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36화 (36/104)

36. 그러니까, 입술을 먼저 떼고, 입술 좀.

2017.01.05.

태어난 이래 가장 큰 실수를 저질러버린 것 같아, 제아의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간절하게 바랐다. 복숭아 사탕이 도준의 입 안에만 들어가지 않았기를.

하지만 입술 사이로 스며드는 도준의 숨결에 복숭아 향이 배인 것도 같았다.

‘미치겠네! 어쩌지!?’

설상가상으로 도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설마 사탕도 모자라 로열 젤리까지 선물 받아서 충격이라도 먹었나? 우선 입술을 먼저 떼고, 사과를 먼저. 그러니까, 좀 떼고…… 입술…… 좀?

“웁, 우웁!”

그런데 생각처럼 고개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깨를 감싸고 있던 도준의 손이 어느새 목까지 타고 올라와 턱까지 야무지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가 좀 더 고개를 숙이자 입술이 조금 더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벌어진 입술 안으로 도준의 입술이 거칠게 파고드는 순간, 제아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사라졌던 복숭아 사탕이 다시 입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사탕을 다시, 돌려주려고 입술을 안 뗐나? 그런데 입술을 떼야 할 도준이 더욱더 깊이 파고들었고, 이내 사탕이 다시 사라졌다.

도준이 더 고개를 숙이자 제아의 고개가 좀 더 뒤로 꺾였다. 입술이 있는 대로 벌어졌다. 그 사이로 사탕과 사탕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깊숙이 침범해 들어왔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입 안 깊숙한 곳까지 헤집는 은밀하면서도 거친 움직임에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져갔다.

서로의 입술 사이로 사탕이 몇 번이고 넘나들었다. 반쯤 넘어온 사탕을 적당히 빨아들이고, 적당히 밀어 넣고……. 사탕과 함께 빨려들었다 밀려드는 건 바로 제아의 입술과 혀였다.

‘……하아.’

입 안 깊숙이 파고든 도준의 숨결, 눈물이 날 정도로 거칠게 빨리는 제아 자신의 숨결.

그래서 숨조차 제대로 내쉬는 게 힘들었다. 그의 입술과 혀가 능수능란한 움직임을 무한 반복할수록 감당하지 못할 감각들이 온몸을 꿰뚫었다.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데 눈앞은 깜깜했다. 벌컥거리는 심장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이 모든 걸 감당하지 못한 몸이 무너져 내렸지만 도준이 단단하게 받치고 있었다.

먹혀드는 입술 감각은 얼얼한데 미치도록 기분 좋은 감각이 짜릿하고 나른하게 온몸을 적셨다. 뭔가를 더 강렬하게 바라는 본능이 솟구쳤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개를 더 꺾으면서 도준의 입술을 파고드는 순간…….

“대체 어디 숨은 거지? 사장님 커플만 찾으면 되는데.”

누군가 탈의실에 들어왔다. 그 소리에 증발해버렸던 이성과 함께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나 지금, 뭐 하는……?

스스로의 미친 짓에 놀라 격하게 숨을 들이켜는 순간 감당 못할 텁텁한 공기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에, 에에에…….”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려는 재채기는 도준이 깊숙이 흡입해서 삼켜버렸다.

얼마나 깊숙이 빨아들였는지 제아의 숨이 탁 멈추는 순간, 도준이 다시 숨을 불어넣었다. 그사이 탈의실의 침입자들은 자기네들끼리 열심히 논의 중이었다.

“박 과장님, 그냥 나가요. 여긴 숨을 데가 없다니까요?”

“그래도 누가 아나? 확인은 해보는 게.”

“아이 참, 박 과장님 같으면 이런 데 볼썽사납게 숨겠어요?”

“어허! 남자가 어떻게 이런 곳에 숨나?”

“거 봐요. 박 과장님도 마다하는 저곳에 우리 사장님이 찌그러져 처박혀 있겠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뭘 모르는 소리였다. 고귀하고 도도한 한도준 사장은 말도 안 되게 이 좁은 공간에 찌그러져 처박혀 있었다. 그것도 할 건 다 하면서 말이다.

