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33화 (33/104)

33. 한 사장의 내연녀가 확실해.

2016.12.26.

별다른 스킨십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극히 평범한 그의 손길 한 번에 제아의 심장이 사정없이 휘둘려 버렸다.

“그, 그래도 김 비서, 윤 비서는 절대 해고하지 마!”

그 감정을 들킬세라 제아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출입구로 내달렸다. 출입문을 쾅 닫은 제아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도준이 허리에 묶어준 재킷을 풀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닿는 손끝조차, 도준은 지극히 섬세하고 조심스럽다는 걸.

차라리 대놓고 들이대면 버티기라도 하겠다. 그런데 여자의 심리를 잘 아는 듯 미묘한 다정함으로 파고들어버리니, 미칠 것 같았다. 제대로, 자극당해 버렸으니까.

비서실에 도착하자마자 신 비서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했다.

“제아 씨, 인사과 김 부장님 호출.”

“아, 네!”

자리에 앉은 제아는 휴대용 반지고리로 대충 터져버린 치마를 꿰맨 후에 인사과로 향했다.

“부르셨……어요?”

회의실 안, 김 부장은 대답 대신 노골적인 시선으로 제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쭈욱, 훑어 내렸다. 화장기가 없는데도 봐줄 만한 얼굴, 물론 몸매는 말할 필요 없이 예술이었다.

유 실장 대신 제아가 비서로 부산 출장을 따라갔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김 부장은 아침 일찍 제아에게 전화를 했었다.

강훈의 부산행에 작은 정보라도 제공해서 점수를 따자는 속셈으로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해도 제대로 뜨지 않는 이른 아침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끈적끈적한 숨소리와 식은땀 날 정도로 야한 대화 소리.

“헉헉! 제발…… 오빠. 천천히……. 너무 빨……라, 한도준. 죽을 것 같다구……. 하아…… 그만…….”

지금 떠올려도 김 부장은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저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런 목소리를 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사장의 이름을 그렇게 막 부른다는 건, 확실한 증거였다.

제아를 평소 눈여겨봐왔지만, 사장과 여자를 공유할 순 없으니 포기를 해야 했다. 무엇보다 공과 사는 철저하게 구별해야 할 때이니.

김 부장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시꺼먼 욕구를 우선 접기로 했다.

“그래, 비서실 적응은 잘하고 있나?”

“네.”

“자네 이력서랑 지원서야. 비서과에 전달하도록.”

제아가 파일을 받고 일어나려는데 김 부장이 다시 앉아보라는 듯 손을 들어 저지했다.

“흠흠, 이번 부산 출장에서 사장님과 같이 회의에 참석하고 내내 동행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 한 사장이 어느 백화점과 같이하려고 하는지 자넨 알고 있지?”

“……모르는데요.”

“아니, 자네가 모르면 누가 아나?”

김 부장의 짜증 섞인 음성에 제아도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저는 자료 준비만 도왔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그런 중요한 결정을 저에게 알려줄 정도로 제 직급이 높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나한테 아무것도 해줄 말이 없다 이건가?”

“죄송합니다.”

김 부장에게서 또 한바탕 짜증이 쏟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조심히 고개를 드니 은근한 미소로 그녈 바라보는 김 부장이 보였다. 저 눈빛, 무슨 뜻이지?

“뭐 죄송할 것까지야. 그래도 다음에 부를 때는 내가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 거라 믿네.”

“네?”

“사장님이 잘해주시고?”

“아, 네. 엄청 잘해주세요.”

제아는 그냥 한 말이었지만 김 부장은 그 말에 옳거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간부부터 비서까지 직급을 막론하고 쥐 잡듯이 잡고 해고하는 게 한 독종 사장이 잘해준다면. 역시 한 사장의 내연녀가 확실해.

“그럼 됐네.”

“……?”

“그렇게 안 봤는데, 문 비서가 아주 선전하고 있어. 앞으로도 쭉, 그러길 바라지. 조만간 또 부를 테니 나가 봐, 그만.”

