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오빠랑 나, 피 한 방울 안 섞였으니까.
2017.01.09.
“몸은 여러 여자에게 주고 마음만은 제아에게 주고 기다렸다? 그게 한지로라는 남자의 사랑 방식인가 보지?”
눈빛처럼 찌르듯이 파고드는 그의 나직한 속삭임에 지로는 격하게 숨을 헐떡였다. 물론 제아 몰래 그런 짓을 한 건 아니다. 그것도 다 사정이 있었고, 제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부끄럽고 창피했다. 지로는 그저 억울한 눈빛으로 도준의 등 뒤 어딘가를 더듬었다.
‘제아야, 제아야! 나 억울하다! 너도 알지? 나 억울한 거! 내 마음 그게 아니란 거!’
하지만 그에게 완벽하게 가려진 제아는 머리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로는 속만 시꺼멓게 타들어갈 뿐이었다.
태산처럼 서 있는 도준의 눈을 노려보는 순간 지로는 보았다. 차갑게 응결된 도준의 동공 속,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변하지 않은 동생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을 말이다.
지로는 도준의 그 눈빛을 오래전에도 마주했었다.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제아가 제 오빠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던 그때도 저 눈빛이었다.
***
제아의 집 앞에 골목에 다다랐을 때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진 남자의 뒷모습을 발견한 제아의 얼굴에 광채가 돌았다.
“어? 우리 오빠다!”
동시에 제아의 걸음이 빨라졌다. ‘오빠’라는 말에 지로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유난히도 오빠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제아라는 걸 알고 있기에 잘 보여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짓 따위, 절대 안 할 성격이지만 좋아하는 여자의 오빠라면 말이 달라지니까.
“한지로, 우리 오빠 문이준이야.”
지로는 몸을 틀자마자 90도로 깍듯하게 상체를 접었다.
“안녕하세요, 제아 남자 친구 한지로입니다!”
그런데 돌아와야 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슬그머니 숙였던 상체를 드는 순간, 지로는 제 눈을 의심했다.
‘흐, 흑표범?’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지로에게 쌍코피를 선사해준 미친 흑표범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싸늘한 눈빛으로 지로를 응시하는 아름다운 남자는 바로 미친 흑표범이었다.
착각이기를 바라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외모였다. 소년인 듯 남자인 듯한 묘한 매력을 풍기는 섬세한 이목구비가 들어찬 작은 얼굴이 기똥찼다. 하지만 저 얼굴은 속임수였다. 주먹맛은 핵폭탄 급이었으니까.
물론 지로도 처음엔 떠도는 소문 따위, 믿지 않았다. 소문이란 원래 과장되게 부풀어 오르는 법이니까. 클럽에 흑표범이 떴단 소리에 궁금해서 찾아갔다.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길래, 그렇게 소문이 부풀어 오른 건지.
남자들은 공포에 떨게 하고 여자들의 마음은 죄다 훔쳐가는 미친 흑표범을 확인하는 순간 지로는 웃어버렸다. 호리호리한 체구, 계집애보다 더 예쁘장한 얼굴. 딱 봐도 샌님이잖아?
그런데도 쓸데없는 남자의 호기와 궁금증은 여전했다. 사소한 걸로 시비가 붙어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흑표범의 주먹이 얼굴을 먼저 강타했다. 파워는 말할 것도 없고 정확한 펀치는 전광석화 같았다.
온갖 운동을 섭렵해서 싸움이라면 자신 있었던 자존심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느꼈다. 저 새끼는 동물적인 감각을 타고난 파이터라는 것을. 싸움을 배워서 하는 놈은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왜 하필 저 자식이 제아 오빠인 거야?’
지로는 짜증이 치솟는 동시에 궁금해졌다. 제아는 과연 제 오빠가 소문의 미친 흑표범인 걸 알고 있는지 말이다.
그를 알아본 자신과 달리 이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로지 동생에 대한 짙은 소유욕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 설마, 나를 기억 못 하는 건가?
“제아는 남자 친구 따위, 없어.”
“……?”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고 이준은 제아를 데리고 초록색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며칠 후 지로는 한 번 더 놀랐다. 제아의 오빠인 문이준이 모범생의 정석인 남한고의 학생회장이라는 사실에 말이다. 그는 완벽하게 이중생활을 즐기는 포악한 야누스였다.
우연치 않게 이준이 미친 흑표범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제아는 여전했다. 지독할 정도로 오빠밖에 몰랐다. 지켜보는 사람이 짜증이 날 정도로.
결국 제아를 잊기로 했다. 빌어먹을, 짝사랑이란 거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그때쯤 소꿉친구인 지연이 그를 커피숍으로 불러냈다. 지로는 귀찮은 듯 어슬렁거리면서 커피숍으로 나갔다. 그런데 지연의 옆에 앉은 제아가 보였다.
