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이미 닿아버린 입술을 먹느냐, 마느냐.
2017.01.02.
도준을 본 순간 제아는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별말 아닌데 바보같이.
그 옛날처럼 항상 그녀가 곤란할 때마다, 필요할 때마다 기가 막히게 나타나준 슈퍼맨 문이준이 눈앞에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다지 곤란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도준이 나타난 곤란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목을 집중시킨 도준의 선택이 끝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흐트러졌다. 별의별 잡소리가 다 들려왔다.
말도 안 돼. 불쌍했나 봐. 좋겠다. 사장 미친 거 아니야…… 등등등.
“자, 그럼 나도?”
도준의 결정이 떨어지자 인호도 당연하다는 듯, 도준의 뒤에 서려고 했다. 인호 딴에는 너덜너덜해진 제아의 자존심을 더 세워주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튼 도준이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냈다.
넌 안 돼. 다른 곳으로 가.
잠시 기막힌 눈빛으로 도준을 응시한 인호가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어디로 가라고?
그러자 도준의 눈빛이 신 비서에게로 향했다.
내 참, 동생 챙겨준다고 해도 성질이야.
도준의 명확한 메시지를 받은 인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신 비서에게로 향했다. 어느 누구도 도준과 인호의 선택을 나무랄 사람은 없었다.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 파트너를 선정할 수 없는 두 남자가 직속 부서인 비서들을 선택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윤 비서와 김 비서는 월등히 남자들의 줄이 길었다. 제일 어패럴의 남자들에게 버림받은 제아는 사장이, 나이가 가장 많은 노처녀 신 비서에겐 유 실장이. 그들의 선택은 직원들도 꽤 납득할 만했다.
“자, 남자분들은 각자 선택한 여자분들에게 나를 뽑아달라고 딱 한 마디씩, 자신을 어필하면서 손을 내미세요! 여자분들은 선택을 한 남자분의 손을 잡아주면 됩니다!”
사장인 만큼 굳이 생략해도 되건만, 도준은 제아에게 손을 내밀며 스스로를 어필했다.
“게임에 걸린 상금과 상품, 모두 다 문 비서 품에 안겨주지.”
제아는 지금, 앞을 온전하게 차지하고 있는 단 한 명의 남자 도준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쿵, 떨어졌던 자존심이 하늘 높이 치솟았고, 덩달아 뛰기 시작한 심장은 덤이었다.
도준이 내미는 길고 새하얀 손을 제아는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문득 부산에서 도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내게 어려운 여자, 난 너에게 쉬운 남자.
그를 피하려는 제아를 잡을 때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던 도준이었다. 그런 도준이 이번엔 손을 잡아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지만, 쉽사리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이 손을 잡는 순간,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거라고.
그와의 관계가 달라져도 분명히 달라질 거라고.
질끈 눈을 감자 또다시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라 묵직하게 가슴을 내리눌렀다.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이성은 안 된다고 하지만, 어느새 본능이 그의 손을 잡아버린 것이다.
“약속, 꼭 지키세요.”
길게 뻗은 도준의 손끝을 제아가 조심히 잡는 그때 바로 옆에선 신 비서가 인호에게 귀여운 협박을 당하는 중이었다.
이게 뭐라고, 라이벌이 없는 도준과 달리 인호는 라이벌들이 신경 쓰인 것이다.
“신 비서, 나를 퇴짜 놓으면 다음 주부터 아주아주 고단한 하루가 시작될 겁니다.”
“어휴, 정말 제가 실장님 때문에 못 살아요.”
말과 달리 신 비서의 입가엔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꿩 대신 닭이라지만, 유 실장도 도준 다음으로 회사에서 능력 있고 멋진 남자였으니까.
곧이어 커플들에게 큼지막한 숫자가 걸린 끈 목걸이가 전달되었다.
“커플이 되신 분들은 숫자를 목에 걸어주시구요, 첫 번째 게임 들어갑니다! 이번 게임은 ‘내 파트너는 너무 가벼워’입니다.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분들은 제일 어패럴 사내 홈페이지에 모바일로 로그인 후 지금 당장 우승할 커플의 숫자를 메일로 보내주세요! 우승한 커플에게는 순금 한 돈이, 맞춘 분들에게는 상금 5만 원이 주어집니다.”