다시 비서실로 향하는 제아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정말 얼떨결에 도준이 김 부장으로부터 완벽한 보호막을 쳐준걸.

제아가 나가자마자 김 부장은 바로 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스파이로 붙여놓은 비서가 지금 한 사장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조만간 제대로 된 정보를 입수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네네, 그렇다고 해도 절대 배신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제가 보장하죠. 그러니까 한 부회장님께 말씀 좀 잘, 아이쿠, 감사합니다! 이사님!”

전화를 끊은 김 부장의 두툼한 입술이 탐욕스럽게 벌어졌다.

그 비서가 사장의 라인으로 갈아타려고 한다면 정확히 짚어줘야 할 일, 나의 배후가 바로 널 이 회사에 넣어준 한강훈 이사라고.

그리고 강훈은 그 비서가 본인이 추천한 사람인 줄 모르고 모든 공로를 자신에게 내리겠지. 그렇게 계산한 김 부장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비서실에 복귀를 했을 때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제아씨, 집무실 정리 좀 해줄래? 사장님 유 실장님이랑 출장 가셨으니까.”

“오전까지 출장 간다는 말씀 없으셨는데.”

그제야 신 비서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제아를 바라보았다.

“사장님 스케줄은 오직 유실장님 혼자 관리를 하셔. 우린 실시간으로 인폼만 받을 뿐이고.”

“아…….”

“그렇다고 우리 사장님이 비서들을 못 믿는 건 아니야. 우리 직급이 높은 편은 아니니 다른 높은 분이 압력을 넣으면 입이 가벼워질 수 있지 않겠어? 그래서 조심하는 것뿐이니 기분 나빠하지는 말구. 스케줄 관리가 아니어도 할 일은 넘쳐나니까.”

제아는 집무실에 들어섰다. 몇 시간 전까지 이 넓은 곳이 가득 차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휑한 느낌이었다. 아련한 도준의 체향만이 남아 있을 뿐.

제아는 어질러진 집무실을 정리하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출장이 오래 걸릴 것 같으면, 출장 간다고 말하고 가면 덧나나? 그래야 얼굴이라도 실컷 봐놓지.”

그 순간 제아는 둔탁한 무언가로 세차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설마 나 지금, 벌써부터 오빠가 보고 싶은 거야?

그때 인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5박 6일 프랑스 출장입니다. 그러니 마음 편히 본드걸 임무 수행해도 됩니다.-

***

제일 어패럴 전체 워크숍을 가는 날이 다가왔다.

도준이 없는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제아는 꽤 선전을 하고 있었다. 인호의 본드걸로 도준의 집 우렁각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비서 업무도 신 비서에게 꽤 많이 배웠고 빨리 배운다고 칭찬까지 받았다. 가장 큰 변화는 김 비서와 윤 비서와의 관계였다.

처음엔 겁을 잔뜩 먹었는지 피하느라 바쁘던 두 비서들과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선배 취급을 깍듯하게 하면서도 먼저 다가가는 제아에게 그녀들도 결국 마음을 연 것이다.

그래서 제아는 1년 만에 처음으로 회사 생활의 재미를 느끼는 중이었다. 회사 앞을 가득 메운 대절 버스로 향하면서 김 비서가 투덜거렸다.

“신 비서님, 도대체 사장님이랑 실장님은 언제 오는 거예요? 우리 사장님 얼굴 보고 싶다. 유 실장님도.”

“아직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며칠 더 걸릴 것 같은데?”

제아는 인호로부터 연락을 받아서 도준의 스케줄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여비서들은 사장의 직속 부서라는 이유로 당당하게 로열석인 뒷좌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뒤에 타자마자 스스럼없이 수다를 떠는 후배들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본 신 비서는 피곤한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제아도 차창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휴, 도준 오빠를 어떻게 감당하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천만의 말씀이었다. 그때 김 비서가 제아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휴, 제아 언니! 지금 우리가 잠을 잘 때가 아니라니까요?”