바로 나와 버렸어야 했는데. 항상 밝았던 제아가 서럽게 흐느끼는 모습에 그는 자석에 끌리듯 그 앞에 털썩 앉아버렸다.
왜 우는, 거지?
그리고 지연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제아의 집안에 들이닥친 불운과 함께 엄청난 비밀을.
“친엄마라니?”
지로의 반문에 지연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나도 자세한 건 모르는데 이준 오빠가 이복오빠래.”
“그런데?”
“이준 오빠가 워낙 미래가 촉망받는 수재잖아. 그래서 미래를 위해서 친엄마한테 가기로 했대.”
그제야 핼쑥해져서 눈물에 젖은 얼굴로 지연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든 제아가 이해가 되었다. 문이준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제아였으니까.
“미래는 개뿔! 지 혼자 살겠다고 가족들 버리고 떠난다는 거잖아! 재수 없는 새끼 같으니라고!”
욕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독할 정도로 가족 바라기인 문이준이 가족을 버리고 가다니.
그래서일까, 제아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준이 다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굳건했다.
그런 제아에게 며칠 뒤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이준이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다.
“가지 마, 이 바보 같은 계집애야! 문이준 그 새끼, 너희 식구 버리고 미국으로 간다잖아!”
“그럴 리 없어!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내가 직접 오빠 만나서 들을 거야!”
제아는 정신이 나가버린 표정으로 공항까지 쫓아갔지만 이준은 이미 미국행 비행기를 탄 후였다. 지로는 창밖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푸른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저 비행기 중 하나에 문이준이 타고 있으리라.
‘문이준 개자식. 이렇게 버리고 갈 거였으면, 정 주는 것도 적당히 했어야지!’
지로는 넋이 나가버린 듯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제아를 일으켰다.
“저런 새끼 때문에 울지 마, 문제아.”
“지켜준다고 했었는데. 곁에 있어준다고 했었는데.”
제아의 말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주저앉은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제아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는 맑은 동공은 영혼이 사라져버린 듯했다. 지로가 아닌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듯, 제아는 똑같은 말을 몇 번이고 계속 되뇌었다.
“나한테 이제 오빠는 없어. 문이준 따위, 깨끗하게…… 잊을 거야.”
***
과거의 회상에서 벗어나자마자 지로는 자신이 왜 제아의 회사 앞까지 다짜고짜 쫓아왔는지를 상기했다.
‘아씨, 할매! 나 진짜 책상머리 체질 아니라니까? 술집 하나 차려주면 기가 막히게 운영 잘 할? 윽!’
이른 아침부터 30분간 쏟아지는 잔소리에 지로는 확 내질렀다. 그 말에 열 받은 할매가 그의 얼굴에 경제 신문을 냅다 투척했다.
얼굴에 툭, 맞고 떨어진 경제 신문의 1면 뉴스.
처음엔 제일 어패럴이라는 회사명에 눈이 갔고, 그다음에는 흑백임에도 불구하고 외모라기보다는 미모에 가까운 남자 사장의 얼굴에 눈이 갔다.
저 눈빛, 저 분위기. 어디서 많이 봤는데?
기억을 더듬는 순간, 어떤 이름이 번뜩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기분 나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문이준. 문이준이 왜?’
그걸 보자마자 제아에게 달려온 것이다.
―나한테 이제 오빠는 없어. 문이준 따위…… 깨끗하게 잊을 거야.
10년 전 눈물을 흘리며 제아가 했던 그 말이 아직도 유효한지 말이다.
그런데 제아에게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와 맞닥뜨린 것이다. 10년이나 흘렀는데도 변함없는 소유욕을 과시하는 문이준을.
그때도 그랬지만 지로는 지금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생을 향한 이준의 과도한 집착과 소유욕이 말이다.
“프라이버시 지켜줄 때, 조용히 꺼지지 그래.”
자신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도준은 조금의 미동조차 없었다. 소름 돋을 정도로 냉정한 도준을 눈에 담으며 지로는 깨달았다. 엄청난 놈을 상대하려면 절대 흥분해선 안 된다다는 것을. 흐트러지는 순간, 잡아먹힌다는 것을.
지로는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뗐다. 절대 질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따지면, 선배도 자격 없는 거 아닙니까? 선배야말로 오빠 노릇 그만하고 꺼져주시죠. 누가 보면 오빠가 아니라 애인인 줄 알겠습니다. 애정도 과하면 추한 거 모릅니까?”
“네 말대로 오빠 노릇, 이제 그만할 생각이야.”
순순히 대답하는 도준의 모습에 지로의 눈에 의심이 가득 차올랐다. 호락호락 포기할 놈이 아닌데. 갑자기 왜 저러지? 미치도록 두렵고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이내 현실이 되었다.