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제아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그저 도준에게 몸과 입술을 맡긴 채 심신을 있는 대로 늘어뜨려 버렸다.

‘설마, 또 하진 않겠지?’

참 묘한 게 여자의 마음이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해주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게 되니. 지독할 정도로 이율배반적인 감정이었다.

그런 제아를 구원해주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우렁차게 울렸다.

“시간 종료! 숨바꼭질의 최종 승자는 사장님 커플입니다! 자, 모두들 외칩시다. 사장님, 제발 좀 나타나주세요!”

“사장님, 제발 좀 나타나 주세요!”

직원들의 함성이 이어지자, 도준이 어깨를 거칠게 한 번 움직였다.

쾅―!

붙박이장의 문이 활짝 열리고 눈부신 빛이 새어 들어왔다. 도준이 먼저 붙박이장에서 빠져나가고, 이내 무너지는 제아의 몸을 품으로 받아냈다.

입술을 벌린 채 몽롱한 고양이 눈으로 제아가 그를 올려다보자, 도준은 또다시 몸 안의 피들이 뜨겁게 도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빨렸는지, 새빨간 핏물이 몰린 제아의 입술은 탐스럽다 못해 탱글탱글 부풀어 올라 있었다. 하루 종일 입에 물고 있어도 성이 안 찰 그의 달콤한 복숭아 사탕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도준은 제아가 제 발로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제아의 몸에 힘이 들어가고 혼몽했던 동공이 또렷해질 때쯤, 도준이 다시 얼굴을 기울였다.

무방비하게 살짝 벌어진 제아의 입술 위로 도준의 입술이 가볍게 머물렀다 사라졌다. 야릇하면서도 아쉬운 느낌만을 남긴 채.

“이번에 자극한 건 너야.”

제아가 혀를 굴려 입 안을 더듬자, 새끼 손톱만 한 크기로 줄어버린 복숭아 사탕이 입안에 있었다.

“자극당한 건 나고.”

흐릿한 미소를 머금은 도준의 입술을 제아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입술로, 저 입술이, 복숭아 사탕을, 내 입술을…….

생생하게 살아나는 감각에 제아는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도준이 다시 몸을 기울였다.

귓가에 바짝 붙은 야릇한 숨결과 속삭임.

“사탕, 일부러 남겼어.”

마음 같아선 산산조각 가루로 내버리는 데 1초도 안 걸릴 사탕이었다. 하지만 광포해져버린 본능 속, 한 가닥 살아남은 이성이 속삭였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남기라고.

서로의 숨결을 나누며 열렬하게 반응했던 제아가 다시 발뺌하지 못하도록.

“너와 내가 진하게 입술을 섞었다는 증거 제출.”

순진무구한 그 입술, 내가 탐했으니까. 도준의 명백한 메시지를 알아듣자, 입 안에 남아 있는 복숭아 사탕이 제아의 심장에 각인처럼 새겨졌다.

“서로의 승인하에.”

그의 엄지손가락이 제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제아의 입술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내 입술에 네가 각인되고.”

그리고 얇은 입술 점막에 닿는 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청량한 향기가 제아의 콧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네 입술에 내가 각인된 거야.”

바짝 붙은 숨결에, 나른한 음성에, 은은한 체향에 이성이 마비되었다.

“이젠 내게 말해줘.”

제아는 스르륵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 냄새, 핸드 로션 냄새인 걸까.

“너도 날 남자로서 사랑한다고.”

어쩌면, 이미 그에게 심신이 홀려버렸는지도 모른다. 바보같이 둔한 스스로가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

도준은 약속대로 모든 상금과 상품을 제아에게 안겨준 채 인호와 함께 리조트를 떠났다. 다른 직원의 차를 빌려 따로 가겠다고 극구 고집하는 인호를 기어코 옆 좌석에 태운 채 말이다.