“두 시간 반이나 걸린다면서. 나 어제 잠을 좀 못 자서 그런데 조금만 자면 안 될까?”

1박 2일로 가는 워크숍이었다. 토요일 오후에 도준이 집으로 오기 때문에 워크숍을 갔다 와서 도준의 집을 청소할 여유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 늦은 밤까지 도준의 집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윤영에게 배운 대로 청소는 손맛이라는 말에 바닥을 열심히 기어 다니면서 벅벅 문대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온몸의 근육이 당기고 아팠다.

“제일 어패럴 워크숍 엄청 유명한 거 몰라요?”

제아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어느 직원이 그녀에게 그런 걸 말해줄까.

“찌릿찌릿 썸 타는 게임이 많아서 커플 워크숍이라고 불리잖아요. 그리고 제일 그룹에서 가장 탑인 제일 전자보다도 게임에 걸린 상품이랑 상금도 완전 대박이고!”

“사내 커플, 웬만한 회사에서는 반기지 않는데. 혹시 잘못 안 거 아니야?”

“아휴, 언니도 참! 1년 허투루 다녔어 진짜! 몇 달 안 된 나보다 정보력이 더 없어서야 되겠어요? 우리 제일 어패럴만 사내 커플 적극 지원하잖아요. 분기마다 오래 사귄 커플한테 주는 보너스까지 있는데 정말 몰라요?”

“진짜 몰랐어. 뭐, 알았어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제일 어패럴의 남자들은 끼리끼리 놀고 싶어 하는 습성이 다분했다. 그래서 스펙도 없는 데다 유일하게 고졸 출신인 그녀를 여자취급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대신, 불미스러운 문제가 생기면 즉각 퇴사조치 및 제일 계열사 어디에서도 안 받아준다는 조건이 붙긴 해요.”

“그게 더 무서운데? 제일 계열사에 협력사까지 하면 웬만한 곳에는 취업 못한다는 말이나 같잖아.”

“어차피 막는다고 사랑이 막아지나? 눈 맞을 남녀는 다 맞게 되어 있어요.”

신 나서 제아에게 설명하던 김 비서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은근하게 어깨를 툭, 쳤다.

“언닌 누구 맘에 두고 있어요?”

“뭐?”

“그래도 1년 다녔으면 눈에 들어오는 남잔 있을 거 아니에요. 난 신규 사업부에 김민호 대리님 꽤 멋있던데. 승진도 쭉쭉 하는 것 같구. 한 부회장님 쪽 친척이란 말도 있더라구요. 김민호 대리님이나 레크리에이션에서 공개 파트너 구할 때 나한테 왔으면 좋겠다.”

시큰둥하게 듣고 있던 제아의 귀가 번쩍했다.

“공개 파트너라니, 무슨 소리야?”

김 비서는 윤 비서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더니 김 비서가 손짓을 했다.

“제아 언니, 귀 좀.”

무심코 몸을 기울인 제아의 귀에 김 비서는 속닥속닥 비밀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이번 워크숍도 왠지 평화롭지 못하게 지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런 제아와 달리 잔뜩 신이 난 김 비서는 곤히 잠든 신 비서까지 깨웠다.

“신 비서님, 우리 내기해요.”

“무슨 내기?”

“레크리에이션 때 파트너 정하는 거 하잖아요. 인기 제일 없는 사람이 일주일 내내 플라밍고 커피 쏘기! 어때요?”

이제 내기라면 진절머리가 나는 제아였다.

게다가 틀에 박힌 속물들만 넘쳐나는 이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제아와 파트너를 하려고 할 남자는 당연히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 비서가 제안한 내기의 패자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밥값보다 비싼 브랜드 커피숍을 일주일 내내 쏜다면? 한 달 점심값이 고스란히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헬퍼 월급이라도 받으면 여유가 좀 생기는데 월급 받을 날짜는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래도 제아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냉철한 워커홀릭 신 비서가 그런 유치한 내기 따위, 절대 허락할 리 없다고 말이다.

그래, 신 선배님이 막아줄……?

