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39화 (39/104)

39. 한 남자를 향한 지독한 유혹, 도발, 자극.

2017.01.16.

이게 몇 차인지 세는 것도 무의미해졌다. 도준은 벌써 3일째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일리안의 한국행 음주가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인호는 하루 만에 항복을 선언하고 제 집에서 기절한 듯 자고 있을 것이다.

체력은 자신 있는 그였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이틀 내내 빈속에 술을 들이부어서 그런지 머리는 어질어질했고 자꾸만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마음은 이미 제아에게 가 있지만, 그는 독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도 업무의 연장이니까.

질렸다는 눈빛으로 도준은 제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일리안을 바라보았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체력이 좋은지.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무리한 부탁을 한 건 그인지라 입도 뻥긋 못하고 있었다.

“제이드, 설마 벌써 지친 건 아니지? 나보다 먼저 쓰러지면 절대 못 받을 줄 알아. 바로 쓰레기통 직행이야.”

어림도 없다는 듯, 도준이 술잔을 내밀었다.

“술이나 따시지.”

“역시 날 상대할 남자는 제이드밖에 없다니까?”

윤기 나는 붉은 입술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일리안이 독한 위스키 원액을 술잔에 가득 따랐다.

“모델 업계 쪽에서도 동양인 열풍이야. 특히 한국 모델들. 동양미가 느껴지는 단아한 페이스에 세련되면서도 화려한 서양미가 더해진 한국 여자들, 아주 매력적이잖아?”

“돌려 말하는 거 질색이야.”

“부킹 좀 시켜주면 안 돼? 나 한국미인들 구경 좀 시켜줘.”

“이틀 내내 실컷 구경한 걸로 아는데.”

“말은 바로 해야지. 지나다니는 여자들 보는 게 본 거야? 내 눈앞에 두고 제대로 음미하고 싶어.”

“이미지 관리해야지. 독특한 취향 소문나서 좋을 건 없을 텐데.”

“나 못 믿어? 날 못 믿어도 내 비서인 에릭은 믿을 만한 거 알 텐데. 뒤처리가 아주 깔끔하다구.”

일대일로 술 상대를 해도 이틀째 버티고 있는 일리안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이 더 끼어들었다가는 술 마시는 타임이 더 늘어질 건 보지 않아도 훤했다. 그 속을 들여다보았는지, 일리안이 호탕하게 웃어댔다.

“만약 내 취향의 한국 미인을 본다면, 깨끗하게 거래 조건 받아들이고 원하는 거 내줄게. 이제 됐어?”

도준이 호출 벨을 누르기가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들어왔다. 웨이터에게 수표를 몇 장을 건넨 도준이 지시를 했다.

“최고의 미인들로 데려오도록.”

수표를 받아 든 웨이터가 룸에서 나가는 걸 보며 도준은 바랐다. 지긋지긋한 이 거래를 끝내줄 눈에 확 띄는 미인을 웨이터가 찾아내서 데려와 주기를.

돈의 효과는 확실했다. 30분도 되지 않았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곧이어 날카로운 힐 소리가 그의 귀를 흔들었다.

어떤 여자가 들어오건 도준은 관심이 없었다. 오직 일리안의 반응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래서 웨이터가 데리고 들어온 여자들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는 일리안을 바라보았다.

일리안의 눈이 가장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그러다가 딱, 어느 한곳에서 멈추었다. 반짝이는 눈빛, 올라가는 입 꼬리. 흐뭇한 음성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아름다워.”

일리안이 마음에 드는 한국 미인을 발견했다는 뜻이리라. 드디어 일리안과의 지독한 거래가 종결된 것이다.

하지만 일리안의 취향을 저격한 한국 미인을 확인하기 위해 정면을 응시한 도준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붉은색의 레이스 원피스는 여자의 새하얀 피부와 터질 듯이 풍만한 몸매를 더욱더 아찔하게 드러내주었다.

