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34화 (34/104)

34. 광란의 질주를 하게 만든 여자

2016.12.29.

제일 어패럴의 워크숍도 처음은 여느 회사의 워크숍처럼 지루하고 단조롭게 시작이 되었다.

통째로 빌린 강원도 리조트의 대강당에 모여 제일 그룹의 창립 역사에 대해 들었고, 제일 계열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사장의 취임과 함께 펼쳐질 제일 어패럴의 밝은 미래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이후 직원들에게 푸짐한 저녁 식사와 함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다른 여직원들은 식당에 남아 수다를 떠는 사이, 객실로 올라가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나온 제아는 워크숍 안내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김 비서의 말대로 게임마다 걸려 있는 상금과 상품은 상상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마지막 게임인 숨바꼭질의 최종 승자에게 가는 효도 상품은 단연 최고였다.

고급 뷰티 숍 상품권과 최고급 안마의자. 윤영과 윤식에게 최고의 선물이란 걸 알기에 마음을 비운 제아도 욕심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파트너가 있어야 하든지 말든지 하지.

“이럴 때 유 실장님이라도 있었으면 부탁해서 했을 텐데.”

괜히 유 실장의 공백이 그리워졌다. 물론 도준은 이런 유치한 게임을 할 리 없으니 아웃이었고. 한숨과 함께 안내서를 훑어보던 제아의 눈이 순간 반짝했다.

부서 장기 자랑에 걸린 상금이 무려 50만 원이었다. 비서가 4명이니 장기 자랑에 우승을 하면 적어도 12만 원이 떨어진다는 말인데.

뒤를 돌아보니 핸드폰으로 아이돌의 댄스 영상을 따라 하는 김 비서와 윤 비서가 보였다.

“라나 동작이 고난이도라서 제일 어려워. 연체동물도 아니고 웨이브를 어떻게 이렇게 해? 3명 몫을 둘이서 소화하기도 힘들고. 선곡을 다른 걸로 할 걸 그랬나 봐.”

“옷을 파격적으로 입으면 시선 좀 끌걸? 남자들이 함성만 질러줘도 점수는 반 이상 따고 들어가잖아. 내가 그럴 줄 알고 이것저것 챙겨왔어.”

둘의 대화를 들으며 제아는 안내서 정독을 끝마쳤다. 결론은, 장기자랑 말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상금을 탈 만한 게 없다는 것. 상금과 상품은 모조리 파트너와 함께 하는 게임에 몰려 있었다.

이젠 정말 나서는 거 딱 질색인 제아였지만, 커피값을 위해서라도 50만 원이라는 상금은 절실했다. 김 비서와 윤 비서에게 다가간 제아가 조심히 말을 했다.

“괜찮으면 내가 같이해줄까?”

“언니, 춤출 수 있어요?”

“3명이라면서. 끝에서 대충 동작 따라 하면서 자리만 지켜줘도 괜찮은 거 아니야?”

“그러긴 한데, 10대 아이돌 춤이라도 완전 섹시 댄스라서 몸이 유연하지 않으면 엄청 어려워요.”

“그래도 둘보다는 셋이 추는 게 덜 민망하잖아.”

김 비서가 잠시 고민에 잠긴 눈빛으로 제아를 바라보았다.

사실 몸매 하나는 회사에서 제아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몸매만 들이밀어도 남직원들이 열광할 건데.

“좋아요, 언니도 같이해요. 그래도 이율 동작이 제일 쉬우니까 이거 보고 연습해요.”

김 비서가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틀어서 제아에게 건넸다. 그 동영상을 두세 번 리플레이해서 보면서 춤 동작을 눈으로 익혔다.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춤 동작을 짚어본 후에 노래를 다시 처음으로 세팅하는 김 비서 옆으로 다가섰다.

노래가 흘러나오고 김 비서와 윤 비서가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센터를 맡은 김 비서는 제아가 불안한지 힐끔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동작 하나 틀리지 않고 섹시하게 춤을 소화하는 제아를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제아가 제일 자신 있는 게 바로 댄스였다. 운동은 치가 떨리도록 싫어했다. 하지만 유연성 좋고 몸매 좋고 리듬 탈 줄 알고. 춤을 추기에 최고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제아가 가장 고난도 동작 중 하나인 상체를 확 숙였다 일어나면서 웨이브까지 멋지게 소화해내자 두 여비서가 짝짝짝 박수 세례를 퍼부었다.

“제아 언니, 너무 잘 추는 거 아니에요? 언니가 메인인 라나 해요! 우리가 서브할 테니까.”