“제아에게, 남자로서 다가갈 생각이거든.”
도준의 마지막 한마디가 귀를 세차게 후려치는 순간, 겨우 꾹꾹 눌러놓았던 성질머리가 폭발하고 말았다.
“미, 미친 새끼!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10년 전은 미친 짓이었지만, 이젠 합법적이지.”
최후통첩을 날린 도준은 제아의 손을 꼭 잡은 채 돌아섰다. 그런데 지로를 더 미치게 하는 건 바로 제아였다. 자신이 손만 대면 괄괄한 성질머리를 가진 계집애가, 도준에겐 얌전한 양처럼 끌려가다니.
‘문제아 너 설마, 또 흔들린 거냐!’
남아있던 이성은 깨끗하게 증발해버렸다. 머릿속은 오로지, 저 미친놈으로부터 제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
“야 미친 새끼야, 그 더러운 손 안?”
도준에게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며 지로가 덤벼드는 순간…….
“안 돼!”
두 손을 크게 벌린 제아가 보호하듯이 앞을 막아섰다. 도준이 아닌, 지로 자신의 앞을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지로, 때리지 마.”
그제야 지로의 눈에도 보였다. 자신을 겨냥했던 도준의 주먹이 목표를 잃고 방황하다가 바지 포켓으로 향하는 걸.
짜증이 나는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 주먹이 도준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도준의 주먹이 얼굴에 먼저 닿았을 거라는 걸.
“진짜 뭣 같네.”
그 중얼거림을 들었을까. 살짝 고개를 튼 제아의 앙칼진 고양이 눈이 지로에게 짧게 머물렀다.
“한지로, 넌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참을 만큼 참아줬다는 말투에 지로는 얼른 입을 꾹, 다물었다. 저 고양이가 발톱 세우면 감당이 안 되니까.
“지로는 나한테 소중한 친구야. 그러니까 한지로 때리면, 나 가만 안 있을 거야.”
제아가 제 편을 들어주었는데도 지로는 한약이라도 먹은 듯, 입 안이 굉장히 쓰게 느껴졌다.
‘저 새끼 앞에서 친구라고 딱 선을 그어버리네, 문제아.’
씁쓸한 웃음을 머금는 찰나, 지로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한도준이,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소중하다면야, 난 이쯤에서 빠져줘야겠군.”
상처받은 야수의 눈이 지로의 얼굴에 서슴없이 꽂히는 순간, 짧게 내비쳤던 감정은 깨끗하게 점멸해버렸다. 지로마저도 숨이 탁 막혀올 정도로, 광포한 어둠의 아우라가 도준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친구와 뜨거운 우정을 나누겠다고 하니, 말이야.”
지로는 미친 흑표범이 제 스스로 사라져주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탁, 소리와 함께 무방비하게 공격받은 제 뒤통수를 감쌌다.
“아야! 넌 꼭 때려도 남자 체통 무너지게 그렇게 때리냐?”
점프하듯이 솟구쳐 오른 제아가 지로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친 것이다.
“오빠한테 얻어터지느니 나한테 맞고 체통 무너지는 게 낫지!”
“아씨, 나 옛날의 한지로가 아니거든? 저 자식, 이제 내가 한 손으로 이긴다!”
저놈의 허세, 어쩔 거야! 제아가 기가 막힌 눈빛으로 바라보자, 지로는 슬쩍 눈을 피했다. 뭐 얻어터지면 어때! 저 잘난 낯짝에 작은 스크래치라도 낼 수 있다면 몇 대 얻어터지지 뭐!
휴, 깊게 내쉬는 제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제 어깨를 두드리는 제아의 손길이 느껴졌다.
“한지로, 할머니 연세도 많으신데 이제 그만 속 썩이고 집으로 돌아가라. 알았지?”
말과 동시에 미련 없이 돌아서는 제아의 앞을 이번엔 지로가 막아섰다.
“문제아, 너도 미쳤냐? 어떻게 저런 더러운 새끼한테 갈라고 하냐고! 나 절대 저 새끼한테 너 못……?”
“그래! 미쳤다!”
“무, 문제아?”
잔뜩 날이 선 제아가 꽥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놀란 지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쁜 숨을 몇 번 토해낸 제아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미친 건 인정하겠는데, 더럽다는 말은 하지 마.”
“……?”
“오빠랑 나, 피 한 방울 안 섞였으니까.”
“너 지금…… 그걸 나한테 믿으라고 하는 거냐? 저 새끼 옹호하려고 하는 말이야. 그렇지? 아니라고 말해!”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으로 지로는 제아의 어깨를 세차게 거머쥐고 흔들었다. 하지만 그 손길을 뿌리 친 제아는 가방을 뒤져서 지로의 손에 2만 원을 쥐여주었다.