학처럼 길게 드러난 목선과 모델처럼 쭉 뻗은 팔다리까지 여자의 몸매는 지극히 서양적이었다.

하지만 치켜 올라간 커다란 고양이 눈과 통통한 볼 살은 오묘한 동양적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갸름한 달걀형 얼굴을 강조해주는 단정한 줄리엣 헤어스타일까지. 일리안의 취향에 딱 떨어지는 여자였다.

문제는…….

‘문제아.’

순간적으로 찾아온 두통에 도준은 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다시 봐도 일리안이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여자는 제아였다. 룸 안에 있는 디자이너들의 시선도 일제히 제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만큼, 제아는 아름다웠다.

마이클이란 수석 디자이너가 누구에게 빼앗길세라 제아에게 먼저 호감을 내보였다.

“레이디?”

그런데도 제아의 시선은 도준에게 고정된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수많은 말들을 커다란 동공에 가득히 머금은 채 말이다.

그는 맹세코 제아에게 잘못한 게 없었다. 지금 이것도 엄연히 업무의 연장이니까. 프랑스에서 있을 3일을 한국에서 소요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제아의 눈빛은 그의 심장을 긁어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야말로 묻고 싶었다. 대체, 그런 아찔한 모습으로, 다른 남자들의 시선을 모조리 사로잡으며, 이런 곳에서, 뭐 하는 거냐고.

‘도준 오빠…….’

지연의 눈은 정확했다. 넓은 룸 안은 하나같이 세련미가 돋보이는 젊은 남녀들로 꽉 차 있었다.

눈부신 금발 머리, 새까만 머리, 각국의 세계인들이 모인 듯한 자리였다. 그럼에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며 상석에 앉아 있는 남자는 분명 도준이었다.

도준은 아직 그녀를 보지 못했다. 누가 들어오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도준의 눈은 정확히 옆에 앉은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연의 말대로 여자는 아주 아름답고 화려했다. 혼혈인 듯 이국적인 외모와 태생적으로 고귀하게 태어난 귀티가 느껴졌다.

도준에게서 잠깐 시선을 뗀 제아의 시선이 빠르게 룸 내부를 훑었다. 룸 안의 풍경은 황금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이들의 유흥 파티였다.

한쪽에 줄줄이 세워진 빈 양주병과 맥주병들은 거의 박스째 쌓여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마시고 마셔댄 건지.

단독 계단과 복도를 통해서 들어온 프라이빗 룸은 내부도 만만치 않았다.

넓기도 했지만 룸 한쪽에 미니 수영장이 있었고,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커다란 스크린 화면은 클럽 내부를 다양한 각도로 비추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이성을 단번에 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고 정확하게.

소파 끝에 앉아 있던 금발 머리 남자가 제아에게 손을 뻗쳤다. 때마침 도준도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정면을 응시했다.

허공에서 무방비하게 충돌한 서로의 시선.

제아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스스로가 봐도 몰라볼 정도로 지연은 완벽하게 변신을 시켜주었다. 그래서 내심 걱정까지 했다. 설마 도준이 못 알아보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게 바로 드러났다. 그녀를 응시하는 도준의 눈은 정확히 그녀를 알아보았다.

미세하게 일그러진 도준의 눈빛과 표정.

하지만 제아는 피하기는커녕 또렷하게 직시하며 그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왜 연락하지 않았냐고.

왜 보러오지 않았냐고.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구냐고.

고백에 대한 내 대답…… 듣고 싶지 않았냐고.

그 이후는 순식간이었다. 상석에 앉은지라 거리감이 꽤 있었는데도 도준은 빨랐다. 남자의 손이 닿기도 전에 어느새 도준이 손으로 제아의 허리를 휘감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제아는 얼떨결에 그의 가슴에 양손을 올렸다.