하지만 신 비서의 입에서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콜! 거기에다가 우리 비서실이 가장 인기가 많을 땐 내가 연장자로서 회식까지 한 턱 거하게 쏠게.”

“꺄아, 신 비서님 최고! 웬일이세요?”

“왜 이래, 나 한국대 나온 여자야, 호호호! 나도 놀 때는 노는 화끈한 여자거든?”

신 비서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핸드백 안에서 거울을 꺼내 메이크업을 다시 손보기 시작하는 세 여자들을 제아는 망연자실하게 쳐다보았다.

이 회사를 다니면서 여자로서의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게임을 같이 하자고 남직원들이 제안을 하지 않아도 구겨질 자존심 따위도 없었다.

하지만 김 비서가 제안한 커피 내기는 자꾸만 그녀를 쪼여 왔다.

그냥 맘을 비우고  커피값을 마련할 방법을 궁리하는 게 더 빠를 듯싶었다.

***

블랙독이라는 유명한 프랑스 아동 브랜드의 독점권 계약이 생각보다 빨리 체결되었다. 도준과 코드가 제대로 맞은 여사장이 흔쾌하게 오케이 사인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일정을 하루 당겨 금요일에 한국으로 귀국을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는데도 도준은 기쁘기는커녕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한국에 온 이후로 그의 마음에 쏙 드는 헬퍼를 인호가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텔로 갈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호텔에 있는 것도 불편하고 집에 있는 것도 불편하면 차라리 집에 가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프랑스에 있는 내내 호텔에서 지낸 탓에 호텔이라면 지긋지긋했다.

“헬퍼, 대체 언제 제대로 구해지는 거지?”

가뜩이나 피곤해서 그런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도준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평소라면 제발 좀 까탈스럽게 굴지 말라고 구시렁거릴 인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제대로 마음에 들 거다. 내가 아주 제대로 구했거든.”

너무 자신만만한 인호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본 후 현관문을 연 도준은 흠칫, 했다. 은은한 복숭아향이 기분 좋게 후각을 자극한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긴 복도의 대리석 바닥은 작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다.

거실도, 다른 방들도 매의 눈으로 훑어보았지만 어느 곳 하나 트집 잡을 게 없었다. 드레스 룸 안의 옷장도 세탁물을 그때그때 찾았는지 보기 흉하게 빈자리 없이 가지런했다.

취향저격이란 말은 아마도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드디어 인호가 취향저격 헬퍼를 찾아낸 것이다.

그제야 기분 좋게 샤워를 한 도준은 하얀 타월만 허리에 두른 채 거실로 나왔다.

테이블 위에 태블릿 PC와 각종 서류들을 꺼내고 있는 인호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헬퍼, 대체 어떻게 찾은 거지?”

“마음에 드나 보네?”

“…….”

“헬퍼 채용이야 방법은 같지. 다만 문 비서가 교육시키고 최종 체크를 했을 뿐이야. 그런 건 남자보다 여자가 더 잘하잖아? 마침 출장도 가고 해서 겸사겸사 부탁했지.”

인호의 말에 도준은 그제야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어찌 보면 그의 모든 습관이 제아에 의해 만들어진 거나 다름없었으니. 제아의 눈에 통과가 되면 그의 눈에도 당연히 통과였다.

물론 도준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설마 인호가 간 크게 제아를 헬퍼로 쓸지는, 도준 자신에게만큼은 자존심을 꼿꼿이 세우는 제아가 헬퍼를 한다고 할 줄은.

인호는 인호대로 나름 긴장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도준이 눈치를 챌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수긍이 된다는 듯 미세하게 도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마터면 나이스를 외칠 뻔했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얼른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한 사장, 이왕 하루 일찍 왔으니 내일 잠깐이라도 들러야 하지 않을까? 제일 어패럴 지금 1박 2일 워크숍 가 있잖아.”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털며 도준이 ‘내가 왜.’라는 무심한 눈빛을 툭, 던졌다.