사회자가 첫 번째 게임 항목을 밝히자 가뜩이나 몸무게에 민감한 여자들의 입에서 불만 어린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메고 나온 가방이나 두툼한 재킷들, 심지어 신발조차 벗어던지는 여직원들이 허다했다.
168cm나 되는 자신의 키에 제아도 움찔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라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런데 도준이 입혀준 코트를 벗으려는 손이 또다시 도준에 의해 저지당했다. 하다못해 단추까지 꼼꼼하게 채워버렸다.
“추위 잘 타잖아. 그냥 입고 있어.”
미처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제아의 어깨와 엉덩이 밑으로 도준의 팔이 쑥 들어왔다. 제아는 순간 제 몸이 깃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무도 가볍게 도준이 그녀를 들어 올린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탈락자가 늘어났고, 도준은 의외로 잘 버티고 있었다. 이쯤 되니 그녀는 공짜라고 리조트 뷔페에서 엄청나게 먹어댄 게 미친 듯이 후회가 되었다.
사실 이 게임을 알고 있다고 해도 개의치는 않았을 것이다. 파트너가 생겨서 게임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것도 도준과 함께 말이다.
제아는 도준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내가 좀, 무겁지?”
“10킬로.”
“……?”
“그 정도 더 쪄야 돼, 너는.”
빈말은 할 줄 모르는 도준이었다. 그런데도 이번 말은 왠지 빈 말 같았다. 10킬로가 찌면, 꽤 뚱뚱할 건데.
“한국의 남자들이 얼마나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줄 알아? 내세울 거 하나 없는데 몸까지 뚱뚱해 봐. 차라리 시집가지 말라고 해.”
“외모가 아니라 내면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면 되는 거 아닌가?”
서슴없이 찔러 들어오는 진지한 도준의 눈빛이 뜨거웠다. 제대로 여심을 자극하는 말에 업무 출장이 아니라 연애 공부를 하고 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제아는 그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의도적인 작업 멘트 같은 건 모르는 남자이니까.
처음에 버텨보자는 오기 밑에 깔린 건 자신감이 없는 제 모습이었다. 도준 같은 남자가 뭐가 아쉽다고. 싫다고 하면 얼마 안 있어 그만두겠지.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자꾸만 치고 들어오는 그의 직설적인 자극은 자꾸만 진심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자꾸만 흔들린다. 도준이라는, 오빠가 아닌 남자에게.
“오빠가 그런 남자라고, 지금 나 자극하는 거야?”
“자극 아닌데.”
“……?”
“그냥.”
도준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나직하게 다시 이었다.
“진심이야.”
톤의 높낮이도 없는 지극히 무덤덤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두근, 심장이 기분 좋은 설렘을 머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한 그 순간, 다행히도 과장된 인호의 음성이 구해주었다.
“어이쿠, 내 다리야!”
불과 5분 만에 인호가 탈락을 한 것이다.
“악, 실장님, 실망이에요! 남자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저 몸무게 50킬로도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런 말 말아요! 내가 원래 안 이러는데 무리해서 그런 거니까! 프랑스에서 잠 한숨도 못 자고 밤마다 얼마나 바쁘고 힘차게 여자한테 힘을 썼……. 험, 험. 여튼! 다음 게임은 꼭 이기게 해줄 테니 이번 게임은 그냥 넘어갑시다, 신 비서. 응?”
시간이 흘렀는데도 상금 때문인지 여자 파트너가 무서워서인지, 꽤 버티는 남자들이 많았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사회자가 한 가지 조건을 더 내걸었다.
“지루한 구경꾼들을 위해, 조속히 게임을 진행하겠습니다. 남아 있는 커플들은 정확히 3초 후에 한 발을 들어주십시오. 하나둘, 셋!”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버티고 있던 커플들이 중심을 잃고 하나둘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준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비 내리듯 땀을 흘리는 남자들과 다르게 식은땀조차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건 제아였다.