콧속으로 훅 스며드는 그리우면서도 익숙한 체향에 제아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내리깐 시선 아래, 새하얀 와이셔츠에 가려진 그의 가슴팍이 보였다.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 단단한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느껴졌다. 매끈하게 드러난 제아의 어깨 위로 도준의 재킷이 내려앉았다.

누가 볼세라 꽁꽁 감싸는 야무진 손길이 느껴지는 순간 묵직하게 내려앉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 숙녀분은, 내가 데리고 가지.”

일리안도, 다른 디자이너들도 모두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도준은 제아를 데리고 룸을 나와 버렸다.

문이 탁 닫히자마자 품에서 놓아준 도준이 제아와 마주 보았다.

동시에 트인 말문, 이내 서로의 말이 꼬여버렸다.

“문제아, 대체.”

“오빠야말로.”

곧이어 서로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준의 긴 손가락 끝이 제 눈매 끝을 어루만질 때 제아는 버릇처럼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따라와.”

도준이 손목을 다시 휘어잡는데 룸의 문이 다시 열렸다. 훅 파고드는 진한 장미향이 매혹적이었다. 도준의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따라 나온 것이다.

흥미로워하는 여자의 눈빛이 제아에게 한참 머물렀다가 도준에게로 향했다.

“제이드.”

한국말이 분명한데 뭔가 세련된 억양이었다.

그런데 제이드, 제이드라니?

“내 마음 알면서 이런 짓을 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서운함 가득한 말투였다. 곧이어 여자의 시선이 제아에게 노골적으로 꽂히는 순간, 경고가 흘러나왔다.

“어쩌지? 난 절대 양보 못 하겠는데.”

믿었는데, 간절하게 아니길 바랐는데. 제아는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휘청이는 제아의 눈동자와 고집스러운 여자의 눈동자가 동시에 도준에게 꽂혔다.

“문제아, 복도 끝 오른쪽에 테라스 있어. 거기 가 있어. 금방 갈 테니까.”

도준의 시선도, 말도 제아에게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최종 선택은 여자였다.

룸의 문이 다시 열리고 도준이 여자를 데리고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 단호한 여자의 한마디가 야속하게도 흘러나왔다.

“나한테 있는 거 갖고 싶으면, 저 여자 포기해.”

스르륵, 룸의 문에 기댄 채 제아는 주저앉아버렸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도준의 서늘한 시선이 일리안에게 꽂혔다. 하지만 일리안은 어림도 없다는 듯, 풍만한 가슴에 단단히 팔짱을 낀 채 도준을 올려다보았다.

두 보스의 충돌에 흥청망청 즐기던 디자이너들은 얼어붙었고, 분위기는 싸늘하게 냉각되었다.

심상치 않은 도준의 분위기에 일리안이 눈을 뾰족하게 치켜뜨며 모두 나가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두려운 디자이너들은 룸에서 사라졌다.

“일리안, 포기할 사람은 내가 아닌 너야.”

“왜? 도대체 왜? 저 여자 딱 내 취향이란 말이야. 한 번 보고 두 번 봐도! 흔한 페이스가 아니라구! 매력적인 내 친구들 모두 거절하면서 나한테 했던 말,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몸 따로 마음 따로 노는 남자 되기 싫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저 여자 양보해. 그럼 내 가방에 있는 그거, 바로 줄 수 있어. 거래 종료라구. 그래도 양보 못 하겠어?”

웬만해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도준이었지만, 지금 상황만큼은 짜증이 났다. 일이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 꼬일 수가 있는지. 왜 하필이면 일리안의 눈에 제아가 들어와 버렸는지.

“제이드, 우리 이러지 말자. 너와 나 훌륭한 파트너이자 친구잖아?”

도준의 침묵을 고집스러운 거절로 받아들였는지 일리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쿨하게 다시 말을 했다.

“오케이, 좋아. 그럼 그 여자 공유해. 먼저 실컷 즐기고 질리면 나한테 보내. 대신, 프랑스 돌아가기 전에 보내야 하는 거 알지? 이 이상은 양보 못 해.”