30여 분 동안 열심히 동작을 맞춰본 후에야 제아는 비서들과 함께 대강당으로 향했다. 어느새 제일 어패럴 직원들이 넓은 대강당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TV에서도 자주 봤던 개그맨이 익살스러운 웃음과 함께 마이크를 쥐고 나와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사회를 맡게 될, 개그라인에 출연하고 있는 아주 핫한 개그맨 김종태라고 합니다!”

처음엔 부서 대항전이 벌어졌다. 비서팀은 도준과 인호도 없는 데다 인원이 적은지라 큰 점수를 얻지는 못 했다. 그저 얌전하게 지켜만 볼 뿐.

제아는 슬쩍 주위를 돌아보았다. 레크리에이션의 꽃인 파트너 정하기 때문인지 미혼인 여직원들은 모두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앉아 있는 건 오로지 제아뿐이었다. 그나마 옷차림은 봐줄 만했다.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시스루 검정 티와 화이트 핫팬츠. 물론 장기자랑용으로 윤 비서가 여분으로 챙겨온 옷이 사이즈가 맞아 빌려 입은 것이었다.

김 비서가 제아에게 파우치를 내밀었다.

“언니 눈 화장 좀만 해봐요. 원래 언니처럼 아몬드 형 눈이 화장하면 진짜 섹시하다니까요?”

“어차피 조명이 어둡게 처리되는데 화장한다고 보이겠어?”

장난스럽게 말을 하며 제아는 무대 위에 있는 사회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김 비서가 아니었다.

하다못해 신 비서까지 은은한 메이크업을 하고 앉아 있는데 장기 자랑의 센터에 설 제아가 맨 얼굴이라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무대를 응시하는 제아의 긴 속눈썹은 서양인처럼 숯이 풍성하고 길었다. 저 속눈썹에 마스카라만 해 줘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김 비서는 오히려 궁금해졌다. 화장을 한 제아의 눈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제아 언니, 내가 눈 화장만 살짝 해줄게요. 그래도 센터에 서서 출 건데 이건 관객들을 위한 기본 에티켓이라니까요?”

어차피 화장 같은 거 해봤자 보여줄 사람도 없는데. 제아는 귀찮아서 거절하려다가 김 비서의 열정에 찬물을 쏟고 싶지 않아 잠자코 얼굴을 내주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부서별 장기 자랑이 시작되었다. 장기 자랑에선 노래, 댄스, 콩트, 마임 악기 연주 등등 다양한 장기 자랑이 나왔지만 아무래도 스펙을 쌓느라 공부만 해서 그런지 이렇다 할 정도로 눈에 띄는 장기자랑은 없었다.

“자, 마지막 무대는 제일 어패럴 남자 직원들의 로망인 비서팀입니다!”

제아를 비롯한 여비서들이 롱코트를 벗어던지고 무대 위에 나타나자 남자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김 비서와 윤 비서도 날씬한 몸과 각선미가 예술이었다. 하지만 단연코 제아가 최고였다.

핫팬츠 밑으로 늘씬하게 빠진 학다리 같은 각선미. 타이트한 상의 위로 드러난 볼륨감 있는 바스트 라인에서 히프라인까지 이어지는 유려한 곡선미에 모두들 넋을 잃었다.

물론 딱 봐도 제아가 몸매가 잘 빠졌다는 건 대충 보였다. 하지만 밋밋한 블라우스와 치마 안에 엄청난 반전 몸매를 숨기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대강당의 불이 꺼지고 현란한 오렌지빛 조명과 함께 요즘 가장 유행이라는 hot girl이라는 아이돌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센터에서 서서 눈을 내리깔고 있던 제아는 고혹적인 몸짓으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최고의 학벌에 젊고 예쁘기까지 한 비서들의 장기자랑은 반응이 뜨거웠다. 그중에서도 제아에게 쏟아지는 남자들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저 몸매로 완벽하게 웨이브를 소화하고 엉덩이 털기 춤까지 제대로 소화했을 땐 군대를 방불케 하는 굵은 남자들의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우오오오!”

“휘이이익!”

열광하는 굵직한 함성과 휘파람 소리는 그녀들에게 활력이 되었다.

제아는 정말 오랜만에 추는지라 거칠게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기분은 최고였다. 지금만큼은 열광하는 이들의 함성을 즐기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춤을 출 수 있었다.

“앙코르! 앙코르! 앙코르!”

노래가 끝났는데도, 굵은 남직원들의 목소리가 한데 모여 앙코르 요청을 쏟아내자 제아의 입술에 흐릿한 미소가 배였다. 보지 않아도 상금 50만 원은 비서팀의 것이었다.

가장 핫한 아이돌 노래이니만큼 하필이면 다른 부서에서도 이 노래로 춤을 췄다. 그래서 더욱더 비교가 되는 무대였다.

