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38화 (38/104)

38. 나한테서 안 벗어나면, 키스해버린다.

2017.01.12.

시간이 멈춰버린 듯, 서로의 몸 사이를 채운 공백마저도 미동조차 없이 멈춰버렸다. 볼에 한 가벼운 입맞춤뿐인데도 거칠게 뛰고 있는 서로의 심장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수줍게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뗀 제아는 도준이 그랬던 것처럼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출장 갔다 오면, 고백에 대한 대답, 해줄게.”

제아의 입술이 멀어지고 나서야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는 듯했다.

엄연히 따지면 진하게 키스를 두 번이나 한 사이였다.

그런데도 이놈의 깃털 같은 볼 입맞춤이 뭐라고, 도준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새하얀 얼굴이 발그레해진 도준을 보려니, 제아는 갑자기 부끄러움이 치솟았다.

에라, 모르겠다! 이럴 땐 줄행랑이다!

“그럼 추, 출장 잘 다녀와!”

메마른 건초에 불을 질러놓고 나 몰라라 튀려는 괘씸한 고양이 한 마리를 도준은 단번에 품에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스윽 기울어지며 확대된 도준의 얼굴이 제아의 동공을 가득히 메웠다.

서, 설마 또 키스하려고? 너무 환한 대낮인데?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런데도 묘한 기대감이 몸속에서 피어올랐다. 예전처럼 피하기는커녕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내려버렸다.

‘이, 입술을 벌려야 하나? 아니야, 그럼 너무 조신하지 못해!’

아무래도 키스는 아닌 것 같고. 뽀뽀 정도는 괜찮겠지.

제아는 입술에 꼭 힘을 주고 기다려 보지만, 입술에 내려앉는 기분 좋은 감촉은 없었다.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면서 슬그머니 실눈을 뜨려는 찰나, 입술이 아닌 목에서 이상한 촉감이 느껴졌다.

탁―.

이게 무슨, 소리지?

간질거리는 따스한 숨결이 귓가에 와 닿았다.

“대답 듣기 전까지, 키스는 보류.”

그 속삭임에 제아는 눈이 번쩍 떠졌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 먼저 마신 꼴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도준이 허리를 단단히 휘감고 있어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정처 없이 방황하는 제아의 시선이 도준의 한쪽 손에 들린 익숙한 형체에 닿았다.

“그거…… 내 목걸이?”

제아는 뒤늦게 손으로 목과 가슴 부분을 더듬어보지만, 항상 걸려 있던 목걸이가 잡히지 않았다.

“내 인질이야.”

인질? 무슨 인질?

제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고백에 대한 대답을 듣고 난 후, 이건 그때 돌려주도록 하지.”

그제야 도준의 말뜻을 이해한 제아는 부끄러움에 눈을 내리깔며 두 손으로 볼을 감쌌다. 버릇처럼 도톰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깨물어서 피가 몰린 제아의 입술을 보는 건 도준에게 꽤 자극적이었다.

이거, 위험한데.

“방금 했던 말, 취소하지.”

긴장한 듯 가늘게 떨리는 동공이 그를 조심히 올려다보았다.

“셋 셀 동안 나한테서 안 벗어나면, 키스해버린다.”

도준이 얼굴을 살짝 기울이자, 허둥거리는 제아의 손길이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손에 닿았다.

“하나.”

그 모습이 귀여워서 도준은 허리를 감은 팔에 일부러 힘을 빼지 않았다. 좀 더 고개를 기울이자 제아의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틀며 그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냈다.

“둘.”

“자, 잠깐!”

덮칠 듯이 얼굴을 숙이며 감고 있던 팔을 놔준 순간…….

“셋.”

“꺄악!”

두 손을 하늘 위로 번쩍 들어 올린 제아가 튕기듯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 골목길로 내달렸다. 키스를 바라면서 눈을 감을 때 언제고.

도망치는 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도준의 눈에 옅은 웃음이 배였다.

***

도준이 없는데도 일주일이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제아는 그동안 온라인 기획팀으로 꽤 많이 불려갔다. 있을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구박만 하더니 막상 그녀가 없으니 기본적인 업무를 다루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호출당한 지 2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온라인 기획팀에서 다시 호출이 오자, 보다 못한 신 비서가 짜증스럽게 말을 했다.

“제아 씨, 내려가지 마. 이제 엄연히 비서 팀인데 누굴 오라 가라야?”

한 성격 하는 신 비서임을 알기에 제아는 일이 커지는 건 막고 싶었다.