“저기 사장님, 상금은 안 타도 되니까?”
“오빠야.”
“……?”
“그렇게 불러줄 거 아니면, 얌전하게 안겨 있어.”
몇 시간이고 버틸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한 발로 중심까지 잡는 건 그에게도 꽤 어려운 일인지라 좀 전과 달리 심기일전 중이었다.
사실 힘은 콸콸 넘쳐났다. 세밀하고 찰진 근육이 오밀조밀하고 완벽하게 그의 몸을 이루면서 거뜬하게 버티게 해주었다.
사리가 수십 개는 쏟아져 나올 거라고 인호가 놀리는 데도 한 여자를 위해 10년을 꾹꾹 눌러놓은 체력이었다.
물론 이런 걸로 힘을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품에 쏙 안겨든 고양이가 역력히 고민하는 게 느껴졌다.
불안함을 머금은 동공이 잠시 주위를 방황하더니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유난히도 더 길고 풍성한 음영을 만들어내는 제아의 속눈썹에 홀리는 순간, 몸이 기우뚱했다.
빌어먹을!
“오빠야, 힘내.”
그놈의 오빠야가 뭐라고. 수줍게 달싹이는 입술에서 속삭이듯이 흘러나온 그 한마디에 흐트러졌던 중심이 바로잡혔다.
드디어 마지막 남은 커플이 픽, 쓰러지자 도준은 그답지 않게 속으로 나직하게 외쳤다.
나, 이, 스.
“내 파트너는 너무 가벼워 게임은 의외로 사장님 커플이 우승했네요, 하하! 이야, 우리 사장님 아주아주 멋지십니다! 출중한 외모에 뛰어난 능력도 모자라서 남자의 힘까지 고루 갖추고 계시다니, 이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제일 어패럴의 미래를 거뜬히 짊어질 만합니다. 그렇죠, 여러분?”
사장이라는 직급에 완벽한 외모도 모자라 힘까지 두루 갖춘 도준의 매력에 여직원들의 눈에서는 무한 하트가 뿅뿅 발사되고 있었다.
뒤이어 이어진 모든 게임들마저도, 도준은 완벽하게 약속을 지켰다.
그중에서 빼빼로 게임만은 예외였다. 마음 같아선 그까짓 빼빼로, 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제아의 입술과 함께 먹어치울 자신이 있는 도준이었다.
하지만 들이닥칠 후폭풍이 제아를 쓸어버릴까 봐 그것만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 드디어 마지막 게임이 다가왔습니다! 대망의 커플 숨바꼭질! 이번엔 전체 직원들이 참여하는 게임입니다! 커플들이 제한된 시간 이내에 숨고, 지금까지 구경하고 계시던 기혼자분들이 숨어 있는 커플들을 찾아내십시오! 커플을 찾아 숫자가 걸린 목걸이를 떼어낼 때마다 상금이 계속 주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버티는 커플 혹은 마지막 커플을 찾아내는 분에게는 가장 큰 효도 상품인 뷰티 숍 상품권과 최고급 안마 의자가 주어지겠습니다! 준비되셨나요?”
제일 어패럴 직원들의 우렁찬 함성에 사회자가 스타트를 알렸다.
“상층을 제외한 리조트 어디에 숨어도 괜찮습니다! 자, 출발!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제한 시간은 20분입니다!”
우르르, 일제히 커플들이 손을 꼭 잡고 리조트 건물 안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광란의 질주를 할 때부터 웬만한 게임은 각오를 하고 온 도준이었다. 하지만 이 게임만은 내키지 않았다. 숨다니, 내가 왜.
“문제아, 이 게임은.”
그냥 넘어가자, 라고 말을 하려던 도준은 말을 멈추었다.
앞 게임들을 웬만큼 우승했으니 이 마지막 게임만은 대충 넘어가 주리라 생각한 건 철저한 그의 착각이었다. 정말 드물게 제아의 동공 속에서 승부욕이라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 꼭, 우승해야 해.”