“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지?”

“……?”

“한국은 프랑스처럼 취향이 독특한 여자가 드물어.”

“제이드, 나 부동산 재벌 칼 맥리의 외동딸 일리안 맥리야. 지금까지 내 눈을 즐겁게 한 여자들이 모두 취향이 독특할 거라고 생각해? 아니야. 그런데도 내가 마음껏 즐긴 이유? 그건 바로 돈이야. 몇 시간만 참으면 거금을 쥐여주는데, 어떤 여자가 싫다고 할까? 나처럼 재벌이 아닌 이상.”

일리아는 별 걱정을 다한다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리안은 여자인데도 남자보다도 호탕하고 화끈한 성격이었다. 또한 유일하게 그에게 흑심을 품지 않은 여자였고, 사업 파트너로서도 훌륭했다.

그래서 친구를 했을 뿐인데. 난생처음으로 그녀와 친구를 한 게 후회가 되었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도준이 툭, 내뱉었다.

“그 반지 주인이야.”

“……뭐?”

“내가 유일하게 욕심내는 여자.”

“유치한, 클로버 반지 주인?”

기가 막힌 듯 짙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일리안이 갑자기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제이드, 역시 우린 통하는 게 있나 봐? 여자 취향도 같을 줄 누가 알았겠어?”

“제아를 상대로 쓸데없는 상상 하지 마. 생각만으로도, 기분 더러우니까.”

“오케이, 알겠어. 그런데 이를 어쩌지? 유일한 네 여자.”

“…….”

“나는 그렇다 쳐도 다른 남자들이 쓸데없는 상상을 할 것 같은데. 그것도 아주 야하게 말이야.”

도준의 뒤쪽에 위치한 스크린을 응시하는 일리안의 얼굴은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불현듯 스치는 불안감에 도준은 서서히 돌아섰다.

커다란 스크린 속 중앙에 위치한 화면, 테라스에 있어야 할 제아가 스테이지 중심에 홍일점처럼 서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데도 아주 또렷하고 치명적으로 그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타이트한 붉은 원피스, 뇌쇄적으로 흔들리는 선이 고운 몸짓, 고혹적으로 내리깐 눈빛.

남자란 남자는 죄다 유혹을 하려고 작정을 한 게 분명했다.

도준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한 듯, 간간히 CCTV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앙칼지면서도 섹시했다.

지금까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도준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곧이어 룸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닫혔다.

룸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디자이너들은 파우더 룸으로 모여들었다.

“친구 사이라면서, 이사님은 왜 화를 내시지?”

“이사님이 그랬잖아. 한도준 사장님이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그리고 결혼은 곧 사업이라고. 딱 보면 몰라? 결혼 생각이 있으니까 사업을 그렇게 도와주는 거지. 재력으로 따지면 우리 사장님이 훨씬 위잖아.”

“맞다. 이제 보니 한 사장님이 회사 방문하고 나서 이사님이 급하게 리미티드 반지 한 쌍 직접 세공했잖아. 딱 봐도 프러포즈용이던데!”

“설마, 한 사장님한테 프러포즈하려고 우리까지 끌고 한국 쫓아온 거 아니야? 근데도 한 사장님은 다른 여자한테 한눈판 거고?”

“원래 재벌들은 결혼 따로 연애 따로잖아. 그 여잔 뭐 하룻밤 상대나 세컨드 하려는 걸 수도 있지.”

“괜히 또 우리한테 불똥 튀는 거 아니야?”

“근데 여자가 매력적이긴 했어. 남자들의 음흉한 마음을 자극하는 기묘한 페이스야. 디자이너들이 환장하는 새하얀 백지 같은 얼굴이잖아. 그리는 거에 따라 달라지는 도화지처럼. 그러니까 마이클도 손을 뻗은 거지. 그 자식도 자기 모국이라고 한국 여자 엄청 좋아하잖아.”