“뭐 장기 자랑 1등은 따로 박수로 구별할 필요가 없겠네요, 하하! 심사위원들도 모두 남자이다 보니. 장기 자랑 상금 50만 원은 비서실에게 갑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앙코르! 앙코르!”

우렁찬 남직원들의 목소리가 힘을 실어주자 그녀들은 기분 좋게 앙코르 무대까지 다시 한 번 한 후에야 상금 50만 원을 거머쥐고 내려왔다.

“언니 때문에 1등 한 거예요!”

신이 난 김 비서가 와락 껴안자 제아는 그저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김 비서와 윤 비서가 있어서 그 함성이 쏟아져 나온 거야.”

제아만 나간 무대라면 남자들은 속으로만 열광할 뿐, 겉으로 표출하진 못 했을 것이다. 눈으로 실컷 구경할 건 다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뗐으리라.

앞에선 관심 없는 척하고 뒤에선 아무도 모르게 은근하게 작업을 걸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비서 동생들 때문에 남자들은 시치미를 뗄 필요가 없었다. 보는 동안은 제아에게 열광했지만, 끝난 후에는 다른 여비서들에게 갈채를 보냈으니까.

뭐 아무려면 어때, 상금을 탔으면 됐지.

드디어 커플 게임의 서두를 끊는 파트너 정하는 차례가 돌아왔다. 아무래도 파트너를 정하기 위해선 넓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강당 앞에 위치한 넓은 운동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운동장의 앞은 여직원들이, 뒤는 남직원들이 차지했다. 그리고 기혼자 직원들은 그 주위를 삥, 둘러서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관전 중이었다.

“자, 제일 어패럴의 오랜 전통이니만큼 제가 설명해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리라고 봅니다. 커플이 된 미혼남녀들은 게임을 즐기면 되시고, 기혼자분들은 게임마다 우승을 할 커플을 맞추고 상금을 타가시면 됩니다.”

레크리에이션의 게임은 사실 미혼남녀들만이 즐길 수 있는 재미였다. 하지만 기혼자들도 게임마다 우승할 커플을 맞추기만 하면 힘들이지 않고 상금을 탈 수 있었다.

주머니는 두둑해지고, 무엇보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하는 추억 어린 눈빛으로 보는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다.

“자, 남자 직원분들 용기를 내십시오! 평소 마음에 둔 여자분이 있거나. 그게 아니면 게임의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임의 여신 같은 여직원이 있다면 과감하게 달려서 쟁취하십시오! 솔로 탈출을 위한 열정과 상품과 상품을 향한 욕심을 불사르며 달려가십시오!”

사회자가 스타트를 알리자 남자 직원들이 우르르 운동장 앞쪽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제아는 시큰둥하게 서 있었다. 마음 같아선 서 있는 것도 싫지만 어쩌겠는가, 꽤 얇은 코트를 손으로 야무지게 여미며 유난히 추위에 약한 몸을 사릴 뿐이었다.

그런데 장기자랑 때 선보였던 댄스의 영향 때문일까? 예상외로 망설이는 남자들의 발걸음이 제아의 앞에서 꽤 많이 머물렀다.

뭐 결국은 다른 여직원들에게 가버리긴 했지만. 어차피 누군가와 파트너 할 욕심 따위는 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쿨하게 자존심 따위 상하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래도 다른 비서들은 전적이 어떤지 궁금해졌다.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여비서들의 앞은 선택을 기다리는 남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명문대 비서과 출신에 높은 연봉, 사장의 직속 부서인 비서팀. 게다가 외모까지 출중한 비서들의 인기는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물론 제아 자신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제아는 이미 예상되는 결과에 마음을 비워서 그런지 홀로 서 있는 자체가 편안했다. 누가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필요한 상금 50만 원을 탔으면 그걸로 족할 뿐인데.

물론 제아처럼 남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여자들도 몇 명 있긴 했다.

100kg에 육박하는 마케팅 팀의 김 대리, 성질 고약해서 히스테리 부리기로 유명한 디자이너 팀의 노처녀 박 과장,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노안을 자랑하는 경리팀의 이한나 여직원 등등.

“자 남자분들이 파트너 선택을 끝낸 듯하니 여자분들은 고개를 들고 자신을 선택한 남자들의 얼굴을 확?”

그때 사회자의 말까지 먹어버리는 요란한 자동차 소리가 쌀쌀한 운동장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모두들 놀라 일제히 소리가 난 운동장 뒤쪽 너머로 시선이 쏟아졌다.

국내에 몇 대 밖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비싼 스포츠카 한 대가 빠른 속도로 거칠게 운동장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끼이이이익―.

우렁찬 굉음을 뿜어내며 360도로 거칠게 회전한 빨간 스포츠카가 운동장 입구 쪽에 정확히 멈추어 섰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멋진 스포츠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만은 저 차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두근거림을 품은 심장이 나직하게 그 이름을 속삭였다.