질투 어린, 시기 어린, 부러움 섞인, 경악한 눈빛들을 홀로 감당한 채 제아는 객실로 돌아왔다. 최고의 남자와 최고의 상품까지 양 손에 거머쥔 채 금의환향했건만, 그녀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제아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신 비서가 말했다.

“이번 내기의 패자는 나야.”

“선배님이 왜요? 유 실장님 말고도 남자들이 두 분이나 서 있던데. 세희 씨가 6명, 정윤 씨가 3명. 제가 꼴찌잖아요. 그리고 저, 상금도 꽤 많이 탔어요.”

제아가 상금을 흔들어 보이며 배시시 웃자, 신 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깟 피라미들이 떼를 지어봤자, 용 한 마리를 이기겠어?”

윤 비서도 거들었다.

“맞아요. 사장님은 일당백인 거 몰라요? 인기 많은 게 이렇게 원망스러울지 누가 알았겠어요?”

여비서들도 다른 직원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준이 진심으로 그녀에게 대시한 것도 모른 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게 도준의 현재 위치였으니까.

피곤했는지 신 비서가 침실로 사라지고 꽃다운 20대 아가씨 세 명만이 남았다. 대화의 주제는 당연히 정해진 당상이었다.

“그런데 언닌 대체 어디 숨어 있었던 거예요?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았는데도 못 찾았잖아요.”

“어? 어…… 사장님한테 하도 끌려 다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여기 숨었다, 저기 숨었다 그랬거든.”

제아의 말에 김 비서는 엄청난 걸 깨달은 표정이었다.

“대박. 난 한 군데 숨어 있다가 김 대리님이 몹쓸 손을 움이는 바람에 짜증나서 바스락거리다가 들켰잖아요.”

“정윤 씨, 김 민호 대리님 마음에 든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었죠. 근데 제 앞에 잠깐 들렀다 간 사장님 얼굴을 봐서 그런지 김민호 대리님을 보니까, 진짜 딱, 오징어 한 마리가 제 앞에 있는 것 같더라구요.”

윤 비서는 키득거리며 웃었고, 김 비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제아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지연에게 물었다가는 제대로 추궁달할 게 뻔하니까.

“저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키스란 거, 해봤어?”

“에이, 그걸 말이라고 해요? 더한 것도 해봤죠. 설마 언니, 키스도 안 해본……?”

“아, 아니야! 나도 키스해봤어!”

그것도 한 시간 전에 말이야.

“근데 그런 걸 왜 물어요?”

“아니, 그냥. 키스가 원래, 기분이 막. 나른하기도 하고…… 심장이. 그러니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제아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같은 말만 반복했다. 감 잡았다는 듯, 김 비서가 통쾌하게 말을 했다.

“귀 옆에 심장이 있는 것처럼 심장 소리도 크고,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황홀하고 짜릿하고, 나른하고. 이 말 하려는 거죠?”

“어? 어, 뭐 비슷해.”

“그걸 바로 쾌감이라고 하는 거죠. 남자들과 달리 여자는 감성적인 동물이라 키스만으로도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존재거든요. 다른 여자들은 몰라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 그게 왜요?”

“원래 키스하면, 그런 기분이야?”

“에이, 언니 키스 많이 안 해봤구나!”

제아는 오로지 도준하고만 키스를 해보았다. 도준과 했던 두 번의 키스는 너무나 달랐다. 10년 전의 첫 키스는 너무 어려서 정신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두렵기도 하고 겁도 났었다. 죄를 짓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붙박이장에서의 복숭아 사탕 키스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때의 생소한 감각들과 도준의 입술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당연히 아니죠! 그럼 아무 남자하고 다 키스하고 다니게요? 좋아하는 남자랑 해야 키스도 기분 좋은 거예요. 그렇지 세희야?”

“언니가 몰라서 그러는데 좋아하지 않는 남자랑 하면 기분 완전 더러워요. 걸레랑 키스하는 것 같은 기분? 축축하고 냄새나고, 끈적거리고. 어휴, 생각도 하기 싫어요.”