“선배님, 이번 한 번만 참아주세요. 제가 마지막으로 내려가서 제대로 인수인계해주고 올게요.”

빠듯한 하루를 보낸 제아는 퇴근을 하자마자 도준의 집으로 향했다. 깨끗하게 청소를 끝내고 도준의 집을 나서던 제아는 버릇처럼 핸드폰을 또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대답, 궁금하지도 않나?”

오늘이 딱 도준이 말한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연락 한 통 없었다. 하다못해 인호조차도. 고백에 대한 대답이 궁금해서라도 빨리 돌아와서 그녀를 보러 올 줄 알았는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제아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제아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도준을 기다리느라, 지연이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날인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지연! 돌아왔어?”

[문제아, 너 당장 압구정 MB로 튀어와. 한지로 이 새끼 술 쳐 먹고 너만 찾는다.]

지로와 함께 있다는 말에 제아는 순간 흠칫했지만, 얌전한 걸 보니 지연은 아직 도준이 돌아온 걸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한지로, 의외로 입이 무겁네?

“지연아, 나 진짜 피곤해서 그러는데 다음에 보면 안 될까?”

[나도 지금 여행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지로한테 불려나왔거든?]

“넌 지로랑 놀아주고 집에 가서 쉬면 되잖아. 난 내일도 출근해야 되거든? 그것도 아침 일찍!”

[그럼 하나만 묻자. 너 다니는 회사 사장이 진짜 이준 오빠야?]

한지로 이 자식 정말, 입 무겁단 말 취소다! 어차피 지연도 알아야 할 일이기에 제아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

“나 지금 바로 갈게.”

MB에 도착하자 입구에 버티고 서 있는 문지기가 제아의 단정한 오피스룩 차림을 못 마땅한 듯 응시했다. 통과를 시켜, 말아 고민하는 눈치였다.

때마침 지연이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완벽한 풀 메이크업에 붉은색의 시스루 레이스 원피스를 입은 지연은 파티의 여왕답게 오늘도 화려했다.

지연을 따라 3층 룸에 들어가자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있는 지로가 보였다. 향기라도 맡은 걸까. 제아가 온 걸 기가 막히게 알아챈 지로가 벌떡 일어나더니 제아에게 손을 뻗쳤다.

“우리 제아! 문이준한테 안 가고 나한테 왔어. 다른 여자들, 빌어먹을……. 다 너 때문에 그런 거 알지? 나, 너밖에 없다. ……회사 때려치워라, 응? 그 자식이 사장이잖아. 버리고 가더니 10년 만에 나타나서 널 뺏어가겠다고? 웃기지 말라고 해.”

횡설수설하는 지로의 눈은 제대로 풀려 있었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을 못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아를 품에 안으려고 손을 버둥거리는 지로의 이마를 제아가 집게손가락으로 툭, 밀었다. 그대로 소파에 풀썩 쓰러진 지로는 이내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늘씬한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지켜보던 지연이 입을 열었다.

“한지로가 하는 말, 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으니까 제아 네가 말해봐.”

지연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제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준 오빠가 돌아왔어. 한도준이란 이름으로, 우리 회사 사장님으로.”

“자, 잠깐. 너희 회사 사장이면…… 이준 오빠 친엄마가 제일 그룹 외동딸이었어? 오빠는, 친손자고? 대박!”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제아는 지연이 흥분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한참 후에야 생각을 정리했는지 차분해진 표정으로 지연이 다시 말을 했다.

“다 이유가 있으니까 네가 나한테 숨긴 거겠지. 그래, 그건 내가 이해할게. 그 대신…….”

“넘보지 마.”

지연이 무슨 말을 할지 불 보듯 뻔하기에 제아는 단호하게 먼저 말을 했다. 지연이 기가 막힌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문제아,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오빠 넘보려는 거잖아. 안 된다구.”

“왜 안 되는데? 이제 이준 오빠가 제일 그룹 손자라서? 그건 걱정하지 마. 우리 아빠 회사, 중소기업이어도 꽤 알아주거든? 그리고 네가 이준 오빠 많이 원망하고 미워하는 거 알겠는……?”

제아는 지연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지연의 눈을 직시하며 또박또박 말을 했다.

“내가 이준 오빨 사랑해. 그래서 안 돼.”

“알아. 이준 오빠랑 너, 유별났잖아.”

제아가 입에 담은 사랑이란 의미를 다르게 해석한 듯 지연은 덤덤하게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런 친구에게 제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딱 잘라서 선전포고했다.

“오빠가 아니라, 한 남자로서 사랑한다구.”