매끈한 상체를 드러낸 채 나른한 눈빛을 던지는 도준의 모습에 앳되어 보이면서도 섹슈얼했다.

그래서 인호는 순간 심장이 두근, 했다. 같은 남자인데도 말이다. 저러니까, 여자들이 아주 환장을 하지.

“한 사장, 제발 옷 좀 차려입어라. 네가 그렇게 쳐다볼 때마다 내가 성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니까?”

“할 말이나 하시지.”

내가 말을 말아야지. 오만상을 구긴 인호가 도준에게 프린트가 된 종이 몇 장을 툭, 내밀었다. 그걸 마지못해 받아서 읽던 도준의 무심한 눈매가 미세하게 구겨졌다. 회사가 무슨 파릇파릇한 새내기들이 넘치는 대학인 줄 아나.

“이딴 걸 워크숍이라고 지금.”

“이딴이라고 표현하지 마라. 한 회장님 알면 지팡이로 등짝 오지게 맞을 테니까. 한 회장님이 제일 어패럴로 시작할 때 그만큼 직원들을 아끼는 마음에 즐거운 워크숍을 기획한 거고, 덕분에 사내 커플에 부부도 많이 생겨서 제일 어패럴이 흔들림 없이 커지고 지금의 제일 그룹이 창립된 거잖아.”

상세한 워크숍 일정을 보고 나니, 도준은 더욱더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노는 데는 노는 데 일가견 있는 인호가 더 적격이니.

“나 대신 네가 가.”

“그럼 내 일은? 한 사장이 대신해줄 거고?”

“갔다 와. 너 없어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니까.”

제아 때문에 이런저런 핑계로 인호에게 업무 독박을 씌운 전적이 꽤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그가 독박을 써줄 참이었다.

“오케이! 그렇지 않아도 신 비서랑 아까 통화했는데 내기까지 했단다. 얼음 공주 신 비서까지 그럴 줄이야. 무슨 내기인지, 안 궁금하냐?”

“전혀.”

도준은 이미 관심이 사라진 듯, 베스 가운을 몸에 걸친 후 테이블 위에 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뭐 궁금하지 않으면 말고. 근데 우리 문 비서는 괜찮을까 모르겠네.”

인호가 서류 가방을 들고 돌아서는 순간…….

탁―.

테이블 위에 서류가 다시 놓이는 소리와 함께 도준의 서늘한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계속해봐.”

인호가 돌아서자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도준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응시하고 있었다.

“안내서엔 없지만 레크리에이션 때 게임 파트너 정하는 게 있거든. 뭐 공식적으로 그걸 통해서 커플이 많이 탄생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문 비서 말이야. 그 얼굴에 그 몸매로도 남직원들에게 투명 인간 취급당하잖아. 그런데 누가 문 비서랑 게임 파트너를 하려고 하기나 할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 정도? 문 비서가 아무리 씩씩해도 의외로 여자들은 감수성이 풍부해서 상처를 잘 받거든.”

확실히 여자에 도가 터 있는 인호는 생각하는 깊이도 남달랐다.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는 도준을 보며 인호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아니면, 내가 그냥 오늘 가볼까?”

“…….”

“아니다. 지금 출발해도 이미 늦었다. 내가 그냥 내일 가 볼 테니 한 사장 넌 신경 쓰지 마.”

지금 강원도로 출발해봤자 처음 시작하는 파트너 정하기 게임은 이미 끝이 날 듯싶었다.

인호가 다시 돌아서는 순간, 확고한 도준의 음성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워크숍, 가야겠어.”

“워크숍을 가겠다고? 언제?”

“지금 당장.”

“뭐……?”

휘둥그레진 눈으로 돌아보는 인호의 눈을 직시하며 소파에서 일어난 도준이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워크숍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이번 운전, 내가 한다.”

“어…… 그, 그래.”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인호가 내미는 차 키를 도준은 받지 않았다.

“네가 운전한다며?”

“그 차는 너무 느려.”

“……?”

“그래서 오늘은 다른 차를 몰고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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