제아가 마지막 상품에 집착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윤식이 사고를 쳐서 또다시 침체되어버린 집안의 분위기를 엄청난 선물로 다시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윤영의 고운 얼굴에 생긴 잔주름을 조금이라도 펴줄 수만 있다면, 아빠인 윤식의 힘없는 다리를 날마다 안마해줄 수만 있다면!
제아는 독하게 다짐하며 주머니 안에서 복숭아 사탕을 하나 꺼내 입 안에 쏙, 넣었다.
달달한 사탕의 향과 맛이 입 안에서 사르르 퍼지자 굳어 있던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도준에게도 사탕을 내밀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뭐 싫다면야…….
“그냥 내가 사줄…….”
“그런 말 말아! 돈으로는 못 사주지만 게임에 꼭 우승해서 선물해줄 거니까.”
유난히 반짝이는 제아의 눈을 보자, 도준은 조금씩 불안함이 피어올랐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상상력을 발휘하곤 하니까, 내키지가 않은 것이다.
그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바로 제아였다.
내켜 하지 않은 침묵을 긍정의 대답으로 받아들인 제아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대체 어디에 숨어야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웬만한 곳은 이미 다른 커플들이 숨어버렸다. 하지만 숨을 만한 장소는 그만큼 찾기도 쉬운 법.
그렇다면 절대 둘이서는 숨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장소를 찾아야 한다!
전광석화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곳이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다가 정말 우연히 알게 된, 아주 기가 막힌 곳.
“숨을 곳이 생각났어!”
제아가 도준을 이끌고 간 곳은 직원용 탈의실이었다. 매의 눈으로 둘러보아도 도준의 눈에 숨을 만한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줄줄이 서 있는 틈새 붙박이장만 보일 뿐이었다.
틈새 붙박이장도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아 보였다. 시선을 트니 제아는 노골적으로 붙박이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설마, 여기 숨을 생각은 아니겠지?”
도준은 말을 하면서도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오빠가 생각해도 여긴 안 되겠지? 오빠 같으면 절대 이런 곳에 못 숨어, 그렇지?”
도준은 그래도 제아가 알아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히려 제아가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도준은 등골이 오싹했다. 설마…….
“바로 그거야! 우리 회사 최고의 두뇌도 숨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공간인데, 설마 다른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겠어? 사장님이 이런 곳에 숨었을 거라고 절대 생각 못 할걸?”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문제아.”
“오 분 남았습니다!”
사회자의 남은 시간 안내에 제아는 다급해졌다. 몸에 걸치고 있는 옷들을 다른 붙박이장에 밀어 넣은 제아가 제일 끝에 있는 붙박이장을 열고는 도준에게 손짓을 했다.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마지못해 걸어는 가지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도준의 걸음은 무겁다. 그래도 제아가 열고 있는 붙박이장은 다른 붙박이장에 비해 내부가 좀 넓은 편이었다. 그래도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것이다.
“문제아, 여기 숨는 건 불가능해.”
“불가능이 어디 있어? 불가능하면 가능하게 해야지! 내가 가능하게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마!”
다짜고짜 제아가 도준을 붙박이장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무슨 코트도 아니고 옷걸이가 걸리듯이 비스듬히 붙박이장 안에 자리 잡은 스스로가 도준은 믿어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붙박이장의 높이가 꽤 있는지라 무릎을 굽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쓰레기 수거함도 모자라서 이딴 좁은 공간에 볼썽사납게 구겨져서 숨는 꼴이라니. 도준의 입술 사이로 짙은 한숨만 연신 새어 나왔다.
도준이 그러건 말건 제아는 이미 신이 난 표정이었다. 팔을 걷어붙이더니, 도준의 앞으로 자신의 몸도 꾸역꾸역 밀어 넣기 시작했다.
도준이 조금이라도 체형이 건장했다면, 제아가 조금이라도 통통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 지금 가능으로 바뀌고 있는 순간이었다.
좁아도 너무 좁은 공간, 하지만 제아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켰다.
차곡하게 걸린 옷걸이처럼 몸을 포갠 제아의 몸이 완벽하게 도준의 품 안에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어깨가 넓은 도준의 팔이 문 밖으로 삐져나와 허공을 헤맸다. 이때다 싶어 클레임을 걸려고 하는 도준을 향해, 제아가 걱정 말라는 듯, 생긋 웃었다.