도준 오빠.

그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찌르르 타고 흘러내렸다.

너무 보고 싶었던 도준의 등장에 기쁜 마음도 잠시뿐, 왜 하필 지금 나타난 걸까 원망스러움이 고개를 들었다.

난 지금 정말 괜찮았는데, 도준 그가 나타난 순간 팍팍 밟아서 숨겨놓았던 쓸데없는 여자의 그 자존심이란 게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이렇게 홀로 서 있는 게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로 꽉 차 있는 이 운동장이 한 달 전 떠밀려 나갔던 노예팅의 그 무대처럼 느껴졌고, 아무도 없이 외롭게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일 귀국한다고 했는데,  설마 도준 오빠가 아닌가?

12월의 차가운 밤바람이 쌩하니, 제아의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난히도 추위를 타는지라 몸을 부르르 떨며 코트 깃을 여민 제아는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치듯이 조수석 자리의 차 문이 먼저 열렸다. 그 안에서 쓰러지듯 비틀거리며 인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호가 조수석에서 내렸다는 건? 지켜보던 제아의 눈에 묘한 설렘이 스며들었다.

곧이어 운전석의 차문이 열리면서 긴 다리가 쭉 뻗어 나오고, 멋진 코트를 차려입은 도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완벽한 자태였지만 코트 안의 옷차림은 꽤나 편해 보였다.

화이트 셔츠에 레이어드한 검정 니트 그리고 검정 슬랙스. 거기에 하얀 스니커즈를 신은 도준의 모습은 쌔끈함 그 자체였다.

갑작스러운 사장과 비서실장의 등장에 운동장이 술렁였다. 뒤쪽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던 워크숍 담당자가 그들에게 달려가는 게 보였다.

인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담당자가 다시 다급하게 사회자에게 달려갔다.

“내가 다시는 이 차, 안 탄다! 우욱, 쿨럭쿨럭!”

인호는 차의 보닛을 잡은 채 헛구역질을 해댔다.

수십 개의 과속 탐지기에서 터져 나오는 플래시를 영광스럽게 맞으며 광란의 질주를 끝낸 차에서 드디어 탈출한 것이다.

인호와 달리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차에서 내린 도준의 눈이 서슴없이 운동장을 헤집어댔다.

그리고 30초도 되지 않아서 아주 정확하게 그 존재를 감지해냈다.

희미한 향만으로도, 아른거리는 실루엣만으로도.

유일하게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존재가 운동장 위에 홀로 위태위태하게 서 있었다. 광란의 질주를 하게 만든 여자, 문제아.

다행히, 늦진 않았군.

다른 곳은 볼 필요도 없었다. 그가 갈 길은 오직 한 곳뿐이니까. 망설임 없이 긴 다리를 뻗으며 걸어가는 도준의 뒤를 인호가 비틀거리며 따랐다.

“제일 어패럴 최고의 남자 두 분이 방금 막, 도착했습니다. 역시 오래된 전통을 가진 워크숍이니만큼 사장님께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직급을 막론하고 직원들과 즐기기 위해 급하게 내려와 주신 멋진 사장님과 실장님에게 박수를!”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졌다. 설렘 혹은 기대감 가득한 여자들의 눈빛이 운동장의 앞쪽으로 태연하게 걸어오는 두 남자에게 쏠렸다. 거리감이 꽤 있는데도 제아의 눈에도 오로지 도준만 보였다.

그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심장이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도준과 인호가 지나칠 때마다 그들의 뒤로 밀려버린 여자들의 실망 어린 한숨 소리가 줄줄이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남자들이 줄을 가장 많이 선 김 비서 앞에 도준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도준의 걸음은 다시 윤 비서에게로 향했다.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윤 비서가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도준은 신 비서에게 향했다.

멈추어선 도준 때문에 신 비서도 바짝 긴장했나 보다. 심장이 있는 부근을 지그시 누르는 신 비서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아는 신 비서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어떤 여자의 심장도, 이 남자를 감당하긴 역부족일 테니까. 10년이란 세월을 함께한 그녀마저도 아직은 감당하기 힘든 도준이니까.

떨림도 잠시뿐, 곧이어 신 비서의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그 순간, 제아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도준이 바로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지금 여직원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남직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늘게 떨리는 어깨 위로 도준의 청량한 향을 품고 있는 코트가 내려앉았다.

힘없이 떨어진 시야로 쑥 밀려들어오는 새하얀 스니커즈의 앞 코. 제아는 홀린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최고의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가, 나른한 웃음을 눈으로 흘리면서 물었다.

“문 비서, 내가 너무 늦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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