 사람 심장을 후려쳐버릴 줄이야.

“남자 친구가 서프라이즈로 나타나서 출퇴근 시켜주는 것.”

“……?”

“여자들의 로망 중 하나라던데, 아닌가?”

“누가 그래? 이런 게 여자들 로망이라고.”

꽤 신빙성 있는 말이었지만 제아는 문득 궁금해졌다. 누군가와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안 걸까?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다음 말에 그녀는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포털 사이트 검색.”

연애를 배우는 법도 도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주 하지는 마. 오빠랑 집도 멀고 바쁜 것도 아는데 이러면 내가 부담된단 말이야.”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왔나 보군.”

“……?”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비스듬히 틀어 바라보는 그의 짙은 눈동자 속, 오로지 그녀 자신만이 담겨 있었다.

“문제아란 내 여자가 말이야.”

무심한 어투가 표현해내는 달콤한 진심에 제아는 심장이 뜨겁게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심장을 한 손에 틀어쥔 도준이 능수능란하게 흔들고 자극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표현을 잘하는 남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빠, 선수지. 몇 명한테 먹힌 작업 멘트야?”

장난스럽게 물었는데도, 이 남자 봐라. 알짤 없이 진지하게 대답을 했다.

“내 심장은 평생토록 한 여자밖에 품지 못해.”

제아는 지금까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던 말을 입에 담았다.

“그 심장 품고서,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어? 나한텐 왜 그렇게 못되게 굴고?”

“겁이 나서.”

천하의 한도준이 겁이 나? 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그가 끊었던 말을 덤덤히 이었다.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네가 내게서 도망쳐 버릴까 봐.”

도준의 손에 들린 제 심장이 바닥에 떨어진 듯, 심장에 통증이 느껴졌다. 눈가가 시큼하게 젖어들었다. 그때의 도준의 심정을 알 것 같아서.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도준의 말은 틀리지 않았으니까. 재회한 순간 그가 제 마음을 털어놓았다면 그녀는 질색하면서 온갖 욕을 퍼부어대며 피하고 도망쳤을 것이다.

미안함에 푹 떨어진 그녀의 시야로 그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침범해 들어왔다. 무릎 위에 주먹을 꼭 쥐고 있는 손 위로 큰 손이 내려앉았다.

제아는 그의 손 위에 다시 제 손을 올렸다.

“한도준 씨, 각오해.”

평생 한 명뿐인 주인을 선택한 그녀의 심장도 한 남자밖에 품지를 못한다.

“찰거머리처럼 오빠한테 붙어서, 절대 안 떨어질 테니까.”

그가 피식, 짧게 웃음을 지었다.

“원하던 바야.”

도준은 제일 어패럴 사옥 주차장에 들어설 때까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주차를 하고 나서도 도준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왜 그렇게……, 웁!”

갑자기 상체를 비스듬히 틀어 다가온 도준이 짧게 입술을 부딪혀왔다. 아직 볼일이 끝나지 않은 듯 입술을 마주한 채 도준이 야릇하게 말을 했다.

“오전에 피울 담배, 한 번에 다 해치워버릴까.”

말뜻을 알아차린 제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런데 피하고 싶진 않았다. 아찔한 감각을 선물해주는 그의 입술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으니까.

역시나 그는 행동파였다. 야릇하게 압박해오는 그의 입술에 제아는 묘한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스르륵 입술을 벌리려는 그 순간, 운전석 쪽 차 문이 벌컥 열렸다.

“한 사장, 안 내리고? 아이쿠! 내가 본의 아니게 방해를!”

차 문이 벌컥 열렸는데도 도준은 확 빠지지는 않았다. 그는 놀란 기색 없이 느릿하게 몸을 운전석 쪽으로 다시 가져갔다. 그제야 도준에게 가려져 있던 여자의 존재를 인호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 사장의 절친한 친……?”

하지만 이내 귀신이라도 본 듯, 인호는 새하얗게 질렸다.

“무, 문 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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