비서들의 솔직한 대답에 곰곰이 생각에 잠긴 제아의 어깨를 윤 비서가 은근하게 툭, 치며 물었다.

“누구예요?”

“누구……라니?”

“언니가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황홀한 키스를 해준, 언니가 좋아하는 그 남자.”

“좋, 좋아한다니! 그런 거 아니야! 그, 그냥 호감 정도?”

말도 안 된다는 듯 김 비서가 제아를 몰아붙였다.

“언니가 둔해서 모르는 거 아니에요? 호감 정도로 그런 느낌 받는 거 드물어요. 내가 보기에  언니 그 남자 좋아해요. 그것도 엄청.”

마지막 말에 제아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누굴, 그것도 엄청 좋아한다구?

파릇파릇한 여비서들과 수다를 끝낸 후에야 제아는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도 잠이 오기는커녕 두근거리기 시작한 그녀의 심장은 점점 더 세차게 뛸 뿐, 가라앉지 않았다. 이제는 오빠가 아닌, 남자 한도준 때문에.

바보같이도, 정말 몰랐다. 오래전부터 그를 남자로서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첫사랑, 그건 도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도 도준은, 첫사랑이었던 것이다.

어렸을 땐 그 모든 걸 똑똑하고 잘생긴 오빠에 대한 경외감이라고 생각했는데, 남매라는 틀에 얽매여, 죄책감에 눈이 멀어, 그렇게 치부해버린 것이다.

‘엄마 아빠, 미안해요…….’

그에 대한 마음을 제대로 깨달아버린 심신이 제대로 터져버렸다.

꽉 틀어 막혔던 수도꼭지가 틀어지듯 콸콸 넘쳐흐르는 그를 향한 마음.

제아는 베개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

대절 버스는 토요일 정오가 되기 전, 회사 앞에 정확히 도착했다. 인호가 급하게 업무를 부탁한 게 있어서 제아는 혼자 비서실로 향했다. 업무도 간단했고 어차피 혼자 주말 약속이 없어서 그녀가 자처한 것이었다.

그녀는 인호가 메일로 보낸 내용을 확인하며 빠르게 자료를 찾아 폴더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고, 액정을 확인한 제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잠잠하다 싶더니, 드디어 한지로가 연락을 한 것이다.

“한지로, 오랜만이다?”

[너 지금 어디야?]

“할 일 있어서 회사에 잠깐 체류 중?”

반갑게 전화를 받는 제아의 말을 지로가 또 다짜고짜 가로막았다.

[나 30분 안에 네 회사 앞으로 간다. 어디 새지 말고 바로 나와라.]

“지로야, 나 오늘 너무 피곤?”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쉬면서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그래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또 뭐에 욱한 건지, 지로는 단단히 흥분한 목소리였다. 성질을 못 이기고 그는 제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린 것이다.

“뭐야, 또 제 할 말만 하고 끊었어? 한지로 이 자식, 오기만 해봐!”

정확히 30분 후 로비를 나서자, 회사 앞 벤치에 앉아 있던 지로가 제아에게 냉큼 다가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패션을 추구하던 한지로는 지금 검은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한지로, 추리닝 입은 것도 멋진데?”

“놀리지 마라. 나 차랑 카드랑 다 할매한테 압수당했으니까. 지금 짜증 게이지 만땅이다.”

“에에? 어쩌다가?”

“아, 몰라. 큰아버지 건설 회사에 밀어 넣어준 거 내가 또 때려치우고 나왔거든. 컴퓨터랑 씨름하는 거 내 적성에 안 맞는다고 술집이나 하나 차려주라고 했다가, 이 나이에 외출 금지까지 당했다.”

“그럼 어떻게 나왔어?”

“편의점 간다고 나와서 택시 탔지. 현금도 다 압수당해서 할매가 잔돈 모아놓은 깡통 뒤져서 나왔다.”