“오빠가 문 닫으면서 내 어깨 위로 손 걸치면 완벽해.”
제아의 웃음에도 이건 정말 내키지 않는 도준이었다.
“오빠 나한테 백허그 잘하잖아, 그 백허그 하듯이 하면 돼, 오케이?”
소신 있는 제아의 한마디에 도준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닫히지 않기를 바랐지만, 거짓말처럼 문이 닫혔다.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컴컴해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붙박이장은 조금의 움직일 공간조차 둘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어둠에 시야가 적응한다. 하지만 그것도 작은 빛이라도 있어야 가능한 일, 정말이지 캄캄해도 너무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오감만 바짝 신경을 곤두세울 뿐이었다.
“좁고 답답하지? 조금만 참아, 오빠.”
좁은 공간이고 뭐고 답답하고 뭐고, 그런 것들은 지금 도준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시각만 닫혔을 뿐, 간간이 들려오는 쌔근거리는 제아의 나약한 숨소리가 민감하게 그의 청각을 곤두세웠다.
빌어먹을.
마지막 게임을 시작할 때 제아가 복숭아 사탕을 못 먹게 했어야 했다. 달달한 복숭아 향이 농밀하게 내부를 채워가며 그의 후각으로 거침없이 스며들었다.
게다가 조금의 빈틈도 없이 앞뒤로 맞물린 보드라운 여체가 생생하게 온몸의 촉각을 자극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그 답지 않게 머릿속에서 양의 마릿수를 세면서 가까스로 참고 있는데 뭔가 불편했는지 제아가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지극히 미세한 달싹임이었지만 도준에겐 치명적인 자극이었다.
온몸의 핏줄이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거칠게 뛰는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찌르르한 감각으로 어느 한 곳에 몰려들었다. 딱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몰려버린 도준은 경고를 해야만 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순간, 때마침 제아도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문제아, 지금 당장.”
“오빠 그냥?”
비좁은 곳에 숨을 때까진 괜찮았던 제아였다. 하지만 얇은 옷을 사이에 두고 몸이 빈틈없이 맞물리니, 내가 미친 짓을 했구나 하는 뒤늦은 생각이 든 것이다.
청량한 체향과 함께 단단한 그의 몸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의식을 하고 나니 다음엔 미안해졌다.
도준에겐 그런 상품 따위 필요도 없을 텐데. 심신의 불편함에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인 제아는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서, 설마?
후끈 달아오른 민망한 열기가 몸을 뜨겁게 데우자, 제아는 결심했다. 상품이고 뭐고,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
그 의사를 도준에게 전달하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하필이면 도준도 고개를 내린 것이다.
새까만 어둠 속, 입술이 위아래로 완벽하게 맞물려버렸다. 빈틈없이 맞아떨어지는 서로의 몸처럼.
서로의 입술을 가로막는 무언가에, 둘 다 동시에 말을 멈추었다.
살짝 벌어진 채 위아래로 맞닿은 서로의 입술.
10년 동안 그토록 그리웠던 그 복숭아 사탕이 달달한 향기를 풍기며 도준의 입술 밑에 있었다.
본능과 이성이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전쟁을 벌였다. 악마와 천사가 마음속에서 논쟁을 벌였다.
이미 닿아버린 입술을 먹느냐, 마느냐.
말캉하게 닿은 산뜻한 입술의 감촉에 제아도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현실감이 점점 동 떨어지는 그 순간, 비좁은 공간에 갇힌 텁텁한 공기 때문인지 눈치도 없게 코가 근질거려왔다.
안 돼……에에…… 안 돼! 에에에…… 안……돼. 에취…… 안……!
“에취이!”
결국은 맞닿은 도준의 입술 틈으로 재채기를 해버렸다.
그런데 재채기보다도, 맞닿은 입술과 몸보다도 더 그녀를 당황스럽게 한 건 지금, 갑자기 허전해진 입 안이었다.
내, 내 복숭아 사탕……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