그때였다. 타앙, 소리와 함께 파우더 룸 끝에 위치한 화장실 칸의 문이 열리면서 제아가 나타났다. 여자 디자이너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는데도 제아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걸어왔다.

“음심을 자극하는 새하얀 백지 같은 얼굴이란 거, 칭찬 맞죠?”

지극히 태연하게 묻는 제아의 모습에 여자 디자이너들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생긋 웃음까지 날린 제아는 유유자적 파우더 룸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파우더 룸을 나온 순간 눈시울이 뜨겁게 붉어졌다.

도준의 진심, 지금 이 순간도 믿는다. 그 여자가 보는데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품에 안고 나온 걸 보면.

그녀가 믿지 못하는 건 지독한 현실이었다. 국내 서열 2위인 제일 그룹의 후계자가 될 몸이니까. 그에게 결혼이란 제일 그룹을 더 번창시킬 훌륭한 사업 파트너를 구할 돌파구이니까. 그걸 이해하는 몫은 철저하게 제아 자신의 것이었다.

“세컨드 따위, 절대 안 해.”

주먹을 불끈 쥐고 작게 중얼거린 제아는 테라스가 아닌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도 알 수 없는 미련에 잠시 돌아섰지만 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뿌옇게 어두운 클럽 스테이지, 흐릿한 어둠을 순간순간 밀어내는 현란한 조명, 끈적이게 뒤엉켜서 몸을 흔드는 젊은 남녀.

안개가 낀 듯 이성이 느슨해지고, 본능이 솟구쳤다.

제아의 시선이 현란한 조명을 뿌려대는 천장으로 향했다. 천장과 상층 곳곳에 달린 CCTV가 보였다. 도준과 그 여자가 있을 룸 안 스크린에 제 모습을 비추어줄 CCTV.

때마침 현아가 부른 듀엣곡인 트러블 메이커가 느릿하고 섹시하게 흘러나왔다.

지금 이 순간, 너무도 마음에 와 닿는 가사.

니 눈을 보면 난 Trouble Maker

니 곁에 서면 난 Trouble Maker

조금씩 더 더 더

갈수록 더 더 더

이젠 내 맘을 나도 어쩔 수 없어

니가 나를 잊지 못하게 자꾸 니 앞에서 또

니 맘 자꾸 내가 흔들어 벗어날 수 없도록

니 입술을 또 훔치고 멀리 달아나버려

난 Trou a a a ble! Trouble! Trou! Trouble Maker!

제아는 클럽 스테이지를 비추는 CCTV가 도준이라도 되는 것처럼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남자를 향한 지독한 유혹, 도발, 자극.

도준이 보고 있다면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때처럼 질투심에 사로잡혀 나타나주기를 바랐다.

이런 나를 보고, 나에게 와줘.

원치 않은 늑대들이 끊임없이 손을 뻗어왔지만 제아는 교묘하게 그 손길을 피하면서 몸을 흔들었다.

‘한도준, 안 나타나면 내가 너 세컨드 만들어줄 거야!’

찾아낸 CCTV마다 시선을 주었지만 도준은 나타나지 않는다.

설마 보지 못한 걸까?

결국은 포기해버렸다. 유혹적으로 흔들던 몸을 축 늘어뜨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누군가가 제아의 허리를 뒤에서 낚아챘다. 지독한 술 냄새와 강렬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자식아, 이 손 안……?”

퍽―.

순식간이었다. 이미 돌아섰을 때 제아를 탐했던 남자는 손으로 코를 감싼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짧은 비명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묻혀버렸다.

마스카라로 바짝 치켜 올린 풍성한 속눈썹 사이로 도준, 그가 보였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현란한 어둠 속에서도 폭발할 듯 타오르는 도준의 눈빛이 제아의 심장을 살벌하게 긁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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