“한지로, 지금 내가 좀 급하거든? 그러니까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하자. 알았지? 딴 데로 새지 말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
도준이 차에 오른 걸 본 제아는 마음이 다급해져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
제아는 출발하려는 도준의 차를 겨우 잡아서 조수석에 올라타긴 했다. 화가 단단히 났는지 제아에게 잠깐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도준은 묵묵히 운전만 했다.
그런데도 제아는 그런 도준의 모습이 이제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알아서인지, 이제 조금씩 보이지 않았던 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제아의 입가에 헤실헤실 미소가 어렸다.
“오빠, 삐쳤어?”
“……아니.”
“에이, 삐쳤네. 삐쳤어.”
정면만 바라보던 고집스러운 시선을 트는 순간, 도준은 제 눈을 의심했다. 폭발할 것 같은 그와 달리 그를 응시하는 제아의 눈빛은 꽤 즐거워 보였다.
“그 눈빛, 뭐지?”
“그냥 신기해서.”
“……뭐가.”
“질투하는 오빠 모습.”
질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래도 다시 그에게 다시 돌아와 준 제아였기에 도준은 반박하지 않기로 했다. 건방지게 제아에게 소유권을 행사하려는 한지로를 때려눕히고 싶은 거친 충동도 질투라고 한다면.
그때, 인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블루투스를 연결해서 전화를 받은 도준은 인호와 꽤 오래 통화를 했다.
통화를 하는 와중에도 차창 밖을 내다보는 제아의 옆모습에서 그는 눈을 떼지 않았다.
인호와의 통화가 끝나자 제아는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물었다.
“일리니는 주얼리 브랜드잖아. 우리 회사, 이제 주얼리도 취급해?”
“일리니만 독점 계약해서 판매할 거야. 제일 아울렛 회원들에 한해서만 구매 자격이 주어질 거고. 일리니, 너도 꽤 좋아하나 보지?”
도준의 말인즉슨, 마케팅 목적으로 일리니 브랜드를 이용할 거란 뜻이었다. 게다가 온라인 사이트처럼 아울렛을 회원제로 운영하겠다니, 꽤 파격적이었다.
“국내에 안 들어와서 한국 여자들이 더 열광하는 게 일리니거든? 이번에 리미티드로 제작한다는 커플링이랑 팔찌는 여자들의 로망 중의 로망이야.”
“그 로망, 너한테도 해당되는 사항인가?”
“당연한 거 아니야? 나도 로망을 꿈꾸는 여자거든요?”
때마침 도준의 차가 큰 도로가에 멈추었다.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는 제아를 저지한 도준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뜻밖의 매너에 제아는 어색하게 차에서 내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매너까지 갖추면, 여자들 완전 쓰러지는데.”
제아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도준이 문을 닫으며 무심하게 대답을 했다.
“그럼 쓰러져주든가.”
“……?”
“이 매너도, 문제아 너한테만 해당되는 거니까.”
“누, 누가 뭐래?”
도준의 직설법에 조금 적응이 되었나 보다. 당황스럽기보다는 심장이 기분 좋은 설렘을 품은 걸 보니.
두근두근, 적당히 뛰는 심장 소리가 기분 좋게 제아의 고막을 울렸다.
“데려다주지 마. 낮이라서 괜히 우리 엄마랑 마주칠 수 있단 말이야.”
“어머니가, 그 정도로 나를 싫어하시나 보지?”
도준의 물음에 제아는 뜨끔했다. 그가 상처를 받을 말은, 뉘앙스도 풍겨서는 안 되는 건데!
“우리 부모님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해. 이해하지?”
다행히도 도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출장, 오래 걸려?”
“일주일 정도.”
“그렇구나. 그럼 나 갈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섰는데도 제아는 이상하게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리고 골목길에 접어든 순간 다시 뛰어나갔다. 거의 본능이었다.
제아가 뛰어오는 소릴 들었는지, 운전석으로 향하던 도준이 돌아섰다.
“헉헉…….”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고르지 못한 숨처럼, 제아의 심장이 고르지 못하게 벌컥거리고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녈 응시하는 도준을 보고 있으니 새삼 깨달았다.
죽어 있던 내 심장을 뛰게 한 남자.
차가웠던 내 심장을 뜨겁게 데워준 남자.
도준은 오빠가 아니라, 남자라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는 걸.
이젠 용기를 내는 일만 남아 있었다.
몸을 숙여 달라는 수줍은 손짓에 도준이 유순하게 상체를 조금 기울여주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제아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까치발을 들었다.
쪽―.
청량감이 감도는 그 소리에 무심하게 내리깔고 있던 도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