“풉! 컥컥!”

얼마나 놀랐는지 지연은 입에 머금었던 술을 입 밖으로 뿜어버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지연을 태연하게 응시하며 제아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한지로처럼 더럽다는 말이나 할 거면 입 다물어. 오빠랑 나 피 한 방울 안 섞였으니까. 너까지 그러면 나 정말 힘드니까.”

“맙소사. 그래서 한지로가 저 꼴이구나.”

불쌍하다는 듯 지로에게 시선을 준 지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준 오빤, 제일 그룹 손자인데도 평범한 문제아가 좋대?”

제아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둘 다 남매였을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

“과거가 중요하진 않잖아. 지금이 중요할 뿐이지.”

“하긴. 근데 너 혹시…… 이준 오빠가 제일 그룹 손자라서 좋은 건 아니지?”

“휴, 차라리 오빠가 평범한 남자였으면 좋겠다.”

묵직한 한숨을 내쉬는 제아를 본 지연은 쿨한 성격답게 현재 상황에 철저하게 적응했다.

“서로 좋다는데 내가 끼어들 순 없으니 포기해야지 뭐. 역시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나 봐.”

“이지연, 고맙다.”

“뭐가?”

“한지로처럼 욕 안 해줘서.”

“솔직히 말할까? 사실 옛날에도 느꼈었어. 이준 오빠가 널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거든. 내가 또 눈치는 기가 막히잖아. 뭐 설마 설마 했지만.”

지연도 느꼈던 도준의 마음을 몰랐다. 10년 만에 돌아온 도준이 주변을 맴돌면서 끊임없이 마음을 내비쳤는데도 몰랐다.

“나 진짜, 둔하나 봐.”

“문곰탱이 어디 가겠니?”

“야아!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지연이 키득키득 웃다가 말을 이었다.

“이준 오빠 의외로 순정남인데? 그 재력을 갖추고도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니, 대단해. 그런 남자면 내가 뭘 한들 나한테 넘어오겠어? 1%의 가능성도 없는 일에 난 우정을 잃고 싶지 않아.”

“내 친구, 멋진데?”

“멋진 게 아니라 안 되는 거니까 포기한 거거든? 그리고 내가 넘본다고 하면, 제아 네가 퍽이나 날 가만히 놔두겠다. 네 손맛, 딱 한 번 느낀 걸로 만족하거든?”

작은 오해로 몸싸움을 벌였던 첫 만남을 떠올렸는지 지연이 질색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근데 이준, 아니 도준 오빠 어떻게 변했어? 엄청 궁금하다.”

잠시 망설이던 제아는 핸드폰을 꺼내서 지연에게 내밀었다. 아직 고백에 대한 대답을 한 것도, 정식으로 애인 사이가 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수줍고 마음은 또 설레는지.

연인을 친구에게 보여주는 기분을 제아는 처음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부산에서 여고생들이 찍어준 도준의 사진을 본 지연이 감탄을 내질렀다.

“대박! 완전 초특급 업그레이드잖아! 이게 남신이야, 인간이야? 야, 나 포기한다는 말 취소할래!”

“이게 진짜!”

“농담이야, 농담! 계집애, 남자 때문에 친구 잡아먹겠네!”

“네가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한테 대시할 때마다, 다 너 때문에 거절한 거 알지? 쌤쌤이니, 그런 말 하지 마. 너한테 미안한 감정 하나도 안 느끼니까.”

“넌 어차피 그 남자들한테 관심도 없었잖아! 뭐, 여튼 축하해. 드디어 첫 연애하게 된 거 말이야. 그런데, 부모님은 아셔?”

지연의 물음에 제아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도준과의 사랑의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그녀의 부모님이었으니까. 그때 지연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어, 오빠! 진짜요? 안 가긴 왜 안 가요, 나 다시 부킹 갈 거니까 기다려줘요. 진짜 확실한 거지?”

전화를 끊은 지연은 항상 들고 다니던 메이크업 박스를 열고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문제아, 너 한지로 책임지고 집으로 데리고 가. 알았어? 다 너 때문에 얘 이 꼴 난 거니까.”

“지로 떠넘기고 넌 어디 가게?”

“이준 오빠 네 거라면서. 그럼 난 다시 부킹 가야지. 부킹 안 한다고 했는데 남자들 죽이는 룸 있다고 진짜 안 갈 거냐고 웨이터 오빠가 전화했네. 호호!”

화장을 고치고 향수까지 다시 뿌린 지연은 손을 흔들며 룸에서 나가버렸다. 지로와 단둘이 남은 제아는 소매를 야무지게 걷어 올리고 지로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한지로, 한지로! 일어나 봐 좀! 집에 가자!”