철딱서니 없는 망나니 친구의 모습에 제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지로, 도대체 언제 철들래?”

“문제아가 내 여자 되면.”

툴툴거릴 땐 언제고 또다시 느닷없이 지로가 제 마음을 드러내며 치고 들어왔다.

날카로운 눈매에 담긴 진중한 지로의 눈빛을 보며 제아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왜 지로의 고백에는 심장이 고요하게 잠을 자는지. 왜 도준의 고백에는 그렇게 심장이 요동을 쳤는지.

제아의 침묵이 불안했는지 지로가 입을 열었다.

“넌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망나니 하나 구제해준다 치고, 이제 나한테 좀 넘어와주라. 울 할매가 좀 유별나긴 한데 넌 예뻐하잖아. 시집살이 없을 테고, 울 할매 돈이 내 돈이고, 난 너만 보고. 넌 진짜 딱 나한테 몸뚱이만 오면 된다니까? 쇠 수저도 들고 올 필요 없다.”

“한지로, 내 말 잘 들어.”

그때 지로가 손을 뻗어 제아를 품에 와락, 안아버렸다.

“입만 열어봐. 확 뽀뽀해버릴 테니까.”

“야아! 이거 안 놔?”

“내가 좀 더 기다릴 테니까, 지금은 아무 말 하지 마라. 나 좀 더 기다릴 자신 있으니까. 아니, 기다릴 거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더 기다리게 해달라고. 아무리 밀어내도 지로는 더욱더 제아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항상 당당했던 한지로였다. 그런데 겁을 먹은 아이처럼 사정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 아팠지만 이제 단호하게 잘라내야 했다. 지로를 위해서라도.

“한지로, 정말 미안한데…….”

그때였다.

“기다리지 마.”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음성에 지로는 휙 뒤를 돌아보았다. 군더더기 없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남자를 발견한 지로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독보적인 존재감, 우월한 외모.

세월을 비껴간 듯 방부제를 듬뿍 머금은 제아의 오빠, 문이준이 분명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제아를 제 뒤로 보내며 앞을 막아섰다. 지로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씹어뱉듯이 살벌하게 말을 내뱉었다.

“선배가 상관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선배가 없는 10년 동안 제아를 지킨 건 선배가 아니라 바로 나! 한지로니까요.”

양심의 가책 좀 느껴보라고 한 말이었지만,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지키던지.”

너무도 쉽게 흘러나온 그의 말에 지로가 제 귀를 의심할 때쯤, 그가 끊었던 말을 이었다. 상대방을 단번에 찍어 내리는 눈빛을 한 채, 지극히 무심한 어투로.

“손끝도 대지 말고 눈으로만. 그것도 아주, 멀리서.”

날카롭게 찢어진 지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남자 새끼가 말을 이렇게 잘하냐. 이쯤 되니 제아의 오빠고 뭐고 이제 눈이 뵈는 게 없어졌다.

“시발, 혼자 살겠다고 버리고 간 주제에 뻔뻔하게 참견질이야? 내가 제아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래서 기다린 건데! 그러니까 10년 만에 나타나서 재수 없게 상관하지 말고 꺼지라고, 이 새끼야!”

도준의 등에 가로막혀 있던 제아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나서려 했다.

겁도 없이 기어오르는 하룻강아지, 그리고 그런 하룻강아지를 가차 없이 물어뜯을 사나운 야수. 결과는 뻔했으니까.

그때 등 뒤로 뻗은 도준의 손이 제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가만있으라는 듯이.

“뻔뻔한 건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지로의 욕지거리에도 도준은 무서우리만치 침착하고 고요했다. 찌르듯이 파고드는 나른한 그의 눈빛에 지로는 같은 남자인데도 순간, 찌릿했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려는 그때, 도준이 몸을 기울여왔다. 표정 없이 달싹이는 도준의 붉은 입술이 속삭임을 멈추자, 붉게 달아올랐던 지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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