얼마나 술을 마셔댔는지 짙은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휴,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못 살아.”

그리고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한지로.

낑낑거리며 지로를 일으켜 세우려는데 갑자기 문이 다시 벌컥 열리면서 지연이 들어왔다. 닫힌 문에 몸을 기댄 지연의 얼굴은 넋이 나가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어? 남자들 죽인다더니 별로야?”

잠시 천장을 바라본 지연이 제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문제아, 네 핸드폰 다시 줘봐.”

핸드폰을 받아 든 지연은 도준과 제아가 찍은 사진을 찾아내 뚫어지게 응시했다.

“나 이준 오빠, 방금 본 것 같아.”

“오빠 해외 출장 가서 아직 안 돌아왔거든? 네가 잘못 본 거겠지.”

제아는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연이 제아와 눈을 맞추면서 물었다.

“문제아, 이 얼굴이랑 비슷한 얼굴이 흔할 것 같아?”

지연의 말이 맞았다. 도준 같은 외모가 또 존재할 리는 극히 드물었다.

“내 눈썰미 기가 막힌 거 너도 알잖아. 확실해. 이준 오빠였어.”

대답을 못하는 제아를 바라보며 지연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다시 말했다.

“그것도 엄청, 쭉쭉빵빵인 미녀랑 같이 있었어.”

제아는 도준을 믿는다. 진심을 보여놓고 다른 짓을 할 남자가 아니란 거, 누구보다 잘 아니까.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왜 만나러 오지 않은 건지. 고백에 대한 대답이 궁금하지 않은 걸까.

“어디서 봤어?”

“4층 라운지 룸. 쭉쭉빵빵한 여자랑 룸에 들어가는 거 내가 봤어. 두 눈으로 똑똑히.”

도준을 믿는 만큼, 제아는 지연의 예리한 눈썰미도 믿었다. 그랬기에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 했다. 정말 도준이 맞는지.

“도준 오빠,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지연이 손목을 잡았다.

“야, 넌 못 가!”

“……왜 못 가?”

지연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몰라서 물어? 룸 잡는 데만 200만 원이야! VVIP를 위한 프라이빗 룸이라고. 그런데 너 같으면 회사에서 퇴근한 차림의 여자를 그냥 통과시켜주겠어? 지금 네 꼴로 가면 바로 문전박대야!”

그제야 제아는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10년 만에 도준을 재회했던 그때와 같은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4층을 통과해서 도준을 봐야만 한다.

단순한 그녀였지만, 생각한 건 꼭 실행에 옮겨야 하는 행동파였다.

생각을 마친 제아는 지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신체 사이즈도, 신발 사이즈도 같은 화려한 파티의 여왕인 친구를.

“이지연.”

“……?”

“나랑 옷 좀 바꿔 입자.”

지연은 단번에 눈살을 구기며 거부를 했다.

“미쳤어? 나보고 그런 꼬리꼬리한 옷을 입으라고?”

“이게 왜 꼬리꼬리해? 아주 단정한 오피스룩이거든? 그것도 비서 오피스룩! 남자들의 로망, 비서룩!”

“너나 비서 해! 난 곧 죽어도 단정한 옷차림 싫으니까.”

“이지연, 오랜만에 내 손 맛 좀 느껴볼래?”

제아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지연이 찔끔했다.

“어휴, 성질머리하고는! 알았어. 옷 바꿔 입어주면 될 거 아니야! 대신에 나중에 도준 오빠한테 한 번 거하게 쏘라고 해!”

룸에 딸린 화장실에서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 나왔다. 톱 원피스 위로 드러난 제아의 아찔하고 풍만한 가슴골에 지연이 부러운 섞인 시선을 보냈다.

“가슴 죽이는데? 사이즈가 더 늘어난 거 같다?”

“그대로거든? 나 메이크업 박스나 좀 빌려줘.”

“화장은 내가 해줄게. 너보단 메이크업 배운 내가 낫지 않겠어? 이준 오빠가 뻑 가도록 내가 헤어까지 세팅해줄게. 어때, 맡겨볼래?”

옷을 바꿔 입기 싫다고 짜증을 부리던 지연은 신 나 죽겠다는 듯, 눈까지 반짝이면서 적극적인 태도였다.

믿음직한 아군을 보며 제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맡길 테니까, 제대로 변신시켜줘.”

어떻게든 4층을 통과해야 나의 늑대를 사냥하러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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